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서라산 자락,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던 무시무시한 괴담은 진실이었습니다. 수백명의 억울한 영혼들이 67년만에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박선주/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장: 맨 가장 자리에서 처음에 처형했을 때 그 사람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거기 흙으로 채우고 그 다음 사람들 처형하고 흙으로 매꾸고 이렇게 하면서 그러니까 여기가 입구는 넓고 밑으로 좁아지는 형상이기 때문에 밑에서부터 올라가면서 시신이 쌓여 있었는데 같은날 처형된 것 같애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그랬다는 거 보니까~
한국전쟁중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혐의로 재판없이 군인, 경찰과 지역 치안대에게 총상을 당한 민간인들의 유해입니다. 운동화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발가락 뼈들과 얼키고 설켜있는 수십구의 유골들은 그당시 참혹함을 발해주고 있습니다.
지난(2020년) 4월말, 발굴이 끝난 이곳에서는 약200여구의 유해와 탄두, 비녀, 장난감 등 약550여점의 유품이 발굴되었습니다. 유해발굴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졌지만 유가족들은 선뜻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김광욱(73세)/아산시 배방읍 유족: 좀 아쉬운 것은 현재까지 100여분이 나오는데 유족이 없다는게 안타깝습니다.
일부 증언이라든가 주민들 얘기로는 한 집안이 몰살을 했다 그야말로 청소를 하다시피해서 유가족이 없다는 얘기도 있고~
아산시 배방면에서는 1950년 9.28 수복이후 1951년 1.4 후퇴까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유해가 여자와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입니다.
박선주: 이런 경우는 처음 봤어요. 내가 몇천구를 발굴하였는데 다 감식을 하고 봐왔는데 아이하고 여자들만 희생이 되어서 나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인 거같애요. 한살부터 열일곱살까지는 일단 아동의 유해로 보는데 열살 내외가 한40~50명 되는 것 같애요. 이렇게 어린애들도 있잖아요. 유치가 겨우~ 겨우 나오고 여기 이런 건 한세살 네살 밖에 안되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은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자행되었으며 그 피해수치는 100만명으로 추정될 정도입니다. 2005년 발족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유해매장지는 168곳, 이중 단 14곳만 발굴이 되었습니다 (과거사 기본법제 개정촉구 범국민기자회견, 주최: 올바른 과거청산단체 준비협의회, 27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행사위원회, 주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장소: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 일시: 2018년 5월 3일 오후 1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들은 멈쳐져 버린 유해발굴과 명예회복을 위한 과거사법 통과를 외치며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위 삭발자: 저희들은 빨갱이 자식이 아닙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이라는 해방군이 들어왔습니다 (미군정 통치시작 1945.9.9). 그러나 그들은 점령군이었습니다. 군과 경찰의 요직은 당시 친일세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독립은 곧 분단을 의미했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이념으로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의 폭정과 경제적 궁핍은 일제 강점기 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폭등하는 쌀값을 안정시키겠다는 이유로 미곡 수집령을 발표했으며 그것은 강압적인 공출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인구가 급증했던 대구시, 쌀부족과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심각한 기아상태에 놓였습니다. 참다 못한 대구시민들은 대구역과 공회당을 중심으로 하나 둘 모여들어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민: 투쟁위원회 사무실이 공회당 옆에~ 다 공회당 자리입니다.
1946년 10월 1일(대구 10월항쟁), 경찰은 미군정의 식량정책에 항의하는 대구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2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시위는 강경 진압되었지만 이로 인해 7500명의 노동자와 학생이 검거 구속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구 10월항쟁입니다.
고희림/대구 10월문학회: 공장의 노동자들이 뛰어나와서 인간답게 살고자 외치고 거기에 미군과 친일경찰이 발포를 하고, 죽고~
함종호/4.9 인혁재단 상임이사: 당시 분위기는 대구시의 분위기가 정말 해도해도 너무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이 노동자 시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은 대구 시민들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요.
김상숙/前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민간인 학살사건의 뿌리는 저는 1946년 10월 항쟁 때 부터다 라고 생각을 해요.
대구 10월 항쟁은 인근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미군정은 시위를 진압한다는 목적으로 경찰은 물론 지역 극우단체를 동원해 이념갈등까지 부추겼습니다. 이것이 제주 4.3항쟁(1948.4.3)과 여순항쟁(1948.10.19)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민중항쟁이 들불처럼 이어지자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반체제 세력을 제거하면서 민간인학살을 시작하였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되었습니다. 전쟁발발 소식을 들은 이승만 정권은 긴급조치 1호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발표한다. 이것은 이후 이루어질 무자비한 학살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성모 당시 국방장관과 채병덕 당시 참모총장). 국방장관 신성모는 이승만을 데리고 전쟁발발 46시간만에 쥐도새도 모르게 비상열차를 타고 피난을 갑니다. 이어진 한강 인도교 폭파(1950.6.28), 이로서 서울 시민들의 피란길은 막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후 경부라인을 따라 국군과 경찰은 믿기 힘든 참혹한 학살을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망루만 남아있는 옛 대전형무소(대전광역시 중구 구대전형무소),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는 좌익사범과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관련자들 6천여명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특별조치령으로 전국 16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23,399명이 일제히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이것이 형무소사건입니다. 그러나 당시 남한에서는 전쟁전부터 빨치산 토벌과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광범위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대전광역시 동구 남월동 흔히 고령골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세상에서 제일 긴 무덤이 있습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수천명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김종현(81세)/대전 산내유족회장: 저도 우리 아버지가 참 나쁜 사람인줄 알았어요. 저더러 아무 것도 못하게 하고 그냥 꽁꽁 묶어놓고 그랬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진실-화해(위원회규명자료)를 보고 아 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었구나.
문양자(75세)/대전 산내유족회: 이게 우리 아버지 사진이고요. 여기 저 사진하고 이 사진하고 같지 않아요? 양쪽에서 팔을 아버지 팔을 양쪽에서 잡더라구. 데리고 나가는데 아무말 한마디도 못하고 하여튼 그래서 내가 따라나가니까 조금 따라 나갔는데 뒤에 가는 사람이 뒤돌아서서 내 등을 두드리며 아가 집에 들어가 아버지 내일 모레 오셔. 그러더라구요. 그걸로 그냥 끝이었고 아버지 하고는 할머니가 이제 아버지 소식을 듣고 그냥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는 자결을 하셨어요.
윤정희(73세)/대전 산내유족회: 우리 아저씨가 한씨인데 공무원 연좌제 걸리니까 집에 들어와서 빨갱이 자식이라고 그 소리를 두번 들었어요. 저한테 그래서 제가 이혼했어요. 이혼 소송해가지고 그렇게 평생 혼자 살았어요.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고 빨갱이 그리고 제가 빨갱이가 뭔지는 몰라도 나는 그 소리는 못듣겠다.
1950년 6월 28일부터 시작된 골령골의 학살은 참혹했습니다. 1999년 미국 법무부에서 공개한 이 사진은 세상을 놀라게 했는데요. 긴 구덩이를 파놓고 구덩이 앞에 재소자들을 엎드려 눕힌 다음, 뒤통수에 총을 쐈습니다. 철저한 확인사살까지 이 참혹한 방식은 이후 모든 학살에 적용되었습니다.
유족대표: 이 무덤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그런데 지금 현재 이 무덤 끝에서 한 200미터 되는 골짜기 구덩이를 파고서 학살을 했어요. 그래서 이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은 지금 한 30미터에서 조금 넘도록 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무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이것을 저희들이 땅을 임대를 했기 때문에 이제 무덤을 만들었어요. 저 밑에는 발굴을 하려고 해도 토지 소유주와 협의를 해야 발굴을 하고 그래서 저희들이 시굴을 해봤어요. 해 봤더니 한 200미터 가깝게 까지 유골이 나와요. 이 골짜기, 이 좁은 골짜기에 그 당시 한 7000명이라는 그 많은 인원을 학살을 했으니까 이 골짜기가 무덤이 아닌 데가 어디 있겠어요? 지금 현재 저희들이 추측할 때 여기서 이 구덩이는 약 한 1000명 정도가 여기 한 장소에서 학살되었겠다 하는 것을 저희가 추정을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앞에 유골이 있냐? 고 그러는데 여기도 지금 우리가 기계로 발굴을 하는게 있어요. 여기도 하나, 둘, 셋, 네 줄이 이렇게 유골이 묻혀 있는 것 같애요. 그리고 또 그 기계가 묻혀 있다고 반응을 하고, 여름에 풀이 나서 보면 이렇게 줄에 풀이 새파랗게 자라올라온다고~
기자: 여기 무덤 있는 이쪽도 다 발굴을 한 지역인가요?
유족대표: 발굴 안했어요. 저쪽 끝에만 조금 발굴을 하고 여기는 이제 (매장예상) 장소다 해가지고 무덤을 만들어 놨지.
기자: 그러면 여기도 지금 파면 다 이렇게?
유족대표: 유골이 나오죠,
기자: 이렇게 핏물이 강물처럼 막 흐르고 그랬다고~?
유족대표: 네, 왜 그러냐 하면 여기 학살지, 저쪽 학살지 그러니까 사방에서 이렇게 내려오니까 여기 개울이 있잖아요.
기자: 예
유족대표: 이렇게 내려갔다는 거지~ 그러고 그저~ 학살하고서, 뭐 근 1년 동안은 여기 사람도 못들어왔다는 거예요. 냄새 나고~ 무섭고 그래가지고,
한국전쟁 직전 이승만 정부는 좌익과 반체제 인사들을 관리하겠다는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습니다 (保 지킬 보, 導 인도할 도).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 지지하고 북한정권을 절대 반대하는 내용을 주요 강령으로 삼았습니다. 지역 할당제가 있어 일반인까지 포함되어 가입자는 약 34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보도 연맹원들도 학살대상에 예외가 없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피해자는 최대 3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은 이런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일까요.
한홍구/반헌법 행위자 열전편찬위원회: 혹시 북쪽에 대한 사회주의 이념을 선호하고나 기웃거리거나 남쪽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을 싹 쓸어버려야 자기가 통치를 안전하고 확실하게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 어떤 이승만이 자기가 만들려고 하는 그 체제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 시켰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제거된 사람들이 꼭 좌익이 아닙니다. 진짜 좌익은요 북으로 갔거나 산 속으로 들어 갔죠.
경산 코발트 광산(경상북도 경산시), 이곳은 국민보도 연맹사건 최대 피해지역입니다. 일제가 전쟁물자로 코발트를 채취하고 우리 민족을 수탈했던 곳으로 한국전쟁 직전 폐광된 곳입니다. 귀신이 많이 나온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로 기가 센 지역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지난 2007년 코발트 광산의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1950년 7월초부터 9월까지 약 두달간 대구형무소에 있던 수감자와 경상도 영동 보도연맹원 약1800여명이 이곳에서 희생당했고 60여년간 뭍혀 있었습니다.
최승호/경산 코발트광산유족회 이사: 쥐도 새도 모르게 끌고와서 학살을 한 거죠. 학살을 하다가 굴이 꽉 차자 이 골짜기에도 사살해서 묻고 이 전체가 백자산 아래 이 산 전체가 학살 현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무덤이고 학살이 일어나고 나서 대원골 골짜기의 물이 벌겋게 흘러서 3년 동안 흘러내렸다고 그러죠. 이 물로 쌀농사를 지어서 밥을 하니까 밥에 비린내가 날 정도였다. 여기가 이제 수직굴이에요. 수직굴하고 수평굴이 이렇게 만나는 지점인데 여기 안에 수직굴에 있던 유해들이 이제 굴이 무너지면서 유해들이 바깥으로 쓸려내려 온거죠. 희생당한 시신들을 수직굴에 떨어뜨리고 입구를 막았습니다. 압력에 눌린 시신들이 수평굴로 밀려 나왔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실규명을 위해 발족한 진실화해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곳에서 약420여구의 유해를 발굴했습니다. 과거사는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는데 더 이상 발굴은 진행되지 않고 장비들만 남아 녹쓸고 있습니다. 코발트 광산 취재중 경산시에 살고 있는 이광달씨를 만났습니다.
이광달(76세)/대구 가창골유족: 방 한칸을 이용해 부모님 추모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제가 괴롭괴 외로울 때 늘 아버지를 만나뵙니다. 절하고~
이광달씨의 아버지 이원식씨는 항일운동과 건국운동을 주도하면서 요시찰 인물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원식씨는 예비검속을 피했습니다.
이광달: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저를 뭐 아버지 있는 데를 가르쳐 달라고 어르고 달래고 온갖 방법을 다했어요. 하다가 나중에 안되니까 날 집에 목욕탕에 거꾸로 집어 넣기도 하고~
대살, 대신 죽인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찾지 못한 경찰은 어머니를 끌고 갔습니다.
이광달: 어머니와 저녁을 같이 먹었어요. 그날 어머니한테 받아 먹은 저녁이 마지막 저녁이었습니다. 새벽에 차에 실려서 가창골에 가서 총살당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어머님 무덤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천추의 한을 갖고 있습니다.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이광달씨가 알아온 역사가 담겨져 있는 자료들이었습니다.
이광달: 이거는 유족회 생기기전에 다 한 것들입니다. 일부러 만들 수는 없는 일이고요.
1960년 4.19 혁명 이후 이원식씨는 한국전쟁 피학살자 유족회를 결성했습니다.
이광달: 이것도 아버지가 다 쓴 글씨입니다. 당시에 기계도 없고 나하고 아버지하고 밤을 새워가며 쓴 것입니다.
의사이자 사회운동가인 이원식씨는 전쟁 직후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발굴과 명예회복을 위해 활발한 진상규명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이광달: 이제 어머님께서 그렇게 무덤도 없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으니까 4.19 나고 아버지가 피학살자 유족회를 실질적으로 전국적으로 주도를 했습니다. 주도를 하시는데 모든 행사의 모든 것을 아버지 자비로 했습니다. 그 당시 어느 누가 해줄 사람이 있습니까.
참혹한 현장이 드러났고 유골과 유품의 상태는 지금보다 온전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유족들이 몰려들었고 당시 접수된 신고는 113만건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좌익전력이 있었던 국가재건회의 의장 박정희는 유족회 활동도 좌익활동으로 규정했습니다. 한국전쟁 민간인피학살자 유가족 모임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구속시키고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1962년 2월 10일 한국일보기사).
이광달: 서울형무소 지하감방에서 그것도 그 겨울 추운데 수갑도 뒤로 차고 지하 감방 독방에서 4개월 계셨다고요. 그러나 다행스럽게 대구사범학교 4년 후배였던 박정희 의장은 이원식 선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습니다. 이후 10년간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광달: 무기로 감형돼서 25년, 25년에서 20년, 15년, 10년, 이래 가지고 옥고 10년만에 나오셔 가지고 또 1년여 후에 사회안전법으로 재판도 없이 또 아버지 들어가셔 가지고 나중에 알아보니 대전교도서에 가계셨던 거라. (社會安全法-특정 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을 예방하는 한편, 사회복귀를 위한 교육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보안처분을 함으로써 국가안전과 사회안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법률). 이게 무슨 일이냐? 하니까 사회안전법으로 국가가 이렇게~ 나오셔 가지고 몇 달 안되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죠.
생전 이원식씨가 그렇게 진상규명하고 싶어했던 대구 최대의 학살 피해지역 가창골, 박정희 정권은 이곳을 굴착기로 밀고 댐을 건설해 버렸습니다. 인근 중석광산 피해지역에 목격자가 생존해 있었습니다.
서상일(89세)/가창골 학살현장 목격자: 사이렌이 불고 통행금지 시키고 그리고 차가 올라왔어요. 전원 앉혀 놓고 이쪽에서 먼저 경찰들이 사람들 위에 총살시키니까 사람들 결국 개울로 떨어져 내려 갔습니다. 죽어서 시체가 들어난단 말입니다. 시체 위에 폭발을 시켜가지고 묻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또 그 위에다 죽이고~다 죽이고 나니까~ 이제 화약고로 올라갔어요.
당시 대한중석 총무과 직원이었던 서상일씨는 그날의 참상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경찰의 강압으로 시신처리를 담당했습니다.
서상일: 불을 안지르면 총을 한방 쏴서 죽었으면 그냥 놔두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몇 발을 더 쏘았기 때문에 창자가 터져 나오고 골이 부서진 사람도 있고 그걸 이제 암매장을 하라고 해서 했어요. 총을 가지고 있고 입만 떼면 같이 죽인다 해서 내가 어리고 다른 사람도 나이만 많을 뿐 두려워서 말을 못했어요, 여기는 사람이 안와요. 귀신이 나온다고 해서~
괴기한 소문이 돌아 인적이 드문 이곳도 발굴을 하면 유해가 나올 것이라고 증언을 했습니다.
기자: 여기서 몇 명이나 죽였을 까요?
서상일: 한 120명, 차로 네차 가까이 죽였어요.
기자: 여기서먄 네 차 정도~ 파면 지금도 유골이 나오겠네요?
서상일: 나오지~ 내가 어디 있었나 하면 저 봉우리~ 저 봉우리~ 저기 있지 않습니까 저기 경비초소가 있었어요.
기자: 그때 거기서 여기 학살하는 장면을 다 보셨어요?
서상일: 다 보았지~ 뭐라고 입 떼면 죽이는데~ 벙어리가 되어야 돼~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인민공화국 만세 하는 소리 못들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속으로 사상가가 아니다. 진실하게 사상가가 아니다 하는 그런 판단이 들지~
참혹했던 그날의 기억, 서상일씨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서상일: 두들겨 패서 되게 두들겨 패고 하면 말로 뭐라고 하겠어요. 안했다 하는 소리가 계속 안나옵니다. 아프면 아야 소리만 하고 그뿐이지 다른 거 있어요? 그래서 다 죽였다고~ 억울하지~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정부에서 즉각 보고 하기 전에 유골발굴 해가지고 여기에 대해서 대안이 있어야 되는데 대안없이 복구부터 먼저 해 버리고 말이야 그러니까 유골은 유골대로 파묻혀 버리고~ 어디 가있는지 모르고 그 주위에 있는 것만 알지~ 어디에 가 있는지 그걸 모르는 거야.
한국전쟁 민간인 피학살자 유가족들은 누구나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살겠지만 누구보다 더 기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강진상씨, 10살이라는 어린 나이, 그날 겪었던 일은 남은 평생에 짐이 되었습니다.
강진상(78세)/합천 삼가면 유족: 아버지가 3대 외동에서 우리 5형제를 두었는데 때 아닌 6.25 사변이 일어나면서 보도연맹에 연루가 되어가지고 아버지가 경찰한테 총살을 당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총살당한 곳에 찾아가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해 가지고 매장을 했는데 시신 수습해서 매장했다는 그 죄로 어머니도 그 다음날 바로 총살을 당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시체도 못찾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 산소가니까 검은 넥타이를 매고 가야죠.
마을 이장으로 봉사와 나무심기로 바빴던 강진상씨의 아버지는 반강제적으로 보도연맹원이 되었다는데요. 방아재에서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일행 45명은 1950년 7월 끌려가셨습니다.
강진상: 줄줄이 손을 앞으로 묶지도 않고 뒤로 묶어 가지고 뒷줄을 가지고 뒤에 사람 연결하고 또 연결하고 이렇게 연결해 가지고 줄줄이 끌고 가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사이에 끼여 있더라고 목격한 이가 있었습니다.
올해 나이 80줄의 강진상씨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 날, 어머니와 어린 강진상은 이곳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했습니다.
강진상: 이 자리입니다.
기자: 당시 그 자리에 오셨는데 그 당시의 기억이 나세요?
강진상: 아이~ 환하게 나죠~ 내 지금 죽어도 그거는 잊지 않고 환하게 알지~ 46명을 여기다 쏟아 놓고~ 흙을 덮었는데 두껍게 안덮이니까 무릎도 올라오고 팔도 팔꿈치도 올라온 걸 내가 봤으니까 요자리에서 이렇게 깊지는 않고, 그 당시에는 여기 많이 파여졌어요~ 저쪽 높이가 이쪽 높이와 비슷했는데~ 내 남편이 총살 당해 가지고 죽었는데 가만히 들어누워있을 부인이 누가 있겠어~ 당장에 달려가 확인해야지~ 엄마가 아버지 시신 찾아다가 묻은게 죄야,
큰 비에 여러 번 유실되어 유해는 더 이상 많이 있지 않습니다.
강진상: 아버지 총살 당한 장소~ 시신 찾아 묻었다고 엄마 총살당한 장소~ 그래 여기가 한이 맺힌 장소야 내가 죽기 전에는 잊을 수가 없는 장소야. 지금까지 고생하며 살아온 것도 이 일 때문인데, 이게 전부 정부가 잘못해서 내가 고생하며 살아온 거예요.
하루 차이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은 강진상씨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공부도 취업도 할 수 없어 머슴살이를 하며 살았습니다.
강진상: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기럭 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부르며 날아 갑니다
아군과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공방전을 계속하고 있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감행했습니다. 전세는 역전돼 국군과 유엔군은 9월 28일 서울을 탈환했습니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여주시~
김영구(87세)/당시 여주지역 치안대: 사람이 꾸러미로 또 죽었어 묶어서 이 뒤에서 질질 끌고 간 거지 여주경찰서로 간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먼동이 트기 전에 전등을 들고 데리고 가 그리고 한 100미터 밑에서 삽 들고 가서, 장풍리 그 골짜기, 일부는 가고 저 고산리, 거기 가서 총으로 쏴서 다 죽이고, 죽인 다음에 삽으로 파서 묻어, 대충 묻어~
이곳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있었습니다.
정병두(79세)/여주시 유족회장: 여기, 저 나무 숲 저기 거든, 여기가 으슥하잖아, 여기 들어오면 무섭지~
기자: 이쪽이 말씀하신 장풍리인가요?
정병두: 여기 여기가 장풍리 골짜기~
장풍리 골짜기라 불리는 이곳에서 200여명의 여주군민이 경찰들에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신기철/금정굴 인권평화재단 소장: 9.28 수복 후에 부역혐의로 대신지소에 갇혀 있던 분들, 지소가 여기서 가깝거든요. 그분들 끌고 와서 여기와서 총살 했죠. 1950년 10월 한달 정도 걸려서 총살이 이루어졌던 곳이죠. 그때 200여분 돌아가셨다고 얘길 하고, 이 옆에가 군부대인데 군인들도 주둔했다가 귀신들이 많이 나와 가지고 무서워서 철수한 일이 있었어요. 유명한 이야기인데, 마을 사람들도 밤이면 여기 가지 말라는 얘기들이 공공하게 있었고요.
기자: 지금 여기 약간 으스스하네요.
인민군이 점령했던 석달 동안 인민군을 도와 부역했다는 이유로 희생을 당했는데요. 전쟁이 끝나고 60여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곳은 전쟁의 恨을 품고 있습니다.
신기철: 여기서 사람이 수습된 적이 한번도 없고요. 그때 돌아가신걸 알면서도 아무도 찾아오지 못했던 곳이죠. 그러니까 유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죠.
기자: 여기서 그냥 파면 유골이 그대로 나올까요?
신기철: 위치만 정확히 잡으면~ 그대로 나올 것이라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역혐의 민간인 학살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9월 중순부터 10월까지 전국에서 자행되었는데, 당시 내무부 치안국 비상경비사령부에 따르면 부역혐의자는 약55만명, 그 중 2만여명을 제외하고 석방했다고 하지만 살아남은 주민들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부역혐의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종교에 귀의해 트라우마를 이기고 있다는 여주의 한 유족은 이곳에서 아버지가 희생당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은 강변에서 학살하고 시신을 강으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이인수/여주시 유족회 사무국장: 그런데 여기는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당시에는 다 강을 이루고 있었으니 다 벌써 떠내려 가거나 유실되었을 확률이 크죠~
박치용(75세)/여주시 계산리 유족: 그러니까 옛날 지형하고 지금은 바뀌어진 입장이기 때문에 지금 만약에 그때의 상태라면 지금 여기서 땅이라도 파면~
최영섭(76세)/여주시 유족회 부회장: 근데 내가 이쪽 지리를 알거든요. 옆에 복대리에 살았으니까 해마다 장마가 지면 강물이 이쪽으로 들어오게 돼요. 내가 여기 살 때는 강물이 아마 이쪽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생각돼요 그러니까 만약에 학살이 되었으면 그분들은 다 유실이 되었지~
박치용: 나중에 들리는 소리가 우리 어머니가 그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새끼줄로 줄을 이어서 이리로 끌고 가다가 계산리 강변에서 죽여버렸다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가슴이 기가막혀 지금 여기에 혹시라도 있으면 내가 파고 싶은 심정이지 그런데 그럴 수 없으니까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오지 못해서 그렇지 저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살아오면서 평생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발표하자 내가 제일 먼저 가서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죽었노라고 해결해 달라고 다른 사람들도 너나할 것 없이 다 같은 입장이야 그래서 다 나와야 돼요.
두만강과 압록강, 억울한 희생은 끝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이 개입한 1.4 후퇴를 계기로 더 참혹한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부역자의 가족입니다. 부역자의 씨를 말려라 아녀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학살을 당한 현장입니다.
장선식(93세)/아산시 배방읍 유족: 여기는 아~ 68년만에 처음 오는 거야
기자: 68년만에요?
장선식: 아~ 여기 처음 왔지, 무서워~ 오면 죽이는 걸, 여기 오면 죽였는 걸~
1951년 1.4후퇴 때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시어머니와 어린 조카를 이곳에서 잃은 93살의 장선식 할머니~,
장선식: 시어머니는 이내정, 우리 조카 딸은 맹광순 아홉 살, 그렇게 사는데 고통스러워, 기자 양반이니까 이왕지사 그때 죽인 사람들 찾아가지고 내 앞으로 다 끌어다 줘, 따귀라도 한대 패보게 아주 분해요, 왜 죽여~ 글쎄 시어미, 시아비 죽여봐, 기분이 어때~
부역자 가족을 색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신 중이었던 장선식 할머니는 시아버지와 잠시 몸을 피해 죽음을 면했다고 합니다.
장선식: 여기서 어떻게 60년을 넘도록 살았나 몰라
유복자 아들과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숨죽인 채 살아온 세월,
장선식: 보상 내놓으라 그래,
장선식의 아들: 저 표지판 바로 밑에가 원래 구덩이인데 여기에서 200여명의 유골이 한 군데에서나온 거에요. 엄마 천천히 내려가서 또 떨기 시작하네.
장선식: 어린 것이 뭘 알아 그걸 갖다가 그렇게 그 가해자들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도 있을거야.
아들: 다 죽었지~
장선식: 세상 이렇게 살아서 너무 오래 살았다, 이렇게 이런 꼴 보려고 오래 살았나 봐, 아이고 아주 분해, 지금도 생각하면 아주 분해, 나도 성질이 없지는 않은데~ 누구든지 경우에 틀리는 건 하지 말아야 해, 내가 서운한 게 낫지, 남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지, 못써
기자: 얘기만 들어도 너무 가슴이 아파요, 할머니
장선식: 그러니 당한 사람들은 어떨 것 같냐 이거야~ 집안 망한 사람 많아
아들: 봐요, 여기가 원래 구덩이거든,
장선식: 아이고 생각하면 그냥 그 어린 것 하고 늙은이가 뭘 안다고,
아들: 엄마, 울지마
장선식: 그 어린 게 얼마나 겁이 났겠어, 아홉살 먹은게 어떤 놈인지~살았겠지, 살았지~, 그 뭔 놈인지 다 죽었겠어 가져다 놓고 다 그만두고 내가 징역을 가더라도 XX 버릴테야 아주 밤에 잠을 못자고 옷을 못벗고 잤어, 뭐가 오면 시아버님 때리고 도망가고, 이 어린 것 데리고 도망가려고 그래서 지금도 밤에 잘 때 옷을 못벗고~자, 밤이라도 낮이라도 금방 와가지고 나오라면 끌고 가서 죽일 것 아냐~ 그런데 나는 젊으니까 얼른 뛰지만 시아버지는 연세가 있으니까 뛰지 못하잖아 불쌍하잖아, 시아버지 안불쌍해? 아버지 자식 다 잃었지 마나님 잃었지 손주 잃었지~ 앓다 죽어도 원통한데~ 생죽음 당하고~ 여기 오니까, 이 팔 다리~ 우리 시아버지가 여기 까지 왔었대, 마나님이 여기 있으니까, 보니까~ 다리가 나온 사람 팔이 나온 사람, 손 내민 사람, 죽일려고 그랬으니까, 다 불러서 이렇게 죽이고 나서 이제 흙으로 덮으니까 비가 오고 그러니까 그게 손도 나온 사람 있고 다리도 나온 사람도 있고 그랬던 모양이야~
지금은 다시 매워져 흔적이 없지만 죽음 사이로 파릇파릇 풀이 돋아났습니다. 너무나도 살고 싶었던 그들의 원혼일까요 (부역혐의사건-1951년 1월경 경찰이 향토방위대장과 공모해 좌익관련자나 그 가족, 부역 혐의자 등 200여명을 마을 방앗간에 가둔 이후 인근 폐광산에 끌고가 전원 총살하고 시신을 부근 금광에 유기함 (유해매장 추정지),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 폐광산 일대 위 장소는 1951년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부역혐의 사건의 집단 학살 유해매장 추정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2008.12.18.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장 아산시장
아산시 공설봉안당에서는 발굴된 200여구의 유해 안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사회자: 200여분의 유해를 발굴 했는데 저희는 이분들의 이름을 모릅니다. 직업도 모르고 어디서 어떤 일을 하시다가 그렇게 희생되셨는지 조차 다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면 이 분들은 전쟁 시기 1951년 1월 경에 동일범에 의한 동일장소에서 동일한 수법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살해되고 67년 동안 유기됐다는 사실입니다.
유족(할아버지): 아버지, 불효자를 용서해 주세요.
유족(할머니): 아이고, 어머님, 이제 이 세상 엉겨붙어 아픈다리 팔다리 다 펴놓고 좋은 대로~ 여러분들 다 좋은 대로 가고 이렇게 해준 양반들 말도 못하게 고맙습니다. 다들 뭐라고 할 수가 없어요. 고마워요 아이고~ 이런 세상은 또 다시 오지 않도록~ 수고 하시고 고맙습니다.
사회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국전쟁 희생자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할머니의 눈물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선주: 처음 발굴 시작할 때부터 감식할 때 그리고 보고서를 쓰면서요.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습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저 김광옥 유족께서 아버님을 부르시면서 슬피 우셨을 때 저희가 장말 죄송했습니다. 찾아드렸어야 되는데 이것으로 저의 인사의 말씀을 다 하겠습니다.
아산에서 발굴된 유해는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모시는 세종시 추모공원에 편안히 안치됩니다. 아직 발굴 되지않은 그 수많은 유해들은 언제쯤 수습될 수 있을까요.
김선희(69세)/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 사무국장: 과거사 기본법은 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잖아요. 언젠가는 이 학살의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 합니다.
윤호상(72세)/민간인 피학살자 유족회장: 지금 국가의 의지 부족입니다. 또 과거사를 은폐하려는 세력들이 소위 가해자들입니다. 가해자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얘기죠.
가해자, 그들은 누구일까요. 이미 모두 사라져서 사법처리가 힘들지만 적어도 그들이 누구인지만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BS 다큐시선 63회 6.25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서 정리).
① 1946년 2월, 김일성 북한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최고지도자로 추대, 권력을 잡은 김일성은 건국(建國)전에 지주 땅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분배, 토지개혁 전격 실시,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북한만을 보더라도 인구의 75%가 농민, 75% 가운데 40%가 토지 없는 소작농 이거나 소농들, 그런데, 인구의 대다수는 해방 이후 조선의 첫번째 목표 건국, 건국 못지않게 다수의 농민들은 자기 땅이 필요, 자기 땅에서 경작하는 열망을 가진게 농민, 그런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토지분배 과제가 가장 컸다. 문제는 토지개혁을 국가 수립 후에 해야 했는데 김일성은 급진적으로 먼저 시행, 당시 북한의 농민들은 토지개혁후 가구당 보통 4천평 정도의 토지소유.
② 토지개혁은 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개혁을 해버리면 한반도 전체를 생각했을 때,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이 주둔한 상황에서 하나의 나라를 만들려면 같은 방식의 토지개혁 필수, 그런데 북조선 김일성이 정부도 수립되기 전에 임시인민위원회 시절에 이 토지개혁을 해버렸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해버리니까 이제 남쪽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건 분단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원인, 북한 김일성이 너무 성급했다. 토지개혁의 방식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남쪽과 조율없이 한게, 결국 남북분단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③ 현재까지 북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만 가르쳐왔지, 한국의 근현대 독립운동사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광복군, 조선의용대, 한국독립군 이런 걸 김일성은 북한 청년들에게 하나도 가르치지 않았다. 김일성의 무장투쟁은 독립운동사 중에서 극히 작은 한 부분인데, 해방후 70년 동안 북한에서는 이게 everything이 되어 버렸고, 남한에서는 이게 nothing이 되어 버렸다. 남북한 역사학자들은 만나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상호 조율하여 균형있는 역사를 가르쳐야 된다.
④ 1948.10.19.밤, 제주 4.3사건진압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경찰과 우익인사들을 죽이며 5시간만에 여수를 장악한 군인들은 다음날, 바로 순천까지 장악한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어렵살이 창설된 군이 국가를 향해 총뿌리를 겨눈 것이다.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것, 진압을 위해서 출동을 해야 하는 군인들이 우리는 출동할 수 없다. 우린 진압할 수 없다 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 그러니까 여수군인반란을 얘기할려면 제주4.3을 이해해야 된다.
⑤ 1948.10.19. 저녁 7시 50분, 비상나팔소리에 연대원 2700명 정도가 연병장에 집합, 이들은 그날 저녁 10시에 제주도 출병을 앞두고 있었다. 이때 봉기를 계획했던 사람 중에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가 사열대에 뛰어올라 외친다.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그렇게 반란은 시작됐다. 반란군은 저녁 8시쯤 모여서 무기를 다 획득한 다음에, 다음날 새벽 1시에 여수 경찰서를 습격한다. 반란군과 경찰이 시가전 전개, 새벽 3시쯤에 여수 경찰서 점령, 그리고 여수 시내의 읍사무소 등 주요 기관을 점령을 해서 인공기를 내건다. 단시간에 여수를 점령한 14연대는 파죽지세로 순천으로 달려가서, 순천쪽에 파견나와 있던 남로당원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던 2개 중대, 인원 2, 3백명 정도는 14연대와 합류하고 순천경찰과 대치, 순천경찰은 반란군에 맞설 추가 병력증원 요청, 그래서 광주에서 제4연대가 이동을 한다. 그런데, 광주 4연대는 순천경찰의 편에 서질 않고 바로 14연대와 합류한다. 반란군과 한 통속이었다. (참고로, 이로 인하여, 현재 대한민국 군에는 4자가 들어가는 연대번호를 쓰지 않는다, 왜냐면 14연대와 4연대 둘 다 4자가 들어가는 반란의 역사, 4자라는 숫자의 나쁜 이미지 때문이다).
⑥ 국가가 유지 될려면 돈과 이데올로기와 물리력인데,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물리력이 여순 군인반란사건으로 흔들렸다. 이 사건이 그래서 중요하다. 소련군과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 건 일본의 항복을 받고 정부수립이 되면 나간다. 소련군은 12월에 나간다 (1948.12.25). 미군도 더 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어서 12월에 나가야 된다. 그런데, 미군정의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는데 물리력이 불안하다. 미국이 지금까지 노력한게 물거품이 된다. 그래서 미군 철수가 1949. 6월까지 연기된다. 이게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됐다.
⑦ 김구 선생은 남북협상차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 두 가지 약속을 받았다. 첫번째, 남한에 대한 전기를 끊지 않는다, 두번째, 남쪽에서 정부를 세우더라도 북쪽은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는다. 그런데 김일성은 하나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김구는 김일성에게 속았고 배신당했다.
⑧ 1948.10.21. 군은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 방위를 위한 수도권 부대를 제외한 대전 이남의 모든 부대를 전남지역에 투입, 그런데 우리군은 연대급 이상 전투경험이 없었다. 부대들 간의 합동작전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지휘계통의 혼란이 왔고, 통신장비가 미비하여 정확한 상황 전파, 명확한 명령 전달에 문제가 생겼다. 심지어는 아군끼리 서로 적군인 줄 알고 오인사격까지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22일에 순천을 탈환하고, 10월 24일에 보성과 벌교를 탈환하고, 그리고 여수가 남았는데, 마침내 10월 27일에 여수를 탈환한다. 여수탈환을 계기로 우리군은 상륙작전을 전문적이고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해병대를 1949년 4월 15일에 창설한다.
⑨ 우리군에 의해 패배한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했기 때문에 반란군을 상대로 지리산 토벌작전, 즉 빨갱이 섬멸작전을 전개한다. 반란군이 빨리 진압된 걸로 봐서 우발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여순반란 사건 2~3일간 반란군에 의해서 지방지주들이나 관료들이 많이 살해당하였다, 심지어 군청 경찰서장이 구타를 당한 뒤에 산채로 화형을 당하였다,
⑩ 반란군이 여순을 장악한 상황에서 벌교 같은 경우는 반란군과 소작인들에 의해서 대지주가 죽임을 당했고 이건 현재도 지주와 소작인들 간에 앙금으로 남았다. 반대로 당시 잔인한 반란군의 행태를 목도하고 그 보복심리도 상당해서 그 당시에 반란에 가담했거나 또는 인민위원회 재판을 열어서 우익이나 지주에게 가해를 한 사람들은 응징을 당하는 죽이고 죽이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당시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은 그게 죄라고 생각하지를 안했다. 이런 과정들이 결국은 비극을 더 키우게 되었다.
⑪ 사실 색출과정에서 지목을 안해서 살아난 사람도 있다. 이게 개인 감정으로 이루어지다 보니까 그 이후에 후유증이 굉장히 컸다. 그래도 나름의 심사기준은, 총을 소유한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자른자, 그리고 바지를 벗겨봐서 미군용 팬티를 입은 사람, 또 여수를 장악했을 때 인민위원회가 나누어준 하얀 고무신을 신고 있는 자를 색출해서 처형을 했다. 색출이 되면 즉결 사형당해진다.
⑫ 반란군들은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저항 중이었다. 그쪽 주민들은 굉장히 공포에 시달렸다. 양쪽에서 고초를 당했다. 낮에는 진압군에 의한 부역자 색출, 진압군이 떨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끌어내어 데리고 간다. 영길네도 나오더라고~, 남편이 입산 안했는가? (한 아낙이 끌려 나온다), 용강 아재! 아재 아들 내보냈지? (한 남자가 끌려 나간다). 代殺(대살)-입산자 가족 대신 처형, (또 한 남자 끌려 나간다). 아재는 빨갱이들한테 소 줬지? 내가 준 것이 아녀, 빼앗아 간 것이여! 밤에는 반란군에 의한 처형과 식량 수탈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