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의 “중년 (The Middle Years)”을 보는 두 관점
조민아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소설가 덴콤은 영국의 해변 도시 본머스에서 회복 중이다. 그는 물가 근처에 앉아 자신의 최근작인 <중년>을 읽고 있다 (혹은 수정하고 있다). 젊은 의사인 휴가 덴콤에게 다가와 소설에 대한 감탄을 표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 책의 저자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휴와 시간을 보내다 기력이 약해진 덴콤은 갑자기 의식을 잃는다. 깨어남과 동시에 덴콤은, 휴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았으며 또한 그가 “백작부인”으로 언급되는 부유한 여성을 돌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후 며칠 동안 휴는 백작부인보다 덴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이에 대해 백작부인의 동반자인 미스 버넘으로부터 경고를 받는다. 며칠 후, 덴콤의 병은 재발한다. 휴는 덴콤에게 백작부인이 사망했으며 유언장에 그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기력이 쇠한 덴콤은 휴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다양한 관점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 예술가의 죽음과 예술
“예술은 그에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다른 모든 것보다 뒤에 왔다. 이런 속도라면 첫번째 존재는 너무 짧다. 필요한 소재를 수집할 정도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 소재를 활용하기 위하여 예술가는 두 번째 시대, 즉 삶의 확장이 필요하다.”
중년의 시간이란 반드시 나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예술적 역량이 정오에 이른 시간은 예술가에게 가장 어려운 시간일 것이다. 불안과 불확정성의 새벽을 지나, 신념과 열정으로 열어가는 아침을 지나, 마침내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밝히는 정오의 시간이 왔다. 정오는 그러나 운명을 가른다. 또 한번의 “시대’를 만나 다른 예술적 경지로 확장하거나 - 아예 다른 존재로 변신(metamorphosis)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아니면 정오의 시간에 붙박이 된 채 추앙 받다 잊혀지던가. 예술가인 이상, 자신이 과거에 만들어 놓은 파사드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안전하다 해도 말이다. 만약 그러길 원한다면 그는 더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창조할 때만 예술가이다. 끊임없는 생성과 자기 부정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예술가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저주다.
덴콤의 불안은 곧 제임스의 불안이었을까? 대표작 중 하나인 <데이지 밀러>를 발표하고 논란의 중심에 올랐던 것이 1878년이다. 이후 1879년 <An international episode>와 1881년 <귀부인의 포상>이 연이어 성공하고 대표작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아마도 제임스가 “또한 번의 시대”가 되기를 기대했을 실험, 1889년 희극 저술은 실패로 끝난다. 회의와 실망, 그러나 아직은 무언가 할 수 있고 해 보아야 한다는 불안과 강박이 있었을 것이다. 제임스와 덴콤이 겹친다. 정오에 붙박일 운명에 처한 두 예술가.
덴콤은 그의 생명이 빠르게 다해가고 있음을 안다. 휴의 위로는 그에게 위안을 주지만, 그는 인생이 '두 번째 시대'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술가의 “업적”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가질 수 있었던 한 번의 기회로 창조한 “작품들의 합”에 머물지도 모른다. 죽음에 가까운 덴콤은 휴에게 속삭인다. “시련을 당하고, 우리의 자그마한 능력을 발휘하고, 우리의 작은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어서 말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습니다. 우리의 의심은 우리의 열정이고, 우리의 열정은 우리의 직무입니다. 그 나머지는 예술의 광기입니다.” 그렇게 덴콤은 자신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기회에 실제적 종말을 고한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예술일까, 예술가일까? 덴콤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했다기보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예술의 광기에 자신의 에이전시를 넘긴 것이 아닐까?
2) 사랑의 서사 코드
헨리 제임스가 Closeted gay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 등을 공개하지 않은 성소수자)였다는 것은 미국에서는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이 소설은 사랑(호모에로티시즘)을 암시 이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덴콤은 아내와 아이가 사망한 노년의 독신 남성이자 작가이며, 휴는 젊고 매력적이며 사려 깊고 예민한 팬이다. 둘 다 여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젊은 남자는 나이든 남자의 글 (지혜-플라토닉)에 “매혹된다.” 남자는 남자를 “몰래 쳐다본다.” 남자에게 남자는 “선망의 대상”이 되며, “신념을 흔든다.” 그들의 첫 만남의 결과는 한쪽이 기절 (“격렬한 감정, 흥분, 피로, 뜨거운 태양”)하고 정신을 잃는 것이었다.
덴콤은 휴를 대상으로 끊임 없이 “달콤한 공상”을 즐긴다.“[휴]가 아니라면 누가 그를 위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삶의 희망과 열정을 잃어버린 덴콤에게 휴는 “하나의 유령”이었고, 덴콤은 휴를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는 곳에다 위치시켰다.” 쇠약해진 그는 휴와 함께 있을 때 “날개로 가볍게 솟아 오르면서 조직적인 구조 (an organized rescue)라는 행복한 관념”에 사로잡힌다.
젊은 남자는 빛이 바래어 가는 나이든 남자를 구원했을까? 휴는 덴콤에게 끊임 없이 “늙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를 향한 감정 때문에 자신을 희생한다. “전 선생님 때문에 그녀를 포기했습니다. 전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이 선언을 들은 덴콤의 감정을 묘사하는 글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강렬한 빛처럼 어떤 확신을 얻고 그는 휴를 가까이 다가오게 한 후, “당신은 나로 하여금 모두 망상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라며,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휴가 덴콤에게 말한다. “선생님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셨습니다!” 그 말은 “결혼식 종소리 같은 강조된 억양이 있었다.”
소설의 끝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덴콤, 아니 제임스의 마지막 깨달음을 성취되지 못한 욕망의 암호화로 볼 수 있을까? 그는 사랑이 구원이기를 바랐으나, 그 구원이 그에게 “두번째 시대”를 열어 주기를 바랐으나, 결국 그 사랑이 다가온 순간 자신이 받아 들일 수 없음을 깨닫고 모든 것이 망상이었다고 결론 지은 걸까? “자신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기회에 실제적 종말을 고했다”의 기회는 예술가로서의 기회일까, 사랑의 기회일까?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덴콤은 예술의 광기에 자신을 맡길 수 있을까? 아니, 사랑이든 예술이든 성취되지 않은 욕망이 곧 광기일까?
첫댓글 조민아님의 발제문 대신 올렸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