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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
들어가며
불교와 화학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차원에서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현대 화학을 불교를 통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주의해야 함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화학은 물리적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원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개창하고, 그를 활용하여 현상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순수 자연과학이다. 반면, 불교는 기본적인 마음챙김(sati)과 수행을 통하여 괴로움(dukkha)의 원인을 이해하여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를 넘어서 보편적 중생을 구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불교는 일차적으로 인간 중심의 철학이지 자연과학이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화학적 현상 그 자체를 단순히 불교의 관점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아님을 밝히며, 그러한 태도는 큰 논리적 비약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먼저 강조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화학이라는 자연과학 분야의 특성과 초기불교와 상호작용한 화학과 관련된 당대의 힌두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먼저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화학의 다양한 측면 중 화학자의 일과 삶이 불교적 관점, 특히 《숫따니빠따》와 같은 초기불교에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가르침들과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호혜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지, 그리고 팔정도의 가르침을 어떻게 ‘수행으로서의 화학(chemistry as practice)’에 적용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간략하게 논하고자 한다.
학문으로서 화학의 특성
먼저 ‘불교와 화학’을 논하기 전에 화학의 학문적 특성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화학은 물질적인 현상을 원자 및 분자 수준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다양한 물질들의 물리화학적 물성, 원자 수준의 미시적 구조, 그리고 화학결합이 끊어지고 생성되어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 화학반응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연과학으로서의 화학은 옹스트롬(Å) 수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현상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현상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설명과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공학적으로도 비료, 이차전지, 제약, 반도체와 같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다양한 화학산업까지 인류의 삶에 큰 파급력을 발휘하고 있다.
화학은 크게 화학 현상들이 기반하는 물리학적 원리를 탐구하는 ‘물리화학’, 탄소가 포함된 유기화합물들의 화학 현상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유기화학’, 금속이나 광물과 같은 결정부터 유기금속 화합물까지 다양한 소재를 연구하는 ‘무기화학’, 화합물이나 화학반응을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방법들을 연구하는 ‘분석화학 및 분광학’, 생체 내 화학 현상들을 연구하는 ‘생화학’, 양자역학 및 분자동역학에 기반한 컴퓨터 모델링 및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다양한 화학적 현상들을 설명하는 ‘계산화학’과 같은 세부 분야들로 나누어진다. 이들 분야는 모두 유구한 학문 탐구의 역사가 있고, 각각의 과목명이 들어간 박사학위가 수여될 정도로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분야 간의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아가 유체역학이나 전자기학, 전달 현상 등 물리학의 세부 학문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융합하여 인류의 삶을 개선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보장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화학공학이나 재료공학과 같은 공학 전공들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화학은 흔히 다른 자연과학 분야들인 물리학과 생물학의 중간에 자리한 학문으로 인식된다. 화학은 관심의 대상인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물리학의 이론을 활용하며, 생물학의 관심 분야인 생명현상의 기본이 되는 화학적 현상들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는 화학이 물리학의 하위 분야이고 생물학의 상위 분야라는 의미는 아니다. 화학은 인류의 복지와 생태와 지구 환경의 지속 가능성 또한 염두에 두고 있어 순수 이론물리학과는 구별되는 측면이 있고, 생물학의 모든 영역이 화학에 들어가는 것 또한 결코 사실이 아니다. 화학은 태생부터 학제 간 융합에 기초하고 있으며 기초의학, 환경과학, 재료과학에도 기여하고 있고, 인류의 생존 및 편의와 가장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서 화학의 위치는 단순히 ‘중간 학문(intermediate science)’이라기보다, 많은 분야를 연결하는 허브의 역할을 하는 ‘중심 학문(central science)’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며, 이는 실제로 널리 쓰이는 표현이다.
물론 물리학과 화학, 생물학은 태생부터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학은 그 명칭에서 볼 수 있듯, 학문 분야들을 막론하고 ‘스스로 그러한 것들(自然)’을 연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를 통하여 ‘세상의 모습’을 이해하고자 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위와 같이 학문 분야가 구분되는 것은 과학사적 배경과 함께 사람들의 편의와 이해를 돕기 위한 기능적 목적이 있으며, 일종의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의 방법론에서 화학은 다른 자연과학 분야들과 궤를 같이한다. 20세기 들어 양자역학과 복잡계 과학의 발달에 따라서 그 경향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긴 했지만, 화학은 그 시초부터 수학적으로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하려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기계론적 세계관(mechanism), 그리고 정신(res cognitans)과 존재(res extensa)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에 상당 부분 기초하고 있다.
한편 불교는 무상(anicca), 무아(anatta), 그리고 인연(pratītyasa-mutpāda)에 기반한 인식론을 바탕으로 탐진치를 끊고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대승불교에서 공(sūnyatā)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불교는 현대 자연과학이 기초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이나 환원론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화학과 불교는 표면적으로는 세상의 모습을 이해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같지만, 기본이 되는 전제와 인식, 그리고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적 목표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화학이 세상의 모습에 대한 물리적인 이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불교는 이보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습, 즉 법(dharma)을 이해하여 수행자가 언제든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 있음을 논리적으로 알게 하는 것을 추구한다.
더욱이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던 당시 현대 화학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시대와 목적과 방법론이 다른 양자를 직접 병치하는 것은 유의미하고 직관적인 결론을 정리하기에 곤란한 측면이 있다. 이에 이 글에서는 초기불교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힌두교의 자연관, 특히 현대 화학과 유사한 인식론에 근거한 바이셰시카 학파의 사상을 먼저 병행하여 소개하여 그 간극을 줄이고 이해를 돕고자 한다.
바이셰시카 학파와 화학, 그리고 불교
후기 베다 시대(later Vedic period, 기원전 11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는 갠지스강 유역의 인도 문명이 상당한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갠지스강 유역의 비옥한 토지에서 비롯되는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들이 출현하였고, 인도 철학의 중추를 이루는 다양한 철학 학파들이 등장하였다. 힌두교 카스트 제도의 원형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베다 시대에서 십육대국 시대로 넘어가는 기원전 5세기는 사문(沙門, 큦ramaṇa)으로 대표되는 수행 계층이 확립되었고, 베다를 인정하는 힌두교의 6정통파와 더불어 불교와 자이나교를 비롯, 인도 철학에 바탕을 둔 여러 종교의 교단이 실체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실재(reality)에 대하여 각 학파와 교단별로 다양한 인식론적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집중되었다. 화학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학파는 힌두교의 6정통파 중 하나로서, 승론(勝論)학파로도 널리 알려진 바이셰시카(Visesikā) 학파이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카나다(Kanada) 또는 카샤파(Kashapa)로 알려진 힌두교 승려를 교조로 하고 있으며, 다원주의적 원자론에 기초한 형이상학을 핵심 이론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의 주제인 ‘불교와 화학’을 논함에서, 불교의 태동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물질적 구성을 인식하였는지 이해하기 위해 바이셰시카 학파의 사상을 소개하고 불교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맥락상 적합하다고 판단한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기본적으로는 만물에 내재하는 변하지 않는 실체, 즉 아트만(atman)을 상정한 힌두교의 분파이며, 그 아트만의 일면으로서 초기 원자론을 주창하였다. 바이셰시카 사상은 관찰과 논리에 기반한 과학적 논증을 전개한다는 측면과 세상이 변하지 않고 쪼갤 수 없는 단위 입자(원자, paramanu)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측면에서 현대 화학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이셰시카 학파는 원자는 ‘땅’ ‘물’ ‘불’ 그리고 ‘공기’라는 4종류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원자들이 둘, 셋, 또는 그 이상 결합하여 더 복잡한 물질, 나아가 만물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발상은 고대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Democritus)의 원자론을 한 세기 이상 앞선 것이며, 현대 화학에서 입증된 원소(element) 및 분자(molecules)의 존재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이라는 시대상을 고려하였을 때 매우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바이셰시카 학파의 사상은 시대적인 한계로 인해서 잘 정의된 환경에서 수행된 실험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큰 한계를 가진다. 바이셰시카 학파의 세계관을 실험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전자현미경이나 입자가속기가 필요하나, 이는 모두 20세기에 개발된 것으로 당대에는 이를 입증할 여건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20세기에 들어서 양자물리학 및 분석기술이 발달하면서 원자보다 작은 아원자(subatomic) 입자들인 전자, 양성자, 중성자의 존재가 입증되었고, 이는 바이셰시카 학파나 데모크리토스가 주장하였던 ‘쪼개지지 않는 원자’라는 고대의 생각들을 정확하게 반박한다. 또한 바이셰시카 학파는 당대 인도와 그리스에 공통적으로 만연하였던 4원소설을 채택하였지만, 현대 화학에서 다루는 원소는 100종을 훨씬 넘는다. 바이셰시카 사상은 기본적으로 관찰과 논리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현대 화학과 일맥상통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인해 여전히 입증되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셰시카 사상은 과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상응하는 만큼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불교는 시대적으로 힌두교의 바이셰시카 학파와 거의 같은 시기인 기원전 5~6세기경에 태동하였다. 초기불교는 기존 힌두교의 다양한 교단의 사상과 대립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모든 것은 변화하며(무상),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 즉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으며(무아), 만물과 그의 생멸 또한 서로 연결되어 있다(인연)는 것을 핵심 교리로 하였다. 특히 불교는 상기한 영속적이고 변하지 않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곧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는 점에서 바이셰시카 학파, 나아가 당대의 지배사상이었던 힌두교와 큰 차이를 보인다. 또한 바이셰시카 학파가 원자들의 성질과 그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우주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불교는 세상의 모습을 이해함으로써 탐진치를 끊어내고 궁극적으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열반(nirvana)을 추구하기 때문에 수행의 일차적 목적도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불교에도 자연과학적 차원의 세계관이 존재하며, 현대 화학에서 관심을 갖는 현상들을 불교적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도 그 내용과 결과적인 의미의 경중을 떠나 충분히 가능하다. 화학은 기본적으로 물질의 변화에 대한 학문이며, 모든 물질의 변화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anicca)’과 일맥상통한다.
일반적으로 화학반응들은 열역학적으로 평형을 이룰 때까지 진행된다. 이는 수면의 높이가 다른 수조 두 개를 수로로 연결하면 수면의 높이가 같아져 수압의 평형이 이뤄질 때까지 물이 이동하는 것과 같다. 열역학적 평형이 달성된 이후에도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들의 총량이 겉보기로만 변하지 않을 뿐 분자 차원에서는 계속해서 화학적 변화가 진행된다. 화학 평형은 정반응과 역반응이 동일한 속도로 끊임없이 양방향으로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기 때문이다. 위의 수조 비유에서 수면의 높이는 맞춰졌지만, 그 이후에도 물 분자들은 정지하지 않고 수로를 통해 양 수조를 계속 왕래하는 것과 같다.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원자들이 쪼개지지 않는 단위로서의 실체라 하더라도 이들은 처한 환경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성질을 가진다. 예를 들어 탄소(C) 원자는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서 흑연이 될 수도 있고 다이아몬드가 될 수도 있다. 또한 흑연상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연결된 양상에 따라서 광물로서의 흑연이 될 수도 있지만, 신소재인 탄소나노튜브(carbon nanotubes)나 그래핀(graphene), 또는 풀러렌(fullerene) 분자로 발현될 수 있다. 산소(O)나 수소(H), 질소(N)와 같은 다른 종류의 원자들과 결합되는 경우 주요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CO2)부터 천연가스나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탄화수소들(CxHy)이 될 수도 있고, 가장 단순한 당류인 포도당(C6H12O6)부터 생명의 근간을 이루는 단백질과 핵산의 뼈대를 이루기도 한다. 이 물질들은 동일하게 탄소를 중심 원소로 한 분자구조를 가지지만, 각각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화합물들의 성질들은 각각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선형적(linear) 조합이 아니라, 분자 전체의 전자구조로부터 ‘창발’된 비선형적 결과이기 때문에, 화합물들의 거시적 성질에서 탄소의 역할만을 환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예시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무아(anatta)’와 모든 성질은 관계에서 발현된다는 ‘연기(pratītyasamutpāda)’의 비유로서 적합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유들은 불교만의 고유한 관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무아, 무상 그리고 연기는 초기부터 성립된 불교의 핵심 교리이긴 하지만 불교가 발생하면서 새로이 개발된 고유한 개념이 아니다. 기존 힌두교의 여러 학파에서 이미 다양하게 논의되어 온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발전시켜서 높은 합리성을 갖도록 정리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초기 우파니샤드인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niṣad)》에는 “소금 덩어리를 물에 넣으면 그 물에서는 짠맛이 나지만 소금을 다시 건져내는 것은 불가능하듯, 개인의 자아도 브라흐만에 녹아들면 구분 지을 수 없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힌두교에서도 개인의 자아 형(form)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무상’의 관점을 견지해 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변하지 않는 자아 본성의 존재’에 대한 논의 등 두 종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철학적 주제를 제외하면, 실재 세계관에 대한 불교와 힌두교의 관점을 완전히 구분하여 기술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 있는 작업도 아니다.
그리고 서두에서 밝혔듯, 화학적 현상들을 포함하여 자연과학적인 관찰 결과들을 불교의 이론을 통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더 나쁘게는 고정된 관점에 천착하게 될 위험성 또한 지니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비유가 화학적 현상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며, 불교적 세계관의 핵심 개념을 미시세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예시의 기능도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제공되는 비유 이상의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화학적 현상을 불교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라는 명제의 단편적인 입증에 불과하며, 반증 가능한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단순히 화학적 현상의 물리적 해석에 국한되지 않고 화학을 수행하는 ‘화학자의 일과 삶’에도 적합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아트만과 외부 세계를 구분하여 인식하는 힌두교와 달리, 불교는 자아를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고정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오온의 집합(즉, 무아)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세계(즉, 무상)와 연속적이고 여러 차원의 상호작용(즉, 연기)을 하는 외부 세계와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일체가 공하다’는 원리로 잘 정립되었다.
화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코 그를 수행하는 화학자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화학과 화학자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는 다른 자연과학 분야들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는 개별 화학적 현상을 넘어서 화학을 탐구하는 화학자, 화학공학자의 삶과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연구를 수행하여 건전한 결과를 도출하는 데 윤리와 사상적 측면뿐만 아니라 건전한 과학적 결과를 도출하는 측면에서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다음 절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이 화학자의 일과 삶을 어떻게 질적으로 향상시켜서 궁극적으로 화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 원리에 대해서 《숫따니빠따》의 게송에 나타나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논하고자 한다.
화학자의 일과 삶, 그리고 불교
화학의 세계에는 다양한 원소들이 있으며, 여러 환경에서 그 원소들은 무수한 방식으로 조합을 이루고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여전히 규명되지 않거나 발견되지 않은 현상들이 너무나도 많고, 새로운 화학적 발견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따라서 화학자들은 새로운 아이디어, 가설 또는 접근방법을 언제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학문연구의 배경에서 알려진 가설이나 자신의 생각에 천착하는 것은 과학적인 발전을 크게 저해한다. 이런 집착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화학자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화학은 인간의 삶에 밀접한 중심 학문으로서, 산업적으로는 순수 물리학이나 생물학에 비하여 인류의 복리를 증진하여 직접적인 부를 창출하는 데 가깝기 때문에 화학자들은, 특히 응용화학자나 공학자들은 명성이나 부에 접근하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실제로 엑손모빌(ExxonMobil)이나 다우케미칼(Dow Chemical), 화이자(Pfizer)와 같이 많은 화학 관련 거대 회사들이 기업 규모 및 매출 측면에서 세계적으로 최상위권에 위치하며, 인류 전체 경제에 실시간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정유 및 석유화학과 같은 화학산업은 반도체, 자동차, 철강산업과 함께 한국이 세계적인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으며, 화학은 탄소중립과 같이 시급성 높은 시대적 요구에도 직접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 이차전지, 수소 등 신사업 분야에서도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화학 분야의 연구개발은 독보적으로 경쟁이 격한 특성을 갖는다. 새로 게재되는 학술논문들 또한 양적으로 전례가 없는 수준이며, 국가와 기업 모두 연구개발을 주도하며 이 경쟁을 끝없이 독려하고 부추긴다. 결과적으로 화학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교수와 연구원, 학생을 막론하고 새로운 발견, 실험의 진행, 특허 및 논문의 획득, 다음 연구의 계획 등 연구개발의 모든 차원에서 성과 달성의 높은 압력에 노출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환경 아래에서 연구자들은 원하는 결과를 보고자 하는 집착, 더 좋은 저널에 게재하기 위한 욕망, 그리고 윤리의 경계선에 서게 하는 유혹까지 미혹에 빠지고 연구의 지속 가능성을 해칠 수 있는 큰 위험에 항상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불교는 화학자들의 삶과 일을 궁극적으로 개선하고 나아가 화학 자체의 학문적 발전을 지속 가능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화학과 화학자는 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학자들의 삶과 일은 일체의 화학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보편적 대중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며, 다양한 역사적, 철학적 맥락에서 쓰인 불경은 실로 그 양이 방대하다. 이에 이 글에서는 경쟁적 환경에서 연구하는 이들에 대해 특별히 국한하여 서술된 텍스트를 발췌하기보다는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진 보편성 높은 텍스트인 《숫따니빠따》로부터 화학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화학을 발전시킬 방안을 도출하고자 한다.
《숫따니빠따》는 상좌부불교의 빨리 정전(Pali Canon)에 속한 경으로, 쿳다카 니까야(Khuddaka-nikāya)의 일부를 이루며, 같은 니까야에 속한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과 함께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불교 텍스트 중 하나로 꼽힌다.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시대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여러 간결한 경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경집(經集)이라고도 불린다. 시와 금언 형식으로 서술되어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가치도 매우 높으며, 12연기, 무아, 무상, 탐진치, 사성제 등 불교철학에서 핵심적으로 여겨지는 개념들의 초기 모습 또한 엿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는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결되는 하나의 줄거리가 아닌 짧은 경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읽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그중 가장 시대적으로 앞서며 초기불교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는 장은 제4장인 앗타까 왁가(Aṭṭhaka vagga, Snp 4)로, 각각의 구성 경전이 8줄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어 영어로는 ‘the Chapter of Octets’라고도 번역되고, 한자 문화권에서는 ‘의품(義品)’이라 일컬어진다. 특히 이 앗타까 왁가는 《숫따니빠따》에 등장하는 경전과 게송 중 시대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언어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되고 있다.
앗타까 왁가는 16개의 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불교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주제들을 대부분 포함하고 있다. 욕망과 집착이 어떻게 괴로움으로 귀결되는지, 욕망과 집착을 초월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움을 주는지, 실체와 자아의 성질은 무엇인지 등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8줄의 게송들을 통하여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나아가 앗타까 왁가의 가르침들은 불교를 공부하는 일반 대중들뿐만 아니라 화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를 행하는 연구자들에게도 사상적이고 윤리적인 지침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아래 인용되는 《숫따니빠따》의 게송들은 호주의 아잔 수자토(Ajahn Sujato) 스님이 빨리어를 영문으로 번역한 영역본을 참고하여 국문으로 중역했음을 밝힌다.
화학자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기존의 관점에 집착하여 전체 학문적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다. 화학자는 학문적 권위가 높을수록 동료 연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특정한 이론이나 생각에 매몰되어 개방성을 잃어버리면 학문 전체의 진보에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다. 19세기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뵐러(Friedrich Wöhler)가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인 요소(urea)를 합성한 결과가 실험 결과의 적합성과 명확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 받아들여지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당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어져 온 과학철학적 관점인 생기론(vitalism)이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생기론은 생체와 생물, 유기물은 생기(vital force)라는 특성이 있어서 무생물/무기물과 근본적으로 구분된다는 이론이다. 현대 화학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어불성설에 가깝지만, 당대에는 가장 저명한 화학자들도 받아들이는 보편적 관점이었다. 당시 유럽 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농학자이자 유기화학자인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도 예외는 아니었다. 리비히 또한 위대한 화학자였지만, 생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뵐러의 반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뵐러의 연구가 인정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를 초래하게 되었다.
앗타까 왁가의 두 번째 경은 ‘동굴의 8게송(Guhaṭṭhaka sutta)’이라 불린다. 육신, 욕망, 그리고 아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변화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집착, 무지, 그리고 고정된 관점에 천착하는 것을 ‘정신적 동굴’로 비유하여 경계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를 초월해야 함을 강조한다. 동굴의 경의 6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는 무언가에 집착하여 메마른 개울의 웅덩이에 갖힌 물고기처럼 허둥대는 자들을 보라. 이를 보고 미래의 삶에 대한 집착을 놓으면서 사심을 버려야 한다.
이 가르침은 끊임없는 혁신을 창출하는 복잡한 시스템을 연구하는 화학자가 열린 마음을 갖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항상 깨어 있고 동료 연구자들과 협력해야 하며, ‘정신적 동굴’에 갇히지 말아야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전한다.
또한 화학자에게는 연구 윤리를 수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화학이 복잡한 실험과 정교한 측정에 기반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 연구 결과물이 사람들의 삶과 다양한 산업, 그리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환경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화학 연구에서 연구 윤리 준수는 과학적 발견의 신뢰성 담보, 연구자와 대중의 안전 보장, 그리고 책임 있는 자원 활용으로 이어진다. 화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1999년 빅터 니노프(Victor Ninov)의 ‘118번 원소 조작 사태’는 경쟁적 환경하에서 연구 윤리 위반이 어떤 파급효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입자가속기의 적극적 활용으로 기존에 보고되지 않았던 새로운 원소를 형성하여 보고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니노프는 이 과정에서 데이터를 조작하여 ‘118번 원소’를 학계에 보고하였고, 처음에는 큰 찬사를 받았지만 재현성의 부재로 인한 여러 차례의 검증에서 데이터 조작이 드러났다. 이로 인하여 학계는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여 연구 동력을 크게 상실하였으며, 동료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니노프의 소속기관이었던 로렌스 버클리 국립연구소까지 명성에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앗타까 왁가의 세 번째 경은 ‘분노의 8게송(Duṭṭhaṭṭhaka Sutta)’으로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는 욕망에 의해 부패나 거짓된 관점과 같은 잘못된 길에 빠질 것을 경계하고, 비판적 견지에서 참된 이해와 지혜를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분노의 경의 7번째 구절은 다음과 같다.
특정한 선호에 끌리고 특정한 믿음에 교조적 태도를 취하는 자가 어떻게 자신의 관점을 초월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믿음대로 말할 것이다.
욕망은 선호를 만들고, 그 선호는 결국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지며, 이는 결국 그릇된 행동으로 이어져 본인의 관점을 버리지 못하게 되어 큰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가 놀랍고 가치 있을수록 화학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언제나 자신의 연구 결과에 자아를 덧씌우는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언제든 버릴 수 있는 자세, 즉 개방성과 유연함 또한 화학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자가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경쟁적인 분야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달성된 연구 성과일수록 그 결과에 자신의 고정된 아상을 투영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가 더 쉬워진다. 이를 극복하는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명성이라는 짐을 많이 진 학자일수록 더욱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를 행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학계 전체의 큰 진보로 이어질 수 있다. 올레핀 복분해(olefin metathesis)의 메커니즘 규명 과정에서 미국의 화학자인 로버트 그럽스(Robert Grubbs)가 보인 태도가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산업적으로 중요한 화학반응인 올레핀 복분해는 1950년대 후반부터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활용되었으나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은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 석유연구소의 이브 쇼뱅(Yves Chauvin)은 프랑스 국내 학술지에 그 메커니즘을 제안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옳게 규명된 결과였지만 프랑스어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많은 학자들에게 읽히는 데 시간이 걸렸다. 미국에서 해당 반응의 연구를 선도하던 저명한 화학자였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의 그럽스 교수는 나중에 쇼뱅의 논문을 접하고 곧바로 자신이 제안한 메커니즘을 파기하고 쇼뱅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쇼뱅의 이론을 바탕으로 그럽스 교수와 MIT의 리처드 슈락(Richard Schrock) 교수는 고성능의 올레핀 복분해 촉매를 설계 및 합성할 수 있었고 쇼뱅, 그럽스, 슈락 모두 2005년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되었다.
《숫따니빠따》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집착의 매듭을 풀고 흘려보내야 함을 경 전체에 걸쳐 여러 번 강조한다. 앗타까 왁가의 네 번째 경은 ‘청정의 8게송(Suddhaṭṭhaka Sutta)’이다. 스스로의 청정함과 정당함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집착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자신의 청정함에 집착하고 추구하거나 심지어 자부하면서 다른 이들을 청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미혹에 빠지는 첩경임을 경고한다. 다음은 청정의 경의 7번째 구절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꾸며내거나 받들지도 않고, 최상의 청정함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집착의 단단한 매듭을 풀어버리고 세상의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의 모습을 연구하는 학자는 세상의 어떤 것도 내 것은 없다는 자세를 견지하며 연구 결과에 아상을 씌우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전술한 그럽스 교수의 사례는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학계 전체에 순기능을 가져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화학을 연구하는 자가 자신의 삶과 임무를 건전하게 수행하면서, 동시에 인류를 이롭게 하는 성과를 지속 가능하게 창출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숫따니빠따》의 가장 오래된 제4장을 바탕으로 논의하였다. 소위 첨단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며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일을 하는 화학자에게도 《숫따니빠따》를 통해 전해지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은 학문의 목적과 학자의 선을 이루기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바들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특히 화학자는 학문적 특성으로 인하여 환경적 압력과 심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고, 더욱이 많은 화학자들이 스스로 상당한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다고 자평하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에 비하여 욕망이나 아상, 그로 인한 미혹에 더욱 빠지기 쉽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건전한 학문의 발전과 지속 가능한 성과의 달성을 위하여 화학자들은 연구 현장에서 스스로를 더욱 잘 관찰하고, 자신과 학계에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릇된 욕망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나의 생각과 이론이라 여겨지는 것도 나의 오로지함이 아님을 아는 것이 권장된다. 그를 통하여 세상의 모습에 한 발짝 더 다가가며, 나아가 세상을 해석하는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수행으로서의 화학, 그리고 불교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밑에 조용히 앉아서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바로 중이요, 그곳이 바로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불교라네.” 조계종 제8대 종정에 오르신 서암 스님이 후일 정토회를 일으킨 젊은 시절의 법륜 스님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는 집착을 내려놓고 세상의 모습을 바로 보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불교의 핵심 원리를 지극히 간결하게 설법한 것으로, 대중에 널리 회자되는 명언으로 전해져 온다. 승려와 사찰이 외형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듯, 수행 또한 정해진 형(形)이 있는 것이 아니다. 큰스님의 말씀을 응용하자면 “그 마음을 청정히 하고자 행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다.
불교의 수행은 탐진치를 끊어내고 일상에서 오는 괴로움과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여 참된 진리를 얻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행하는 것이다. 참선이나 고성염불(高聲念佛) 정근 등 불교에서 널리 행해지는 다양한 수행의 방식이 있지만, 수행의 목적만 옳다면 반드시 그런 모습이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반드시 사찰에 들어가서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충분히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이를 흔히 ‘생활 속의 수행’ 또는 ‘수행으로서의 생활’이라 한다.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이 기존에 널리 활용되어 온 수행의 형태인 참선이나 정근에 비하여 효과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길거리에서 걸어 다니며 독서하는 것이 조용한 방의 책상에 앉아서 독서하는 것에 비해 더 효과적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방법과 방향만 바람직하다면 일상을 살아가며 모든 순간을 수행으로 활용하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다는 것이며, 긴 시간을 내기 어려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현실적으로 더 적합할 수 있다.
화학 분야에서 연구하는 연구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화학자로서 삶과 일을 수행으로 삼을 수 있다. 연구를 수행하면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정리하고, 원하는 특정된 결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성패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태도를 갖고자 발원하는 것이 수행의 첫 단계가 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연구 과정에서 올 수 있는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객관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적합한 연구 방향 제시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학문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불교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 즉 수행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잘 체계화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불교의 가장 오래된 가르침에 속하는 팔정도(八正道)이다. 이 여덟 가지 길을 따름으로써 탐진치를 끊고 괴로움과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워져 맑고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본 절에서는 ‘수행으로서의 화학’을 화학의 학문적 특성을 반영하여 팔정도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화학자가 삶과 일의 모든 맥락에서 행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팔정도의 첫 번째 길은 정견(正見)으로,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것은 어떠한 도덕에 근거한 당위가 아니라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편견이나 고정된 관점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을 말한다. 화학자 개개인이 자신의 가설에 집착하지 않고, 실험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편견 없이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 어떻게 학문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 앞 절에서 앗타까 왁가의 동굴 8게송과 청정 8게송을 논하며 다루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논의는 생략한다. 두 번째 길은 정사유(正思惟)로, 올바른 생각과 의도를 갖는 것이다. 화학 연구는 인류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연구의 목적을 건전히 설정하고, 윤리적 기준을 견지하면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경쟁심, 출세욕, 과시욕 등 다양한 욕망의 원인을 알고 그에 끌려가는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팔정도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길인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연구자-수행자의 계율과 윤리적 기준에 대하여 방향을 제시한다. 정어는 바른말을 의미하며, 진실하고 유익한 말로 동료들과 소통하여 신뢰를 확보하고 논문을 보고할 때도 정직하게 데이터를 제시하는 것을 말한다. 정업은 바른 행동을 의미하며, 환경안전 및 연구 윤리의 엄격한 준수를 통하여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연구 활동을 궁극적으로 돕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명은 바른 생활방식을 말하며, 특정 주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탐닉을 지양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피하여 종합적으로 연구 활동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팔정도의 마지막 세 길은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으로 연구자의 마음과 관련된 것이다. 정정진은 올바른 노력을 지속하여 끊임없이 정진할 것을, 정념은 마음을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하여 매 순간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정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깊은 집중 상태를 유지해서 연구에 대한 몰입도와 완성도를 향상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히 실험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서, 화학자는 실험을 수행하면서 머릿속에 지나가는 생각들, 실험 결과에 대한 욕망들, 그리고 결과를 마주했을 때 자신의 마음속에 이는 생각 등을 집중하여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욕심에서 비롯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원인을 찾아 분석할 수 있다. 또한, 그로부터 유래될 수 있는 괴로움을 사전에 관리하고 더 깊은 통찰을 얻는 발판을 확보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수행으로서의 화학’을 팔정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수행자와 연구자 양면에서 본질에 가까운 수행 방향이 도출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일반적인 연구’와 ‘수행으로서의 연구’가 차이가 있다면, 수행으로서 연구는 모든 순간에 깨어서 보고, 가치판단이나 편견 없이 보고, 모든 관찰에 대한 마음의 일어남을 보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마지막으로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도반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홀로 수행하는 것은 자기 생각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크다. 효과적인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주는 동료 연구자와 함께 생각을 나누고 비판적으로 토의하는 활동이 필수적이다. 모든 연구자가 수행을 연구 활동에 잘 녹아들게 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할 수 있다면 연구 내 · 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해결하여 지속 가능하고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며
화학은 자연과학 분야의 ‘중심 학문’으로서 그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불교와 화학을 세계관과 원자론, 화학자의 삶과 일, 수행으로서의 화학, 이렇게 세 가지 차원에서 논의하였다. 먼저 화학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당대의 바이셰시카 학파의 세계관을 함께 소개하며 논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관점에서는 화학과 화학자가 구분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불교가 화학자의 삶과 일을 개선함으로써 화학 발전에 기여할 가능성을 논의하였다. 마지막으로 화학 연구의 수행적 측면을 팔정도의 관점에서 논의하여 현실적인 수행 방안을 간략히 제시하였다. 필자는 독자들이 이 글을 통해 화학 연구와 불교 수행이 상호 호혜적일 수 있음을 확인하고, 연구자들이 연구 과정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더 나은 연구 성과를 이루길 희망한다. ■
강종헌 jonghunkang@snu.ac.kr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 화학공학 공학박사.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연구원 역임. 현재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조교수, 서울대학교 총불교학생회 지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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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佛敎와 科學 - 佛敎와 化學.
한파들이 드세네요
건강하시고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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