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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洋畵史論(가제)
1한국적감수성
1)자연
2)공간
3)생활
4)체질
-이하 생략
II. 양화, 한국적 수용
1) 강 건너 불
2) 불난 집
11I. 양화 연대기
1. 재료의 실험기
1916-1927 김관호金觀鎬 개인전-이종우李鍾禹 살롱 드톤느입선
-유화물감으로 삶과 민족정서를 표현
1) 3.1운동과 미술계
2) 귀족선전과 난전亂廛협전
3) 본류로의 대장정
2. 이즘의 검증기
1928-1937 녹향회창립-목일회->목시회, 백우회
-일제의 탄압과 압제를 벗어날 수 있는 이즘의 도입을 실험
1)비온 후에 땅 굳는다
2)협전의 종막
3. 이념의 상충기
목시회해산-대한민국정부수립
-우익과 좌익 이념투쟁에 미술이 용역을 제공
1) 일본미술의 후유증
2) 해방의 미술
4. 기법의 모색기
1949-1956 국전- 국전 보이콧 소동
-선전-국전스타일의 기득권 확장 대 반국전 스타일의 기법상 각축과 반전
1) 아카데미즘
2) 국전 보이콧
5. 사조의 육화기
1957-1966 반국전흐름-추상표현주의 퇴조
-반국전의 흐름에서 양화의 노하우를 성숙시키면서 한국적인 조형 가능성 모색
1)개혁과 定位Orientation의 해결사
2) 닭갈비鷄肋, 국전
3) 한국미술이라는 이름
6. 사상의 접목기
1967 - 1978 청년작가연립 - 에꼴 드 서울
국전 타락논쟁, 백색주의와 동양정신
1) 국전과 민전
2) 화단과 화랑
3) 신체와 자연과
7. 국적의 확인기
1979-1988 현실과 발언- 문화올림픽
-세계-서울: 서울-세계로 한국적인 이름 조형 사상 의미 및 형식에 관심 증폭
1) 민중의 발언
2) 미술과 보통사람Das Mann
3) 올림픽 미술
IV. 고독孤獨한 백년
1) 옆 동네 나들이
2) 탈 많은 잔치상
3) 탯줄과 기저귀
도판: 류경채 폐림지근방 1948년 제1회 국전대통령상 수상작품, 김영재, 한국양화백년, 미술연감사 1988에서 인용
본문: 김영재, 한국양화사론(가제), 자유문고, 2018(근간)에서 앞 부분인용
I. 한국적감수성
한국의 화단이 외래 양화에 대하여 스스로의 가능성을 개발해나간 것은 1930년대 후반으로 볼 수 있으리라고 오광수吳光洙는 지적한다. 다양하고 풍성한 양상의 전개가 단순한 기술의 수용단계를 벗어나 개성적인 표현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전통미술의 관성과 보수성향은 외래영향의 수용을 가로막는 차폐막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온 것이 비단 한국만의 양상은 아니다. 민주적인 혹은 시장논리가 그 걸름장치가 되어 한 나라의 미술풍토를 결정하고 정화하는 것이되 유독 한국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 보인다.
민주적이라 함은 많은 대중의 넓은 공감대가 설정하는 미술의 방향에 미술가들은 묵시적인 합류를 종용 당한다는 것이다. 시장논리란 보편적인 거래의 관행을 만족시킬 수 있는 미술작품이 팔리고 소장되고 미술사에 수록된다는 것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 사춘기의 감수성과 강력한 귀소본능歸巢本能, 흙과 자연과 핏줄에 가깝게 살도록 체질화된 한민족은, 이 한국의 땅에서 그네들의 존재와 실체의 배경으로서의 전통이라는 이름의 줏대, 문화라는 이름의 자존심을 가꾸어왔다.
회화에 나타나는 감수성은 자연, 공간, 생활, 체질에서의 감수성으로 나타난다.
1) 자연
한국인은 자연을 외경하고 신앙한다. 자연의 생성력을 받아들이되 인간사와 같은 흐름으로 인식한다. 자신의 신체조건과 주어진 여건에서 만들 수 있는, 자연을 위압하지 않는 작품을 만든다. 자연 속에서 노닐듯, 화면의 중앙에 돌발적 상황이나 주제를 놓지 않는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한국적인 것의 의미는 한국인으로서는 격화파양隔靴爬癢의 애매한 지적으로 비칠 수 있다. 이국정서의 일단으로 치부하기에 그 배경은 복합적이며, 복합의 통합-자기화를 위한 숙성이 필요한 것이 한국 내지는 한국적인 것의 실상으로 보인다.
김인환金仁煥은 토착성과 설화성에서 그 해답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토착성이란 황소와 목동, 피리부는 농부, 시골아낙, 초가집 등 소위 이발소그림의 소재를 예로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설화성이란 한국적인 표제를 선택했다는 의미이상의 의미부여는 역부족이라는 인상을 준다.
형상과 교집합交集合intersection을 이루는 짙고 두꺼운 윤곽선, 투박한 질감과 감성적인 색괴色壞가 만드는 푸짐함, 화면 안으로 수렴되는 의식과 이야기꺼리가 설화성의 설명이고, 두터운 윤곽선과 동세, 기념비적 단순성의 설화성이라면 보다 접근적일 것으로 보인다.
한국미술에서 개념은 개념미술과 괴리된다. 장석원은 관념적인 논리의 굴레 안에서 만들어지는 작가 개인의 발명품같은 개념의 유희를 든다. 동시에 혼돈과 혼동, 허구와 시행試行의 반복 속에서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감각적 미학의 추구와 개념은 동비중으로 다루어진다.
장석원張錫源이 말하는 개념의 유희는 이우환李禹煥의 장소론에서 말하는 만남의 현상학, 즉, 인용되는 바, 장소만이 대상을 참으로 대립시키고 그 존재성을 자유롭게 한다. 장소만이 자기의 대상성을 무無로하여 온전한 일체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가설과는 다른 각도와 위상을 보인다.
그것은 이 장소론이 서구의 관념론처럼 개념의 크기대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두께와 여유를 가지면서 ‘만남’이라는 관념으로 자리 잡게 되며, 사물과 인식간의 중화상태를 설정한데 의의가 있다고 장석원張錫源은 설명한다.
이우환李禹煥의 ‘만남-장소론-개념과 관념-사물과 인식간의 중화“로 해석하는 것은 다분히 미술현상과 미술가의 현상학에 대한 인식과 합리화를 감안한 미술평론적인 시각 혹은 타협일 수 있다. 그 관념론적인 타협은 이우환李禹煥의 현상학적 딜레마와 유사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다시 장석원張錫源은 미술가들이 다루는 자연이란, ‘개념적으로 자르고 부수고 나눈 뒤의 파괴되고 인공적으로 변모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손으로 직접 건드리지 않고 현실구조의 언저리만 정성들여 작위한 나머지에 관심 밖의 영역이 대두되는 자연’이라고 분석한다.
그림에서 주제를 비우고 주변에 미분화微分化한 설화성을 포치하는 바, 일종의 변각경邊角景같은 기법과 접근방식을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우환李禹煥이 현상학적 서설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작품의 존재성과 합리성을 정당화하려는 타협적인 논지와 같은 궤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한국미술가의, 한국미술평론가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자, 접근방식일 것이다. 현상학은 개념을 추출하는 방편은 될지 모르지만 미술에 관한 한, 실물로서의 미술오브제와 미술현상, 미술제작과 결과로서의 흔적을 설명하는 길이라기엔 역부족이라 할 것이다.
미술에서의 개념을 자연과의 친화라는 전제에서 접근하는 것은 한국인의 자연관과 무관하지 않다. 이일李逸이 1980년 복강福岡후쿠오카ふくおか 시립미술관 심포지엄에서 미니멀 아트를 한국의 고유한 정신적 발이며 일종의 자연직관이라 할 수 있다는 발언은 그런 의미에서 심장하다 할수 있다.
다시 이일李逸은 무기교의 기교, 무작위성이라는 한국특유의 민족성의 표현이며 만든다는 것에 대한 무관심은 자연스럽게 그렇게 있어야할 사물 또는 상태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의미하며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대한 애착을 뜻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작가들과 이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국제적인 사조를 도입 혹은 모방해서 만들어지는 한국만의 정신이 있으며, 이는 직관적이고 체질적으로 획득한 순수한 형질이지, 이일李逸의 주장대로 국제주의의 카테고리에 묶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자연적으로 노장사상으로 유추된다. 그러나, 김인환金仁煥은 노장老莊사상의 이를테면 무사무위無思無爲에서 미니멀 아트의 작품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미니멀아트의 방식과 방법론이 반전하여 무사무위, 무명無名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노장이라기보다는 노자老子로 귀착되는 한국인의 무위자연관無爲自然觀은 류종렬柳宗烈야나기 무네요시やなぎ むねよし의 진단에서 이미 개진開陣된 바 있거니와 이러한 문제를 다루는 글과 견해가 나타난 바의 현상과 추론으로 그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2) 공간
한국인의 공간은 상징적 심리적인 것이다. 익숙한 밀집구조의 공간에는 서열이 매겨진다. 기하적-유기적, 첨예-투박, 실선보다 중동이 터진 선, 모든 층이 드러나는 물감의 중층구조, 시선이 집중되는 구심구도, 경중 있는 조형요소의 병치가 선호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물이나 체질적으로 배어있는 감정적 요소에 의해 정서가 움직이는 것을 서정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성장과정을 보낸 작가들이 해외에 있건 국내에 있건 작품에서 서정성을 보이는 것은 매우 특이할만하다.
황포돛대나 갈매기, 포효하는 호랑이, 박꽃 핀 초가지붕 등은 키치Kitch라고 부르는 저급한 정서로 치부된다. 백자의 은은한 자태, 창호에 어른거리는 댓잎,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장판지, 배부른 흙 담이 그려졌다면 그림에서의 한국적 정서를 유발하는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추상화 개념화라면 붓끝과 붓끝이 스쳐 지나가면서 만드는 궤적, 끊어질 듯 이어지는 붓 자국, 등가等價의 색채군色彩群이 상호 연결되어 균형을 이루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허점을 남기는 마무리, 기하적 유기적 요소의 갈등과 긴장, 생략과 부연의 절제 등을 들 수 있다.
작품들에서 이러한 분석이 나올지언정 이런 특성이 타문화권에서 한국적 서정성이나 한국미술의 특성 혹은 장점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은 낮다. 세계화를 목표한다면 먼저 그 문화권의 문법을 숙지하고 체질화하여 그 문화의 공기-예술대藝術帶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다.
3) 생활
에서의 감수성은 적당함과 소탈함과 괜찮음으로 나타난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소탈하고 소박한. 흙과 더불어 사는 생활이 작품 자신의 자존과 자립을 위한 구도. 투박한 소재의 민화들. 작품을 창고에 보관하기보다는 생활공간에 두는 패턴이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다.
이경성李慶成이 소 차륜 초가집 농촌 등의 이른바 향토적 소재에서 한국미술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순환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향토적 소재를 기념비적 구성으로 승화해나가는 제작태도를 한국적인 소재의 개발로 보는 오광수吳光洙의 시각과 현격한 차원으로 보인다.
오광수吳光洙는 촉각적 공간으로서의 정물화의 부재는 서민적 리얼리즘의 혼돈으로 본다. 그러나 국전을 중심으로 만연한 좌상의 모티브에 대해 정물이 갖는 특성으로서의 신체성 등의 표현은 걸러지지 아니한 현상학적 어휘의 차용으로 지적될 수 있다.
1970년대 한국미술의 주요한 혹은 압도적인 영향원이 원색화보를 통한 간접경험 중심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미술의 폐쇄성을 온전히 설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발 먼저 입수한 정보로 화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사조와 작품이 단명했기 때문이다.
직접경험 혹은 해외미술 본류라는 공기 속에서 얻고 농축시킨 자양으로 민족적 감수성을 극대화한 작품들이 가교가 되어 한국미술이라는 풍토를 서서히 ‘개량‘해 나가는 많은 사례들은 한국미술의 한 발전적 방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에게 행위와 논리는 양립할 수 있으되 조화가 어려운 개념으로 보인다. 원동석元東石은 이우환李禹煥의 작품에서 인간본연의 삶의 형태를 담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그려 넣는다는, 이를테면 회화의 부정에도 작품이 생성의 숨을 쉬고 있다고 했다.
다시 원동석元東石은 이우환李禹煥이 절대적 시간성의 지속이라는 논리적 관점에서 일획一劃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일획은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민상 속에 한 획을 볼 수 있는 삶의 관점에서 본 생성의 시간으로 봐야한다고 분석한다.
이우환李禹煥의 ‘만남의 현상학적서설’은 논리와 회화라는 실체의 양면성이 맞선다. ‘나’와 세계가 마주하는 현상학적인 만남을 추론하되 그 만남의 결과를 환매가능한 작품으로 구체화한다는 이율배반의 논리를 괄호 안에 넣어 판단중지Bracketing한다는 모순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제작과 이론이 병립 혹은 공생할 수 없다는 한국미술가들의 주장은 이러한 모순대당의 논리에 맞설 수 없는 기질적 한계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서 올 수도 있겠지만, 미술을 논리이전의 초월적 인식으로 호흡하는 체질적 선호에서 기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4) 체질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매끈하고 기름끼 도는 그림 대신 투박하게 보이게 한다. 외래사조의 수용은 한국인에게 분석적 논리적이라고 하기보다 총체적 직관적이다. 그래서 오광수吳光洙는 외래사조를 하나의 새로운 양식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으로 수용한다고 보았다.
한국인 화가들이 뱉어버린 외국의 사조는 초현실주의, 하이퍼 리얼리즘, 하드엣쥐, 팝아트 등이다. 변형하여 수용한 사조는 흙냄새 묻힌 야수파, 점묘파 등이다. 체질적으로 인상파/후기인상파, 뜨거운 추상이 수용되었다.
한국의 양화가 자연주의미술에서 출발하여 인상파 후기인상파 그리고 추상미술로 이어진다고 성완경은 말한다. 추상미술도 논리적 구축적이라기 보다는 주로 서정주의적 추상, 이어 미니멀 아트와 개념미술로 이행했다고 본다.
특히 구축적 동력학적이거나 다다Dada적 풍자적인 또한 초현실적이고 심리주의적 미술은 우리의 체질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생략했다고 진단한다. 이른바 편의적 수용이다. 다른 말로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편의적 기호에 의해서 화풍이 결정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본간정의本間正義혼마 마사요시ほんま まさよし는 한국현대회화전에서 외국인으로서 한국정신의 일면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는 한국작가들의 작품들에서 무언가 생경한 것이 부상되고 있는 데, 이것은 미적가치와 기술의 공졸功拙 이전의 문제같이 느껴진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 본간정의本間正義혼마 마사요시는 한국미술에서 오프적 경향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비상히 단순한 색을 좋아하는 민족적인 기호嗜好가 예부터 잘 음미되어 왔기 때문이라는 이우환李禹煥의 말을 인용한다. 이 발언 역시 그 근본원인에 대한 궁구窮究와는 거리가 있다.
외국인이 보는 단순한 색이라는 것은 흰색의 상복喪服이나 제복祭服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관례冠禮와 혼례婚禮가 반드시 흰옷 일색의 단순한 색이 아닐 때는 그것을 민족적 기호라고 일반화하기는 무리가 있고 문화사적 천착이 필요한 명제일 것이다.
작가의 작품경향 역시 편의적으로 분류되었다. 어느 작가의 어떤 작품이 어떠한 유파의 어떤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작가는 “=적”이라는 말로, 이른바 야수파적 표현파적 추상파적 초현실파적으로 규정, 분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광수吳光洙는 외래 사조를 이념이나 조형적 사고가 아닌 기법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새로운 것이라면 야수파건 표현파든 상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은 그 표현기법을 생성시킨 이념이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편의적인 수용이라 매도할 수도 있을 이러한 태도는 뒤집어 보면 체질적인 호 불호가 굳건하게 자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화가나 사회의 암묵적 공감대는 바로 국민취향 혹은 국민색의 굳건한 범주 때문일 수 있다.
외국인은 어떻게 생각할까...본간정의本間正義혼마 마사요시는 이우환李禹煥의 좌담회발언을 상기시킨다. 한국현대미술에 강한 오프적 경향은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라 비상히 단순한 색을 좋아하는 민족적인 기호嗜好가 예부터 잘 음미되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국의 혁신적인 전통파괴와 자기부정의 예술양상을 수입하더라도 체질적 요소와 절충한다 라고 외국인은 본다. ‘계간미술’ 1977년 2월호에서 스미스Peter Smith는 자기정화의 관점에서, 본간정의本間正義혼마 마사요시는 1983년 9월 ‘공간’에서 문화전달자로 한국미술을 봤다.
스미스Peter Smith는 낙천적이고 점잖은 예술적 유산이 20세기의 시각적 철학적 제 문제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시각적 상징이나 이미지가 되어주지 못한다 고 말한다. 그리고 부단한 문화적 침략으로부터 고유문화를 지키기 위한 영속적인 투쟁의 관점으로 한국미술을 보았다.
그리고 본간정의本間正義혼마 마사요시는 일본에로 향한 통로문화라는 관점으로 진단한다. 한국회화는 조선의 자기瓷器가 이마리-이만리伊萬里와 나베시마-과도요鍋島()와 같은 통과지대성으로의 사고가 그 집중도를 높여갈 수 없기 때문이라는 쇄국적 시선으로 보게된다.
예술은 그 예술이 꽃피는 데 필요한 자양과 수분과 햇빛에 의해 꽃핀다. 세상의 상대평가가 어떻건 하나의 미술현상은 한 사회의 주제적인 기본구조로서 존재하며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상호교류적인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태도는 세계미술에의 큰 걸음을 지체케할 수 있다. 나타난 바를 진단하고 주체성이 깃든 미술을 살피며, 세계미술에 어떠한 방향으로 내어 보이는 것이 효율적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배냇정신의 세계화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장르마다 작가를 거론되지만, 한국미술 백년에 기라성같은 작가들이 있었고, 있을 것이다. 두터운 작가 층에 명민한 평론가들의 작품론이 제시하는 주옥같은 미술의 판도가 이제 열리고 있는 것이다.
II. 양화, 한국적 수용
미술이라는 말이 보편화하기 전에 태서법泰西法-서양화西洋畵-양화洋畵란 명칭이 있었다. 당시 양화는 서양의 그림畵이었고 유화油畵였다. 유화환경이 바뀌었다. 아크릴 칼라나 수성페인트가 자리를 잠식하면서 전통적인 회화의 관념과 접근방식, 미학이 뒤틀리고 있다.
미술의 개념과 범주, 그 외연外延은 물론 내포內包에 이르기까지 달라지고 있다. 평면이라는 타블로Tableau의 아성이 허물어진지 오래다. 아름다움美의 전통은 추醜함의 미학과 자리를 나눠앉을 수밖에 없었다. 장르와 매체는 이미 미술에서 박대薄待당하는 개념이다.
그런데도 양화요, 한국양화이다. 양풍회화-양화-서양화의 흐름에서 양화를 다시 조명함은 그 미학이, 미적 질서와 정서가 여전히 한국미술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배경에 배냇정신이라는 철옹성鐵甕城이 자리한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