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정조의 능행차 전말을 소상하게 기록한 책. 행사장면과 행사에쓰인 도구들, 수행원행렬도 등 112쪽에 걸친 판화그림, 의식의 절차에 관한 기록, 능행차와 관련된 각종 보고서 및 문서, 음식종류와 식단, 그릇 목록, 지출한 비용 등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매우 소상하고 방대하여 생생한 역사자료가 되고 있다, 고증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나라의 의식에 문무백관이 차례로 늘어선 그림) 일부
이책은 1798년 사도세자 무덤을 화성으로 옮긴후 1800년 1월까지의 원행과 관련된 여러 사항을 정례화하여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왕의 명령을 소개한 전교에서 시작하여 어가를 따라간 백관과 군병들의 행렬배치와 복장,수행원 등에 관한 규정을 적고, 이어서 행차에 쇼요된 비용, 배다리 놓는 방법, 화성행궁이 여러 시설, 문무과 시험에 대한 규정등을 담고 있다.
정조께서1795년의 화성행차를 널리 후세에 알리기 위하여 궁중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의 주요장면을 그리게 하여 만든 병풍, 노량주교도섭도, 시흥환어행렬도, 득중정어사도, 서장대성조도, 낙남헌방방도, 화성서묘전배도, 낙남헌양로연도, 봉수당진찬도 등 능행차와 관련된 여덟 쪽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능행도』 중 일부
▶ 수원행행반차도(水原幸行班次圖)
정조 당시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불명의 15m 길이의 두루마리 그림 , 종이에 화려한 채색을 입힌 이그림은 행렬을 뒤에서 보는 후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김홍도 사단의 유쾌한 보고서 만들기
반차도(班次圖),시각화된 언어정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969년 [회화는 언어체인가?]라는 글을 통해 회화와 언어는 완전히 다른 구조물이라는 것, 때문에 이 둘 사이를 화해시킬 수 있는 좋은 번역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회화와 언어, 이 두 가지 다른 매체 사이에서 의미는 ‘끊임없이 되돌려 보내지고, 항상 이동’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림에 대해 만가지 말을 쏟아 놓는다 해도 그 말이 곧 그림이 될 수는 없으며, 말을 아무리 잘 도해(圖解, illustration)한다고 해도 그림이 말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는 이 불가능한 만남을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존재해왔다. 글을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종교화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효자도(孝子圖)]와 같은 유교적 감계화(鑑戒畵)들이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모두 특정한 ‘언어정보’를 ‘시각정보’로 전환하고자 노력했던 증거들인 셈이다.
1795년 을묘년에 있었던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반차도]도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그림이다. 왕이 직접 수원까지 행차한 국가적인 행사를 세세하게 기록한 책인 [원행을묘정리의궤]에 포함되어 있는 이 그림은, 조선 왕조 문화의 르네상스기라 일컬어지는 영,정조시기에 언어로 기록된 정보를 시각화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동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이 ‘시각화된 언어정보’라는 사실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몇몇 기록에 따르면, 왕실 행사를 기록한 언어는 너무 장황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이를 알기 쉽게 그림으로 도해할 필요가 있다고 적고 있다.
더욱이, 영,정조대에는 왕실 기록화를 왕이 직접 친견(親見)하는 관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반차도]는 정조에게 화성행차의 결과를 프레젠테이션하기 위한 시각 보조자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또한, [반차도]는 [배반도(排班圖)] 혹은 [문반차도(文班次圖)]라는 이름의 문자도로 만들어지기도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배반도]란 행렬의 모습을 문자로 표시한 것을 말하는데, 이는 [반차도]가 순수한 회화의 성격을 띠기보다는 정보 전달을 위한 시각자료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반차도]를 제작한 화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언어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있을까? 이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반차도] 자체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회화 형식이라는 점이다.
그저 기다란 두루마리에 수백, 수천의 행렬을 끊임없이 늘어놓아야 하는 것이 [반차도]인 것이다. 정조의 화성 행차라는 동일한 사건을 병풍 그림으로 재현한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와 비교하면 [반차도]가 얼마나 하품 나는 회화 형식인지가 단박에 드러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행렬의 장관, 이를 구경하는 백성들의 해학 넘치는 표정들이 돋보이는 [환어행렬도]에 비하면 [반차도]는 아무런 스펙타클도, 잔재미도 가미되지 않은 오락성 제로의 작품인 것이다. [반차도]가 공무원용 보고서라면, [환어행렬도]는 장대한 서사시에 가깝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795년작 [반차도]는 보는 이에게 담담하면서도 쏠쏠한 재미를 제공하고 있다. 유쾌한 공무원 보고서 만들기.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이 미션을 해결하기 위해 화원들은 어떤 필살기를 동원한 것일까? 일단 이 작업에 참여한 화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상전(賞典)’을 살펴보면 최득현, 김득신,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 당대 최고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2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회화의 슈퍼스타 단원 김홍도가 비공식으로 이 기록화의 총감독을 맡고 있었다.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또한 김홍도 화파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 김홍도가 누구인가. 당대의 시정 풍경을 가장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고 이를 감동스러울 정도의 해학을 가지고 묘사해낸 자가 아닌가.
이들이 착수한 첫 번째 작업은 [반차도]의 기본형으로 이어져 오던 인물 배치 방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또 다른 반차도인 [예궐반차도(詣闕班次圖)]와 비교해보면 이 작품에 나타난 방식이 얼마나 혁신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왕이나 왕비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되었던 인물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시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詣闕반차도]와 같은 전통적 방식에서 왕과 그 이외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 속에 놓일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계급 혹은 신분이라는 장벽이 가로놓여져 있었고, 왕은 중심 공간에, 나머지는 주변 공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이러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지금 다루고 있는 [반차도]에서 정조대왕이나 혜경궁은 나머지 인물들과 동일한 공간을 점하고 있다.
비록 신분적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림 상에서 만큼은 수평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전반 영조대에 제작된 [기사계첩(耆社契帖)]과 김홍도 자신이 1786년 반차도 형식을 차용해 제작한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에서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두 그림에서는 왕이나 왕비 같은 절대 권력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회화에 비해 지독히 보수적인 왕실 회화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시도는 놀라운 것이었다.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인물 표현의 해학성이다. 사실, 좁은 화면에 천 칠백 여명이나 되는 인물을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작은 인물들의 표정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이루기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홍도 사단의 드림팀은 이 어려운 작업을 하나하나 꼼꼼히 해나갔다. 앞서 언급한 [기사계첩]에서조차 중요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봉제인형처럼 아무런 표정 없이 처리되어 있다. 역시 영조대에 제작되었던 [대사례도권(大射禮圖卷)]에는 아예 눈코입 없는 몽달귀신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반차도]의 인물들은 활기가 넘친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각각의 얼굴 묘사는 개인의 개별성을 가능한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한낱 병졸 하나의 얼굴도 예사로이 처리하지 않는 이 노력으로 이 그림은 왕실 기록화이자 한 폭의 커다란 풍속화와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물과 말 등의 다양한 자세를 빼놓을 수 없다. 언뜻 모두 같아 보이는 인물과 말들의 자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포즈는 당시의 정해진 몇몇 패턴의 조합으로 이루어낸 것이긴 하나,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자칫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 [반차도]는 생기 넘치고, 유쾌한 작품으로 살아나고 있다. 18세기 후반의 회화세계를 주름잡았던 김홍도와 그의 영향 아래에 있던 화원들은 딱딱하고 공식적인 왕실의 언어를 한없이 정감 넘치는 화면으로 다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788년, 44세를 맞은 김홍도가 문사들의 모임에 참석한 뒤, 그 모임의 장면을 그린 [은암아집도(隱巖雅集圖)]에는 다음과 같은 찬문이 붙어 있다. “만약 그 자취를 그림으로 그려 뒷사람들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 모임의 훌륭함이 옛날 당시와 같았을 것이며, 우리가 다행히 태평한 시절에 태어나서 태평한 기상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반차도]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홍도를 위시한 화원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1795년에 있었던 장대한 행렬의 모습을 그저 머리 속으로 상상만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전의 [반차도]에 나오는 모습처럼 딱딱하고 생기 없는 행렬로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림은 분명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최선의 매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림은 언어가 전달하지 못하는 어떤 공백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림이 위치하는 곳은 바로 언어의 공백, 바로 그 지점이다.
사진설명
1 왕실 기록화를 왕이 직접 친견(親見)하는 관습은 18세기 이전에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그만큼 이 시기 왕실 기록화의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주된 용도는 아니었다. [반차도]를 포함한 의궤의 첫번째 목적은 왕실행사를 세세히 기록함으로써 이후에 있을 행사의 모델로서 기능하는 것이었다.
2 자비대령화원이란 1783년 정조가 창덕궁 규장각에 설치한 궁중화원 직제를 말한다. 이들은 도화서의 일반 화원들과 달리 국왕 주변에서 도화활동을 담당하며 특별 대우를 받았다. 김홍도, 이인문, 김득신, 이한철 등 조선후기와 말기를 대표하는 화원 화가들은 모두 자비대령화원으로 활약했다.
[글_김형진 객원기자]

[국조속오례의서례(國朝續五禮儀序例)]가례 배반도 중 [인정전진연지도(仁政殿進宴之圖)]
1744, 중요한 왕실 행사에 참석할 사람들의 대열과 순서를 문자 그림으로 표시해놓았다. [대사례도권]



위부터 [대사례도권] 제1장면 [어사도], [기사계첩] 제4면 [봉배귀사도],[정리의궤],[반차도] 중 일부
각 인물들을 살펴보면 [반차도]의 인물 표정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당시의 정보디자이너,화원 화가 김득신을만나다
이름은 김득신 본관은 개성이다. 자는 현보(賢輔)이며, 호는 긍재(兢齋)이다. 우리 집안은 유명한 화가를 많이 배출한 화원 집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도 화원에 들어가 초도첨절제사(椒島僉節制使)의 벼슬을 지냈다.
주로 작업한 것은 화원 내에서 그린 초상화나 왕실 기록물들이지만, 후대에는 오히려 여가시간에 틈틈이 그린 풍속화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화풍은 아무래도 단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내세울만한 작품으로는 [파적도(破寂圖)], [귀우도(歸牛圖)], [귀시도(歸市圖)],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 [신선도] 등이 있다. 참고로 1822년에 죽었다.
행사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윤2월 28일), 어명에 의해 의궤제작을 담당할 의궤청이 설치되었다. 도판을 그릴 화원으로는 나를 포함해,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직접 언명은 안되어 있지만 단원 선생님도 참여하셨다.
당시 무고한 모함으로 관직을 박탈당한 상태라 공식적인 직책을 맡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렇게 큰 일에 선생님이 참여하시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왕께서 따로 부르셔서 비공식적이나마 총감독을 수행토록 하셨다.
이 의궤를 위해 따로 활자, 요즘말로 하면 서체를 새로 만들었을 만큼 방대한 작업이라 기간도 꽤 오래 걸렸다. 지금 기억으로는 작업이 모두 끝나기까지 2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했던 원칙은 없다. 다만 행렬의 순서는 정해진 반차에 어긋나서는 안되었고, 직접적인 묘사는 당시 통용되던 시각적 언어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 예를 들면, 우리 시대에는 원근법에 입각해 사물을 보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거나 꼭 필요한 경우를 빼놓고는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림의 방향과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는데 왜 반차도는 꺼꾸로 뒤에서부터 보도록 되어 있나요?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책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도록 되어 있는데 유독 반차도만 왼쪽이 앞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 덕에 보기 편하게 되어 있지만요. 보통 반차도는 두루마리로 제작되었는데, 그 관례가 그대로 지켜진 것이다. 당시 두루마리 그림은 왼쪽부터 펼쳐서 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왼쪽을 행렬의 앞으로 두었다.
이 그림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각 인물들의 표정이나 자세가 너무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물을 그리면서 지루하지 않게 표현하려면 매우 힘들었으리라 생각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염두에 두고 작업에 임하셨나요?
그렇게 봐주니 고맙다. 솔직히 말해, 이 그림에 그려진 사람과 말 등의 다양한 자세에는 약간의 속임수가 있다. 아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단번에 눈치챘을 것이다.아무리 실력이 좋고, 또 시간이 많더라도 이 많은 양의 인물, 혹은 말들의 자세를 모두 제각각 그린다는 것은 무리이다. 이런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은 소위, 시각적 어휘 내에 있는 기본 단어들을 다양하게 조합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 한 마리를 묘사하는 데 우리가 사용한 어휘는 모두 8가지이다. 우선 치켜든 머리와 조금 내려간 머리, 이 2가지 종류의 머리가 있다. 앞다리는 모두 4가지 정도의 변화가 있으며, 뒷다리는 2가지 양상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변수들을 조합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최대한 중복을 막을 수 있게 된다.
옆에 나오는 10마리의 말을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똑같은 포즈의 말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적 단어들의 조합은 많은 양의 같은 대상을 각각 개성 있게 묘사하는 아주 경제적인 방식이다.
나를 비롯해 [반차도]를 제작하는 화원들은 이런 방법을 사용해 비슷하지만 다양한 문장들을 생산해 내었다. 물론 그 안에서도 얼마만큼 적절한 조화, 혹은 세부적인 묘사가 가능한지는 화가 각각의 역량에 달린 것이다.
세부적인 묘사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질문인데, 각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의 완성도에 있어 차이가 많이 느껴집니다. 어떤 페이지는 굉장히 뛰어난가 하면 또 어떤 부분은 자세도 어색하고 말들도 생기가 없어 보입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분담해서 작업을 하다보니 작품의 일관성을 지키기가 힘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밑그림도 밑그림이지만 이 그림은 기본적으로 목판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목판을 파는 각자(刻者)들의 역량에 크게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양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중요한 부분은 솜씨좋은 각자들이 맡았지만, 조금 떨어지는 부분도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도판의 중간에 실린 가마제작도에 대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의궤를 보면 무려 열 두 페이지에 걸쳐 가마설계도가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가마 그림에 커다란 비중을 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 행사에서 가마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행차에 사용된 가마는 특별히 새로 제작된 것이었다. 현륭원 무덤에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여기에 타고 갈 특별한 가마가 필요했다.
정보란 것이 새로운 것, 가치 있는 것, 기념할 만한 것이라면 이 가마와 그 다음에 실려있는 배다리(주교, 舟橋)가 가장 대표적인 정보일 것이다. 원래 한강을 건널 때는 직접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오랜 관행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배다리를 놓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 행사에 사용된 배다리는 왕께서 직접 설계에 참여하셨고, 우리 시대 최고의 과학기술이 동원된 것이라 자세히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먼저 전체적인 측면도를 원근법을 적용해 나타내었고, 뒤에 각 면들을 기록하였다. 또 각 면의 세부 부분은 어디에 해당하는 것인지 표시하여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각 부분의 세부도를 실은 이유는 새겨지는 문양이 정확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마 지금 보더라도 가마를 재현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보다 일반적인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정보디자인에 있어서 정보의 순도는 생략의 정도와 비례합니다. 즉, 정보를 더 많이 생략할수록 꼭 필요한 정보만 남게 되기 때문에 사용자들이 정보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이에 비해 반차도는 실제 행렬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와 대열은 물론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명백한 정보의 과잉이지요.
한가지 물어보겠다. 백만이 얼마만큼의 크기인가? 백만 개의 물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백만이 얼마나 큰 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숫자란 추상적인 정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것과 문자로 제시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행렬에 몇 명의 사람들이 따라갔다고 기록해봤자 읽는 사람은 그 크기를 추측만 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긴 행렬을 눈으로 직접 보여주면 다르다. 이 [반차도]를 보면, 정말 큰 국가행사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물론 우리도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것은 과감히 생략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위 군사를 그린 부분을 보면 96명의 군사를 10명만 그린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략되지 않은 사실적인 표현이 정보 전달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반차도의 제작 목적은 행렬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보존하는 데 있었다.
물론 사람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것이 불필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이 그림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건 불필요한 정확성이 아니다. 한 시대의 문화가 작은 물건들의 집합이듯이, 이 반차도 역시 그런 작은 표현들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다.
확실히 많은 발전을 한 것이 사실이고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를 비롯한 모든 커뮤니케이션이 그렇듯, 그런 장치들은 학습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200년 후에나 통용되는 방법이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그런 그래프나 차트를 본다면 이해하기는커녕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반차도에 나타난 그림들이 그 사람들한테는 더 이해하기 쉬운 정보의 지도인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킨 방식들이 그 당시로서는 가장 첨단의 방식이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더 좋은 방식이라고 확신한다.

[정리의궤] [반차도]에 나오는 다양한 포즈의 말들.이들의 다양한 자세는 각각의 기본적인 모양의 조합에서 나온다







[정리의궤] 중 가마제작도.
무려 열 두 페이지에 걸쳐 나오는 가마설계도.
각 부분의 위치와 모양이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행렬이 끝나다
좌사중초군(左司中哨軍)과 초관, 그리고 좌사후초군(左司後哨軍) 3대가 대미를 장식하며 정조의 화성행차는 끝을 맺는다. 한가지 밝혀둘 것은 반차도에 나와있는 사람의 수와 정리의궤의 기록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반차도에 의하면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은 총리대신 채제공을 비롯하여 1,779명, 동원된 말은 779필이지만, 의궤 내의 기록에는 어가를 따라간 장관, 장교, 군병의 수가 1,855명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행렬이 아닌 행사 자체에 동원된 인원 명단을 살펴보면 무려 6천 여명에 달한다. 즉, 모두 어가를 따라간 것은 아니고, 현지에 먼저 내려가 있거나 혹은 연로에서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점들은 반차도를 근간으로 이번 행렬을 한눈에 들어오는 크기로 축소시킨 것이다. 행렬 위에서 항공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듯 싶다.
정보 디자인이란 다른 말로 하면 정보의 조작이다. 그것은 마치 고고학에서 발굴 작업이 항상 유물을 파괴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이 발굴되느냐, 혹은 파괴되느냐는 작업과정을 통해서 결정될 뿐이다.
정보 디자인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올바른 디자인이 될 것인지 정보의 왜곡이 될 것인지는 그 행위의 의도와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용자와의 관계에서 정해지는 것이다. 행렬의 구성을 좀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 여기서도 약간의 조작을 가했다.
공간의 편의상 말들은 표시하지 않았으며, 간격은 균등하게 조정하였다. 마지막으로 행렬의 구성을 좀더 효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된 것들은 범례로 표시하였다.
● 깃발
깃발을 들고 가는 군인은 총 241명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깃발이 위치한 곳은 (e)부분이다. 총 5명의 병졸들이 왕을 상징하는 엄청난 크기의 용기(龍旗)를 들고 어가를 뒤따르고 있다. 이 밖에 사용된 깃발로는 주작기(朱雀旗), 벽봉기(碧鳳旗), 삼각기(三角旗), 백택기(白澤旗) 등을 비롯하여 신기(神旗), 영기(令旗), 인기(認旗) 등이 있다.
● 악대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는 총 11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장용영에서 차출된 인원이다. 가장 큰 악대 행렬은 대각(大角), 북, 징, 피리, 점자(点子), 해금 등 완벽한 취주악대의 구성을 하고 용기 바로 뒤를 따르고 있다.
● 나인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말을 탄 여자 나인은 총 28명이다. 혜경궁과 정조의 두 누이까지 합한다면 이번 행렬을 따라간 여자는 총 31명이 되는 셈이다.
이들 나인은 혜경궁과 두 군주(두 딸)의 시중을 위해 데려간 것으로 대부분 어보를 실은 어보마(御寶馬)(b)와 혜경궁의 옷을 싣고 가는 자궁의롱마(慈宮衣籠馬)(c)사이에 줄을 지어 가고 있지만, 나머지 10명의 나인은 다른 곳에 위치한다. 특히, (f)부분에 보이는 2명의 나인은 계라선전관 유성규와 함께 나란히 가고 있어 퍽 이채롭다.
■ 가마
위의 그림에서 가마는 총 4대가 등장한다. 하나는 정조를 위한 것, 다른 하나는 어머니 혜경궁을 위한 것,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정조의 누이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를 위한 것이다.
(g)부분의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는 이번 행사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으로 무려 29종의 장인 120여 명이 제작에 참여하였다. 각 가마에는 11명의 사람들이 앞뒤에 서서 보필하고 있다.
★ 왕
행렬에서 왕이 어디 있는지는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가장 호위가 삼엄하고,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부분(h)이 바로 정조가 지나가는 자리이다.
원래 정조는 이보다 훨씬 앞에 위치한 (d)부분 어가에 타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번 행차에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관계로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 뒤에 말을 타고 있다.
┳ 생략
이 부분은 실제 인원보다 적게 그려진 부분이다. 예를 들면 (a)부분에 나오는 별기대의 실제 인원은 84명이지만, 반차도에는 10명만 표시되어 있다. 실제 행렬에 참가한 인원수는 옆에 숫자로 표기하였다.
● 총을 든 사람
행렬에 참가한 사람의 대부분이 군병(軍兵)이라 할 만큼 군인이 수행원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간단히 살펴보면, 친군위 200명, 별군관 100명, 금군 100명, 가전별초 50명, 무예청 총수 80명, 아병 44명, 장용위 100명 등이 있다. 이들을 모두 표시하는 것은 힘들어 군병들 중 총을 든 사람만 표시해보았다.
현대의 정보수용자, 사학자 한영우 선생님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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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 선생님을 처음으로 찾아 뵌 것은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이란 선생님의 저서를 보고, 선생님이야말로 저희가 소재로 삼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일차적인 정보수용자’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생님은 여기서 얻어낸 자료를 바탕으로 정보를 재해석해 현대에 다시 소개했다는 점에서 또다른 정보생산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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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들, 혹은 일반인들이 조선시대 기록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그것이 시각적으로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안에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지요. 언뜻 봐서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고 그곳에 그려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그 ‘무엇’을 ‘정보’라고 가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현대의 정보개념과 과거의 정보개념이 다를테지만요.
그리고 그러한 정보가 구성된 방식을 ‘정보디자인’이라고 가정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보시는 관점에서는 약간은 생소하겠지만, 어쨌든 그런 가정 하에 인터뷰를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책의 서문에서 정조시대 기록문화의 치밀함에 대해 ‘무섭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제가 가장 먼저 알고 싶은 것은 그 당시 정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또 누구에 의해 생산되었으며, 누가 그 정보의 수혜자였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을 먼저 그려보자면, 당시의 정보에는 문자기록과 그림기록이 있습니다. 대체로 사료라고 하면 이 두 가지 모두를 말하는 것이지요. 조선시대 기록문화를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정보를 결합하려는 시도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문자기록에 대해서는 이 책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일 테니 생략하기로 하고, 그림기록에 대해서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림에 의한 정보의 생산은 주로 화원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여기에서 공무원 신분으로 임무를 수행했지요. 초상화를 그린다든지, 왕실에 있었던 주요 장면들을 그리거나, 또 지도를 제작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무원 신분으로 일한 작품에는 이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미술사 분야에서 이런 것들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런 그림들, 즉 실명이 들어가 있는 그림들은 이들이 개인적으로 아르바이트한 작품에 불과합니다. 이름이 남아 있기에 자료로서 가치가 높을 따름이지요.
누가 그 정보의 수혜자였냐는 물음에는 왜 조선시대에 기록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하는 게 좋겠군요. 조선시대 기록문화는 유교문화, 유교정치가 피운 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교정치는 백성으로부터 믿음을 얻어내는 것이 가장 우선이죠. 또 백성의 믿음은 정권의 솔직함과 투명성에 의해 획득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가 보여주는 그 치밀함은 바로 백성들의 믿음을 얻어내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당시 일반 백성들로서는 그러한 정보에 접근하기조차 힘들었을텐데요.
물론 그렇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의 기술상황이나 사회구성으로 볼 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인 여건만 허락했다면 정보의 공유가 훨씬 넓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일례로 18세기, 즉 정조대에 와서는 의궤를 목판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기 있는 <정리의궤>도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지요.
조선초기에 필사로 제작된 의궤는 보통 5~8부 정도 제작되었지만 목판은 대량생산이 가능하지요. 이 <정리의궤>의 경우는 100권이 넘게 인쇄되어 전국에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술의 발달에 의해 정보 공유의 범위가 넓어진 것이지요. ‘접근’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이 정보의 1차적인 수혜자는 조선왕실이 되겠지만, 그것은 기술의 제약에 따른 것이고, 앞서 말씀 드렸듯이 왕도정치를 가능하게 한다는 넓은 의미에선 일반 백성들도 그 수혜자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제 생각에는 기술이나 사회적 여건도 한몫 했겠지만 권력이란 속성 자체도 정보의 형태나 구성에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기록화에서 왕의 모습은 그리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알고 있습니다.이것을 권력에 의한 정보 통제의 일례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록화에선 왕의 모습이 빠져있지만 왕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왕이라 해서 절대 미화하는 법도 없죠. 주근깨가 있으면 있는대로, 코가 못생겼으면 못생긴대로 화가들은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기록화에도 물론 왕을 그릴 수 있었겠죠.
하지만 보시면 알겠지만 크기가 작아 정확한 묘사가 불가능합니다. 왕을 그리려면 정확히 그려야지 부정확하게 그린다는 것은 안될 일이죠. 왕에 대한 위엄, 이미지에 손상을 입힐 수 있으니까요. 그런 연유로 그런 관례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것을 통제라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일반인들도 잘 알듯이 사관들이 기록하는 사초(史草)는 왕이라 해도 절대 간섭할 수 없었죠. 말실수를 했으면 한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이런 점을 보시면 알겠지만 권력에 의한 정보의 통제는 오늘날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책의 구성으로 들어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통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는 데는 시간순서가 가장 적합합니다. 선생님께서도 집필하실 때 이 방법을 사용하셨구요. 하지만 <정리의궤>의 구성은 이와는 다릅니다. 글도 그렇고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그저 관례인지, 아니면 여기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고싶습니다.
먼저 문자기록에 대해 말씀드리면 정해진 순서가 있습니다. 우선 업무주체에 따른 범주로 자료를 분류합니다. 왕의 명령, 축사, 왕에게 올린 건의서, 관청끼리의 업무연락 등으로요. 그리고 중요도에 따라 나열하지요.
물론 아무래도 왕의 명령이나, 왕이 신하와 나눈 이야기 등이 다른 것에 우선해서 나열되지요.
한가지 말씀 드리자면, 이 시대 정보디자인의 원칙(만약 그런 말을 사용할 수 있다면)에서 중요한 것은 요즘 중요시하는 효율성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건을 그저 시간 순서대로 나열했을지도 모르지요. 권력, 즉 왕에 대한 경외가 효율에 우선하고, 물리적인 현상보다 사상이 중요합니다. 조선시대 정보디자인을 지배했던 원리는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구성해야 좋은지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일단 범주들의 순서가 정해지면 그 안에서는 다시 시간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도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순서보다는 사건의 중요도에 따라 배열되어 있지요. 아무래도 이번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어머님의 회갑잔치 장면을 기록한 그림이 먼저오겠고, 그 연회에서 췄던 춤이 그 다음, 이런 순이지요. 춤끼리는 시간순서대로 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도판의 맨 처음은 회갑잔치가 아니라 화성행궁도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글로 기록된 내용도 맨 앞에 어명이 오는 것이 아니라 행사 일정표에 해당하는 택일(擇日)이 오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이 그림은 책의 구성에서 도판에 대한 작은 목차로 보시면 됩니다. 먼저 행사가 이루어진 공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각각의 행사가 이루어진 곳을 맨 첫 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국가적인 행사를 하는 데 그저 1억원이 들었다고 하는 것과 1,12,562,485원이 들었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데이터가 자세하지 않을수록 진실성은 떨어지게 마련이죠. 그리고 설렁탕 몇 그릇,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 구입비, 그릇단가 등을 모두 적어보십시오. 거짓말을 할래야 할 수 없습니다.
좋은 말만 하는 홍보자료가 아닌 다음에야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흠이 될 수 없지요.
다시 말하면 조선시대의 기록문화, 특히 그 중에서도 의궤 제작의 목적은 하나의 거짓없이 정보를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었고, 때문에 지금 보기에는 과할 정도의 치밀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효율적인 정보의 전달’ 이란 현대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치밀함이 그 정보가 가져야할 덕목이었으니까요. 그것은 자신의 목적에 가장 알맞게 디자인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조가 탄 좌마(座馬) 왕의 모습은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Day1 윤 2월 9일
am 06:45 창덕궁 출발하다. (총인원 1,779명, 말 779필) 오전 노량(노들)에서 배다리를 이용, 한강을 건넌 후, 노량진 용양봉저정에 도착하다.(점심과 휴식) am 11:30 행차를 다시 시작하다. 오후 시흥(始興) 행궁에 도착하다.
Day2 윤 2월 10일
am 06:45 시흥 행궁 출발하다. 점심 사근참 행궁에서 점심을 먹다. 비가 내리기 시작. 우구를 갖추고 다시 출발. 오후 진목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출발. 저녁 화성 도착하다. 혜경궁은 장락당에서,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각 휴식.
Day3 윤 2월 11일
am 05:45 향교 대성전(大成殿)에 참배하다. am 07:00 낙남헌(洛南軒)에서 문무과 별시 실시하다.
pm 02:00 오전에 있었던 별시의 결과를 발표하다. 문과 5명, 무과 56명 선발
pm 03:00 봉수당 마당에서 회갑 잔치의 예행 연습을 하다.
Day4 윤 2월 12일
am 04:45 정조, 혜경궁 현륭원에 전배(展拜)하다. pm 03:00 정조, 서장대(西將臺)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다. (5천여 명의 장용영 외영의 군사 참여. 낭기(狼機), 조총(鳥銃), 신포(信砲), 삼안총(三眼銃) 등 무기 동원) 야간 잠시 낙남헌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 후, 야간 군사훈련 재실시하다.
성 주변, 성안의 주민 집문 위에 횃불을 밝힘.
Day5 윤 2월 13일
am 08:45 회갑연 거행되다. 초대인사 혜경궁의 내빈 13명, 외빈 69명 준비물 혜경궁-연꽃무늬방석 십장생병풍 왕 -표피방석, 진채병풍 음식-70가지 상화(床花)-42개
건물-휘장 무녀들이 헌선도, 몽금척, 포구락, 학무 등의 춤을 선보이다.
Day6 윤 2월 14일
am 05:00 화성부 거주민에게 쌀,소금, 죽을 배포하다.(홀아비 20명, 과부 24명, 고아 6명, 진민 261명)
정조 신풍루(新豊樓)에 가서 죽을 직접 시식하다.
am 07:00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다.(한양에서 따라온 노인관료 15명과 화성노인 384명)
am 11:00 정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을 방문하다.(경치와 화성 성제 치하)
pm 03:00 정조, 행궁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을 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야간 활쏘기를 시행한 후, 매화포를 터뜨리다.
Day7 윤 2월 15일
am 08:45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화성을 출발하다. 점심 진목정교와 미륵현을 지나 사근평 행궁에 도착하다. 저녁 시흥행궁에 도착하다.
Day8 윤 2월 16일
am 06:45 정조, 백성들의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을 듣다. 점심 노량 행궁에 도착해 점심을 들다.
오후 다시 한강 배다리를 건너 창덕궁에 도착하다. 배다리(舟橋)는 다음날, 즉 윤2월 17일에 해체됨.
옐로우 페이지
‘의궤(儀軌)’란?
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이다. 행사에 관련된 내용을 하나의 본보기나 전범으로 만들어놓고 이를 따름으로써 예법에 맞게 의식을 행하고자 만든 것이다.
의궤에 기록된 주요 행사는 가례(왕실의 혼인)를 비롯하여 왕과 왕세자의 책봉, 장례, 제사, 잔치에서 국왕의 행차, 사신영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의궤가 특히 중요한 까닭은 비록 왕실 행사를 기록한 것이지만 행사에 참여한 하급 장인이나 화원, 집기와 물품, 의복 등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대해
1795년(정조 19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이하여 화성과 현륭원에 다녀와서 만든 8일간의 행차보고서인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백미로 평가된다.
여기에는 정조 시대의 통치방향과 문화수준이 한 눈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행차와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과 들어간 비용, 예를 들어 무슨 물건이 몇 개고 그 단가는 몇 전이고, 천인에 해당했던 막일꾼과 기술자의 이름과 주소, 복무일수, 실제 한 일, 품 값까지, 또 음식을 먹었으면 음식의 종류와 그릇 수,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의 종류와 양, 그리고 비용도 그릇별로 찾아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정조시대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정보의 보고(寶庫)인 셈이다.
[반차도(班次圖)]에 대해
본래 반차도는 궁중의 각종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반열도(班列圖) 또는 노부도(鹵簿圖)라고도 한다. ‘반차’는 임무나 등급에 따라 나뉜 순서나 절차를 뜻하는 말로, 의식에서 문무백관이 늘어서는 차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채색화로 제작되며, 행사가 있기 전에 미리 작성하여 그림으로 각자의 역할을 익히고 실제 행사에서 착오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지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린 [반차도]는 목판으로 제작되어 채색이 들어가지 않았으며, 행사가 끝난 뒤에 제작되었다.
이 책에 실린 [반차도] 채색본은 한영우 선생님이 1994년 고증을 통해 새로이 채색, 제작한 것이다.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정조가 행사를 모두 마치고, 일곱째 날에 화성을 출발하여 시흥 행궁에 도달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반차도의 직선적인 구도가 아닌, 상하로 긴 화면에 행렬의 모습을 갈짓자(之)로 잘 배치하여 놓았다. 세밀한 묘사와 산수표현이 두드러지며, 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의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전하는 능행도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예궐반차도(詣闕班次圖)]
원래 [반차도]의 구도는 아래 보이는 [예궐반차도]의 예처럼 가운데 행렬을 중심으로 양쪽의 사람들이 좌우대칭으로 배열된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들 구도에는 왕과 그 밖의 사람들 사이의 신분 차이가 놓여져 있는 것이다.이에 비해 [정리의궤]에 실린 [반차도]는 모든 인물이 한 가지 구도로 묘사되어 있어 보다 사실적인 면이 느껴진다.
배다리(주교, 舟橋)에 관하여
정조가 직접 설계에 참여하여 기본 구상에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 배다리는 현대에 보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이 다리를 만들기 위해 소요된 물자는 교배선 36척, 난간이 240척, 홍살문이 3개, 배다리 좌우에 있는 위호선이 12척이었으며 장소는 지금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중간쯤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화인열전2- 고독의 나날 속에도 붓을 놓지않고], 유홍준, 역사비평사, 2001.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한영우, 효형출판사, 1998.
[이미지와 글쓰기], 롤랑 바르트, 세계사, 2000.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 박정혜, 일지사, 2000.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고려대학교 박물관, 2001.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신병주, 효형출판사, 2001.
[꿈의 문화유산, 화성 - 정조대 역사 문화 재조명], 유봉학, 신구문화사, 1996.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김동욱, 돌베개, 2002.
[정보디자인], 로버트 제이콥슨 엮음, 장동훈 김미정 옮김, 안그라픽스, 2002.
[21세기 정보 뱅크], 리차드 솔 워먼 지음, 간태경 성형동 공역, 평범사, 1993.
[포스트 PC 시대의 정보기기 디자인], 에릭 버그먼 엮음, 정선화 외 옮김, 안그라픽스, 2001.
[인포메이션 그래픽스], 피터 월버 마이클 버크 지음, 김경균 옮김, 디자인하우스, 2001.
[디지털 시대의 정보디자인], 클레멘트 목 지음, 김옥철 옮김, 안그라픽스, 1999.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이해], 존 바워즈 지음, 박효신 옮김, 디자인하우스, 2002.
[표상공간의 근대], 이효덕 지음, 박성관 옮김, 소명출판사, 2002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214.5×73.5cm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소장.

[예궐반차도(詣闕班次圖)] 중 일부 42.5×407.6cm 고려대박물관 소장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중 [주교도]
서울대 규장각 소장
[출처] 정조 화성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반차도(班次圖)'
ꡔ원행을묘정리의궤ꡕ
1) 화성행차의 의미
1795년(을묘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 되는 해이자, 1794년에 시작한 화성 축성 공사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는 시점이었으며, 정조 즉위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자신의 권위를 펼쳐 보일 필요성이 있었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이룩한 위업을 과시하고 신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려는 정치적 행사였다. 정조는 이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을 따르는 친위 세력을 하나로 묶고, 장차 화성을 중심으로 펼쳐 가려는 개혁 정치의 구상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2) ꡔ원행을묘정리의궤ꡕ의 내용
① 활자본 의궤
○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整理)한 의궤라는 뜻, 1794년 12월에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였으므로 ‘정리소의 업무를 정리한 의궤’도 의미함
○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로서 이 책의 인쇄를 위해 특별히 정리자(整理字)를 만듦, 뒤에 ꡔ화성성역의궤ꡕ ꡔ홍재전서ꡕ ꡔ장헌세자예제ꡕ를 인쇄할 때도 정리자를 사용함
② 권수(卷首) 1권, 도식(圖式)
○ 화성행궁도(華城行宮圖) : 화성행궁의 전도(全圖)
○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열린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장면을 그린 그림
헌선도(獻仙桃) :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궁중 무용으로 오래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의미가 춤
몽금척(夢金尺) : 조선 태조 때 정도전이 태조의 공덕을 기리려고 만든 악장을 춤으로 만든 것
하황은(荷皇恩) : 태종이 명나라 고명을 받은 것을 축하하며 지은 노래를 춤으로 만든 것
포구락(抛毬樂) :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춤. 비단 공을 구문에 집어넣는 놀이를 겸한 춤
무고(舞鼓) : 고려 때 만들어진 춤
아박(牙拍) : 동동사(動動詞)를 부르며 상아로 만든 작은 박(아박)을 두 손에 들고 장단을 맞추며 추는 춤
향발(響鈸) : 놋쇠로 만든 방울인 향발을 좌우의 엄지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에 끼고 장단 맞추면서 추는 춤
학무(鶴舞) : 대나무로 만든 푸른 학과 흰 학 속에 무용수가 들어가 춤을 추면서 연꽃을 쪼아 여는 동작을
보이는 춤
연화대(蓮花臺) :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두 송이 연꽃 속에 여자아이를 숨겼다가 꽃이 터진 뒤에
나타나게 하는 춤
수연장(壽延長) :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춤
처용무(處容舞) : 신라 헌강왕 때의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꾸민 가면무
첨수무(尖袖舞) : 오색한삼을 입은 무용수가 음악에 맞추어 손을 뒤집고 엎으면서 추는 춤
선유락(船遊樂) :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채색한 배를 두고 여러 무용수가 닻줄을 끌고
배를 감으로 추는 춤
검무(劍舞) : 군인 복장을 한 두 무용수가 마주보고 찰을 휘두르며 추는 춤
○ 채화도(綵花圖) :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머리에 꽂았던 채색 조화 그림
어잠사권화(御簪絲圈花) : 국왕과 혜경궁 홍씨가 꽂았던 조화 그림
홍도별간화(紅桃別間花) : 관리들과 군병들이 머리에 꽂았던 조화 그림
준화(樽花) : 단지를 장식한 조화 그림
상화(床花) : 잔치상을 장식한 조화 그림. 삼층대수파련(三層大水波蓮), 이층중수파련(二層中水波蓮), 일층소수파련(一層小水波連) 등 10종
○ 기용도(器用圖) : 회갑 잔치에 사용된 기물 그림. 수주정(壽酒亭), 준화상(樽花床) 등 16종
○ 복식도(服飾圖) : 회갑 잔치에 참석한 무용수들의 복식 그림
여령복식(女伶服飾) : 여령들의 복식 그림. 화관(花冠), 황초삼(黃綃杉) 등 5종
동기복식(童妓服飾) : 동기들의 복식 그림. 유소(流蘇), 금화라대(金花羅帶) 등 6종
○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정조가 개최한 양로연 장면 그림
○ 알성도(謁聖圖) : 정조가 화성 향교의 대성전을 참배하는 장면 그림
○ 방방도(放榜圖) : 화성행궁 낙남헌에서 문과 무과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장면 그림
○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 화성 서장대에서 장용영 군대가 훈련을 하는 장면 그림
○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 화성행궁 득중정에서 정조와 신료들이 활쏘기 시합을 하는 장면 그림
○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 정조가 화성행궁 신풍루에 올라 백성들에게 쌀 나누어 주는 것을
감독하는 장면 그림
○ 가교도(駕轎圖) : 행사에 사용된 각종 가마의 그림
가교전도(駕轎全圖) :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간 가교의 전체 그림
가교분도(駕轎分圖) : 혜경궁 홍씨가 타고 간 가교의 부분 그림. 35종의 세부 그림이 있음
유옥교(有屋轎) : 행사에 사용한 유옥교의 그림
○ 주교도(舟橋圖) : 정조의 행렬이 한강의 배다리 위를 지나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
○ 반차도(班次圖) : 정조의 행렬이 화성을 왕복할 때의 모습을 그린 그림. 74면에 걸쳐 1,500명 이상의 인원이 나타난다.
③ 본문 5권
○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 행사에 사용된 글
○ 의식 절차(儀註)
○ 해당 관청 보고서
○ 잔치 음식의 내용과 조달 상황
○ 국왕과 혜경궁이 타고 간 가마의 재료와 비용
○ 배다리 설치
○ 행사에 참여한 내빈(內賓, 여자 손님), 외빈(外賓, 남자 손님), 군인의 명단
○ 재용(財用, 재정지출 내역), 경비의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정리
④ 부록 4권
○ 혜경궁의 진짜 생일날인 1795년 6월 18일에 창경궁 연희당에서 열린 회갑잔치
(연희당진찬도, 홍화문사미도)
○ 사도세자의 회갑일인 1월 21에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경모궁을 참배한 일
○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탄신 8주갑(480주년)을 맞아 정조가 영흥본궁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린 일
○ 1760년 사도세자가 충청도 온양 행궁에 가서 심은 느티나무가 35년 만에 큰 나무로 성장한 것을 기념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우고 당시 세자를 수행한 관원에게 상을 내린 일
3) 반차도의 분석
○ 경기감사 서유방, 행차의 목적지가 경기감사 관할인 경기도 화성이었기 때문에 경기감사가 선두에 섬, 서유방은 정리소의 정리사이자 경기감사의 자격으로 행렬 인도
○ 총리대신 채제공, 1795년의 행차를 총괄, 정조의 신임을 가장 크게 얻었던 실력자로 사도세자를 복권시키고 화성을 건설하려는 정조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측근 인사
○ 별기대 84명, 깃발을 든 군사
악대(징 나팔 호적 해금 장고 북 피리), 행렬 곳곳에 나타나는데 행렬의 보조를 유지하고 행렬을 웅장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음
○ 국왕의 어보(御寶)
○ 나인 18명, 회갑잔치에서 무용을 공연할 무용수, 궁녀가 궁 밖을 출입할 때에는 얼굴을 가림
○ 국왕의 가마
수어사 심이지가 인솔하는 50명의 기병이 선도
의장기 사이에 예비마 4필
정조의 어가, 실제로는 가마를 타지 않음
용기(龍旗), 국왕을 상징, 5명의 병졸이 함께 듬
취주악대 51명, 행렬의 중앙을 인도, 장용영에서 차출
훈련도감과 장용영의 초요기, 군영의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깃발
○ 혜경궁의 가마
수라가자 마차, 혜경궁에게 제공할 음식, 조카 홍수영이 감독
혜경궁 가마를 끌고 갈 예비마 8필, 정조 갑옷을 실은 말 2필
훈련도감 소속 협련군 80인, 무예청 총수 80인 사이에 혜경궁 가마
별감 6인이 최측근 경호
○ 정조의 좌마(座馬), 30명의 무예청 군사, 30명의 순라군, 별감 6인이 경호
○ 청연군주 청선군주의 쌍가마
정조의 두 누이로 2살, 4살 연하,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위해 동행
○ 장용영 군사 96인
○ 약물대령의관, 국왕의 주치의
○ 용호영에서 차출된 가후금군 50인
4) 관련 기록
○ ꡔ원행정례(園行定例)ꡕ, 1789년 이후 매년 있었던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사항을 정례화하여 정리한 책
○ <화성능행도> 병풍, ꡔ원행을묘정리의궤ꡕ에 나오는 주요 행사 장면을 천연색으로 그린 명품, 고궁박물관, 호암미술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박물관 등에 전해짐
○ <화성원행반차도>, 천연색 두루마리, 규장각 소장, 행렬을 뒤에서 본 모양
-단국대 김문식 교수 (출처: 수원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