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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둘레길 트레킹이 일찍 끝나서 또 막걸리 딱 한 잔 했겠지요.
정말이지 딱 한 잔 마셨는데도 이리 기분이 좋아지니
술에 관한 한 너무나 경제적입니다.
남들은 몇 병을 마셔야 기분이 좋아진다는데 저는 한 잔에
이리 기분이 좋아지니 얼마나 경제적인지 모릅니다.
오늘은 기분도 좋겠다 좀 긴 이야기를 해 볼까 하니
너무 길고 재미없다 생각되시면 가차없이 문 닫고 나가시고
뭐 대충 읽어줄만하다 싶으면 한 5분쯤 참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9조, 일명 헵번 조는 맨 마지막 줄에서 걸었습니다.
어느 만큼 가다가 스텝진 한 분과 잠시 둘이 걸으며 나무와 꽃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분은 8-2코스가 전담인데 둘레길을 걸으며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이라는 주제로 나름 스토리를 만들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특히 미루나무에 대한 스토리를 계속 만들어 나가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저도 한 말씀 드렸습니다. 그 분도 저의 말에 동감해 주셨습니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난 야생화들도 카메라를 들이대니 너무 예쁘더군요”
이건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 제가 며칠 전
자전거 타고 양주에 있는 회암사지라는 절터를 가다가
양주 청담천 부근에서 야생화 사진을 찍다가 느낀 것이었습니다.
제가 찍은 꽃은 민들레 개망초 달맞이꽃 애기똥풀 등 몇몇 야생화인데
일단 한 번 제가 찍은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계속 하지요.
위 꽃들은 그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꽃들이고 그리 눈에 차는 꽃은 아닙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가까이서 접사 사진을 찍는데,
사실 접사 사진은 자동으로 놓고 셔터 탁 누르는 게 아니라
수동으로 렌즈를 활짝 열고 초점을 잘 맞추어서 찍어야 하기 때문에
렌즈로 들어온 꽃을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더구나 접사 렌즈도 아니고 광각렌즈 하나 달랑 달고가서
꽃을 찍으려니 꽃을 여간 세심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렇게 꽃을 잘 살펴보니 그냥 지나가면서 보던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다가 말고 꽃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너 차암~~~~ 예~~쁘구나.”
이럴 때 인용해야 하는, 잠언처럼 회자되는 싯구가 있지요.
바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엊그제 제가 산행팀들과 함께 밀양에 있는 재약산을 다녀왔습니다.
표충사로 내려와 표충사 소나무 숲길을 걷고 있는데
저 앞에 알록달록 등산복을 갖춰 입은 여성 산꾼들이
소나무 숲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는데 뒤에서 보니 그 광경이 얼마나 아름답던지요.
소나무와 여성 산꾼들의 무리지어 가는 모습이 너무 잘 아울리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지요.
바로 저거야,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갔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여성들은 이미 풍경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쉽던지요.
제가 한 때는 무거운 카메라 들고 풍경 사진을 찍는다고
혼자서 종종 출사를 다니곤 했었는데요,
어느 순간 풍경 그 자체는 너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풍경 속에 사람이 없으면 풍경이 풍경답지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음부터는 사람이 있는 풍경을 주로 찍곤 하지요.
사람이 있는 사진을 찍되 사람은 작게 풍경은 크게
이렇게 찍으려다 보니 저는 주로 광각렌즈를 들고 다닙니다.
오늘 맨 뒷줄에서 따라가며 숲길을 걷는 100인 원정대를 보니
알록달록 등산복의 100인 원정대가 꼬부랑 휘어지는 오르막길을
줄줄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 꼬부랑 오르막길에 사람이 없는 사진을 찍는다고 생각해 보면,
그 길은 그저 길일 뿐 그리 아름답지 않았겠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풍경보다 아름답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요.
그렇습니다. 안치환이 그랬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제가 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풍경 속에 있으면 누구나 아름답다. 다시 말씀드리면,
숲은, 자연은 사람 구분없이 누구나 예쁘게 보아준다.
사실 표충사 경내 소나무 숲길을 걷던 여성들도 그렇고
오늘 북한산 자락을 걸었던 100인 원정대에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 속에는 쭉쭉빵빵도 있고 양귀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건 순전히 그 외모만을 보고 판단한 것이지요.
자, 그럼 나태주 시인의 시를 다시 볼까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은 저 시를 외모만 보고 쓴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모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볼 꺼리가 별로 없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할 것은 그 내면인 것이지요.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그 내면을 자세히 보고 오래 보고 있으면 어딘가에는
예쁘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기 마련이라는 거지요.
야생화를 오래 보았을 때의 예쁨은
야생화가 가지고 있는 내면이 우리 눈에 투영되어 예쁜 것이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예쁘다고 하는게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뜬금 없겠지만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에 대해서 한 말씀 드려보고자 합니다.
이 오페라는 모차르트가 ‘로렌조 다 폰테’라는 작가에게
대본을 부탁하여 만든 오페라인데 이 오페라 말고도
모차르트는 로렌조와 합작하여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를 만들었는데
세 오페라 모두 당시 귀족계급을 비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모차르트와 로렌조가 시대적 반골 기질이 강했던 예술가들이지요.
돈 조반니는 17세가 전설적 방탕아 ‘돈 후안’의 바람피는 내용을 그린 오페라 인데요.
그가 얼마나 바람을 피웠는지는 그의 하인인 레포렐로가 정확하게 발설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주인인 돈 조반니가 ‘돈나 엘비라’라는 여인을 차버리자
괴로워하는 돈나 엘비라에게 레포렐로가 자기 주인의 행태를 노래로 부르며 발설합니다.
레포렐로의 노래를 제가 그대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이건 바로 주인님이 사랑한 여인들의 명단이랍니다. 제가 작성했죠. 제가 읽을테니 잘 들어보세요. 이탈리아 여인 640명, 독일 231명, 프랑스 100명, 터키 91명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벌써 1003명이나 된답니다. 1003명이요. 여기엔 시골처녀. 하녀, 도시 여자, 시골 여자, 백작부인, 남작부인, 후작부인, 공주 등 계급도 다양하죠. 온갖 여자가 다 있어요. 외모도 제각각이죠. 모든 여자가 다 있어요. 금발여인에게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마음을 사로잡고, 검은 머리에겐 정숙함을 찬양하며, 은발여인에게 부드러움을 찬양하며, 겨울엔 살찐 여자, 여름엔 마른 여자를 찾고, 몸집 큰 여인은 그 당당함을, 왜소한 여인에겐 애교가 있다고 찬양을 하죠. 나이 많은 여인은 정복하는 이유는 명부를 채우는 재미 때문이고, 진짜 흥미를 가지는 건 숫처녀랍니다. 돈과 외모 등은 따지지 않아요. 못났든 예쁘든 오로지 치마만 둘렀다면 주인님의 표적이 되죠. 주인님의 먹이가 되는 거죠. 치마만 둘렀다면 주인님은 가리지 않아요. 아시겠죠? 우리 주인님은 그런 분입니다. 여자 사냥꾼”
저 노래가 돈 조반니 오페라에서도 유명한 노래인 레포렐노의 ‘카탈로그의 노래’입니다.
제가 세어보니 존 조반니는 무려 도합 2,006명의 여인과 바람을 피우지요.
하루에 한 명씩 바람을 피웠다고 계산하면 근 6년 동안
매일 같이 여자가 바뀌었다는 거죠. 참 지겹지도 않나봐요.
돈 조반니는 결국 벼락을 맞고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막이 내리지요.
사람들은 흔히 존 조반니를 호색한, 방탕아로 치부하며
천하의 바람둥이 취급을 하고 있지만 전 좀 달리 보고 있지요.
저는 그가 바람을 피운 상대 여성들의 면면에 주목합니다.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하녀와 시골처녀, 도시 여자와 시골 여자, 귀족부인과 공주까지
그리고 날씬한 여자와 뚱뚱한 여자, 예쁜 여자와 못난 여자 등등
그는 가리지 않고 수많은 여자와 바람을 피웁니다.
그러니까 그는 여자에 관한 한 완전한 평등주의자라는 거지요.
생각해 보세요.
날씬하고 예쁘고 돈 많은 여자만 좋아하면 그렇지 않은 여자는 도대체 누구한테 사랑을 받는 걸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돈 조반니가 막무가내 치마만 둘렀다고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
뭔가 상대 여자의 내면의 아름다움
즉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야생화를 자세히 보고 오래 보면서
내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을 찾아내듯
돈 조반니도 야생화 같은 상대 여성들에게서 내면 어딘가에 보이는 아름다움
즉 지적인 매력이라든지, 애교스런 행동이랄지, 조곤조곤한 말투랄지,
예쁘게 쓰는 글씨라든지, 남을 생각하는 배려심이랄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갖는 연민이랄지,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비추인다던지
불의를 못 참는 용기랄지 등등 뭐 이란 내면의 아름다움들 중
어느 한 가지가 상대 여인의 저 안쪽에 숨어있는 것을 발견해내고
그걸 사랑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인 거지요.
그래서 어찌보면 돈 조반니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스트가 아닐까
하는 다소 요상하고 깨름찍하고 발칙한 상상을 해보게 되지요.
야생화로 시작해서 풍경을 거쳐 돈 조반니까지 먼 길을 돌아왔네요.
결론은 숲과 자연이 우리를 동등하게 대하듯
우리도 다양한 사람들 각각을
동등한 눈으로 보고 동등한 눈으로 살펴보자' 뭐 이런 개똥 철학인 거지요.
그리고 덤으로 하나 알려드릴게요.
제가요, 그러니깐두루, 보시다시피, 알려졌다시피
짝달막한 크기에 찌질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하는 말인데요.
그래도 내면은 나름 웅대하고 나름 섬세하고 나름 이쁜 구석이 있으니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사랑을 주십사.....
그러면 마구마구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거.....
♂♂♂♂♂♂♂♂ 뭐냐 저거........앗, 진짜 짱돌이닷!
첫댓글 좋은 사진과 글 잘 읽었습니다...많은 사람들과 대열을 지어 걷다보니 허겁지겁 정신이 없는데 그 와중에 다양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 기꺼운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그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ㅎㅎ
돈 조반니 말씀은 일견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ㅋㅋ
그러다가 위대한? 박애주의자까지 올라갈까 걱정입니다...ㅎㅎ
돈 조반니가 무슨 휴머니스트겠어요. 제가 글을 쓰다보니 논조를 그렇게 몰고간 것이지요. ㅋㅋ
세상에는 이천 명이 넘는 여자를 농락한 난봉꾼이 박애주의자가 된 적은 없답니다. ㅎㅎ
긴 글 읽어주시고 코멘트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소요유님!
오늘은
더
쫀득쫀득한 8-2 후기
맛나게 읽었습니다!
멋지십니다! 👍
쫀득쫀득한 후기라 하시니 다행입니다.
혹 찐덕찐덕한 후기라고 할까봐 한 편 걱정했더랬거든요. ㅎㅎ
고맙습니다.
개망초 가을이 되니 더욱
정겹게 다가 오네요 ^^
아카데미2기 尹
나무 이야기를 해 주시던 바로 그 분이시군요.
저 나무 사진을 같이 찍었던 기억이 나네요. 반갑습니다.
좋은 글과 멋지게 찍으신 사진 즐감합니다.
몇몇 사진은 제 앨범에 담아놓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