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김치 / 정선례
모를 심어놓고 오랜만에 장구경을 갔다. 수시로 갈아신는 남편 양말도 사고 더위에 지친 목을 축여 줄 유제품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둘 요량이다. 생선가게부터 들렀다. 목포 갈치가 상자에 나란히 담겨 싱싱하게 반짝인다. 밭에서 캐 온 햇감자로 칼칼하게 갈치조림을 해놓고 “데워서 드세요.” 메모 남겨 놓고 저녁 모임 나갈 참이다.
생선과 장날만 나오는 싱싱한 해산물을 사 차에 실어 놓고 시장 안 채소전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철 만난 감자, 매실, 마늘, 열무가 시장 바닥에 그득하니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내 발걸음이 멈춘다.
아기 주먹만 한 무에 무청이 겉잎도 싱싱하게 달려 있다. 무에는 황토가 묻어 있는 게 아닌가. 주부경력 30년 차인 경험으로 보면 이런 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세 다발은 사야 한다. 바닥에 놓여있는 다섯 다발을 전부 사면서 가격 흥정을 하니 가격은 빼주지 않고 당근, 생강을 얹어 주신다. 이런, 언제 이 많은 양을 다 다듬을까나? 겨울에 김장하고 남은 양념으로 쓱쓱 버무려 여기저기 나눌 생각에 그만 일을 장만하고 만 것이다.
나는 유난히 총각김치를 좋아한다. 어머니는 손맛이 있어서 대충대충 음식을 하시는 것 같은데 뭘 만들어도 맛있다. 특히 김치를 맛있게 잘 담그시는데 머리 달린 쪽파김치와 잎 널따란 부추김치, 무청이 짧고 무가 동그랗고 단단한 총각김치 맛은 단연 으뜸이다. 어머니는 재료구매부터 깐깐하게 고르시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밥상에 총각김치가 올라오지 않으면 나는 생떼 부리며 밥투정을 했다. 밥 한 숟가락에 싱거운듯하면서 적당하게 익은 무청과 무를 입 안 가득 베어 물고 씹는 맛이란,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모임이 있어 식당에 가도 다른 음식 다 제쳐두고 나는 총각김치에만 손이 간다. 총각김치 한 접시에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옆 사람들 미안해서 슬그머니 한 접시 더 시켜 놓고 뒤로 물러나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셋째 아이 출산하고 남편이 끓여준 미역국을 먹을 때 왜 그렇게 총각김치가 생각나던지. 괜히 눈물이 나서 미역국에 눈물을 말아 먹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아이가 장성하여 취업했다. “엄마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묻는다.
겨울에 온 세상이 눈으로 덮일 때 마당 끝 샘가 장독 큰 항아리 위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양푼 가득 국물이랑 같이 담아 마당을 가로질러 오신다. 수북하게 담긴 김치 위에 새하얀 눈송이가 꽃잎처럼 뿌려진다. 까만 무쇠솥 부뚜막에 올려놓으면 눈이 스르르 녹는다.
어머니는 팔뚝만큼 기다란 대나무 주걱으로 밥을 푸시면서 그릇에 담기도 전에 뜨거운 밥을 손으로 집어 내 입에 넣어 주셨다. 그럴 때면 엄마 입도 덩달아 벌어지곤 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입안의 밥 위에 무청 달린 총각김치를 통째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오도독 먹어댔다. 요즘 아이들이 이렇게 먹는다면 식사예절에 어긋난다고, 입 다물고 먹으라고 혼날 것이다.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면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추위를 견딘 쪽파도 통통하게 여물이 든다. 어머니는 알맹이 달린 쪽파로 멸치젓 넉넉히 넣고 고춧가루 칼칼하게 국물이 약간 있게 담그셨다. 냉장고에 바로 넣으면 제맛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며 집과 창고 사이 바람 잘 통하는 평상 위에 두고 익힌다. 쪽파김치가 맛있게 익으면 어머니는 밥상에 올리셨다. 아~ 매워 짜증 섞인 딸년의 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덜 익은 쪽파 대가리는 당신이 드시고 이파리만 밥숟가락에 올려 주신다. 쪽파김치는 곰삭을수록 맛있다. 순전히 내 취향일까?
잔뜩 사 온 총각무를 샘가 나무 그늘 아래 평상에 펼쳐놓고 다듬는다. 무와 무청 사이를 칼로 손질하고 뿌리만 떼어내고 씻어 작은 것은 통째로 담고 크기에 따라 두 등분 또는 네 등분 하여 주로 무에 소금이 닿도록 뿌려 절인다. 물도 손으로 두어 번 떠서 소금 뿌린 무에 뿌려 주면 골고루 잘 절여진다. 한 시간쯤 뒤에 위아래를 뒤집어 주고 꾹 눌러 놔둔다. 무가 부드럽게 휘어지면 잘 절여진거다. 흐르는 물에 할랑할랑 씻어 바구니에 담아 비스듬하니 물기가 잘 빠지게 세워 놓는다.
해마다 김장할 때 갖은 재료를 넣은 양념을 넉넉히 해서 김장을 한다. 남은 양념은 한 번 담을 양 만큼 여러 봉지를 비닐에 담아 냉동 보관하여 재료 손질할 때 꺼내놓으면 절여질 동안 녹는다. 잘 절여져 물기 빠진 총각무와 절이지 않고 씻어만 놓은 쪽파를 양념에 버무리기만 하면 되니 김치 담그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총각무 한둘 금 쪽파 한둘 금 같이 넣어 꾹 눌러 작은 항아리에 담아 익히는 방법도 내 어머니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방법이다.
많은 양의 김치를 힘들어하지 않고 담그는 건 엄마 손맛을 닮아서이다. 내가 우리 엄마의 김치맛을 최고로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맛으로 기억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