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교회 120년 역사, 교훈과 선교전망>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노 종 해(CM리서치)
서울 마포서강지역은 초기 한국 기독교가 전래될 때 활발한 서민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전국 물산의 집산지이며, 민족의식이 투철한 서강양반 하급 관리들과 양반상인, 서민들, 경강상인들의 중심지였다. 또한 서울 도성으로 드나드는 관문으로 신문화의 접촉 지였고, 격변하는 근대사의 역사적 현장이며 증인이었다. 고려시대부터 관리들의 녹봉 곡물을 보관하는 관청과 광흥창 창고와 공민왕사당 등이 있는 역사적인 지역 명소이다. 이러한 서강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고 신앙공동체가 형성 된 곳이 서강교회 역사의 현장이다.
서강지역 최초 방문하고 기도한 선교사는 1884년7월, 맥클레이 선교사 이며, 첫 한국 선교개척의 선구자는 1885년 헨리 H. 아펜젤러, Dr 윌리암 스크랜튼 목사,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였다. 이들은 정동에 선교본부를 두고, 1885년 가을에는 한국 최초 교회와 병원, 학교와 서점, 서민 도서실을 설립하였다.
서울지역 교회형성은 1885년부터 정동제일교회에 이어서, 동대문, 종로, 상동의 교회와 병원, 학교 등에 드나드는 주민들에 의해서이며, 1890년부터 복음전도는 의료선교와 교육선교와 병행하여 서울 성곽 밖으로 확산 되었다. 마포서강지역민들은 주로 정동교회와 상동교회, 병원과 학교들을 서대문 밖에서 드나들던 분들이었고, 서강교회 역사는 토착인 주민들이 신앙공동체를 형성시켜 간 역사의 현장이다.
서강교회가 창립 된 1902년은, 첫 한국선교사 헨리.H. 아펜젤러의 순직의 충격으로, 한국선교 확장과 교회개척 부흥의 계기가 된 해이며, 첫 한국인 목사 3명이 배출 된 해이기도하다. 한국교회는 아펜젤러의 숭고한 희생정신, 투철한 복음전도자의 삶을 기억하며 복음전도운동을 일으켰고, 전국으로 교회와 학교를 개척하는 전도운동으로 이어졌다.
첫 서강교회 개척자는 본처전도인 사역자들이다. 감리교회의 제도에서 본처사역자는 “권사“로 구역장의 임명으로 구역 내 예배처(교회)로 파송 받은 평신도 전도인이다. 오늘날 ”장로”와 같다. 정동교회 구역장은 최병헌 목사이고, 구역장의 파송 받은 서강교회의 첫 권사는, 평신도 전도인 정호석, 방진국, 이쭐레 등이며, 서강의법학교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서강교회의 창립 첫 담임은 최병헌 목사(구역장)이고, 실제로 첫 전도인들은 권사로 정호석, 방진국, 이쭐레 등이며, 이들은 강 건너 편 염창에 교회와 학교를 개척 설립(1905년)한 전도인들이기도하다.
서강교회 개척 전도특징은 남녀의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남성은 1880년 대 선교초기부터 정동교회에 출석하며, 1890년대에 독립협회, 엡웟청년회 등을 통해 자주독립과 교육, 청년운동에 참여한 이들이었다.
서강교회에 대한 최초 선교보고서는, 1902년 제18회 연회에서 서원보(Willbur C. Swearer) 선교사의 보고에서 이다. 즉, “규칙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강에서 10리 거리인 동막으로 내려가 부인집회를 지도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동막(東幕)은 한글로 “독막”이며 "독 굽는 곳"이란 뜻이다. 오늘날 서강교회 주소는 독막길이며, 창전동이다. 창전동은 광흥창 창고 앞이란 말이다.
1902년 선교보고에 의하면 서강지역 신앙공동체를 “영광의 집회처”(Spiritual Light Hous,靈光集會處)이라했고, 위치는 “사지감재"로 “새텃말”(상수동)과 “농바우”(하수동) 사이의 고개 마을이었다.
1902년 선교보고서에 의하면, 서강교회 여성전도에 착수한 이는 이쭐레 전도부인(Bible Woman) 이다. 이쭐레는 1900년부터 상동교회 전도부인으로 스크랜튼의 전도부인양성학교(傳道婦人養性學院)를 다녔으며, 자신의 거주지인 서강지역에 1902년부터 여성성경공부반이 설립하였고, 규칙적인 주일예배를 드렸다. 서강지역의 선교적 특징은 남성, 여성들에 의해 성경공부 모임이 구체화되고 규칙적인 주일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개척설립 되었다는 점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이 넘어간 때, 친일 감독인 해리스는 1897년에 설립 된 “엡웟(의법,懿法)청년회”를 폐지 시켰고, 최병헌 목사는 정동의법회의 “의법학교”와 “몽양원”(1904년)을, 서강교회로 이전 시켜 “서강의법학교(西江懿法學校)”로 개교(1905년)하였다. 운영에 어려움에 처한 서강 우산학교(1902년 설립. 창전동)를 1907년에 인수하여 서강의법학교는 확장 발전하였다.
또한 이화학당 부속으로 서강여학교(西江女學校)를 붉은 벽동 2층 건물을 건축하고 설립(1907년)하여, 서강에는 남녀학교가 설립 된 유력한 지역이 되었다. 서강교회 선교의 특징은 교육선교이며, 지역사회와 함께 구국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펼쳐 나갔다.
19011년에는 서강교회를 창전동에 신축 봉헌(1912년)하고 이전하였으며, 감리교 유지재단에 등록했고.(5.25.) 교회와 학교는 창전동에 자리하게 되었으며, 재단에 등록 일, 5월25일을 교회 창립일로 오늘날까지 지키오고 있다.
1919년3.1독립만세운동 때 서강교회는 주동이 되어 학생들, 지역 주민들과 함께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정호석 권사는 왼손 무명지를 깨물어 붉은 출혈을 접시에 받아 태극기를 그리고, 죽봉에 매어 자택을 나서서 조선독립시위 운동의 기세를 크게 울려 인민을 선동”하고 나가, 서소문에서 체포 되어 1년2개월 복역하였다.(상해 “독립“(獨立) 신문 보도)
강준표 유사는 독립선언서를 교회에서 등사하여 배포하고, 교인들과 기도회를 열고, “마부끝”(홍익대 자리)에 집결하여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 들고 나갔고, 와우산에 모여 기도와 찬송 후 횃불을 들고 시위하다 검거 되었다. 서강교회는 주일 낮 예배 외 집회금지 되었으며, 교회 지도자들이 투옥 되어, 간절한 기도와 목메인 찬송만 불렀다.
이계창 권사(서강여학교 교사)는 독립선언서를 평북 선천에 배포하는 사명을 수행하여, 평북지역 3.1운동을 일으키게 하다 검거 되어 1년2개월의 징역을 선교 받고 복역하였다.
서강교회는 3.1운동으로, 민족의 고난과 극심한 시련 속에서 더욱 체험적 십자가의 신앙으로 돈독해졌으며, 그리스도의 위로와 은혜로 사랑이 깊어져 교회는 더욱 부흥을 이루었다. 서강교회의 선교적 특징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 하는 체험적 십자가의 신앙이다.
선교사 철수로 서강여학교는 페쇄 되고, 서강의법학교는 “경성의법학교”로 개명 되어 남녀학교로 통합 되었다가(1940년) 지역유지에게 매각 되었고(1944년), 8.15해방 후 학생들만은 “서강초등학교”로 전학되었다.
결국 일제강압으로, 1944년에 서강교회와 학교는 감리교 교단정책에 의해 매각 폐지되었고, 매각금은 전쟁 비행기 기금으로 헌납 되었으며, 교인들은 이웃 교회로 합병 되었다.
8.15 해방 직 후 흩어졌던 성도들이 다시 모여들어 가정교회를 이루었으며, 와우산(臥牛山) 중턱에
교회 부지를 확보하고 교회건축을 준비하는 중. 6.25동란으로 중지 되었다. 전후 교회 건축을 재개하여 천막교회를 세웠으며(1952년), 이어 붉은 벽돌 40평 교회를 건축을 준공하고(1954년), 감격 속에 봉헌하였다.(1955년4월1일)
서강교회는 1970년대 한강개발로 지역과 함께 부흥 성장하였으며, 1980년에 건평 540평 대지 위에 360평 2층 교회를 제4차 건축 기공(1980.5.)하고, 이듬해 봉헌하여(1981.10.25.), 여의도 국회와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며 민족과 세계를 향해 120주년 오늘까지 꿋꿋이 복음의 증인으로 서있다.
성경말씀에,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 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어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4:26~29) 말씀하셨다.
서강교회(담임:임태일 목사) 120년 역사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임을 믿고(고전3:7), 서두르지 말고, 자기 때에 충실하며, 굽힘없이 믿음에 굳게 서서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고, 마지막 시대 세계선교의 사명을 향해 나가야할 것을 가르쳐 준다.(rch:2022.4.17.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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