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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나오카게(直陰), 나오나리(直柔) 출생1836년 1월 3일 일본 시코쿠 도사 번 사망1867년 12월 10일 (31세) 일본 교토 시 사인 암살 별칭 사이다니 우메타로(才谷梅太郞) |
사카모토 료마(일본어: 생애 |
에도 유학◀ 가와다 쇼료 병법사 목록을 받자 료마는 더욱 심도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1853년 에도로 유학했다. 료마는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 지바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에도의 존왕양이론자들과 사귀었으며[5]그 해 말에는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에서 공부했다.[6] 같은 해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내항했고, 무사계급에서는 서양 세력에 대해 개항하려는 막부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1854년 6월 23일 료마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히네노는 료마에게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12개조와 25개조》를 하사했다. 료마가 처음 받았던 병법사 목록은 면허의 초전(初傳)임에 반해, 12개조와 25개조는 면허 중전(中傳)으로서 이는 료마가 에도에서 수련하여 솜씨가 늘었다고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7] 이 해 겨울, 료마는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료(河田小龍)로부터 서양에 대해 배웠다. 료마는 쇼료에게서 외국 배를 구입해 동지를 모아 운송업을 하며 배에 드는 비용을 조달하고 항해 기술을 터득하라는 충고를 들었고, 이는 훗날 료마가 걷게 될 해운의 길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8] 그 다음해인 1855년 12월 4일, 아버지 나오타리가 사망하자 세달 뒤인 1856년 2월 2일, 형 곤페이가 집안의 대를 이었다.[9] 그러곤 료마는 그 해 다시 에도로 가 지바 도장에서 2년간 수련을 하며[5] 1858년 1월에는 료마는 지바 도장에서 스승 지바 사다키치(千葉定吉)에게 《북진일도류 장도 병법목록》(北辰一刀流長刀兵法目録) 1권을 받았고[10], 그 해 9월 검술 수행을 마치고 귀국했다. 도사 근왕당료마는 1861년 9월 경,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이 주도한 도사 근왕당(土佐勤王黨: 도사출신의 하급무사들이 천황을 지키고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모인 모임)의 《도사 근왕당 혈맹자 성명 사본》에 아홉 번째로 서명함으로써 도사 근왕당에 가입했다.[6][11] 그러나 료마는 평소 다케치와 친분이 있었지만 이런 정치적 결집은 몹시 기끼워했으며[11], 다케치가 주장한 일번근왕(一藩勤王)은 따르지 않았다.[6] 가입 직후인 10월 1일, 료마는 히네노 벤지로부터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3개조 목록》(小栗流和兵法三箇條)을 수여받았다. 이는 오구리 류의 면허 개전(皆傳)으로서, 오구리 류의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고 볼 수 있다.[11] 그 후 료마는 검술수행을 하러 마루가메 번(丸龜藩)의 도장에 간다는 명목으로 여행 허가를 얻어 여행을 떠났다. 이러한 여행 도중 료마는 하기(萩藩) 에서 존왕양이파를 대표했던 인물 중 하나인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를 만나 번을 초월한 일본의 통합을 호소하며 대화를 나누었다.[12] 탈번1862년 2월 말, 료마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도사 근왕당은 번의 중신 요시다 도요(吉田東洋)를 암살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13] 하지만 료마는 암살에 가담하지 않고 3월 24일 같은 도사 근왕당 소속인 사와무라 소노조(澤村惣之丞)와 함께 탈번하여 낭인(浪人: 소속이 없는 사무라이)으로서 에도로 향했는데, 당시 탈번은 사형에 처해지는 중죄였다.[6] 료마가 왜 탈번했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이러한 도사 근왕당의 과격한 정세를 싫어한 것이 탈번의 이유중 하나였다.[13] 또 다른 이유는, 요시무라 도라타로(吉村虎太郞)의 설득 때문이었이다. 요시무라와 함께 탈번한 소노조는, 요시무라와 상의한 끝에 이미 탈번한 상황에서 시모노세키(下關)에서 고치로 되돌아가 료마를 데리고 다시 번을 빠져나왔다. 소노조는 더 많은 사람을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다케치가 허락하지 않아 료마만을 데리고 나오게 되었다.[13] 가쓰 가이슈와 고베 해군 훈련소
가쓰 가이슈▶ 료마가 탈번한 해 1862년, 료마는 개화파이자 군함 부교 나미(軍艦奉行並)[주 1] 직책에 있던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고 그의 견식에 감복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된다.[6]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을 배운 료마는 양이에서 개화로 생각이 크게 바뀌며, 번이라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 일본국으로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가쓰는 다음 해 2월 25일, 도사 번 번주였던 야마우치 도요시게(山內豊信)를 만나 료마의 탈번의 죄를 사면받았다.[14] 그 다음해인 1863년, 료마는 가쓰를 도와 고베 해군 훈련소(神戶海軍訓練所) 설립에 힘썼다.[15] 가쓰는 4월 21일 오사카에 도착한 쇼군 이에모치를 모시고 이튿날 효고 방면을 안내한 뒤, 고베에 가서 그곳에 해군 훈련소를 설치하고 싶다고 직접 담판을 하여 허가를 받아내었다.[16] 해군훈련소는 막부의 정식 기관으로서 막부로부터 필요한 경비를 제공받았고 이와 별도로 가쓰는 고베에 사설학교를 세워도 된다는 허가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는 사비로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번창시키기 위해서는 자금이 부족했다.[17] 그러나 막부의 지원만으로는 자금이 부족했기에 료마는 해군 훈련소 설립 자금 조달을 위해 가쓰의 사신으로서 에치젠 국(越前國) 후쿠이 번(福井藩)의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松平春嶽)를 찾아가 천냥을 빌렸다.[18] 료마가 해군 훈련소 설립으로 바쁘던 이 해 4월, 도사 번의 정세가 변하고 다케치 즈이잔이 번의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것에 불만을 품은 도요시게는 다시 실권을 되찾기 위해 요시다 도요 암살의 하수인을 조사하도록 명령하고, 도사 근왕당 숙청에 나섰다. 또한 5월 경, 조슈 번의 존왕양이파가 시모노세키에서 양이를 결행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후 9월 21일, 결국 다케치 즈이잔을 포함한 주요 당원이 투옥되고 2년 뒤인 1865년 윤 5월 11일, 다케치가 할복함으로써 도사 근왕당은 해체된다.[19] 료마는 1863년 10월 료마는 고베 해군 훈련소의 책임자가 되었다.[20] 이 무렵, 야마우치의 도사 근왕당 탄압이 심해지자 료마 등 도사 번 출신들에게 귀국 명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당시 료마는 해군 훈련소 업무 수행에 힘쓰고 있어서 12월 경 가쓰는 손수 탄원서를 써 료마의 귀국 명령을 취소해 달라고 탄원했다. 하지만 가쓰의 탄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료마는 다시 탈번하는 신세가 되었다.[21] 고베 해군 훈련소 기념비
그 다음해 1864년 1월 경, 천황과 조정을 개항 노선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참여회의(參與會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월 경, 프랑스의 군함이 작년 조슈 번의 양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슈의 시모노세키를 공격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자 당시 참여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가쓰에게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가 공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가쓰는 2월 10일 료마를 비롯한 열네 명의 문하생을 이끌고 중재를 위해 출발했다.[22] 그리고 2월 14일, 구마모토(熊本)에 도착하자 가쓰는 료마를 요코이 쇼난(橫井小楠)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료마에게 해군 훈련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쇼난은 해군 문답서를 적어 나가사키에 있던 가쓰에게 보냈고, 다음 해 1865년 가쓰는 다시 료마를 쇼난에게 보내, 쇼난의 조카 두 명을 해군 훈련소에서 교육시키기 위해 데려오게 했다. 해군 문답서에서 쇼난은 총독관에게 해군의 전권을 위임해 막부의 각료가 간섭하지 못하게 하고 신분이 아닌 능력 위주로 지휘자로 선발하게 하도록 하는 등 가쓰의 구상을 뛰어넘는 다소 파격적인 구상을 제시했다.[23] 하지만, 조카를 맡은 뒤 료마와 가쓰가 돌아오자 떠날 때 와의 상황과 딴 판이 되어있었다. 참여회의는 해체되고, 조정과 막부는 양이 노선으로 되돌아가 요코하마 쇄항에 합의하는 등 흐름은 쇄국정책의 노선으로 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참여회의의 연장선에서 구상된 해군 문답서는 한낱 꿈이 되었고, 가쓰의 해군 구상도 그 가치가 하락되어버렸다.[24] ◀나라사키 료 5월 4일, 오사카 수군이 폐지되어 고베 해군 훈련소에 들어가고 5월 14일 고베 해군 훈련소가 발족되었다. 료마가 평생의 동반자 나라자키 료(楢崎龍)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발족과 동시에 가쓰는 군함 부교 나미에서 군함 부교로 승진하여 해군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25] 6월 2일경, 료마는 급한 용무가 있어 교토에서 에도로 떠난다. 그리고 바로 3일 뒤, 신센구미(新選組)가 조슈의 존왕양이파를 습격한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이 발생했다. 에도에 간 료마는 6월 17일 시모다(下田)항에 도착해 가쓰에게 홋카이도 개발에 대한 구상을 털어놓았다.[26] 그러나 이 무렵까지도 료마와 가쓰는 이케다야 사건의 발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26] 한달 뒤 7월 19일 저녁, 교토에서 세력을 잃은 조슈 번의 존왕양이파가 세력 회복을 위해 교토로 병사를 이끌고 진격한 금문의 변(禁門의變)이 발생했다.[27] 이 변은 다음날 새벽 조슈 번의 패배로 끝났고, 조슈 번은 조정의 적으로 낙인이 찍혔다.[28] 가쓰는 20일 조정의 요청을 받고 간코마루 호를 타고 출발했지만 료마는 승선하지 않았다.[29] 료마는 당시 홋카이도를 개발하자고 역설한 뒤 고큐마루 호에 타고 있었다. 그러다가 에도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이케다야 사건에 대해 알게되었다.[30] 그리고 에도로 돌아온 8월 초순, 료마와 료는 곤조지(金倉寺) 본당에서 소박하게 혼례를 올렸다. 또한 이 무렵 가쓰는 료마를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에게 소개해주었다.[31] 사이고와 료마가 대면한 날을 전후해 가쓰는 로주(老中) 아베 마사토(阿部正外)를 여러번 만났다. 아베는 교토 조정에 양이가 불가능하다고 뚜렷하게 말한 최초의 로주였다.[32] 기존의 로주들이 실현 불가능한 양이를 약속하는데 진저리가 났던 가쓰는 아베를 높이 평가해 사이고 등에게도 추천하여 사쓰마 번과 에치젠 번도 교토에서 아베와 접촉했다. 이들 앞에서 막부는 강력한 번들과 연합하여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 가쓰를 막부 독채를 관철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진 아베는 크게 반대하였고, 가쓰는 이 일을 계기로 에도로 소환되어 11월 10일, 군함 부교직을 파면당했다. 이로 인해 가쓰는 더이상 해군 훈련소를 이끌어 나갈 수 없게되어 얼마 뒤 문을 닫게되었다.[33] 그리고 료마 일행은 사쓰마 번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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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메야마 조합가메야마 조합▶ 이후 가쓰가 물러나고 훈련소가 문을 닫자, 료마는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고 가메야마 조합(龜山社中)이라는 무역회사를 세웠다. 이 조합은 상업활동 등에 종사하는 현대의 기업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회사였다.[35] 가메야마 조합은 당시 상인들이 모여있던 고조네 이시로(小曾根英四郞)의 집을 근거지로, 시모노세키의 이토 스케다유(伊藤助太夫)의 집과 교토의 식초가게에 사무실을 설치했다. 조슈 번은 1864년 12월에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가 군사를 일으켜 온건파의 정권을 장악해 다시 존왕양이파가 정권을 차지하고 있었다.(고잔지 거병(功山寺擧兵)) 가메야마 조합의 목적은 상업 활동의 이익으로 이윤을 얻는 것 이외에, 당시 물과 불처럼 사이가 나빴던 사쓰마와 조슈 양 번의 화해 도모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후에 삿초 동맹(薩長同盟)의 성립에 기여하게 된다. 막부 세력으로부터 한 차례 타격을 받은 조슈 번은 그들을 교토 정치로부터 몰아낸 중심 세력에 있던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에 뿌리깊은 반감을 갖게 되었고, 일부 번사(藩士)들은 이들과는 하늘아래 함께 살 수 없다고 맹세하며 '살적회간'(薩賊會奸) ('사쓰마는 적이고 회통하는 자는 간사한 자이다') 라는 네 글자를 나막신 바닥에 써놓고 짓밟으며 울분을 토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도사 번의 탈번 지사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그의 동지 히지가타 히사모토(土方久元)는 사쓰마와 조슈 같은 세력이 강대한 번의 동맹을 촉구해, 이를 통해 무력 막부의 토벌을 바라고 있었다.
◀나카오카 신타로 료마는 히젠(肥前)의 오무라 번(大村藩) 지사인 와타나베 노부로(渡邊昇)를 만나, 삿초 동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와타나베는 원래 연병관(練兵館)의 우두머리로, 조슈 번의 중신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등과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료마는 와타나베에게 조슈 번에 로비를 의뢰했다. 와타나베는 이 일을 맡아 조슈 번에 가서 삿초 동맹의 필요성을 알리고, 나가사키(長崎)에서 다카요시와 료마의 만남을 주선했다. 1865년 5월, 먼저 히지가타와 료마가 협동해 다카요시를 설득하고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의 회담을 승낙시킨 동시에, 나카오카는 사쓰마로 향해 사이고에게 회담을 승낙시키도록 했다. 같은 해 윤 5월21일, 료마와 다카요시는 시모노세키에서 사이고가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나카오카는 어선을 타고 사이고와 함께 다카요시를 만나러 오고있었다.[36] 사이고는 시모노세키를 향하고 있었지만, 도중에 조정의 의견이 막부의 조슈의 재정벌로 기우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급히 교토로 향해버렸다. 다카요시는 격분했고 화해의 진전은 불가능 해 보였지만, 료마와 나카오카는 사쓰마와 조슈의 화해를 포기하지 않았다. 막부 타도의 선봉장에 있던 조슈 번에 대해, 막부는 외국 세력에 조슈 번과의 무기나 탄약 류의 거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자, 조슈 번은 근대 무기의 도입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한편, 사쓰마 번은 군량미의 조달을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서 료마는 사쓰마 번의 명의로 무기를 조달해 은밀히 조슈 번에 되팔고, 그 대신에 조슈로부터 사쓰마 번에 부족하던 쌀을 공급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거래의 실행과 화물의 운송은 가메야마 조합이 담당했다. 이 계책에 의해 양 번의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해결되었고, 양 번 모두 자연히 수긍했다. 이것이 가메야마 조합의 첫 실적이 되어, 당시 외국인이 많이 모이던 나가사키에서 외국인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료마는 영어와 네덜란드어 공부를 시작했다.[37] 그리고 8월엔 나가사키의 그레이버 상회(일본어: 9월에는 조슈 재 정벌의 칙령에 대해 사쓰마 번은 따르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긴, '의롭지 않은 칙령은 칙령이 아니다'(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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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초 동맹
데라다야 사건이 일어났던 데라다야 여관
도막의 중심은 사쓰마 번(가고시마 현)과 조슈 번(야마구치 현)이었다. 사쓰마 번은 조정과 손을 잡아 막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중도파였음에 반해, 조슈 번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급진파로서 두 번은 대립하며 사이가 매우 나빴다.[41] 료마는 동향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두 번을 중재하여 1866년 삿초 동맹(사쓰마와 조슈 동맹)을 결성하는 데 공헌했다.[42][43] 삿초 동맹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 료마를 포함한 지사들이 모여있던 데라다야 여관에서 료마 일행을 암살하려는 사건(데라다야 사건)이 발생한다.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삿초 동맹에 위협을 느낀 막부의 소행이라는 설[4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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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엔타이 ◀가이엔타이의 깃발, 니비기(二曳) 1867년 4월, 료마는 2번째 탈번했던 죄를 용서받고 가메야마 조합의 대장이 되어 도사 번 부속 외곽기관으로써 가메야마 조합의 이름을 가이엔타이(海援隊)로 개칭한다. 가이엔타이 창립 후, 료마는 이로하마루(한자: 以呂波丸, 일본어: 대정봉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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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중팔책과 대정봉환1867년 교토로 가는 배에서 료마는 대정봉환 등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입안했다.[42][43] (이 선중팔책은 훗날 신정부강령팔책(新政府綱領八策) 이라는 메이지 정부의 기본 이념이 된다.) 대정봉환의 구상은 료마가 속했던 도사 번의 번주인 야마우치 도요시게가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게 건의하여 채택되었다. 이후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실제로 대정봉환이 이뤄졌고, 정권은 막부에서 천황 중심의 조정으로 평화적으로 넘어갔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봉건시대를 종식하고 메이지 유신을 통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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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대정봉환 한달 후 료마는 나카오카와 함께 교토에 머물다가 음력 11월 15일인 여관 오미야에서 습격을 받고 피살됐다.(오미야 사건)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막부측 미마와리구미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신센구미, 아군인 사쓰마 번 음모설 등 여러 설이 있다. 료마는 머리에 상처를 입었고 천천히 죽어갔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당시 같이 습격당했던 나카오카가 중태인 가운데서도 3일간 생존했기 때문에 그에 의해 소상히 전해 질 수 있었다.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다이쇼 시대가 된 전 미마와리구미 대사였던 이마이 노부오, 와타나베 아쓰시의 구술로, 사사키 다다사부로 등이 실행범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가쓰 가이슈는 막부 상층부의 지시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미마와리구미 설이 통설이 되었으며, 여기에 의문을 나타내는 역사학자는 없다. 하지만, 이마이나 와타나베의 구술에 어긋나는 부분(자객의 인원 구성, 현장에 두고 간 칼집의 소유자 등)이 있어서, 주로 작가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이설이 나오는 상황이다.[45] 또한 현장에 달려가서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병한 다니 다테키는 교토 미마와리구미 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이마이 노부오는 증언 당시에는 자신이 망보기 역할이었을 뿐이라고 했으나, 장년~노년에 이르러서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료마를 죽였다고 말하며 그때 썼다는 무기(칼,창)를 보여주며 당시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와타나베 아쓰시는 젊었을 적 이름이 이치로 였다고도 하고 실제 료마를 암살한 미마와리구미의 와타나베 이치로와는 다른 인물이라고도 한다. 그가 료마 암살에 대해 증언한 것은 거의 죽기 직전에 할 말이 있다며 가족들을 모았을 때라고 한다. 평소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던 노인이 가족들을 불러서 한 얘기는 자신이 바로 료마 암살의 진범이라는 얘기였다. 이는 당시 신문에 기사로까지 나오며 유명해졌다. 그러나 고령의 나이로 인한 것인지 그의 얘기는 군데군데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사건의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세부적인 내용이 전무,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한다. 당시는 료마 암살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사건의 진상 또한 어느 정도는 밝혀졌기 때문에 일반인이 전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유일한 증언자인 이마이 노부오 등도 죽어 더이상 사건에 대해 진술할 만한 미마와리구미 대원도 없었다. 즉, 이 와타나베 아쓰시는 실제 실행범이 아니며 단지 ' 료마를 죽인 자 '라는 자신의 이름을 팔기 위해 연극을 했다는 설도 있다. 신센구미 설료마 암살 당시 현장에 남아있던 칼집 등의 물증이나, 3일후에 암살된 이토 가시타로의 동지(고료에시(御陵衛士))등의 증언에서 신센구미의 하라다 사노스케에 의해서라고 믿어졌지만, 베인 상처로 보면 왼손잡이에 의해서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을 채용하면 왼손잡이에다가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의 달인인 료마를 살해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인물, 사이토 하지메라는 설도 있다.(사이토의 신센구미 복귀 시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중에서는 고료에시(高臺寺黨)로써의 사이토 설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이토가 왼손잡이라는 설 자체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설정이며, 그가 실제 왼손잡이였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다.) 사건 후, 11월 26일에 막부에서 조사를 받은 신센구미 국장 곤도 이사미는 진술에서 ' 우리는 프로다. 만약 우리가 했다면 나카오카씨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실제로 같이 참변을 당했던 나카오카 신타로는 이틀 정도 더 생존해 사건을 증언함)' 라며 관여 된 것을 부정하였다. 곤도와 같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은 오이시 쿠와지로도 이 사건만큼은 부정했다. 그는 이토 가시타로를 암살한, 신센구미 내에서도 손꼽는 검객이었다. 료마가 속해있던 토사번 지사들이 신센구미 설을 확신에 가깝게 믿고 있었던 당시에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이시에게 무수한 고문을 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오이시가 억지로 인정을 한 적이 있지만 이내 부정하면서 ' 사건 이후 곤도 국장이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와타나베가 료마씨를 해치운 것은 회자될 만한 일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을 들었을 뿐 ' 이라며 일축했다. 곤도와 오이시 둘다 료마 암살 혐의 때문에 참수되었지만 이는 토사번 지사들의 복수심에 가까운 맹렬한 주장에 의한 것으로 실질적인 증거 없이 억지로 몰아 붙인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료마는 지금과 같은 인지도는 없었지만 이름난 지사였다. 따라서 막부 순찰대가 그를 해치운 것은 큰 공로이므로 자랑을 하면 했지 숨길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센구미는 암살 당시 부터 한결 같이 혐의를 부정했다. 현재는, 신센구미 설을 지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다. 사쓰마 번 음모설대정봉환 이후, 료마는 막부에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지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포함한 제후 회의에 의한 신정부 설립에 기울였다고한다. 무력 도막을 지지했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등이, 이런 료마의 움직임을 간과할 수 없었고, 고의로 막부측에 료마의 소재지를 누설했다는 설. 요시노부의 처우를 둘러싸고, 사이고와 료마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는 것은 확실하다. 무력 도막파에 의한 대정봉환파의 암살설은, 사사키 다몬의 서한이나 오우미야 종업원들의 증언 등의 자료를 근거로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대정봉환 노선과 무력 도막노선의 대립을 필요 이상으로 너무 강조되었으며, 양자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선은 아니었다는 학설[46]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점이 최대 문제로, 그 점에서 근거가 약하다. 이 설에는 일부 열광적인 지지자기 때문에[47]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상대하지 않는 실정[4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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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료마의 가계도
관련 작품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
그 이외의 작품
무대
또 다른 자료..
아래 글은 학민사에서 출판된 <황당한 일본>에서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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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11월, 시코쿠 토사번(지금의 고오치현)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친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상당한 재산을 모은 부친은 향사(토착 농민으로 무사 대우를 받는 자)의 권리를 사서 겨우 말단 사무라이 축에 끼게 되었다.
료마는 어렸을 때 울보니 오줌싸개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당하자 칼을 빼어드는 소동을 일어켜 쥬쿠(초등 교육기관)에 갈 수 없게 되어 누나가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이나 지식보다는 검도에 집중하였다.
료마는 19세 되던 해인 1853년, 처음으로 에도에 나와 치바 사다키치의 문하생이 되어 북진일도류를 수련했다. 그래서 흔히 검술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기록을 살펴보면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도 칼 싸움을 한 횟수가 별로 없고 또 이겼다는 기록도 거의 없다. 1857년 에도에 있는 토사번 저택에서의 검술시합에서 무명의 시마다 고마노스케를 이긴 것이 유일한 승전 기록이다.
교토 후시미 데라다야에서 부교쇼(에도 시대의 행정관청) 포졸들에게 쫓길 때에도 칼을 차고 있으면서도 권총으로 쏘기만 하다 손가락을 다쳐 도망치기도 하고, 1867년 교토의 오미애에서 암살될 때에도, 비록 기습을 당하기는 했지만 상대방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도 못하고 자신은 중상을 입어 죽고만 것을 보면 그의 검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토사번의 하급무사 다케치 즈이산은 이런 료마를 가리켜 "대 허풍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제대로 본 것이다. 다만 이러한 료마의 성격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쓸모가 있을 것으로 본 것이다.
료마 역시 다른 유신지사들처럼 여자 문제에서는 뒤떨어지지 않았다. 나가사키에서는 주로 마루야마의 화월루 등의 게이샤를 일종의 현지처로 삼아 상대하였다.
그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여자가 있는데, 오료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야쿠자의 멱살을 잡고 싸우기도 할 정도로 성질이 거친 여성인데, 료마는 그녀를 교토 후시미 데라다야에 맡겨놓고 왔다 갔다하면서 성욕의 배출구로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정식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는 료마가 암살당하자, 이 남자 저남자와 섭렵하다 마지막에는 어느 행상인과 붙어다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 밖에도 료마에게는 검도 스승 치바 사다키치의 장녀인 사나와 토사근왕당 시절의 동료의 여동생인 히라이 가오 등 사랑스러운 여인이 많이 있었다.
1867년 4월, 료마와 가이엔타이(료마가 나가사키에 설립한 무역회사)가 오오즈번(지금의 시코쿠 에히메현)으로부터 보름 동안의 사용료 500냥을 지불하고 빌린 160톤 짜리 작은 기선 이로하마루가 오사카 방면으로 항해중 세토나이카이에서 짙은 안개로 기슈(도쿠가와 3대 가문의 하나)의 887톤 선박 메이코마루와 충돌하여 침몰하였다.
료마가 기슈번이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토사와 초슈번이 연합하여 공격을 한다고 협박을 하자, 보수적인 기슈번은 체면 때문에 조용히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배상에 응했다. 배상금은 당초 8만 3천냥으로 합의했으나, 이로하마루도 현등을 달지 않은 잘못을 참작해서 7만냥으로 결정되었다.
료마는 7만냥 중 절반 정도를 오오즈번에 갚고, 나머지 금액 중 1만 5천 340냥을 가이엔타이에 주었다.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오늘날의 자해공갈단이나 보험사기단의 수법과 비슷하지 않은가? 또한 1만 5천냥은 료마와 대원들이 나눠 나가사키의 마루야마에서 창녀들과 질펀하게 노는데 사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료마가 같은 해 11월 교토의 오미야에서 암살되자, 아마 일전의 이로하마루 사건의 원한으로 기슈번의 자객에게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16명의 대원이 기슈번 숙소인 텐마야로 쳐들어가 4명 사망, 4명 중경상의 참사로 이어졌다. 결국 자기들이 기슈번에 대해 공갈과 협박을 했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