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에 관한 시모음
연꽃 /오세영
불이 물 속에서도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은
연꽃을 보면 안다
물로 타오르는 불은 차가운 불,
불은 순간으로 살지만
물은 영원을 산다
사랑의 길이 어두워
누군가 육신을 태워
불 밝히는 자 있거든
한 송이 연꽃을 보여 주어라
닳아오르는
육신과 육신이 저지르는
불이 아니라
싸늘한 눈빛과 눈빛이 밝히는
연꽃 에밀레 / 손택수
연꽃 잎위에 비가 내려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직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하나를 삼키고 나선 단 한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니다.
연꽃에 관한 관념 / 이화은
진흙 판에서
살아남으려면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서는
안된다 스스로
거울진 물 그림자를
뉘 가르침으로 이렇게
말문마다 조용한지
내 가슴만 열어 놓고
입 잠근 사람을 닮았네
한 송이 수련으로 / 이해인
내가 꿈을 긷는
당신의 못 속에
하얗게 떠다니는
한 송이 수련으로
살게 하소서
겹겹이 쌓인 평생의 그리움
물위에 풀어 놓고
그대로 목말라
물을 마시는 하루
도도한 사랑의 불길조차
담담히 다스리며 떠다니는
당신의 꽃으로 살게 하소서
連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 정 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이었다 / 신석정
그 사람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이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 하나 있다
눈빛 맑아,
호수처럼 푸르고 고요해서
그 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침나절 연잎 위,
이슬방울 굵게 맺혔다가
물 위로 굴러 떨어지듯, 나는
때때로 자맥질하거나
수시로 부서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삶의 궤도는, 억겁을 돌아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수없이. 수도 없이
그저 그런, 내가
그 깊고도 깊은 물 속을
얼만큼 더 바라볼 수 있을런지
그 생각만으로도 아리다
그 하나만으로도 아프다
(신석정·시인, 1907-1972)
연꽃 에밀레 / 손택수
연꽃잎 위에 비가 내려 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찍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선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러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꾹 참은 아픔이 수면 위로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연꽃 / 박제천
연꽃 보러 간 연꽃늪에 연꽃은 보이지 않고
우산만한 연잎에 모여든 빗방울들만
비에 젖은 나를 기다리네
어떤 빗방울은 제 몸 속에 피보다 붉은 연꽃을 피워내고
어떤 빗방울은 아직 피워내지 않은 꽃줄기마다
가시를 번쩍이고 있네
어떤 빗방울은 바람에 날리는 꽃술마다 눈을 달아서
늪 가득히 띄운 채
연꽃 보러 온 사람들 하나하나를 지켜보느니
연꽃 보러 간 연꽃늪에서
보지도 못한 연꽃 속 연실처럼 자라나는
내 얼굴, 내 마음 속 죄만 들키고 말았네.
군데군데 입을 벌린 구멍 사이로 드러난
땅속 진흙처럼 어지러운
내 마음의 진창을 들키고 말았네
가시연 / 조용미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
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 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찍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
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그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가시연꽃 / 이동순
온몸을 물 속에 감추고
눈만 빠끔히 올려 세상을 엿보는 개구리가
그는 정말 싫었던 것이다
다른 저수지의 연꽃들처럼 화사한 분홍 연등을
한번도 달아보지 못하고
이 쓸쓸한 곳에서
그냥 묵묵히
묵묵히 참고 지내왔는데도
거친 비바람은 사정없이 짓밟고 갔던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그저 노엽고 싫게만 보이던 어느 날
슬금슬금 가려워진 등짝에서는
뾰족가시가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못난 등짝에
하얀 백로들이 서서 깃을 다듬거나 졸고 있는 것이
마냥 좋았다
그러다 가을이 되자
아득한 물위에 가시만 남겨두고
넓은 잎은 덧없이 녹아
물 속에 가라앉고 마는 것이었다
운암지 수련잎은 초록 접시 / 이해리
아직 덜 헹군 접시들이 와그르르
물 속에 담겨 있다
식기세척기도 없는 부엌
저 접시 다 설겆고 출근하면 지각일테고
놔 두고 나가면 불량 며느리 낙인 찍히겠다
밤낮이 뒤바뀐 아이는 밤새 보채고
출산휴가 동안 내 몫까지 일 한 직장 선배는
인상이 좋지 않다
오, 내 생의 억압인 부엌이여, 접시여
그저 착하게만 키웠으니 어여쁘게 봐 주시고...
친정 어머니 날 시집이란 연못에 뿌려놓고 가신 뒤로
너무 많은 접시가 날 물 속에 빠뜨렸지
수련잎처럼 浮葉性인 주부라는 이름
내 삶 위에 떠서 심연을 가렸지
내게도 필 수 있는 꽃이 있다고
수련 봉오리 붓을 들고 허공에다 써 보지만
너는 아줌마잖아 아줌마잖아
햇볕도 바람도 조절 안되는 물이
내 꿈을 내리 누른다
쉽게 폄하되는 억울한 이름 아줌마
잠이 모자란 꿈 아무데서나 졸다 깨어보니
아직도 못 헹군 접시 위에
몇 방울 식구들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