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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한 비윤리적 선택
* 난해한 비윤리적 선택
* 난해한 비윤리적 선택을 위한 기도
③ 난해한 비윤리적 선택을 위한 기도.
우리가 ‘난해한 비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에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원칙이 있다.
*성경의 원리를 마음에 새긴다.
*생각과 소원의 어떠함을 살핀다.
*충분히 기도했으면 행동에 옮긴다.
*초자연적ㆍ직접적인 응답을 기다리다 세월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예언자들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꿈을 참고하되 의존해서는 안 된다.
*표징을 참고하되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제비뽑기를 의존하려 해서는 안 된다.
*느낌을 참고하되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마음의 평안을 참고하되 의존해서는 안 된다.
*환경을 참고하되 의존해서는 안 된다.
*조언을 참고하되 의존해서는 안 된다.
*결과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한 번의 선택을 하나님의 최종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a. 성경의 원리를 마음에 새긴다.
“아침에 나로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나의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받듦이나이다”(시143:8)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
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특정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성경적인 사고와 가치관과 안목을 갖추는데 주된 목적을 두어야 한다.
ⅱ. 성경에는 계율과 원칙 두 가지가 있다. 계율은 하나님의 뜻을 흑백으로 분명하게 지시한다. 한편 원칙은 우리로 하여금 회색지대(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영역들)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반적인 지침들이다. 곧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행하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분별력을 사용하여 스스로 결정할 것을 요구한다.
ⅲ. 교통법규에도 계율(법칙)과 원칙 두 가지가 있다. ‘속도제한 60㎞’라고 쓴 표지는 법칙이다. 한편 “조심하여 운전하십시오”라고 쓴 표지는 원칙이다. 이 원칙은 새벽 2시에 사람이 없는 거리를 운전할 때와 어린이들의 등하교 시간에 운전할 때와 전혀 다르게 적용된다.
ⅳ. 우리는 성경에서 원칙을 발견하여 당면 문제에 적용해야 할 경우가 많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어디에 살아야 하고, 어떤 직업을 취해야 하고, 어떤 대학에 가야 하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만약 성경이 그런 모든 일을 다 말해 준다면 생활하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얼마나 적은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영적 성숙은 초등학교 1학년 학생 이상으로 깊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원리들을 잘 이해함으로 성경적 안목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ⅴ. 테레사는 그의 책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에서 “사랑이 없으면 듣지 못하고, 사랑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 우리의 마음이 어두우면, 곧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욕심에 사로잡혀 있고, 시기와 질투의 노예가 되어 기도하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마음이 깨끗하고 사심이 없이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빛’, 곧 사랑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ⅵ. 무심지도(無心至道)란 말이 있다. 마음을 비우니 길(道)이 보인다는 뜻이다. 사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기도하면 곧 바로 주어진다. 다만 우리가 그 응답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대개는 우리가 충분히 회개하지 못했을 때, 곧 죄가 내 마음의 창을 가리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싸인(sign)을 보지 못한다. 마치 자동차 앞면 유리에 먼지가 잔뜩 끼어 있으면 우리가 교통신호를 볼 수 없듯이 말이다.
ⅷ. 아프리카 케냐 모얄레라는 마을에 ‘디다’라는 의사가 있다. 그는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의학공부를 했다. 함께 의사가 되었던 친구들은 도시에서 병원을 열었는데 ‘디다’는 시골로 내려와서 병원을 열었다. 어느 날 우리나라의 한 여성이 그곳을 방문하여 그의 초대를 받았다. 그녀는 기대를 하고 그 집에 갔다. 그런데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몹시 놀랐다. 방 하나에 부엌, 응접실, 그리고 꼭 필요한 가구와 집기들 그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그는 “나는 혼자 살므로 옷 몇 벌 넣을 튼튼한 장과 편안한 침대 하나만 있으면 되고, 또 글을 쓸 수 있는 책상과 걸상만 있으면 되지요. 가구가 많으면 짐만 되고 신경만 쓰이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다시 물었다. "의사가 되려면 돈도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들여 공부했을 텐데, 왜 이런 시골에서 병원을 하세요?" 그는 “나는 돈과 명예를 얻으려고 의학공부를 한 게 아니예요. 내가 태어난 모얄레 근처에는 예나 지금이나 말라리아나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말라리아나 콜레라로부터 이들의 생명을 지키는 제 꿈이요, 사명이랍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그에게 “참으로 대단하시네요. 감동적인데요” 하자, ‘디다’는 “그렇지도 않아요. 내가 나이로비에서 개업을 했다면 그저 여러 의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겠지만 여기서는 아주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오히려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서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고 대답했다. 그녀가 도시와 시골 중에 시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ⅶ. 외국 교회가 한국 교회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하면서 “한국 교인들에게는 세 가지만 있는 것 같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돈이다”고 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목적이 오직 자기 자신과 물질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b. 생각과 소원의 어떠함을 살핀다.
(a) 생각(이성)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딤후1:6)
“그러나 에바브로 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노니”(빌2:2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ⅰ.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하나님의 뜻을 다 보내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곧 인간은 생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이성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ⅱ.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에 있어 많은 경우에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는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당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 사실 헌신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들 안에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과 결정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ⅲ.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를 결정하려 할 때 우선적으로 여러 방안들을 적어 놓고 각각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육하원칙에 의해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떠오르는 생각들이 사라지도록 방치하지 말고 판단의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ⅳ. 예컨대 토요일까지 대학에 입학원서를 접수시켜야 하는데 어느 대학 어느 학과에 지원해야 할지 특별한 인도하심(환상, 음성, 확신 등)이 없다고 하자. 이런 경우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결정하면 된다. 우리는 결정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b) 마음의 소원(욕구)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시21:2)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라”(시37:4)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버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던 원이 있었으니”(롬12:22-23)
ⓐ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한다.
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욕구를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욕구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말한다.
ⅱ.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면 우리의 욕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자신의 소원과는 다른 것을 선택하기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요나처럼)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의 욕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
ⓑ 우리의 욕구는 개인적인 성취감과 동시에 타인에게도 유익해야 한다.
ⅰ. 사람은 자기 인생의 성취감을 느끼게 될 때 의욕을 가지고 일하게 되며, 또한 자신이 타인에게 유익한 존재가 됨을 알게 될 때 가장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만약 우리 안에 그 일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없다면 우리는 그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창조적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ⅱ. 우리는 결혼하고 싶은 상대와 결혼했을 때 그를 더 사랑하게 되고, 반면에 결혼하고 싶지 않은 상대와 결혼하게 되면 의무감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므로 혹 교사나 군인이나 의사나 그리고 성직자 등이 되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그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ⅲ. 우리 안에 있는 욕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어떠한 존재로 만드셨으며, 우리에게 무슨 소명을 주셨는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안에 있는 욕구를 진지하게 평가해 보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자기에게 주어진 청지기 직분을 올바로 수행하지 않는 일이 될 수 있다.
c. 충분히 기도했으면 행동에 옮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출14:15)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막14:4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a) 하나님의 응답은 다양하며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을 주실 때 획일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각각 다르고, 우리에게 필요한 처방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ⅱ. 그러므로 우리가 충분히 회개하고 충분히 기도했다고 판단되면 ‘성경 말씀ㆍ양심의 소리ㆍ환경과 여건ㆍ소원ㆍ기호(嗜好)ㆍ주위 사람들의 충고’ 등을 고려하여 내 마음의 ‘저울’이 기우는 방향으로 선택하면 될 것이다.
ⅲ. 우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의 손길을 느끼던 못 느끼던 간에, 성령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생각을 이끌고 계시는 사실을 믿고 결정하면 된다. 만약 믿는 이들이 초자연적인 응답을 듣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다닌다거나 혹은 초자연적인 응답을 무작정 기다리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b) 세 개의 불빛이 하나로 일치될 때를 살핀다.
마이어 목사님이 별 하나 없는 어느 날 밤 에이레 해협을 건너고 있었다. 그는 선장과 함께 갑판 위에 서 있었다. 그때 그가 선장에게 물었다. “당신은 오늘과 같은 캄캄한 밤에 어떻게 홀리헤드 항구를 압니까?” 선장은 “저기 불빛 세 개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 불빛이 일렬로 되어 하나로 일치될 때 저는 그 항구 어귀의 위치를 정확히 압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이어는 ‘세 개의 불빛이 하나로 일치될 때’라는 말을 인용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할 때도 세 가지 사실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마음의 충동(강렬한 의욕)’,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 그리고 ‘여건(환경과 자신의 준비)’이다. 그는 이 세 가지가 동시에 동의할 때까지 결코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c) ‘가장 좋은 것’보다 ‘충분히 좋은 것’을 선택한다.
ⅰ. 선택과 행동은 비록 그것이 비록 실수로 이어질지라도 그 과정 속에서 반드시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있다. 반면에 초자연적인 응답만을 구하다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정체(停滯)와 위축만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성취의 대부분은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동요하는 가운데 놓치고 만다.
ⅱ. 비리 슈워츠는 그의 책 ‘선택의 심리학’에서 ‘가장 좋은 것’보다 ‘충분히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권한다. 가장 좋은 것을 구하려면 가능한 한 모든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대안이 넘쳐나는 세상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ⅲ. 최고만을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극대화자(Maxizer)’는 고르고 또 고르느라 오히려 불행해지기 쉽다. 반면에 더 좋은 게 있을 수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접어두고 일단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만족하는 ‘만족자’가 낫다고 그는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닫쳐진 문에 집착하여 열려진 문을 보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d. 초자연적ㆍ직접적인 응답을 기다리다 세월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비밀에 붙이신다.
*초자연적 응답(인도)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a)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비밀에 붙이신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 점(占)
ⅰ. 입시철마다 점(占)집이 미어지는 것은 위안 받기 위해서다. 한 어머니는 하루 일곱 군데 점(占)집을 돈다고 한다.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붙을 거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은 소식을 들은 어머니라도 몇 군데 더 들른다. 좋은 소리일수록 듣고 또 듣고 싶기 때문이다. 끝없는 모정(母情)의 목을 점(占)으로 축이는 셈이다.
ⅱ. 한국 역술인 협회는 우리나라 ‘운명산업’ 규모를 2조 원으로 추산했다. 인터넷 역술사이트가 150개 이상이며, 서울 압구정동에만 점(占)집과 사주카페 70곳이 갖가지 동서양 점술을 갖추고서 젊은 남녀에게 가격표 적힌 ‘점(占)메뉴’를 내민다. 각박하고 불안한 시대를 사는 남녀노소에게 점(占)은 삶의 한 소품이 돼버렸다. 인간이 달에 첫발을 디디자 한 과학자가 “과학이 달을 정복했으니 세상의 점쟁이들은 모조리 실업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점은 망하기는커녕 ‘미래예측산업’으로 번창하고 있다. 좌씨전(左氏傳)에 “점은 의심쩍어 치는 것, 의심쩍지 않은데 왜 점을 치랴”라고 했다. 고대 이래로 예언과 점술은 국가를 이끄는 한 동력이었다.
ⓑ 우리는 마치 점(占)을 치듯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와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18:9-13)
ⅰ.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점치듯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금지한다.
ⅱ.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때때로 개인의 필요에 따라 직접 앞일을 알려 주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편에서 먼저 능동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알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사항이며, 또한 우리에게 득보다 해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현재 내게 원하시는 바를 알고 행하려 해야 한다.
ⅲ. 아잔 브라흐마의 책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미래를 알고 싶어 하던 한 사람이 유명한 선생에게 찾아가 자신의 미래를 알려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그 남자의 꺾이지 않는 결의에 못 이긴 선생은 절대로 점을 봐주지 않는다는 스스로의 계율을 단 한 번만 깨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남자의 손금을 본 선생은 말했다. “잘 들으시오. 당신의 미래를 말해 드리겠습니다. 내 점괘는 틀린 적이 없습니다.” 그 남자는 너무 흥분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선생이 말했다. “당신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과연 그의 점괘는 틀리지 않았다.
ⓒ 자신의 미래를 아는 지식은 다음과 같은 해(害)를 낳을 수 있다.
ⅰ. 첫째, 삶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이스라엘 왕 사울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난 직후, 곧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너무나 두려워서 기력이 쇠진해지고 말았다. 그는 하루 종일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하였다.(삼상28:20)
ⅱ. 둘째, 믿음이 약화된다.
믿음이란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는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미지의 미래를 향하여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5:7)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고 말씀한다.
ⅲ. 셋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피할 수 있다.
결혼 후에 있을 고난을 미리 안다면 누가 결혼하려 하겠는가? 또 출생할 아이가 불행한 일생을 살게 될 것을 미리 안다면 누가 그 아이를 낳아 키우려 하겠는가? 예언자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당할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굽게 하려 했다.(행21장)
ⅳ. 넷째, 삶이 지루해진다.
우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알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인생은 불행해진다. 자신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의식의 작용으로 인해 삶에 대한 열심이 약화되고 지루해진다. 마치 승패가 끝난 바둑을 두 대국자가 다시 복기하는 것 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모든 흥미나 기대를 잃어버린 채 무미건조한 일생을 살게 될 것이다.
ⅴ. 다섯째,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다.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피동적인 인간이 된다. 기계적인 인간이 되며, 사고를 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
(b) 초자연적 응답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라사대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려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행 8: 26-29)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베드로가 본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행10:3-29)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행3-11)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9:9-10)
ⓐ 하나님은 우리가 이성만으로는 생각해 내지 못할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실 때 직접적으로 개입하셔서 인도하신다.
ⅰ. 하나님께서 빌립을 광야로 보내어 에디오피아의 권력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천사를 통해 직접 지시하지 않으셨다면, 그가 그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바울을 아시아에서 유럽의 마케도니아로 건너가게 했을 때에도 환상을 보여주지 아니하셨다면 그가 그러한 발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ⅲ. 또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보내셨을 때에도 환상을 보여주지 아니하셨다면, 그가 그러한 발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우리는 초자연적인 응답(인도)을 꼭 필요한 것으로 기대해서는 된다.
ⅰ. 첫째, 초대교회 시대에도 초자연적 응답은 아주 희박했다.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문제를 결정하게 되는 일이 무려 100가지이상 나온다. 그러나 그 중에서 초자연적 인도를 받는 사례는 10가지 정도이다.
ⅱ. 둘째, 성경에 초자연적 응답을 구하거나 기대하라는 말씀은 없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초자연적 인도하심을 받은 경우는 대개 인간이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하심과 주권적인 뜻에 의해 나타났다. 만일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응답이나 인도를 원하셨다면 그러한 취지의 명령을 하셨을 것이다.
ⅲ. 셋째, 우리의 일상생활을 비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극적인 만남은 우리에게 심리적 위험을 준다.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두렵게 만들고, 또한 충격을 줌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이끈다.
ⅳ. 넷째, 우리의 믿음을 시험에 빠뜨릴 수 있다.
초자연적 경험은 자기를 남보다 영적으로 더 뛰어난 존재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실 초자연적인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 영적 탁월함을 의미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것이 없다는 것이 덜 영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초자연적 경험이 일부 신자들을 영적 교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ⅴ. 다섯째, 우리를 비현실적ㆍ비윤리적ㆍ비이성적ㆍ비상식적ㆍ비사고적 성향의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
ⅵ. 여섯째, 사단도 빛의 천사를 가장하여 나타나서 역사하므로 우리가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어렵다.
e. 예언자들을 의존해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저희 말을 청종치 말라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 부종하고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신13: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와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18:9-1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 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 하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3:16-32)
(a) 구약 성경에는 참예언자들도 출현하지만, 거짓예언자들이 훨씬 더 많다.
ⅰ. 이스라엘 왕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의 길르앗 라못을 치기로 합의하였다.(왕상22:1-40) 당시 400인의 어용 선지자들은 승리를 예언함으로 왕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러나 미가야는 이스라엘의 패배와 왕의 죽음을 예고했으며, 이에 아합은 노하여 미가야를 옥에 가두었다. 결국 여호사밧은 한 사람이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죽었다.
ⅱ. 예레미야는 기도할 때 자기 민족이 처한 참담한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슬프도소이다”(렘32:17)라고 고백하였다. 그의 슬픔의 고백은 민족의 죄와 민족의 비극적 최후로 인한 것이었다. 한편 당시 대개의 다른 선지자들은 사태를 낙관적으로 보고 좋은 말로 왕과 백성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들은 회개와 심판의 말씀을 가장 강하게 선포해야 할 때에 오히려 구원에 대한 거짓 믿음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을 책망하셨다.
(b) 우리는 자칭 예언자들이 예언의 형식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 의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ⅰ. 우리는 개인 신상문제에 대해 주어지는 예언자의 말을 일단 거부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예언이 개인적인 신상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도)으로 사용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예언이 순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일종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보다 우선 당사자인 나에게 보다 확실하게 밝히셨을 것이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일반적인 원칙이기도 하다.(예외도 있지만)
ⅱ.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당할 것이므로 가지 말라는 예언자의 권면을 받았을 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며 이를 거부하였다. 이 같은 바울의 거부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감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던 것이다.
ⅲ. 물론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로 하실 때 이 시대를 향해 또는 교회와 개인을 향해 초자연적인 예언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부인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