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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들이 이 부근에 오면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국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경천사지 10층석탑을 보기 위해서이지요. ^^.
이 앞에서 경탄하신 분들 많으시지요?
이날은 시간도 있고 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합니다.
경천사지 10층석탑을 보신 분들은 하나 같이 이렇게 정교한 조각의 장대한탑이 있다는 것에 기꺼워 하십니다.
물론 맞는 말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 탑은 각 방위마다 다섯 개의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각 방위마다 다섯 개의 면이 합하면 스무 개가 되지요.
한면 정 중앙의 면은 4층까지는 삼존불을 조각하고, 나머지 면은
부처님의 법회 장면인 영산회상의 장면들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이건 소 그림 아닌가 싶네요. 소가 있는 불화는 '심우도'라고 하여 선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지요.
하지만 이 섬세한 조각에 대해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돌이 조각에 매우 적합한 무른 돌인 대리석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석탑이나 석불이 경도가 매우 강한 화강암이라면
대리석은 매우 쉽게 긁어내듯이하면서도 섬세한 조각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거든요.
그래서 조각하기 무척 힘든 화강암으로 된 인공석굴에 어마어마한 불국토의 세계를 형성한
석불사(석굴암)을 방문한 외국 전문가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원터풀과 뷰티풀, 언빌리버블을
연발하지요.
우리가 세계의 명작이라고 하는 서양의 피에타 상이나 비너스 상 등등 모두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거나
석고로 만든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화강암에 비하면 매우 쉽게 조각이 가능하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화강암으로 조각이 가능한 석공이라면 대리석은 떡주무르듯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작업도구만 보아도 화강암이 정과 망치라면 대리석은 조각도로 마무리를 합니다.
다만 대리석은 그만큼 무르기 때문에 쉽게 손상이 갑니다.
그래서 이 석탑도 14세기 석조물 치고는 훼손 상태도 심한 것이지요.
국박 특별전,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지만 늘 좋은 전시들을 해주고있습니다.
그냥 보면 잘 모를 수 있는데요. 이 전시회는 일제강점기의 국립박물관 역할을 했던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 등에서 수집한 물품들을 전시하는 특별 전시회입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자리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은 해방 후 몇번의 명칭 변경을 거쳐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전시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박물관이 수집한 작품들 중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는 것을 전시하는 특별전입니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품은 광화문 자리에 있다가 허물어진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홀 북벽에
걸었던 그림입니다.
한국과 일본에 모두 존재하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소재로 서양화풍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렸다고 하네요. 철거시 이 벽화를 해체하여 보관하고 있다네요.
일본 역시 19세기부터 서양문화에 대한 동경이 강했기에 저렇게 서양 스타일의 그림이나 조각들을
더 값어치 있게 보곤 했지요.
중국 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반가사유상이라고 합니다,
백옥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상은 중국불교에술의 진수라고 하여 초기부터 널리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의 싯타르타 시절 인간의 굴레에 대해 고뇌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지요.
매우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4세기경 작품으로 아프카니스탄에서 출토된 작품인데 당시 프랑스 모 박물관에서 기증했다고 하네요.
제 눈길을 끌었던 여인상입니다.
돌을 깍은 것 치고는 느낌이 달라서 살펴보니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이라고 합니다. ^^
멋진 작품이네요.
무언가를 지긋이 응시하는 고혹한 눈빛과 입술에 머금은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투르판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8~9세기 작품이니 통일신라 말기 작품이네요.
당시의 일본강점기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도적질)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한 작품 중에 수작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이때 중국 둔황과 실크로드 각지의 석울을 파고 그 안의 불상이나 벽화 등등을
서구의 스타인이나 펠리오 같은 인물이 동양에서는 일본의 오타니 같은 탐험대가
유물을 수집(도적질) 하였는데, 그 결과 펠리오가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하여 프랑스
기메박물관으로 가져간 돈황문서에서 신라 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고,
오타니(大谷)탐험대가 조선총독부 창고에 갖다놓았다고 합니다.
그 조선총독부가 오늘날 국립중앙박물관이 되었고, 그 수장고 안의 당시 수집품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앙아시아 벽화의 세계 최대 컬렉터 중의 하나가 되었답니다. 참 아이러니 하지요.
4~6세기, 북위 시대의 반가사유상입니다.
정교하지요.
중국 스타일의 불교 미술에서 볼 수 있는 불비상입니다.
비석 같은 곳에 불상을 새긴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제가 완전 반해버린 최고의 명작입니다.
중국 북제 말기인 6세기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때 구입한 것이라고 하네요.
손상되기는 했으나 손 모양으로 보아 어느 부처나 취할 수 있다는 손갖춤인 통인을 하고 있네요.
그래서 부처의 존명을 확인할 수 없어 해설판에선 '부처'라고만 적혀 있습니다.
이 고졸한 아름다움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한참을 이곳에 서 있다가 왔습니다.
그리고 박물관 전체를 다 돌아보고 나오면서 다시 들려서 재차 친견하고 왔습니다.
절대자의 모습이 아닌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 온 부처님이 전 좋습니다.
이런 상을 보면 인간 개개인마다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이런 내재적 감동이 있어야 진정한 불교미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관음보살 처럼 보이지만 '보살'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송나라 시대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자비로운 존안과 더불어 리듬감 넘치는 손 모양이 일품입니다
관음보살이라면 보관에 화불이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그냥 보살이라고만 해놓은 것 같습니다.
부처와 보살이 어떻게 다르냐구요? 일단 인상을 보면 부처는 완벽하게 진리에 통달하여
화려한 장신구들이 없습니다. 반면 보살은 아직 깨달음을 구하는 중이기에 인간적인 장신구로
치장한 경우가 많지요. 물론 지장보살 처럼 스님의 복장을 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한달도 안남았으니 아직 안가보셨다면 꼭 다녀오세요. ^^
1층 시대관을 전체적으로 돌았는데요.
통일신라시대라고 우리가 배운 시대를 이제는 남북국시대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네요.
신라가 남쪽, 북쪽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발해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통일신라시대의 철불입니다.
새롭게 선보입니다 라고 크게 홍보하던 분이신데,굉장히 낯이 익습니다.
제가 도록을 많이 봐서 그런가 싶었는데, 기억을 되살려보니 3층 불교조각실에 예전부터 있던 분을
1층 통일신라시대실로 옮겨 와서 새롭게 전시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
2층 회화실에서 내려다본 1층 통로.
역시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무게 중심을 잡아줍니다.
독일의 유명한 영화평론가이자 시각 미술의 대각인
루돌프 아른하임은 '모든 사물은 공간을 창조한다'라고 하였지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 경처사지 10층 석탑의 배치는 대단히 아름다운 공간을
국박 건물 전체로 확장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가 싶습니다.
사물이 공간을 창조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수 있을 겁니다.
내가 창조하는 공간은 어떠한가! 과연 가치있는 공간인가! 라는 생각을 자꾸자꾸 하며
앞으로 나아갈 바와 행동할 바를 정해야겠다는 상념에 빠져들어 봅니다.
10월28일부터 4월까지 특별 전시되는 변산반도 개암사 괴불입니다.
높이가 무려 13.17m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1749년에 조성되었으니 영조 시절이니 나름 평안한 시대였네요.
2층 불교 회화실과 3층 불교조각실이 터져 있는 공간을 꽉 채워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탱화에 있는 부처님과 보살들의 존명을 알기에 좋습니다
불교조각실이 있는 3층에서 내려다본 괘불입니다.
3층 불교조각실에서 괘불 상단을 제대로 친견할 수 있습니다.
불교회화실에 있는 수월관음도입니다
도상을 보면 수월관음도가 맞는데, 남성적으로 표현된 관음보살님에게
살짝 거부감마저 듭니다. 월래 관음보살은 여성성과 음(물)을 상징하는 분인데 말이지요.
조선시대 19세기 작품이라고 하는데,
역시 억불숭유의 탓인지 조선시대는 불교문화가 그다지 융성하지는 못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T.T
일제강점기 일본에서는 고대, 중세, 근대 문명의 척도를 불교문화에서 비롯되는 문화와 예술품으로
그 발달의 척도를 삼았는데,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시대로 인해 조선의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다소 특이하고 억지스런 주장을 펼치기도 했답니다.
선정인의 손갖춤을 한 나한의 조각에 마음 한자락 얹어봅니다.
통일신라시대관으로 내려간 철불 계신 곳에 새로운 보살님이 닫집까지 근사하게 만들어서 모셔졌습니다.
불상의 형태로 보아 목불이나 청동불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관이나 가슴의 장식 장식들이 정교하기 그지 없었거든요. 일반적인 목불로는 어렵지요.
물론 일본에서 유행했던 요세기쯔쿠리 기법이라는 각각 만들어서 붙이는 목불 제작 기법이라면
가능할런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게는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던 양식이거든요.
설명문을 보니 역시 건칠불 방식으로 제작되었군요.
설명문에는 '칠포'방식이라고 쓰여있지만 '칠포'라는 단어는 잘 안쓰는 말인 것 같아요.
보통은 건칠불이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이 방식은 기본적인 형태를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종이나 천을 덮고,
옻칠을 하고, 다시 그 위에 종이나 천, 다시 옻칠을 일곱번 여덟번 한 후 세밀하게 조각을 하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섬세하게 조각이 가능하고, 잘못된 것은 다시 덧발라서 수정이 가능한 장점이 있지요.
다만 옻칠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매우 길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답니다.
일본의 경우 건칠불이 많이 남아 있는데요. 섬세함과 디테일을 중시 여기는 일본 스타일에 적합하기 때문이지요.
또 폐불훼석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불교 문화재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거나 부셔진 메이지 시대에는
유명한 목불도 땔감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때 건칠불들은 땔감으로도 쓸 수 없는 비효율(?)성으로 상대적으로 많이 남았다는
서글픈 사연도 있답니다.
불교조각실 동쪽 방입니다.
한중일의 불상들 비교입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각각 꽃피운 문화의 색깔은 다른 것이 느껴지지요.
이런 다채로움 속에서 세상은 조금씩 나아가는 듯합니다.
나와 다름을 틀림이 아니라는 것을 좀더 넓게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다짐해봅니다.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전륜성왕이 취하는 윤왕좌를 취하고 계시는 관음보살님 (고려시대 작품)
전륜성왕은 불법을 통해 나라를 통치하는 이상적인 왕을 뜻한답니다.
불교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신장들은 대부분 인도의 브라만교, 힌두교의 여러 신들을
차용해서 만든 경우랍니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을 때 힌두교의 신들도
모두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받든다고 경전에 적고 있습니다.
그냥 보기에도 인도불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요? ^^
아, 특별힌 방 하나를 차지하고 계시는 83호 반가사유상입니다.
바로 앞의 유리판에 비치는 반영과 함께 잡아 봤습니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에서 대표적인 83호 반가사유상과 78호 반가사유상의 예술적 우열을
비교하는 글을 예전에 본 기억이 납니다.
불상 전문가의 눈에는 저 발바닥의 엄지와 검지발가락의 움직임에서 디테일을 포착해
78호보다 83호가 더 예술미가 뛰어나다고 평하는 글이었지요.
두 불상을 함께 놓고 비교하기 전에는 저는 뭐라 결정할 수 없네요.
어쩌면 우열을 가리고 싶지 않을 수도 있구요. ^^
일본 고유지의 국보 1호인 목조반가사유상과 흡사하여 늘 대조되곤 하지요.
큐레이터와의 대화 때 이 83호를 가지고 이야기를 많이 했던데 가보질 못해서 늘 아쉬웠습니다. T.T
반가사유상의 설명문입니다.
좀 이상한 것은 문화재청 공식 홈페이지의 자료 설명에는 분명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국립중앙박물관 설명은 미륵보살이 아닌 석존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부처님의 차이는 매우 큰데, 어느 것이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검색을 해 보아도 이 두가지 해설이 제각각이어서...
즉, 미륵보살이라면 '미륵부처'께서 56억7천만년 후 인간세상에 하생하기 위해 도솔천에서 명상하는 모습이고,
석존이라면 위와 사진 설명문 같이 출가 전의 석가모니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고민과 명상하는 모습일텐데요.
허! 공식자료들이 서로 다르니 정말 어렵네요.
혹시 지난번 큐레이터와의 대화에서 이 작품 설명할 때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좋은 불상 조각들이 많았는데, 제 눈길을 끌어잡아 당기신 분입니다.
이렇게 인간미가 풍부한 절대자를 저는 좋아한답니다. 오른손에 무언가 들고 계시니
약사불이 아닌신가 짐작해봅니다. 보통 약사불은 왼쪽에 약갑을 들고 계시긴 하지요.
통일신라 초기의 금동부처님이십니다.
크기가 매우 작지만 매우 섬세한 수법이 놀랍습니다.
도자기실의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종류
멋진 시가 적혀 있는 술병과 잔!
고려 상감기법이 들어간 청자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아시아관의 인도관입니다.
불상이 없던 시기가 지나고 불상을 처음 만들던 시기의 인도의 부처님상입니다.
2~3세기 작품이니 지금으로부터 2,000년 가까이 된 셈이지요.
불교 초기에는 약 500년간 불상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일반 인간이 아니기에 불상으로 만드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는 설과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법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를 숭상하면 족했다 라는 설이 무불상시대를
설명하는 설입니다.
그래서 불상이 아닌 스투파(탑)을 만들어서 기도를 올리고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널리 퍼지려면 무언가 숭배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때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리스문화가 들어오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당시의 부처님상은 서양사람의 얼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때도 우견편단의 양식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위의 상은 간다라 지방의 것을 테고, 이보다 좀더 동쪽 그러니까 그리스 문화가 덜 전파된 곳인
마투라 지방에서는 이와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인도식의 불상이 생겨난답니다.
*우견편단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놀고, 왼쪽 어깨에서 시작된 옷이 오른쪽 허리까지 이어지는 양식
미륵보살이라고 하는 2~3세기 인도의 불상입니다.
그때도 미륵신앙이 있었나봅니다.
인상이 상당히 낯설지요? ^^
인도 흰두교 계열의 조각상입니다
인도 힌두교의 대표적인 신인 시바신(왼쪽)과 부인 파르바티의 상입니다.
원래 가운데 아들인 스칸다 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
우리나라의 역사는 중국, 일본이 포함된 동아시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그래서 알고자 한다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문화 더 나아가 인도의 정신까지 이해하는 노력과
안목도 필요할 듯 합니다.
보잘것 없는 긴 후기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첫댓글 다녀온듯 자세한 설명과 사진~잘 봤습니다
귀여운 어린애 같은 저 배 볼록 내밀고 있는 통일신라의 불상 저도 참 좋아한답니다~^^
한번 죽 둘러보러 가야겠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사진과 해설 감사합니다~^^
보잘것 없는 게 아니라 무지하게 볼 것도, 읽을 것도 많은 후기였네요.
아주 많은 상식을 얻어갑니다. 감사!
후기에서 여유와 열정이 읽혀지는 듯 합니다...^^
국박을 1년 넘게 드나들며 눈에 익은 유물들이 꽤 많았습니다만, 늘 바쁘게 들어갔다 나오다보니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것을
발견이님 후기에서 상세한 해설을 읽습니다. 정성 들인 사진과 해설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국박 가깝게 있으면서도 그 장점을 아직까지 이용하지 못함에 다시 반성을 하게 됩니다.
자다가 우연히 잠이 깨어 뒤척이다 스마트폰으로 발견이님의 국박후기를 보았습니다, 잠못이루고 뒤척이던 밤 참 좋은 구경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감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