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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의 향기
서옹 상순대종사 1주기 추모집
대한불교조계종 고불총림 백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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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의 향기
제5장 서옹스님의 생애와 평전
03. 지선대담
/주체의 길에 선 위없는 참사람
어떤 사람이
자기의 큰 원력과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려 할때
부처님께서
“선래비구(善來比丘)야” 하고 부르면
머리가 스스로 깎아져버리고
가사가 입혀지며
모든 계(戒)가 갖추어져 비구가 된다고 한다.
이런 비구스님은
수많은 세월을 과거로부터 지나오면서
많이 닦고 또 큰 발원을 무수히 하여
쌓인 지혜의 공덕과
청정한 복덕의 결과라고 보겠다.
부처님께서도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을 닦아서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같은 수행자들이라도
어떤 이는 번뇌에 시달림이 없이
시종일관
수행승의 길을 잘 마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무던히도 많은 장애에 걸리고
번뇌의 시달림에 얽매여 애를 태우거나
중도에서 가던 길을 그만 드는 이가 수없이 많다.
그것은 모두가
자기 스스로 짓고 받는 결과이니
어떠한 탓도 있을 수가 없다.
[ 서옹(西翁) 큰스님.]
한 번 불러보고 생각할 때면
전체적인 그 모습이
한적한 산 중에 티 없이 미소 짓고 앉아 계시는
천년 고불(古佛)이나
한 마리 고고한 학을 연상케 한다.
흡사 불보살님의 자비의 화신과 같으시다.
천년 고불의 미소를
어떠한 사람들이나 다 이해할 수는 없다.
설령 이해한다고해도 천차만별이고
과연 정확하게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 미소를
관심 없이 지나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이며
심지어 비웃거나
돌팔매질 하는 사람들은 얼마일까.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스님의 미소는 부처님의 미소일 뿐.
다른 어떤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세상이 제아무리 변화무쌍하여
지금처럼 사람의 진면목을
찾기 힘든 시대에 있어서도
부처님의 미소는 변함없이 미소일 뿐이고,
미래의 어떤 시대에도
부처님의 미소는 한결같이 미소일 뿐이므로
근본 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미소 속에서
전변 윤회하는 지구와 천체의 역사를
한 순간으로 묶어
한번쯤 꿰뚫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의 미소 속에
모든 진리가 살아 숨 쉬지 않는가.
부처님의 미소 속에는
항상 은밀한 해답이 일고 진다.
석가모니도 달마도 혜능도
원효와 의상도 보조와 태고와 서산도
그 미소를 알고서 막혔던 가슴이 터졌고
그미소와 함께 일고 졌으며
여러 나라의 뛰어난 석학과 지도자들도
자기 홀로로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그 미소와 함께
더 높은 자기 발전이 가능했었다.
이 시대의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도
그 미소의 광명은 가득차 있음을
사람들은 알아야 한다.
인간들 모두가
그 미소를 자각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은 알고 미소를 지을 줄 모른다.
서옹 큰스님의 미소를 보고
나는 부처님의 미소를 연상한다.
그 모습이
한 떨기 하얀 연꽃 같고
한 마리 학과 같으니
희귀한 그 모습을 영원케 하려면
천연 그대로를 보호만 해야 할 뿐
별다르게 위하고 모시려는 수단들은
필경 본래의 모습을 망쳐 놓을 것이다.
[고불의 미소. 자비의 화신]
중국의 임어당이 말하기를
“소년기의 인생은
창틈으로 달빛을 보는 것과 같고
중년기의 인생은
뜨락에서 달빛을 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기의 인생은
마당 한가운데서 달빛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큰스님께서는
드높은 제일 산봉우리에서
달과 독대하고 있음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으니
인생사 번뇌 따위
아예 먼지하나 붙어 있지 않으셨다.
본디 소년기부터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청정하게 빼어나셔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오지 않으셨다.
그러한 사실이
그 어느 곳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스님을 뵈올 때마다 느끼는 사실은
부처님의 미소와
어쩌면 그리도 같을까하는 생각뿐이다.
다만 어떻게 보면 답답할 정도로
완벽한 모습
- 걷는 모습, 하시는 말씀,
일용상행(日用常行)의 정중동(靜中動) -
이 어쩌면 그렇게도 단아한 성품으로
여법(如法)하실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파격적이고
호탕무제한 모습을 좀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고의적으로든
후학을 가르치려는 방편으로든
본래 자기의 모습을 달리 표현하여 보여 주는
의도적인 행적을 하지 않으셨고
초탈한 도인인 척하는
그 흔하디흔한 몸짓 한 번 하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무엇을 많이 아는 체,
또는 모든 것을 초월한 체 하지도 않으셨고
남들을 평하는 일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오직 공부하는 길. 진리를 닦는 길.
인간이 본래면목을 찾아
자유자재 할 수 있는 경지만을 깨쳐주시며
이 시대의 대선사로서의 자리에만 머물러 계신다.
큰스님께서는 1912년.
충청도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495번지에서
아버지 이범제(李範濟).
어머니 김지정(金地貞) 두 분 사이에 태어나
일곱 살에 부친을 여의고
한학자이신 조부(祖父)의 슬하에서
전통적인 유교 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조부님은 이창진(李漲鎭)이신데
당시에 중추원 의관 정삼품 벼슬을 하였으며
청렴결백한 학자로서
스님께 한학을 가르쳤는데
스님은 조부님을 성인(聖人)으로만 알고 배우셨다.
천자(天資)가 영오(穎悟)하고
재기가 환발(渙發)한 스님께서는
할아버지의 애중(愛重)과 주위의 경탄이 대단했다.
한문 수학 후
보통학교를 그 곳 연산에서 다니시다가
집안이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상경하여서는
죽첨 공민 보통학교(지금의
천연동 금화초등학교)를 다니셨으며
그 학교 5학년 때 양정고보로 입학하셨다.
월반을 하여 들어간 셈이다.
당시엔 중학교가 없었고,
보통학교를 나오면
바로 5년제 고등학교 과정의
고등 보통학교에 들어갔다.
스님께서는 초등학교 5학년때
전과목 시험을 합격하여
월반해서 고보에 들어가셨다.
어릴 적부터 영명하심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스님께서는 어릴 적에
조부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조부님께서 들려주신
당시의 애국 열사 박열 같은
뛰어난 분들의 이야기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민족적 혼란기이자 국운의 쇠퇴기에도
항상 ‘옳은 뜻’, ‘높은 품도’를
한시라도 잃지 않고 대경대도를 걸으신
조부님의 인격에서 산 교육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양정고보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조부님마저 돌아가셨다.
스님께서는 그 일로
세상의 무상함을 크게 깨닫고
정신적인 허무와
심성의 공백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다행인 것은
그때 양정학교에
김교신(金敎臣) 선생과
장지연(張志淵) 선생 이라는 큰 그늘이 있었다.
참다운 애국정신과 진실한 인간교육을
성실히 가르쳐 준 두 분 덕분에
인격의 형성과 마음의 위로에 큰 도움을 받았다.
장지연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라는
국난 앞에서
‘조약’강제체결의 전말을
신문에 상세히 보도한 동시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라는 논설을 집필한
양심적인 지식인으로서, 참교육자로서
민족적 위기에 처하여
애국운동의 선두에 나섰던 분이 아닌가.
그 당시 학생들은 모두 20세 미만이고
통제된 사회 환경으로 인해
세계적 지도자들이나 사상가들
그리고
국제적인 흐름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던 바,
김교신 선생이
밖의 일을 가끔 얘기해 줄 때는 퍽 흥미로웠다.
그 때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교육 방법이 제한돼 있어서
함부로 얘기마저 제대로 할 수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김교신 선생이 들려 준
간디 얘기는 상당한 감동을 주었다.
다 알다시피
간디의 영웅적 투쟁의 직접적 목표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이었다.
여기에
그의 드넓은 인도주의(人道主義)적 관심은
나라를 완전히 초월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뜻하는 바가
인도의 해방을 통하여
제국주의적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이 지구상의 모든 약소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근대 서구 제국주의는
자기들이 가진 물리력을 무기로 하여
식민주의의 사나운 파도로
비서방 사회를 휩쓸어 버렸다.
이는 인간존엄과 민족평등에 대한 도전이자
진리와 양심의 파탄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국가의 모든 자원마저
악랄하고 지독하게 유린하고서
무자비한 착취를 감행한 것은
비서방 사회의
민족적 독자성도 주체성도 잘라버린
원시적 야만성의 노출이었음에 틀림없다.
스님께서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간디의 위대성이 그립기만 한 까닭은
오늘의 현실이
그러한 것들의 연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 하시면서
“그 위대한 정신이
한낱 회고담이나 흠모의 사상이 되어서는
안 될 판국이다.”
고 간디의 교훈을 말해 주었다.
스님께서는 그 후
상급학교 진학 공부를 하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도 있고 하여
도서관에 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그 도서관은
당시 제일 크고 좋은 도서관이었는데
그 곳에는
일어로 쓰인 불교서적이 많이 있어서
스님께서는 조금씩 읽어 보았다.
특히 그때 읽은 자서전은
처음으로 감명 깊게 읽은 책이었다.
부처님을 숭배하고
부처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간디 자서전과 불교서적들을 읽으며
스님께서는
아무 것도 모르던 불교를 점차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중(승려)이라 하면
하필이면 세상에서 저런 생활을 하나,
빡빡 깍은 머리하며
보통 사람들과 다른 옷을 입고
생활도 이상하게 한다 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점차 친근감을 갖게 되었으며
“나도 간디처럼 진실하게
여러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적으로 사는 방법을 생각해야겠다.”
라고 다짐까지 하였다.
그 뒤부터는
불교 사상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우울하던 마음도
불교 서적만 읽으면 시원해지고
무아사상이라든가
욕망으로부터 해탈하는 사상 등이
갈수록 훌륭하게 생각되어지면서
그 때 부터는
길을 걸으면서도 보이는 사람들이
모두 탐욕으로 가득찬 듯이 보였다.
그 후
각황사(지금의 조계사 건너편)에서
김태흡(법호 : 大隱)스님의 법문을 듣고
선학원도 찾아가 보았다.
이렇게 불법을 좋아하다 보니까
스님들이 입는 붉은 가사도 좋게만 보였다.
그러다 양정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당시의 학생들은
거의가 일제 치하에서
압박을 받으며 살아온 터라
가슴에 피가 끓고
적개심과 나라 잃은 울분이 가득 차 있었다.
스님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다 보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각과
인생의 무상함이 함께 떠올라 무척 고독하였다.
그래서 인생 문제를 생각하면
불교를 생각하게 되고
결국 의지하고 살 정신적 지주는
불교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불법에 따라
진실하고 순수한 입장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높고 우람한 산봉우리에 가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보다
힘차고 시원한 호흡을 할 수가 있으며
산정은 또한 우리의 때 묻은 마음을 닦아주고
영원불변의 믿음에로의 접근을 누리게 해주지 않는가.
세계 회생의 터전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거대한 인간 산악.
그러한 보람의 실천으로써
불법에 따른 길만이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민족을 위하고
인류 모두를 위해서 사는 길이 된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학교 운동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에도
빠져나와
불교책을 몰래 읽었을 만큼 불법에 몰입하였다.
[ 불법을 찾아서 ]
스님이 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에서는
그 당시에 가장 영광으로 생각하던
경성대학 예과에 합격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듣지 않고
아예 원서마저 내지 않았다.
스님은 오직 부동심으로
불법을 위해 , 진정한 자기 정도를 위해
부귀와 영달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는
경성대학을 버리고
중앙 불교 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에
입학 하고 말았다.
그때의 사회적 분위기 탓도 있었겠지만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과 집에선
스님이 미쳤다고 질타하고 수없이 힐난했다.
스님은 당시에
몹시도 냉혹한 고독을 체험 했다고 회고하셨다.
그리고 그 때
영어를 가르치던 미국인 여선생이 있었는데
그분은 지리산을 찾아
화엄사 등지의 스님들과 만나며
어느 정도 불교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역시 경성대학을 가지 않은
스님의 뛰어난 성적을
서운해 하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그러기에 스님은
중앙 불교 전문학교를 다니면서도
주위의 이해부족으로
학생시절을 퍽 쓸쓸하게 보냈다.
때로는 현실과 이상이 상반되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낄 때
인간이 이처럼 연약하고 무기력한 존재인가
라는 회의가 끊임없이 솟구쳐 올랐다.
마침내 한 번 먹은 마음은 더욱 굳어져
결국은 승려 생활의 각오까지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태흡 스님을 만나서 입산할 뜻을 비치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분도 처음에는 반대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문대학에 다니면서
승려생활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개가 동진출가자들인데
대학을 다니는 사람이
왜 고생스런 중노릇을 하려고 하느냐
하고 말린 것이다.
그러면서 특히
소원성취를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관세음보살을 지극히 부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스님께서는
법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을
지극히 독송하였다.
한편으로는 점차 차원을 높여
일본 사람이 쓴
선(禪)에 대한 깊이 있는 글들을 읽으면서
오직 불교에만 마음을 쏟았다.
어떤 때는 참선을 하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다녔다.
특히 지금의 연세대학교 뒷산 숲속에서는
오래도록 앉아
졸음이 오고 모기가 물어뜯는데도
밤이 다 가도록 일어날 줄 모르고 계속하였다.
스님이 그토록
자포자기와 타성에 빠지지 않고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적인 의지로는 불가능했으리라.
그것은 아마도
스님께서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의
연이는 죽음을 목도한 이후부터 갖게 된
마음속의 큰 의무
- 나는 누구이고 무엇이며 어떻게 되는가.
죽음은 피할 수 없고
고뇌는 면할 수 없는 것일까.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앞에서
그러한 인생의 본질적 물음을 해결하여
생사의 대몽(大夢)을 영원히 깨닫고
깨달음과 행함이 원만한
각자(覺者)로서의 길이
차근차근 준비됐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스님께서는 그러한 정진 끝에
다시 김태흡 스님을 찾아갔다.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불렀느냐고 묻기에
그러했다고 대답하였다.
대은 스님께서는
마침 서울에 와 계시던
장성 백양사의 송만암 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 만암 큰스님과의 일대사 인연 ]
그러한 기호를 통해
만암 큰스님과
일생일대의 만남을 갖게 된 스님께서는
여름 방학 때
백양사에 내려와 수계(受戒)를 끝냈다.
마침내 정식 승려가 되어 불문에 귀의하였다.
이에 비로소
그토록 혼자서 찾아 헤매던
구도의 힘든 역정이 조금은 손 쉬어지게 되었다.
스님께서는 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백양사로 내려와
만암 큰스님을 모시고
한편으로는 열심히 수행하며
한편으로는 그 곳 불교 전문 강원의 외전강사
(영어 및일반 사회학문을 가르치는 사람)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포교도 하시고
일반인들이 모인 광장에 초대되어
강연도 하시며 2년간을 보냈다.
평소 이상적으로 늘 그리던
승려의 수행 정진과
현실적인 승려들의 생활이
너무나 맞지 않아 갈등이 심했다.
청정한 진리에 따라서만 살아가는 길을
추구하는 자신에게 숱한 회의심이 일어났다.
스님께서는
그러한 생활을 더 하지 못하고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위해
오대산 월정사의
방한암(方漢岩)스님을 찾아가
상원사 등지에서 2년간을 용맹 정진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그 곳의 참선수도
역시 본래적 수행과는 동떨어졌음을 느꼈다.
어쩌면 스님께서는
그 당시부터 속진 현실과는 거리가 먼
청정수도인의 전형이었다.
오롯이 홀로 서서 찌들어지지 않는
미더운 선행자(善行者)의
모습 그대로였는지 모른다.
그 당시 백양사나 오대산의 선방은
상당히 규율이 엄한 수도원으로 평이 나있었는데
스님께서는
그러한 곳의 한편에서 있음직도 한
인간적인 사소한 모순까지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로 큰스님들께 듣기로는
그 당시에 우리절집에서 하는 말들로
모범 백양. 승풍송광.
군막 사찰◦◦. 농막 사찰◦◦. 겉다리 사찰◦◦.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럴진대
스님의 독야 청정한 정진을
더 이상 용훼할 필요가 있을까.
따라서 철두철미한
비구 수행 생활의 여법(如法)한 삶에서
우러나는 스님의 청정무구한 마음으로 볼때
겉과 속이 다른
그 당시 일부 사찰과 승려들의
기우적(寄寓的)인 삶의 모습이
어찌 마음에 들 수 있었으랴.
그렇게 수도인 으로서의
정도만을 고집하던 스님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일이 생겼다.
2년간의 오대산 수도생활 가운데
임제대학에 다니던
정모씨(丁某氏)를 만난 사실이었다.
불법에 대해 박람강기하였던 정씨는
스님께 일본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또 거기서 수도 정진하면
큰 보탬이 될 것이라는
한 무리의 빛과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스님은 그 말에
대단한 지적 호기심과
불법에 대한 열망이 솟구쳐
백양사의 만암 큰스님께 유학의 뜻을 비쳤다.
그러자 만암 큰스님께서는
그 만한 학벌이면 됐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스님은 선으로나 철학으로나
더 큰 공부를 계속하여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으로
이미 확고부동한 상태였다.
사람이 항상 같은 것만을 생각하며
답보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까닭에
좀 더 새로운 지혜를 찾아가는 일은
어쩌면 구도하는 자의 본분사가 아니겠는가.
스님은
만암 큰스님의 허락을 얻어내어
드디어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 당시의 승려 출신으로는
처음 있는 유학이었다.
스님께서 일본으로 떠나기 전
집에서는 스님 모르게
모 판서댁 규수 집안과 결혼을 약속하고
준비까지 하면서
스님께 결혼을 종용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스님의 굳은 의지로 실패하게 되자
상당한 말썽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독교 집안인
이화 전문대학 규수의
청혼도 거절되어 원망을 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인간적인 아픔으로 기억되었다.
그 당시 한국이나
일본 승려들의 생활 경향은
대처를 해도 무방한 시대였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아야만
승려 생활은 물론
불법에 따르는 생활일 수 있다는
스님의 태산 같은 신념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아예 여자 문제는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스님께
“불교의 진리를 우러르시다가
실제 승려가 되어 절집 안에 들어와보니
느낌이 어떠하셨으며,
일본에 가서 공부할 때
그 곳 승려나 불교를 보고
느낀 점을 어떠하셨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당시의 승려생활은
현실과 비교해 볼 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고의 해결과 인류의 구제
그리고 미래의 역사 창조를
이끄는 문제에 있어서의 진리는
불교진리라야 되겠다 하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고 하셨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도
그 쪽의 학문이나 학교 선생들이
그다지 스님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나
경도대학 구송박사
(久松眞一博士 히사마쯔 신이찌.
鈴木大拙박사와 함께
일본과 세계의 禪學界의 쌍벽)
와 만나서 대화하는 기쁨 때문에 유학을 계속했다.
그곳에는
대학 교수들이 일주일에 한 번
자유롭게 쉬는 날이 있었다.
그 날이면
당시 경도대학 화엄학 교수인
구송박사를 방문하여 대화하였다.
하도 진리가 깊고 친절하여
학교서 배운 학문에 대한 불만이
거기서 풀어지며
서로 묻고 답하여 동감하고 이해하는데
보람을 느끼곤 했다.
특히 스님께서는
일본의 임제선은
너무나 타락했다고 지적하시며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참뜻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화의 초점을 삼으셨다.
구송박사 역시 열렬히 찬동하였다.
구송박사는 지금은 작고하였는데
생존 당시에는 독일 지성인들이
일본은 몰라도
꼭 구송박사는
알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대학자였었다.
아무튼 구송박사는
니시다 게다르(西田)의 제자였는데
그분은 서전철학에 대한 비판을 좋게 받아들였다.
니시다 게다로(西田學派)단합 대회의
부패한 사실들을 지적하여
직접 비판한 사람은 스님뿐이었다.
스님은 그 당시
일본의 잘못된 철학사상 들을
글로도 많이 썼는데
그러한 일들은
그 곳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었다.
특히 구송박사의 권유로 쓰게 된
**진실자기**라는 졸업 논문은
일본에서 교재로 쓰일 정도였다.
일본에서
불교가 사회적으로 차지하는 위치는
압도적인 비중을 점유하고 있다.
지도자적인 위치에서
인격적 대우와 지지를 크게 받고 있다.
그러므로 절간에 있는 스님이라 하면
어디에서든지 장애 없이 활동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임제대학의 수학 과정이
엄격하고 까다롭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모범적인 학인의 본분을 다해
졸업하신 후
더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있는데다
구송박사의 권유도 있고 하여
다시 선원(禪院)에 들어가
3년간 참선을 계속하였다.
스님께
그 곳 수행 과정에서 느낀 점을 묻자
“일본 국민성은
전통을 잘 지키는 민족이라서
직업을 대대로 이어 나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불교수행 방법 역시
한국에서 불교문화가 전래된 것이지만
또 자기들 나름대로
중국에 가서 직수입해온 점들이 있었는데
수행 방법이 이미 중국에 없어졌는데도
그래도 계속하고 있는 인습에 얽매인 특징이 있다.”
고 하셨다.
지나친 형식적 전통을 지키고 모방하여
계속 그런 방법으로 수행해 나가다 보니까
급기야는 인습만 지키려고 급급할 뿐
자기들이 단점을 비판해서
창조적으로 새롭게 깊이 파고들거나
향상발전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한국 불교는 거기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대혼란기라고 볼 수 있는데
오히려 그점이 장점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어떤 형식적인 인습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처해 있는 현실을
잘 비판정리해서 깊이 파고들면
장점을 크게 살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잘 다져지고 획일적으로 정리된
인습적인 일본의 선보다는
아직은 엉성하여 미정비상태여서
혼란기에 처해 있으나
한국 전통적인 선불교는
본래부터 조사선의 깊이가 있으므로
장차 장점만 취하여 올바로 나아간다면
크게 발전하여 훌륭해지리라는 낙관이다.
중국에서 받아들여 온 옛날 사찰의 수행 방법이
그대로 지켜 내려오는데도
중국선보다 일본선이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스님께서 해방 후에
일본에 건너 갔을 때 구송박사를 만나
일본선이 중국선보다
급격히 떨어져 있는 점이라든지
잘못된 점을 비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구송박사도
일본선의 취약성을 시인함과 동시에
크게 비판하면서
스님에게 같이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 불교계와 일본 선을 이끌어가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는 오래 있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
일본에 오래 있으면
일생을 그 곳에 바쳐야 할 것 같고
구송박사와 뜻을 같이해 일을 성공시키자면
일조일석에 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런 일을 위해
한국 사람인 스님께서 일생을 보낸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이었다.
구송박사와 그 곳 사람들이
붙잡는 걸 멀리하고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스님께서는 백양사에 돌아와
다시 수년간 머물면서 수행을 하였으며
목포 정혜원(淨慧院)에 조금 계시다가
다시 선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는
서울의 무문관
(無門關:6년간 밖에 나오지 않고 오직 참선만 함)
의 초대 조실 (組室)을 지내신 뒤
동국대학교 선원장,
경북 동화사(桐華寺),
문경 봉암사(鳳岩寺),
백양사(白羊寺) 등의 조실로 계시다가
1974년 8월 3일에
조계종 제5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큰스님께서 종정에 취임할 당시에
종단은 여러 가지 문제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대혼란기였다.
따라서 큰스님께서 종정이 되신 것은
석호(石虎 : 서옹스님의 당시 법명)스님하면
전국적으로 사부대중이 추앙하고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청정비구인데다가
현대 학문을 두루 섭렵하심은 물론
학덕과 수행력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한 승려들의 내심은
큰스님의 그러한 면보다도
문중파벌(門中派閥)이
없으신 점을 더욱 중요시했다.
그러니까
고승대덕의 큰스님을 잘 받들어서
불교 중흥을 위한 종단, 화합하는 승단으로 가꾸어
발전하는 불교를 만들자고 다짐하는 뜻에서
추대한 것이 아니었다.
문중 파벌이 없는 스님이니까
스님 마음대로
종단을 운영해 갈 분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조직적 세력이나 아성이 없기 때문에
총무원 집행부 간부들의 뜻대로
잘 움직여 주실 분이라는 점을 유념하고
계산적으로 추대한 속셈이었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종정직에 취임하고 나서
곧바로 위계질서가 없고
명리에 따른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등
사사건건들의 비리투성이로 어지러져 있는
종단 내부를 하나하나 정리하였다.
당시 큰스님께서 구상하셨던
대작불사(大作佛事) 계획의 사안들은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승가대학, 불교방송국, 불교병원,
불교 18개 종단 통합 등은
가히 선각자로서의
진보적이고 생산적인 장도(壯圖)로
누구든 부인할 수 없는 청사진이었다.
[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다.]
당시 모든 종도(宗徒)가 합심 협력하였다면
한국 불교는
혁명적 전환이 가능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결신불오(潔身不汚)의 큰스님께서 제시한
불교중흥의 대불사가 순풍의 돛으로 항진했다면
오늘날에 있어서
불교가 갖는 사회적 위치 역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라졌을 것이다.
서옹 큰스님과 같이
정상의 법왕(法王)에 오른 선지식은
그리 흔히 나타나지 않는 것임을 고려할 때
한량없는 아쉬움은 허허롭기 그지없다.
여기서 생각나는 여담 한 토막이 있다.
한국 정계에서 고위관리를 지낸 유명인사가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는 사적인 자리였다.
일본의 한 인사가
한국불교계의 혼란상을 말하면서
“서옹 종정 스님이 우리 일본에 계신다면
아주 훌륭한 세계적 인물이 되실 수 있을 텐데
한국에서는 왜
잘 도와드리지 못하여
불교 종단이 그렇게 되어가게 만드느냐”고 물었다.
한국 유명인사의 말이
“그 분이 인사 문제와 행정에 밝지를 못하여......”
하고 말끝을 흐렸다.
다시 일본 인사가 말을 받아서
“그러니까 수행도인이지.
세속적인 매사에 밝다면
정치인, 행정가, 사업가가 아니겠느냐”
고 말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곁들여 생각나는 것은
역시 일본에서 온간 이야기인데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구송박사가
한국동란 당시에
한국불교를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옹(당시에는 석호)스님만 살아준다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자꾸 일본 얘기가 나오는데
일본이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분명한 발전상에 대하여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일본에서
큰스님을 붙잡으려 했던 일과
존경했던 일에 대해 생각해 보면
늘 새롭기만 했다.
그래서 큰스님을 모시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일본 불교 특히 선불교에 대하여 많은 것을 물었다.
그 때마다 큰스님은
우리나라의 불교도
빨리 승려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종단의 모든 힘은
그 곳에 쏟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사실 지금 세계적으로
선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고는 하나
올바른 선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도 동양이 앞장서서 가르쳐야 할 터인데
오히려 동양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위기에 처해 있는 형편이다.
불교와 선의 시원(始原)으로서의 출발은
인도에서 시작했지만
선종은 중국이 발상지로서
독특한 조사선의 가풍은 거기서 생겨났다.
그리하여 중국 불교 역사상
오직 선종만이 크게 발전해서 남았다.
이제
서옹 큰스님의 선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를 살펴볼 때
종파를 통합하고
선교(禪敎)를 일치시키려 노력을 한
스님들이 많았다.
사람에 따라
서산스님이
선교통합(禪敎統合)을 완성한 분이라느니
보조스님이
선교를 일치시키는 데 성공한 분이라느니
각기 다르게 주장을 하고 있다.
부족하나마 나의 생각으로는
옛날에 큰 스님들이
선교를 일치시킨 점과는 관계없이
현재까지
어떤 확연한 결과가 맺어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이심전심 교외별전
(以心傳心 敎外別傳)인 선을
왜 교와 일치시키려고만 하는지 속을 모르겠다.
선교합일적인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불교의 모든 교학사상은
선정(禪定)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하고 비판되었다.
그렇게 재창조된 교학은
선과 결국은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점은
화엄초조(華嚴初祖)
두순(杜順:557~640, .중국 화엄종 스님.
후세에 그를 화엄종의 초조라 부름)
을 비롯해 모두 뛰어나 선사였다.
중국에서 선이 종파로서 독립된 후
화엄종장(華嚴宗匠)으로서
최초로 선정과 관련을 맺은 사람은
사조(四祖) 청량(淸凉 澄觀:?~839,
중국 당나라 스님. 화엄종 제4조) 이다.
그는
우두(牛頭: 중국 우두선에서 펼쳐진 선종의 일파)
의 선을 받아들여
하택종(荷澤宗 六組의 제자 神會를 말함.
선의 頓悟漸修 주장 계열)의
무명선사로부터 인가(認可)를 받았다.
그 뒤를 이은
규봉 종밀(圭峰 宗密:
780~841, 화엄종 5조)은
아예 선교일치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화엄쪽에서는 선을,
선가쪽에서는
화엄사상을 선에 수용하였다고는 하나
조계선종의 전통 조사선 법맥을
주장하는 선가에서는
하택(荷澤)계열의 선을
선으로 인정도 해주지 않고 있다.
역시 선은
교외별전일 뿐 교선의 합일은 불가하다.
감히 어림잡지 못하는 나의 입장에서
이 이상을 이야기한다면 망설이 되겠지만
좀 더 부연하겠다.
선사들이 주장하는 데 있어서
화엄 사상이나 금강경 사상이니
더 나아가 선의 전문서인
**염송**이나 **벽암록**이나 **전등록**등
여타 다른 선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학이나 서책은
불립문자 교외별전의 선지를 깨닫기 위한
하나의 방편적 지침서일 뿐이다.
정신적인 선문에서 보자면
군더더기 같은 것에 불과하다.
[ 무엇이 선인가 ]
서산대사께서
묘향산 보현사 금선대에 머물러 계실 때
사명(四溟)스님과
행주(行珠)스님, 보정(寶晶)스님 등 세분이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가지고 찾아와
**반야경(般若經)**속에도 선지(禪旨)가 있으니
이 경으로 종지(宗旨)를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가섭존자에게 부촉하셨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은
부촉하지 않았다 말하고
문자에 구애되지 않으면
한번 읽어볼만한 것이라고 하였다.
서산대사는
화엄경에 대하여도
먼저 성해(性海)를 말하기를
화엄은 비록 무진법계(無盡法界)를 밝혔으나
인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였다.
본 내용의결과인
신해행증(信解行證)에서
견문생(見聞生)과
해행생(解行生)을 거친 다음에
증입(證入)하는 고로
의로(義路)의 초극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였다.
교외별전의 선과 비교할 수 없으니
교를 버리고 선에 드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주장하여
교는 선문에 들어오는 방편이라 하였다.
서산대사는
육조(六組) 혜능(慧能)대사가
소의경전(所衣經典)으로 했다고 전해지는
금강경도 일소에 붙였고
선교합일은 선주교종(禪主敎從)적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자내증(自內證)이라든가 그 같은 표현
즉 화엄의 성기자연적(性起自然的)인 면을
얘기하고 그 뜻을 해설하는 것이
선과 같을 수도 없다.
그 같은 입장에서
시간, 공간적으로 계기현현(繼起顯現)되는
향외적(向外的)인 연기(緣起)의 규정과
인과적 파악을 지각적인 착각으로 교시한다 해서
그 점이
선과 같은 내용이라는 설명은 되어지지 않는다.
선은 더욱이
실증주의적 차원에서의
물음이나 대답이라든가
다른 의도적인 의심과 이해로서
따로 체득되어 각(覺)해지는 자리가 아니니
어떤 방식의 접근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위의 그러한 방식들은
아무리 추구해도
실마리가 풀리기는커녕
계속되는 자가당착 빠지고 말며
그러한 방법의 수증(修證)들은
교설적(敎說的)인것이나
학설적(學說的)인 흐름에 지나지 아니할 뿐
선의 본질과는 십만 팔천리나 격절된다.
그러므로
불립문자 교외별전인
선의 근원을 얻으려면,
그 흐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옛 선사들의
고칙(古則)을 엮은 선서들도 방편의 문일 뿐
조사선도
그것과는 별 무관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계속되는 이와 같은 지루한 생각도
교학적인 지식 교육에 물이 든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한다.
서옹 큰스님께서는
선을 묻는 우리들에게 그 대답은커녕
더 큰 의심덩어리만 선물하신다.
몇 번이나 큰스님께서
속 형편을 말씀드렸다가
봉변만 크게 당하고 나서는
이거 죽지도 못하고
답답하여 살 수가 없을 지경일 때가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말에 일본의 어떤 관리가
혜월(慧月)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선입니까”
하자
선사께서 벽을 바르시다가
일어나시며 대답하시기를
“도깨비가 방귀를 뀌었다.
그 방귀에 털이 났다.”
하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 날
지견(知見)이 상당히 열렸다고
자부하는 처사가 와서 묻기를
“어떤 것이 선입니까”
하니까
대답하시기를
“차돌은 떠오르고
낙엽이 가라앉는 호수를
몇이나 보았느냐”
하고 되물으셨다.
사실 나의 어릴 적 승려생활은
비구승, 대처승 분쟁으로
전국사찰이 시끄러워
공부를 할 수 없는 한심한 풍토였다.
하지만 노스님한테서 구전되어 온
옛 선사들의 행장에 대한
말씀들을 귀담아 듣곤 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식에 의하여
지각적인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어떤 알음알이나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타인들의 방법을 빌어서
스님에게서
선을 물어물어 배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최하급 선으로 일컬어지는
의리선(義理禪)이라도
스스로가 공부하여 깨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지금도 나는
선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기에
이렇게 선에 대하여 말을 하고 있다.
큰스님께서 주창하시는
조사선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똑바로 생각해 본다.
마음 가는 곳이 사라지고(心行處滅)
말의 길이 끊어지며(言語道斷)
의식 작용이 이르지 못하고(意路不至)
문자로도 세울 수 없으며(不立文字)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져(以心傳心)
교 밖으로 따로 전해지는 (敎外別傳)
그것은 스스로 체험(自證自悟)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이와 같은 무상의 선을
참되게 터득(頓證)하지 못한 자가
당치 않은 망설과 망발로
선문은 물론 사회를 어지럽힐 때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고
심지어는 죽여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 본래의 참 성품을 오염시켜
새로운 번뇌 망상의 병을 계속 앓게 하여
치유는 그만두고
사람 자체를 죽이는 작태를 연출하게 되기 때문이다.
[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
우리는 선수행(禪修行)을
매우 잘 하신 훌륭한 분들이
조사선하고는 아주 먼 거리에 있음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큰 차이를 모르고
혼합된 상태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경전을 연구하는 식,
조사 스님들의 어록을 연구 암송하는 식.
그분들의 사상이나 행적을 모방하는 식에 불과한
선사의 아류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무엇이고 분석해보고 떠보고 싶은 생각에서
태고선(太古禪)과 보조선(普照禪)을 두고
큰스님께 질문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은
돈오점수의 보조선과
돈오돈수의 태고선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나누어 말하는 것도 이상하게 됐지만)
‘보조선은 순수한 한국적인 선이고
태고선은 사대주의 사상에 입각한
중국전통의 외래선(外來禪)이라고 운위하는데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게 나의 질문이었다.
거기에 대한 큰스님의 말씀을 간추린다면
고려 시대의 보조스님 때에는
선과 교가 다 같이 숭상 받으며 발전하던 때여서
조사선 일번도만을 추구하기엔
어려운 실정이었다 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 점이
한국불교의 특색이라면 할 수도 있겠지만
조사선의 안목에서 볼 때는
문제가 있다고 한 후
그러한 것은
눈 밝은 훌륭한 선지식들에게
판단을 맡길 일이며
그분들이 알아서
전법(傳法)해 갈 것이다
하시고는 그만 두었다.
돈오돈수에 대하여
확실하게 답변하지 않으시고,
조사선은
돈오돈수이지 돈오점수는 모르겠다.
통불교라고 해서
비빔밥을 만들지 말라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다.
종조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자세히 얘기하자 하시고
다른 질문을 받아 아쉬움과 불만이 남았다.
여기서 문득 생각건대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 중에서
사대주의 사상의 폐해는 확실히 고쳐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바깥 나라의 격 높은 사상이나 정신
그리고 고급 문화까지 배격되어서는 안 된다.
외국의 문물이라 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이며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에 와서
선종이라는 종파까지 생겨나
더욱 발전된 불교의 특색
(부처님의 三處傳心이 선의 시초이지만)
을 보여 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에 지지 않는 조사선의 법맥을 이어온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옹 큰스님의 선사상도 살펴본다면
이해가 손쉬워진다.
가는 곳마다 주체가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어라
혹자들은
“태고(太古)스님이나 나옹(懶翁)스님이
중국에 건너간 것은
중국의 선사들과
법거량(法擧揚)하려고 간 것이지
인가받으러 간 것은 아니므로
태고선이든 보조선이든
모두 다 한국선으로서 올바른 것이다.”
라고 의견을 내세운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듯한 얘기다.
그러나 또 하나의 의견은
우습고 불경스런 얘기지만
“태고스님이나 나옹스님께서
스스로가 깨달은 바가 확실하다고 느낀다면
중국에까지 건너가 그곳 선사들과
법거량(法擧揚)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뭔가 뿌리와 확증을 얻어야겠다는
미비한 점이 남아 있으니까
건너가서 인가를 받고
그 신표를 받아 가지고 왔으리라.”
는 추정이다.
확실한 것은 조사선의 가풍은
오직 조사 가풍일 뿐
한국적이니
인도적이니
중국적이니 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 서옹 큰스님. ]
조사가풍(祖師家風)의
참 소식을 아시고자
생명을 걸어 그 길에 철저하신 분으로
‘가는 곳마다 주인이셨으며
차별 없는 참사람(隨處作主 無位眞人)’
으로 시종하셨다.
나는 30년여를
큰스님을 모시는 흥복을 받고 있음에도
큰스님께서
활연관통(豁然貫通)하신
대오(大悟)의 소식을 모른다.
사자굴 속의 뜻과
상왕행처(象王行處)의 소식은
다른 동물들의 뜻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바가 아닌가.
다만 큰스님과 맺어진
인연의 그 공덕을 헤아려볼 뿐이다.
진실로 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남이요.
겨자씨가 바늘에 꽂힘이라.
그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book cafe 唯然世尊 願樂欲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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