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그곳, 콜로라도
문민순
달이 유난히 밝다 했더니 오늘이 음력 열사흘이란다.
내 마음에는 지금도 휘영청 밝은 달이 하나 있으니 20년도 훨씬 전 나의 마음에 들어온 크고 밝은 달이다. 내가 콜로라도 덴버 시에 갔을 때 거기에서 보았던 달이다. 그때는 비행장의 크기도 미국에서는 제일이며 세계에서도 세 번째라고 했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의 천정이 무척 멋있게 느껴졌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팔레트에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고 그 밑엔 병풍을 깔아 놓은 듯 거대한 로키산맥이 삥 둘러쳐져 있었다. 특히 이곳은 사랑하는 아들딸이 유학 생활을 한 곳이라 그리움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높은 고도에 위치한 아름다운 곳이기에 감동을 더했다.
맑고 푸른 하늘이 일 년이면 300일 이상이나 됨은 높은 고도에 위치함일 테니 마일하이시티<mile high city>라는 또 다른 이름이 그럴싸하다. 여느 도시와는 달리 웅장하고 병풍처럼 둘러있는 거대한 산과 맑고 투명한 자연이 도시와 어울려 나를 흠뻑 빠져들게 하였다. 덴버는 콜로라도의 주도로 로키산맥의 동쪽에 접해 두, 세 시간의 트레킹코스가 많고, 로키스키장, 8월에도 흰 눈을 이고 있는 파익스피크 봉우리로는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가끔은 오로라도 볼 수 있는데 그때는 우주의 신비와 아름다움이 더해져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거기에 머무는 동안 토네이도가 올 때는 지하실로 내려가 두려워 떨면서 삶을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기도 해 그곳은 진정 신의 영역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콜로라도의 또 하나의 명물은 ‘콜로라도 달 밝은 밤에...’로 우리 음악 교과서에도 소개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달이다. 처음 달을 보았을 때 내 눈을 의심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한국에서 보았던 달의 20~30배는 족히 돼 보이는 멍석같이 큰 달로 말 그대로 달 덩어리였다. 지대가 높아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아주 가까이 느껴지기도 했다. 고산지대이기에 쟁반같이 큰 달과 함께 주변에 깔린 별은 쏟아지는 몽골의 별을 무색케 하고도 남았다. 선명한 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계수나무도 토끼도 볼수 있을것 같았다. 그런데 자연이 주는 경관과는 달리 내 마음은 차츰 편치 않았다. 이국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과 사람 사이에 느낄 수 있는 이질감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소외감이 엄습해왔다. 그런 밤이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을 달에게 속삭이곤 하였다. 달은 그런 나에게 싫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자존심이 무너지는 일로 짜증내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날에도 아무 말 없이 무던한 빛을 던져 주기만 했다. 갈 곳 없는 이방인처럼 뒤로 자꾸 밀쳐지고 서성거릴 때 나를 보듬어 주기도 요동치는 고통을 잠재워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나를 달래주던 달이 바로 콜로라도의 달이었다.
그 시절 콜로라도에는 말을 타고 다운타운 시내를 구경하는 관광이 있었다. 어느 날 특별대우라며 있는 대로 생색을 내는 아들을 뒤로하고 말을 타고 구경을 했다. 서부영화를 연상케 하는 별난 체험이었지만 인디언이 살았던 곳이어서인지 가히 싫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사람들은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각박하고 주위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우리네 삶과는 달리 자신들만의 삶을 충실히 살아 내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밖에서 보기에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들렀다. 여유 있게 담소하며 즐거운 표정으로 끼리끼리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다. 그런데 거기에서 ‘블루문’이라는 맥주가 있는 것을 보며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사춘기 때 ‘빨간머리앤’을 상기해 ‘앤’이라는 이니셜을 쓰다 ‘블루문’으로 바꾸어 쓴지 오래다. 그런데 거기에서 ‘블루문’이라는 맥주를 만나다니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웠다. 알고 보니 콜로라도의 유명한 맥주란다. 벨기에 스타일의 밀맥의 생맥주인데 곡물 냄새가 난 듯하면서 향이 싱그러웠다. 설명되지 않는 우연 이었지만 반가움이었다. 잠시 이것저것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의 달이나 그곳의 달이나 다를바가 없다. 먼 이국땅에 떠 있는 달은 지금도 변함없이 밤을 밝히건만 그때는 왜 그리도 외롭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어쩜 그때는 젊은 날의 향수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는 외롭고 아픔보다는 달처럼 둥글고 모나지 않게 살고 있는듯해 마음이 넉넉하고 풍요롭다. 연륜의 덕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은 콜로라도의 달이 외로움이 달이 아니고 그리움의 달이 되어 걸어온 길을 담담히 되짚어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