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보이는 살림
결혼식 때 우리는 성혼선언문 대신 서로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30년을 다르게 살아온 우리가 한 집에서 살아가기 위한 다짐과 약속이 담긴 글이었다. 남편이 쓴 것 중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아내와 남편이 평등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평등한 가정. 그러나 이게 얼마나 환상에 가까운지 얼마 지나지않아 알게 됐다.
가장 많은 다툼의 원인은 ‘밥’이었다. 연인 때는 식당에서 오붓하게 밥먹는 것이 데이트의 일부였지만,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달랐다. 두 사람 중에 누군가는 밥을 해야 한다. 기껏해야 하루 한 끼 식탁에 겨우 마주 앉는 일상 속에서 밥짓기 노동은 내게도 중요했다. 왠지 모르게 있지도 않는 실력을 발휘해 이것저것 건강한 집밥을 차려야할 것만 같았다. 정기적으로 냉장고에 먹을 걸 채워넣는 것도 당연히 내 몫이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식욕이 없는 편이라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가보다 생각했다. 자고 일어나면 뭐 먹을 지부터 생각하는 내가 밥을 차리고 말지. 쉽게 치부했으나 한 끼 식사에 들어가는 노동은 상당했다. 비록 인터넷 배송일지라도 채소와 가공식품 등 장을 봐야 하고, 그 재료를 씻고 다듬어 불 앞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 반찬 통에 담아내야한다. 손이 느린 내가 반찬 두세가지와 국 하나를 끓이면 못해도 한시간 반은 훌쩍 지났다. 저녁 8시에 퇴근해서 밥 먹을라치면 9시 반이 넘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바빠 한 끼도 못 먹은 날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이것저것 불 위에서 조리한 뒤 밥을 푸려고 봤는데 밥솥이 비어있었다. 나보다 훨씬 일찍 퇴근한 남편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왜 나는 집에 오자마자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밥을 차리고 있는 걸까. 심지어 남편은 대학원생이라 나보다 훨씬 시간적여유가 많은데. 허기짐은 급속한 분노를 불러왔다. 으레 내가 밥을 하겠거니 생각하는 사람처럼 쌀을 안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남편을 향해 소리쳤다. “내가 밥하는 사람이야?” 남편이 놀란 토끼눈을 했다가 이내 반박한다. “아니, 너 오면 뭐 시켜먹으려고 했는데…”.
나도 결혼 전에는 늘 엄마 밥을 먹고 살았다. 내가 차리는 진수성찬보다 남이 차려주는 단촐한 식사가 훨씬 맛있다는 걸 결혼하고서 절실히 깨달았다. 종종 김치와 반찬꺼리를 가져다주시는 시어머니도 자기 아들이 아닌 꼭 내게만 그 반찬에 담긴 노동과 조리법을 설명했다. “어제 달랑무김치 담느라 새벽 1시에 잠들었단다. 통마늘은 쉽게 썩으니 키친타올을 깔아두고 쓰는 게 좋아.”같은, 어쩌면 살림 노하우와 자신의 노고를 약간은 알리고 싶었던 말들이었겠지만 왜 그 말들이 늘 나를 향하는지는 의문이었다.
대외적으로 평등한 가정을 외치던 남편 눈에 보이지 않는 살림은 비단 비어있는 밥솥만이 아니었다. 일주일만 지나도 슬금슬금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는 화장실 청소가 그랬고, 그보다 더 눈에 띄지 않는 바닥먼지도 그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온갖 어려운 기계들은 능숙하게 다루는 남편이지만, 최신 기능이 탑재된 세탁기는 제대로 돌릴 줄을 몰랐다. 아니, 돌리는 방법을 익힐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편은 억울해했다. 자기 정도면 ‘가사일에 많이 참여하는 편’이라고 항변했다. 예컨대 일주일에 한 번하는 분리수거나 음식물쓰레기 비우기 정도는 꼬박꼬박 하지 않냐는 거다. 그렇다. 이 남자는 시어머니가 빳빳하게 다려준 셔츠를 입고 차려진 밥상만 받을 줄 알던 사람이다. 평범한 한국 남자들에 비하면 그가 분리수거라도 해주는 걸 고마워해야하는 걸까? 남편은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살림지시를 내려달라고 했다. 양말을 뒤집어 놓는 것도, 속옷을 분리해놓지 않는 것도 일일이 다 말해달라는 걸까. 누군가 말하기 전에는 그 노동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남편의 삶이 한편으론 부러웠다.
똑같이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큰 딸과 아들인데, 결혼 후 가정을 꾸리고 나선 매 끼니 집밥을 차려야 할 것 같은 아내와 그 밥이 저절로 나오는 줄 아는 남편으로 자랐다. 이제 질문은 내 안을 향한다. 왜 나는 그 많은 반찬가게와 밀키트를 외면하고 불앞에서 기꺼이 서있기를 택했을까. 그렇다고 더 맛있지도, 건강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화목한 가정은 화목한 식탁에서 유래한다는 환상에 젖어 그 뒤에 숨은 노동을 너무 쉽게 여겼던 건 아닐까. 두 눈을 부릅뜨고 내가 바라봐야할 것은 각종 한식 레시피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첫댓글 맞아요. 레시피 그만 보세요 ㅋㅋ
화장실의 곰팡이, 굴러다니는 털들.. 해도 금방 도로묵 되지만 방치할 수만 없는 집안일들. 너무 스트레스죠.
저도 같이 살면서 왜 결국 내가 하게 되는건지. 결국 나도 가부장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건지, 한탄한적 많아요.
어머니가 그렇게 시집가기전에 신부수업해야된다며 얘기할때 불같이 화냈었는데 그거 없이도 결국 집안일은 내 손을 거쳐가더라구요.
시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내가 보는 것을 같이 봐주고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는데
결국 성격이더라구요. 배우자와 배우자의 누나는 둘다 집안일이 안 보이는, 속편한 눈을 갖고 있더라구요 ㅋㅋ
가족이 만나면 저와 매형이 서로 합심하며 한탄하죠.
그래도 계속 힘든걸 얘기하고, 작은나무님의 남편이 억울함을 내려놓는 건 좀 중요할것같아요.
제 배우자도 처음에는 자기가 최선을 다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자기가 변명하는 것같다는 걸 깨닫더군요.
분리수거와 음쓰 비우기가 얼마나 집안일의 세발의피인지 계속 알려줄 필요가 있는것같아요.
하다보면 현타도 오지만..
나도 좀 내려놓고 서로 중간지점에서 만나는게 최선이지 않을까 싶어요.
평등한 가정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부터가 사실 평등하지 않은 것이 기본값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네요. 당연히 평등하다면 선언문에 쓰지 않았을 것 같다는 쎄한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살림 너무 하기 싫고 어지르는 쪽이라 이 글을 읽고 좀 부끄러웠어요. 저 때문에 남편이 좀 힘들 것 같아서요. 근데 살림 넘 싫고요ㅠㅠ 초반에 살림 갖고 많이 싸우다가 잘 정리가 되어서 이젠 그냥 그냥 사는데, 언젠가는 남편이 일 관두고 살림을 전담해주면 좋겠어요.
짧은 글이지만 작은나무님의 분노와 짜증이 잘 느껴져서 공감이 확 되었습니다.
아 너무 공감되요 작은나무님. 다른 집 남자들을 봐라 나는 많이 하는 편이다. 저의 남편도 하는 말입니다. 청소도 쓰레기 버리는 것도 한다는 거죠. 그런데 주감독, 보조감독처럼 냉장고, 반찬 등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관리하는 건 제가, 보조는 남편이 할 때가 많아요. 그럴때마다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무리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결혼을 앞둔 많은 신랑 신부들이 읽어야 할 글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리 남편의 아바타가 작은나무님 댁으로 간줄 알았어요. 본인만큼 하는 남자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식사 때마다 옆에 와서 물어요 "뭐 할까요?" 아니 왜! 본인이 자발적으로 할 생각은 않고 혜원님네 가정처럼 보조 역할만 하려 드는지..구구절절 공감 가는 글이네요.
"두 눈을 부릅뜨고 내가 바라 봐야 할 것은 각종 한식 레시피가 아니라 가부장제가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끝 문장 좋아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