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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짜빈동 전투
1967년 미국 시각 2월 15일 아침, 베트남에서 날아온 미국 UP 통신의 한 장의 사진은 미국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빨간 큰 제목으로 “신화를 창조한 한국 해병대”
까만 소제목으로 “베트남전에서 청룡 해병의 활약은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미 해병대 제임스 듀란 대령
그 사진 속에는 갓 20대 초반의 한국 해병 청룡부대 병사가 4시간에 걸친 적 10 대 1의 엄청난 전투가 끝난 뒤의 전장의 참혹한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걸작이었다.
어느 어린 병사가 자기 키만 한 M1 소총을 앞에 던지고 방탄복을 반쯤 걸친 상태로 오른쪽 가슴에 수류탄을 하나 달고, 상체를 비스듬히 어느 묘비에 걸치고 지쳐서 퉁퉁 부은 눈으로 오른쪽을 멍하게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치렀길래, 영혼이 빠져나간 모습으로 눈을 감을 힘도 없이 저렇게 얼이 빠지게 되었을까?
정경진 대위가 지휘하던 해병 청룡 11중대가 방어하는 짜빈동은 베트남 중부의 호찌민루트가 가로지르는 추라이 비행장과 인접한,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적들은 작정하고 짜빈동 탈환을 노렸다.
그리고 ‘강철 연대’라는 별명과 함께 호찌민이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월맹 정규군 2,400여 명을 작전에 투입했다.
그와 맞서는 아군은 모두 합하여 294명으로, 적들이 무장한 개인 화기는 소련제 자동소총 AK-47인 데 비하여 너무 초라한 2차 대전과 6.25 전쟁 때 쓰던 M1 개런드 소총이었다.
베트남 시각 2월 15일 04시 10분 짜빈동,
요란한 포 공격 뒤에 대낮 같은 조명탄 아래 마치 인해전술을 펼치듯 몰려오는 월맹군을 보며 정경진 대위는 비장한 각오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첫째, 적이 유효 사정거리 내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하지 말 것.
둘째, 해병대의 명예와 전통을 위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라.
셋째, 죽음으로서 진지를 사수하라 이상”
그렇게 4시간을 넘게 2,400명의 월맹군은 빼앗으려 했고, 294명의 청룡 해병은 지키려고 하는 사상 최악의 혈투를 벌였다.
08시 30분, 저들은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해병 청룡 11중대에 기가 꺾여 마침내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짜빈동 전투가 끝났다.
날이 밝은 짜빈동에는 뿌연 화약 연기와 피비린내의 묘한 향이 감돌았고, 아비규환 생지옥이 펼쳐져 있다면 바로 여기가 그곳이었다.
“적 사살 246명, 추정 사살 60명, 아군 전사자는 15명, 부상 33명”
2,400: 294의 믿을 수 없는 전과였다.
이 전투 소식으로 6· 25 때 자유를 위해 만리타국에서 희생한 미군 참전용사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을 처음 안 미국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6· 25 참전용사들은 너무나 한국적인 모습의 이 병사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16년 전에 똑같이 겪었던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의 한 전쟁을 생각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아군 294명: 적군 2,400명이라는 10 대 1이라는 병력 차이를 극복한 믿어지지 않은 신화 같은 전투 소식에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아해하며 무척 놀랐다.
이렇게 놀라기는 그날 아침 짜빈동 현장으로 헬기로 날아간 미 3 해병 군단 사령관 웰트 중장도 마찬가지였다.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군이 동맹군으로 참전했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군은 달랐다.
공산세력과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한 나라이기에 그 임하는 정신력이 대단했다.
그래도 그렇지, 말도 안 되는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적군에게 수적 열세로 괴멸당할 줄 알았던, 짜빈동 전투의 대승 소식을 듣고, 설마 해서 급히 헬기를 타고 작전지역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해병 청룡 11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대원들에게 최고 경의를 표했다.
같이 간 제임스 듀란 대령과 종군 기자단은 연신 카메라를 누르고 이 믿지 못할 광경과 전과를 미 본국으로 급히 송신했다.
웰트 중장은 중대 단위 전투로서는 처음 보는 대단한 전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속히 미 국방성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사실 이 전투는 베트남전쟁을 통틀어 단일 작전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린 쾌거였다.
베트남의 키우 대통령과 키 수상까지 추라이의 청룡부대 본부로 날아와 기적과 같은 전과를 브리핑을 받고 연신 부라보를 외쳤다.
그 후 짜빈동 전투의 영웅들은 11중대 장병 전원이 1967년 3월 1일부로 베트남전 사상 전례가 없는 영광스러운 전원 일계급 특진을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 김용길 중사와 배장춘 하사에게는 을지무공훈장, 김기홍 중위, 김세창 중위, 김성부 소위, 김준관 하사, 오중환 하사, 이영환 하사, 이 진 해병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하였다.
또한, 1968년 미 국방성이 뽑은 최고 부대로 선정되어, 자국군이 아닌 한국 동맹군이 최고 부대 표창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미 3 해병 사령관 웰트 중장이 남긴 이 말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 해병들이 아군인 게 정말 다행이다.
만약 적으로 만났다면 큰일 날 뻔했다”
세계 각국은 백병전에 쓰인 한국 태권도를 앞다투어 도입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전투를 계기로 미 국방성이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M1 소총을 현대적 소총인 M16으로 대량 교체해 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월맹군 총사령관 호찌민은 치욕스러운 이 전투 이후, 짜빈동이라는 지명을 없앴고, 월맹 정규군과 게릴라 부대인 베트콩에게 새로운 지침을 하달했다.
“한국군 중에서 얼룩무늬에 빨간 명찰을 단 부대와는 절대 전면전을 하지 말고 피하라.”
‘신화를 남긴 해병’의 명예는 자랑스러운 선배들이 흘린 핏자국 위에 세워졌다.
추가 자료
짜빈동(茶平東)전투(Trận Quang Thạnh, Battle of Trà Bình)는 1967년 2월 14일부터 2월 15일까지 짜빈동(Trà Bình Ðông; 茶平東) 일대에서 베트남 정규군,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과 대한민국 해병대 제2여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배경
1966년 9월 23일 제2해병여단은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북부 지역 쭈라이로 이동해 지역 평정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베트콩의 활동이 상당히 왕성한 지역으로,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제11중대가 주둔하고 있던 짜빈동 마을은 꽝응아이성 북쪽 12km 지점에 위치했다.
기지는 둘레가 800m, 높이가 30m 정도 되는 구릉 지대에 타원형으로 설치되었다.
당시 짜빈동 기지 내에는 3개 소총 소대, 1개 화기 소대, 그리고 배속 부대로 1중대 1소대, 4.2인치 박격포 1개소대, 81mm 박격포 1개소대, 81mm 박격포 1개 반, 106mm 무반동총 1개 분대 등으로 총병력 294명이었고 간부들의 지휘를 받았다.
이 병력은 북쪽에 3소대, 남서쪽 1소대, 남동쪽 2소대가 배치됐고 주요 화기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 지역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증원된 1중대 3소대가 예비로 각 소대 후방에 1개 분대씩 배치됐다가 적의 예상 침투로였던 3소대 후방에 다시 배치됐다.
불과 1달 전, 베트민 제2사단이 청룡부대를 상대로 짜빈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어 북베트남은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다.
이에 북베트남은 다음 목표로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 기지를 정하였다.
11중대 기지가 근방의 중요한 거점인 쭈라이 비행장과 청룡부대 포병대대 포진지로 가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11중대 기지를 1시간 만에 돌파하고 이 두 거점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북베트남군의 기습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해병 여단은 예하부대에 경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11중대는 여단의 지시에 따라 주변 지역의 수색 및 정찰을 강화하면서 기지 보강 공사에 착수했다.
주요 화기의 진지를 유개화하며, 기존에 구축했던 교통호와 개인호를 보강했다.
또한 외곽에 2중 단선 철조망, 내부에 5중 원형 철조망을 설치하고, 적들의 예상 침투로에 지뢰 140발, 크레모아 63발, 조명지뢰 38발을 매설하는 등 기지 방어에 만전을 기했다.
전투 당일인 1967년 2월 14일에 이미 다수의 적이 기지 가까이에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매복하고 있었음에도 국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다만 피난민들이 중대 기지 근처를 떠도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중대장의 판단으로 경계를 강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2월 14일에서 2월 15일 밤사이에 걸쳐 규모가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11중대의 전술 기지를 급습했다.
짜빈동 전투 전개1
제1차 공격
1967년 2월 14일 밤에는 초승달이 떴으나 오후 10시 무렵부터 짙은 안개와 가랑비가 내려 시야 확보가 어려워졌다.
오후 11시 20분경, 11중대 3소대 전방의 청은 조 박기장 일병이 북베트남군 침투 부대가 접근해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북베트남군은 철조망 파괴 통으로 3소대 전방 기지 외곽 철조망을 폭파시켰다.
중대는 즉각 81mm 조명탄을 띄워 적정을 확인했고 1개 소대 규모의 적들이 숲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 집중 사격을 가했다.
베트남군은 산발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중대의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들이 도주한 후 중대장은 2차 공격에 대비해 50퍼센트의 병력을 전투 배치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이때를 이용해 11중대는 중대의 방어 태세와 상급 부대의 지원 화력을 재점검함으로써 예상되는 취약점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
제2차 공격
적의 강력한 기습
11중대는 적의 제1차 공격이 감행된 후 전투 준비를 마쳤다.
11중대와 돌산 사이에는 마른 냇가가 있었는데, 김세창 중위는 군데군데 냇가에 낮은 둔덕들에 적의 은폐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했다.
그는 그가 소속된 해포 7중대에게 포대 효력사로 서너 차례 위치를 이동하며 의심 지역에 대한 요란 사격을 실시하였다.
그곳엔 북베트남군의 선봉 대대가 있었고, 포병 대대의 카운터를 맞고 와해되었다.
이것 때문에 북베트남군은 후방 대대와 임무 교대를 하는 데 4시간이 걸렸다.
덕분에 자정에 총공격하려던 북베트남군은 4시간이나 시간을 미루게 되었다.
오전 4시 10분경 3소대 전방의 또 다른 청은 조 소속인 조정남 일병과 도성룡 일병이 수풀의 움직임을 발견하였다.
조 일병은 은밀히 빠져나와 중대본부에 보고했다.
이에 따라 중대장은 즉시 전 병력을 완편 배치했고 예하부대에게 마구잡이로 사격하지 말고 적들을 최대한 끌어들여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조명탄이 터지자 중대 전술 기지를 포위하던 베트남군은 기지를 향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11중대는 적의 기습에 대비해 진지 보수 공사를 많이 해두었던 터라 포격을 버틸 수 있었다.
또한 적들이 예상 침투로 인 3소대 전방으로 침투한 덕분에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가 즉시 포격을 명령하여 신속히 대응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포격전의 양상이 지속됐다.
결사항전
포격전 도중 북베트남군의 특공조가 파괴 통으로 3소대의 철조망 지대를 폭파했다
철조망 지대가 뚫리자 북베트남군의 인해전술이 시작되었다.
이에 11중대 대원들에게 일제사격 명령이 떨어졌고, 중대원들은 M1 카빈, M1918 브라우닝, M1919 브라우닝, 박격포, 무반동총 등 모든 총기를 동원해서 사격을 가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동료의 시체를 밟으면서 계속 진격하였고, 결국 3소대는 돌파당한다.
한편 1소대 지역도 일부 철조망이 파괴되어 북베트남군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1소대는 적들이 크레모아 설치 지역까지 들어오기까지 침착하게 대기하고 크레모아를 격발하였다.
그 결과 반경 100m 내의 적들이 모두 섬멸되었다.
또한 북베트남군이 후방에서 RPG-2로 공격하는 것을 포착하고 4명의 특공 조를 급파해 이들을 섬멸하고 발사기까지 노획하는 성과를 거둔다.
이어서 4.2인치 박격포 소대가 위치한 포진지가 적의 공격을 받아 박격포 사격을 중지해야 했다.
이에 중포 중대 제2소대장의 지휘로 박격포를 숨기고 박격포 소대를 2개 분대로 나누어 포진지와 포를 보호했다.
3소대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2소대와 본부중대에서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처절한 결사항전으로 진지 내에 약 5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교통호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 사이 2여단 본부에서는 11중대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판단하고 진내 사격, 즉 브로큰 애로우 상황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상황의 반전
새벽 6시 30분경,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한풀 꺾였다.
이에 중대장은 1, 2소대에서 각각 1개 분대씩을 차출해 기동타격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기지 내에 침투한 적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적의 허리를 끊어내는데 성공하자 김세창 중위가 포격을 가해 기지 바깥의 적을 섬멸했다.
그리고 기지 내에 고립된 적들마저 모두 사살하였다.
상황이 반전되자 기지 외곽에서 저항하던 1개 중대 규모의 베트남 군도 북서쪽으로 도주했다.
여단은 그쪽으로 지원 화력을 집중했고, 타중대에서 UH-1으로 퇴로 차단 작전을 벌였다.
마침내 오전 7시 20분경, 진지를 돌파했던 적들을 완전히 섬멸하였다.
짜빈동 전투 결과
확인된 11중대의 전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이었으며, 확인된 전과 이외에도 다수의 적들이 포격 등으로 인해 사망 혹은 부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베트남군의 시신 중에는 1연대 90대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동시에 대전차 유탄포 6문과 화염방사기 3문, 기관총 2정, 소총 실탄 6000발 등을 노획했다.
이로써 11중대는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고 중대 전술기지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국군의 전투력을 과시했다.
앞선 두코 전투에서 대두된 중대 전술 기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전투였고, 이후 대한민국 해병대는 '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에 호찌민이 짜빈동 전투의 결과를 보고받은 후, 한국군을 만나면 일단 후퇴하고 인민의 재산과 병력을 보호하도록 하고, 100%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 싸우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전후
짜빈동 전투 훈장
11중대 지휘관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게는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배장춘 하사와 김용길 중사에게는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김기홍중위, 김세창 중위, 김성부 소위, 김준관 하사, 오중환 하사, 이영환 하사, 이진 병장, 이영복 일병 등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간부를 제외한 191명의 사병 전원은 각 1계급 특진을 받았다.
11중대는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미합중국 해병대 ANGLICO 무전병으로 참여한 짐 포르타 일병(Lance Corporal)과 데이브 롱 일병(Lance Corporal)에게는 인헌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이 둘은 미 해병 전우회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활약상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사자들은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