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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철민법가이드 원문보기 글쓴이: 박철
우리는 그동안 현대 축구를 빛낸 불멸의 스타들을 ‘다양하게’ 살펴 왔다. 여기서 ‘다양하게’란 표현이 중요하다. 현대 스포츠와 미디어 스펙터클, 권태로운 도시의 일상과 뜨거운 민족주의가 응결된 축구라는 문화는 그저 그라운드 안의 기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다양한’ 측면에서 봐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남미의 역사와 문화가 빚어낸 펠레와 마라도나를 살펴보았고, 과열된 상업주의에 의해 혼탁해져 가는 글로벌 축구 시장을 성찰하기 위하여 크루이프를 검토하였으며, 다인종 다문화가 혼융하는 그라운드에서의 진정한 가치 실현을 탐색하기 위하여 로저 밀러와 지네딘 지단을 생각해 보았다.
현대 축구의 중심, 곧 그 공식과 문화와 산업의 본산은 역시 유럽이다. 잉글랜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4대 빅 리그가 세계 축구를 주무르고 있는 현실을 떠올려 보자. 1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그들의 규칙ㆍ문법ㆍ제도ㆍ언어가 축구라는 세계의 모국어가 되었고, 우리는 이를 ‘보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나 ‘특수’한 변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반강제적으로 보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나름대로 성숙해지게 되면 ‘특수’의 힘이 발현된다.
1985년 4월, 분데스리가 레버쿠젠 시절의 차범근. 유럽이 곧 기준이자 보편으로 통했던 축구의 역사에서 불멸의 스타로 자리매김한 그는 보편을 벗어난 특수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남미는 그것을 일찌감치 이뤄냈다. 19세기 말에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공을 찼다. 우리는 펠레와 마라도나를 통하여 그들의 ‘특수’가 얼마나 비범하고 아름다운지를 살펴보았다.
아프리카로 눈을 돌리면 이런 선수들만으로 베스트 11을 구성할 수 있다. 얼핏 떠오르는 대로 맨 앞에 드로그바(코트디부아르)나 아데바요르(토고)가 있고, 허리에 미켈(나이지리아), 에시앙(가나) 등의 파이터가 즐비하며, 수비에도 리고베르 송(카메룬) 같은 선수가 있다. 골키퍼로는 최근 19년 만에 아프리카네이션스컵을 우승하여 그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심을 들어 올리려는 세리머니로 큰 즐거움을 준 엔예마(나이지리아)를 생각할 수 있겠다.
이렇게 축구는, 비록 원산지가 잉글랜드를 정점으로 하는 유럽이라 해도, 그 규칙과 장비와 기후 조건의 단순성에 힘입어 금세 전 세계로 번져갔고, 세계 각지에서 그들 나름의 역사적 상처와 같은 특수성을 더해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몸짓이 되었다.
그런데, 가만, 이쯤에서 생각나는 이름 하나가 있을 것이다. 서구가 압도했던 20세기, 그럼에도 제3세계 곳곳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 그렇다면 우리의 축구사에도 당연히 그 정도 이상의 거목은 한 사람 정도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누구라도 즉답할 수 있다. 차, 범, 근!
사뭇 진지하게 시작했으니, 조금 숨을 돌리기 위하여 차범근 해설위원의 간단한 멘트 하나를 소개한다. 지난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독일 경기 도중의 한 장면이었다.
캐스터 : 독일의 명장 뢰브가 화면에 잡히고 있습니다.
차범근 : 그렇습니다. 제가 선수시절에 함께 뛰었었는데요. 좋은 선수에서 좋은 지도자 되었군요.
캐스터 : 뢰브는 어떠한 선수였나요?
차범근 : 제 교체선수였습니다.
어릴 적, [소년중앙]이나 [어깨동무] 같은 월간지가 있었다. 뭐든지 닥치는 대로 읽어대던 시절이었으므로 정확히 어느 잡지에 게재된 글인지는 잊었으나, 그 당시 어느 잡지에 한 축구 소년이 국가대표로 성장해 가는 논픽션이 있었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소년, 논바닥에서 공을 차다가 일을 하러 가기도 했던 소년,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서 혼자 드리블과 패스와 슛까지 도맡아 끝내주던 소년.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그 글의 필자는 이 소년의 허벅지를 특히 강조하여, 우람하고 미끈하고 튼튼하게 묘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소년은 축구 명문 경신중고교를 거쳐 고려대를 나왔고, 그러는 사이에 한국 청소년 대표와 성인 대표의 일원이 되어 아시아를 종횡으로 누빈 후, 저 멀리 독일 분데리스가로 진출했다. 아니, 내가 그 월간지들을 읽을 때는 아직 독일로 진출하기 전이었고, 그래서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주인공이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수만 관중 앞에서 골을 터트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차범근은 그런 인물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마디 더하자면, 나는 경신중학교를 다녔는데 입학하던 해, 독일로 진출했던 차범근이 모교(경신고교)를 방문하였다. 이에 축구 명문의 중고교 전 학년생이 복도를 가득 메우며 차범근의 얼굴 한 번 보기를 앙망하였던 기억이 생생한 바, 당시 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내 형은 복도에서 차범근의 팔을 한 번 만진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삼아 며칠간 손도 씻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차범근은 그런 인물이다.
차범근(車範根)은 1953년,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신중고교와 고려대를 나왔으며 1976년 10월 공군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치고 1978년 12월에 독일의 다름슈타트98 및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레버쿠젠 등에서 활약했다.
1975년 제23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에서 헤딩슛을 하는 차범근. 그는 당시 고려대 소속 공격수였다. <출처: 연합뉴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국가 대표팀의 우람한 주전이었다. 1971년 청소년 대표로 발탁되었으며 1년 후에는 최연소 성인 대표팀에 뽑혀 1972년 5월 7일, 이라크와의 AFC 아시안컵 경기 때 데뷔전을 가졌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후, 그는 후배들과 함께 86 멕시코 월드컵을 뛰었다.
국내에서 치러진 대표팀 경기에서 차범근이라는 이름이 전설을 넘어 신화로 장식되는 유명한 경기가 있으니, 바로 1976년 대통령배(박스컵) 국제축구대회 말레이시아전이었다. 1-4로 뒤진 상황에서 차범근은 7분 동안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 무렵 가히 축구로 치르는 대리 전쟁과도 같았던 일본과의 정기전에서 차범근이라는 이름은 동대문운동장에 울려퍼진 ‘독립운동가’와도 같았다. 김호곤, 이영무, 박성화, 최종덕, 박상인, 허정무, 조광래 등이 그 시절 그와 함께 뛰었다.
독일 진출 초기에는 군 입대와 관련하여 다소 어수선한 사정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1976년 10월 입대하여 1979년 5월 31일에 만기 제대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1980년 UEFA컵 우승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듬해에도 DFB-포칼 우승컵을 들었다. 바이어 레버쿠젠으로 이적해서는 1988년에 UEFA컵 챔프 자리에 올랐다.
혹시 차범근의 대표팀 시절, 그리고 독일에서 활동하던 시기의 세부 사항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후추 차범근’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기 바란다. 한국 스포츠 저널리즘의 수준을 한 차원 발전시켰던 전설의 스포츠 저널리즘 ‘후추닷컴’에서 차범근 특집을 하며 게재했던 글을 찾아볼 수 있다. 그 글 속에 차범근에 대한 ‘디테일’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 무렵 MBC 문화방송에서 매주 월요일 밤 10시 30분, 이철원 캐스터ㆍ주영광 해설로 분데스리가 경기를 (녹화) 중계해 준 적이 있는데, 그러나 차범근이 팽팽한 현역으로 독일의 푸른 잔디를 누비는 광경을 생생히 중계한 적은 드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그 무렵 방송은 아날로그 테이프 방식이라서 방송이 끝난 테이프를 다른 방송을 위해 재활용한 경우도 많아, 당시 독일에서 활약한 자료 화면이 적어도 국내 방송사의 아카이브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들었다. 이 점, 아쉽다.
그는 1989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당시 그의 리그 98골은 외국인 선수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그 이전에는 네덜란드의 빌리 립펜스가 92골로 최고였으며, 차범근 이후에는 10년 쯤 지난 후인 1999년 스위스의 스테판 샤퓌자가 106골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 전대미문의 기록, 단지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왔다는 ‘특수’한 차원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세계 극강의 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년 역사를 아로새긴 ‘보편’적 지평의 대선수가 세운 이 기록에는 반드시 덧붙여야 할 두 개의 기록이 더 있다.
하나는 분데스리가 10시즌 동안 그가 단 한장의 옐로카드만을 받았다는 점이다. 주전 공격수 차범근이라면 상대 팀 누구라도 1차 방어 대상이 되고, 축구라는 경기의 특성상 육체적인 접촉이 시종일관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장의 경고! 더욱이 98골! 이 기록은 그의 플레이가 얼마나 깨끗하면서도 날카로웠는가를 입증한다.
또 다른 기록은 그 98골이 모조리 필드골이라는 것이다. 페널티킥은 아예 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오랫동안 국가대표로 활약했는데 역시 페널티킥 골이 없다. 사실 그는 선수 시절 페널티킥 공포증을 겪었고 그 때문에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
그 ‘트라우마’는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된 첫 경기에서 발생했다. 차범근은 운명의 1972년 5월 7일, 제5회 아시안컵 대회 출전을 시작으로 성인 대표팀 무대를 밟게 되었다. 그날 태국 방콕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전이었고, 한국은 그만 2대 4로 패했다. 신예 차범근도 키커에 포함되어 보란 듯이 찼으나 골키퍼의 움직임이 있어서 다시 킥, 그러나 이번에는 긴장한 탓인지 공이 골대 높이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이후 차범근은 국내에서나 독일에서나 은퇴할 때까지 페널티킥을 차지 않게 되었다. 그는 대학생 시절 연습 경기에서도 페널티킥을 자주 실축했고, 유럽에서 뛸 때는 자신에게 승부차기 임무가 맡겨질까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당대 최고 수준의 분데스리가에서 98골을 성취했으니, 걸출한 필드 플레이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다.
지난 2013년 1월 27일,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베스트 11’ 행사에 다녀온 소감을 인터넷에 올렸다.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선정한 역대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베스트 11' 중 외국인 선수는 차범근을 비롯하여 안토비 예보아(가나), 제이 제이 오코차(나이지리아) 등 3명 뿐이었다. 원래 200명 정도의 관중을 예상하고 프랑크푸르트 박물관에서 개최하려던 행사는 수많은 팬들의 호응으로 인해 급히 시내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되었다. 그는 “(내가)입장하자 모두 기립해서 박수로 맞아주는데 조금 감격했습니다. 축구는 나에게 너무나 크고 많은 선물을 주는 것 같습니다"라고 적었다.
그러나 정작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팬들이었다. 이 행사와 관련된 글과 차범근 트리뷰트 동영상을 본 프랑크푸르트 및 세계 곳곳의 팬들이 남긴 소감 일부를 간략히 요약해본다. “10년 동안 308경기에서 단 한 장의 옐로카드? 세계 최고의 페어플레이어라는 얘기잖아.”(tempestloor), “한국이 다른 많은 문제들로 축구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시절에 차범근이 태어났다는 점이 안타깝군. 만약 요즘이라면 메시나 호날두 같은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IKAG4ever), “내게 차범근은 특별한 감동을 줬던 인물.”(Bruno_P), “내 유년기의 완벽한 영웅이 귀환하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러 가야지. 직장에서 쫒겨나는 한이 있더라도.”(Booking agent).
2008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직후, 선수들의 축하 세리모니를 받는 차범근 감독. <출처: 연합뉴스>
차범근은 1989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은퇴한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지도자 생활은 매끄럽지 못했다. 1991년부터 K-리그 울산 현대를 맡아 그해 준우승을 했으나 1994년에 물러났다. 1997년에는 대표팀 감독을 맡아 ‘도쿄 대첩’ 등으로 일찌감치 프랑스행 직행 티켓을 확보했으나, 멕시코와 네덜란드에게 대패하였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경질 당했다. 대회 도중에 감독이 한 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바로 그 현장에서 즉시 경질 당한 사례는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이후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일이며 아마도 다른 종목에서도 이 같은 극단의 사례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축구교실에 몰두하며 잠시 세상과 거리를 뒀던 차범근은 2003년 말에 수원 삼성의 사령탑이 되어 이듬해 K-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이 순간 차범근은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14년이 걸렸다. 정말 긴 시간이었다.”고 벅찬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눈물 자욱이 배어 있었다. 그는 “선수 때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굉장히 많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우승을 결정짓는 순간도 이채로웠다. 당시 수원과 포항은 승부차기까지 가는 극한의 경기를 펼쳤다. 포항의 마지막 키커의 공을 수원의 이운재가 막아냈다. 그 마지막 키커가 김병지였다. 그 후 차범근은 수원 삼성에서 2005년 컵대회 우승을 했고, 2008년에는 리그와 컵, 두 개의 우승으로 더블을 이룩한 후 2010년 6월 6일 전북 현대와의 경기를 끝으로 주연의 무대에서 내려왔다.
2010년 6월,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 팬들에게 답례하는 차범근 감독. 그는 이렇게 그라운드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출처: 연합뉴스>
그 후로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차범근이다. 그는 미디어를 통해 대표팀 후배들의 경기를 해설하고, 아들과 함께 국민들의 간까지 걱정한다. 그러나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역시 한국 축구 그 자체다. 물론 중진이나 원로급 축구인이라면 누구든지 한국 축구를 걱정하겠지만, 차범근의 걱정은 그 결이 다르다. 아주 짙게 배어 나온 그의 걱정에서는 심모원려(深謀遠慮: 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가 느껴진다.
단적인 사례가 2011년 1월, 박지성의 대표팀 은퇴 건을 둘러싼 일이다.
당시 축구계에서는 두 가지 반응이 나왔다. 먼저 축구협회 수뇌부의 반응을 정리해보자. 당시 조중연 회장은 “진의 파악이 중요하다. 깊은 얘기를 들어보겠다.”고 했다. 카타르에서는 아시안컵 대회가 개막될 무렵이었고, 이미 협회 안팎에서 그 대회를 끝으로 박지성이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진 상태였다. ‘진의 파악’이라는 미묘한 표현은, 협회가 박지성 측의 주장과는 달리 ‘주고 받을’ 얘기가 있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그 무렵 이회택 부회장은 “박지성의 몸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것”이라고 말했다. 한 선수의 고뇌에 찬 은퇴 결심이 ‘국위 선양’이라는 애국주의 신화에 휘둘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의견을 들어보자. 당시 차범근은 인터넷을 통해 매우 침통한 자기고백의 글을 남겼다. 나는 차범근의 이 글을 너무나 애틋하게 읽었고 ‘좋은 글’의 모범으로 여겨 때로 강의 중에 활용하기도 한다. 무릇 ‘좋은 글’이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나는 차범근의 이 글을 통해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그 첫머리는 이렇다. “환갑이 별로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했는지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아니, 천하의 차범근 아닌가. 그런 그가 무엇을, 왜 부끄럽다고 했을까. 당시 그가 남긴 글을, 그 핵심을 정리해 다시 새겨보자.
“초등학교 선수가 기초 공부조차 하지 않고 축구만 하는 나라. 10세도 안 되는 선수들이 하루에 세 번씩 프로 선수처럼 훈련하는 현실.
합숙을 하던 어린 선수들이 불에 타서 세상을 떠나고 지도자에게 맞아서 세상을 떠난 적도 있습니다. 너무 거칠고 비인간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성이가 어딘가에서 스피치를 하면서 우리나라처럼 맞으면서 축구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선수들이 그들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기를 강요당하면서 축구를 합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던 최고의 선수를 겨우 서른 살에 국가대표에서 은퇴시키는 안타까움 앞에서 멍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지성이의 은퇴는 나에게 묻습니다. ‘한국 축구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해준 게 뭔데?’ 나의 용기 없음이, 비겁함이 부끄럽습니다.”
차범근 감독의 이 절절한 글에는 자신과 아들 차두리 선수의 성장 과정에 대한 회고도 나온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해 한국 선수들의 몸 상태를 점검했을 때, 무릎이나 발목이 온전한 선수는 오직 차두리가 유일했다고 한다. 다른 선수들은 유능한 주전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혹사’당해서 온전치 않았다. 차두리는 중학교 때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차범근 역시 중3 때 축구를 정식으로 시작했다. 유소년의 성장기를 제대로 보낸 후에 선수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무릎이나 발목의 예민하고 섬세한 근육이나 신경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전 참패 후, 한 경기를 남겨둔 상태에서 경질된 차범근 감독이 귀국하고 있다. 그의 경질 사건은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성과를 내서 '국위선양'을 해야 하는 한국 스포츠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출처: 연합뉴스>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합리적인 시스템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 자신은 ‘후배들에게 해준 게’ 없다고 썼지만, 그의 ‘차범근 축구교실’은 하나의 모범이었다. 평일에는 주로 공부를 하고 오후에 한두 시간 정도 훈련을 하며 주말에 리그식 경기를 갖는 방식이다. 반드시 공부를 병행할 것, 성장기의 육체에 과도한 긴장과 무리를 주는 훈련을 삼갈 것, 지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토너먼트가 아니라 리그식으로 전반적인 기술 수준을 향상할 것. 이 세 가지가 차범근 축구교실의 모토였으나 안타까운 것은 그 무렵 그렇게 하는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더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1988년 시작한 차범근 축구교실은 미래형 모델이었고, 해마다 수여하는 차범근 축구상의 제5회 수상자가 바로 1993년 당시 수원 세류초등학교 6학년 박지성 어린이였다. 그렇게 성장한 선수가 서른도 채 못 돼 무릎이 아파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으니 차범근의 마음은 참담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이후, 박지성 선수의 모습을 살피건대 차범근의 이 깊은 회오는 진실로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만한 과제라고 하겠다.
맨 앞에 적었듯이, 우리는 서구를 ‘보편’으로 삼아 그것을 빨리 수입하고 학습하여 그 과정을 단기간에 압축시켜 성장하고자 했던 ‘특수’한 현대사를 살아왔다. 그 결과 우리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실천이라는 두 개의 과제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이뤄냈다. 식민지와 전쟁과 가난과 군사독재 등을 모조리 다 겪은 나라들 중에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를 이만큼 성취한 나라는 매우 드문 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많은 ‘찰과상’이 있었다. ‘하면 된다’는 사회적 신념은 압축적 경제 개발의 에너지가 되었지만, 사회 의식과 상호 연대라는 점에서는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국위선양 대한건아’로 요약되는 스포츠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스포츠는 지난 70년대에 ‘국위선양’과 ‘대한건아’라는 과잉 열정을 기반에 두고 발전해 왔다. 그 바람에 상명하복의 군대적 편제와 강압적인 위계질서가 오랫동안 한국 스포츠를 지배해 왔다. 몇 차례의 발전적 계기(특히 2002한ㆍ일 월드컵의 히딩크 신드롬)에도 이 폭력적 관계는 관행이니 성적이니 대안부재니 하는 말을 핑계 삼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일반 학생들은 스포츠를 거의 즐기지 못하고 있으며, 학생 선수들이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 또한 여전하다. 이 속에서 폭력, 스카우트 비리, 승부 조작 같은 일도 끊이지 않는다. 개인의 창발성이나 자유의지 대신 강력한 통제와 동원의 방식으로 한국 스포츠가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볼 만한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차범근은 이러한 ‘특수성’에 기반한 한국적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단지 한 사람의 축구인이 아니라,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저 20세기 후반기의 어려웠던 시절을 오직 가족들을 위하여 모진 고생과 시련을 다 겪어낸 이 시대 아버지ㆍ어머니의 표상이다. 타고난 체력에 더하여 근면하고 성실했다. 그는 한국의 ‘특수’를 ‘보편’의 지평으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20세기 한국인의 초상화에 다름 아니다.
2013년 1월,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베스트 11' 행사에 초청받아 독일을 방문한 그가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역에 설치된 전성기 때의 사진 앞에 부인 오은미 씨와 함께 섰다.
그런데 더 놀랍고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이제 그러한 ‘특수성’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압축적 근대화’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고치기 위하여 노력한 인물이 바로 차범근이다. 그는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독일 특유의 합리성을 체득하여 돌아왔다. 그 무렵 독일과 유럽은 이미 ‘국가주의 스포츠’에서 벗어나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즐기며 성장하는 시스템이 안착되어 있었다.
차범근은 이 ‘합리적 시스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귀국했다.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하면서 축구하는 ‘차범근 축구교실’에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차범근은 박지성의 은퇴 소식을 듣고 “초등학교 선수가 기초 공부도 하지 않고 축구만 하는 나라, 10살도 안 되는 선수들이 프로선수들처럼 훈련을 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한국 축구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해준 게 뭔데? 나의 용기 없음이 비겁함이 부끄럽다”고 썼다. ‘국위선양’이라는 말로 모든 허물과 낡은 구조와 비리까지 그냥 덮어버리는 ‘특수’했던 우리의 근대를 넘어서기 위하여 차범근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할 일이 많다.
이런 점에서 차범근은, 이 연재를 통해 우리가 그토록 찬사를 보냈던 펠레, 마라도나, 지단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야말로 ‘특수’를 넘어 저 ‘보편’의 지평에 첫 발을 디딘 진정한 스타, 레전드 중의 레전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