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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찾겠다 꾀꼬리’
1980년!
그 해는 [조용필]의 광풍이 몰아치던 해다.
라디오만 틀면 하루 종일 조용필의 노래가 들리던 시절이기도 했다.
조용필은 1980년 1집을 시작으로 1982년에 4집을 만들 정도로 그 무렵에는 정신없이 창작활동에 열을 올렸다.
발표한 노래 대부분은 히트를 시켰다.
각 방송국의 버라이어티쇼에 단골손님으로 출연을 하고, 밤에는 야간업소 순례를 하는 그 살인적인 일정에도 창작의 열정은 전혀 식지 않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괴력을 과시했다.
조용필의 무수히 많은 히트곡 중에서 특히
‘못 찾겠다 꾀꼬리’는 그 시절을 아련히 떠올리게 하는 노래이다.
‘못 찾겠다 꾀꼬리’는 숨바꼭질을 하다가 술래인 아이가 숨어버린 아이들을 못 찾으면 힘껏 지르는 소리이다.
일종의 항복 선언인 셈이다.
작사 김순곤
작곡 조용필
노래 조용필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거야
모두가 숨어버려 서성거리다 무서운 생각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지
하나 둘 아이들은 돌아가 버리고
교회당 지붕 위로 저 달이 떠올 때
까맣게 키가 큰 전봇대에 기대 앉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엄마가 부르기를 기다렸는데
강아지만 멍멍 난 그만 울어버렸지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이 숨어버려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야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
눈을 감고 세어보니
지금은 내 나이는
찾을 때도 됐는데
보일 때도 됐는데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얘들아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술래
못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술래
못찾겠다 못찾겠다 못찾겠다 못찾겠다
고기는 씹어봐야 제 맛을 알고 노래는 듣거나 불러봐야 그 맛을 제대로 안다.
그러나 조용필의 ‘못 찾겠다 꾀꼬리’는 단지 어린 시절의 절절한 추억을 소환해준다는 이유가 있으므로 가사만으로도 충분한 감흥을 준다.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삼보사찰(三寶寺刹)]이 있다.
세 개의 보물 사찰 이라는 말이다.
그 첫 번째가 [통도사]다.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고 하여 [불보사찰 : 불교의 보배 사찰]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해인사]다.
이곳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라고 해서 [법보사찰]이라고 한다.
세 번째가 [송광사]다.
여기에서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승보사찰]이라고 한다.
통도사는 [불지종가(佛之宗家)]라고 불리는 사찰이다.
불교의 종가라는 뜻이다.
즉 한국 불교의 뼈대 역할을 하는 사찰이다.
[통도사] 뒤에 있는 산 이름이 ‘영취산’이다.
이 산의 이름은 인도의 ‘영취산’에서 따 온 것이라고 불교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영취산은 불교의 상징 그 자체다.
‘영취산’은 인도에 있는 산 이름이므로 인도 불교를 상징하는 산이다.
여기서 ‘취(鷲)’는 ‘독수리 취’자다.
지구촌 곳곳에는 장례풍습도 다양하다.
인도에 어떤 부족 장례식은 사람이 죽으면 날짐승이 뜯어 먹는다고 한다.
주로 까마귀와 독수리가 많이 뜯어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새 종류 중에서 까마귀와 독수리를 가장 성스러운 새(神鳥)로 여겼다.
[영취산]의 이름을 지을 때 까마귀는 너무 영악하여 밀려났다.
그래서 까마귀보다 약간 지능이 낮은 독수리가 주인공이 되었다.
주인공인 ‘독수리 취(鷲)’를 넣어서 영취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독수리’가 불교계에서는 더 대접을 받고 있다.
‘통도사 극락암’에 기거했던 [경봉스님]은 키가 180cm로 기골이 장대한 스님이었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통도사 극락암을 찾았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 사업에 실패한사람, 사랑에 병든 사람, 육신에 병이 든 사람 등이 인생 상담을 하기 위하여 찾아왔다.
“스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생의 길을 물었다.
생각하면 참 딱하고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자기 삶의 길을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자기가 결정해야 하는데 스님이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경봉 스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삶에 도움과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한마디씩 해주었다.
[못 찾겠다 꾀꼬리]는 대마초 사건으로 방황을 하던 조용필이 ‘경봉스님’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탄생했다.
1970년대 중반에 연예인 대마초 사건이 터졌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히트시켜서 한참 잘 나가던 조용필도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가수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사람은 자기가 하던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 낙심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때 ‘경봉스님’의 소문을 들은 조용필도 통도사 극락암을 찾았다.
조용필은 답답한 마음에 극락암 마당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마침 경봉 스님이 마당에 나왔다가 조용필을 보았다.
이때 스님의 나이가 80대 중반이었다고 한다.
스님을 접견하자
“뭣 하는 놈인고?”
“예! 노래를 하는 가수입니다.”
“그래? 그럼 한 자락 해 보거라!”
조용필은 스님 앞에서 한 곡을 불렀다.
조용필로 부터 자초지종 얘기를 듣고는
“허흠! 노래를 참 잘하는구나. 니 속에 꾀꼬리가 들어 있구나! 그런데 그 꾀꼬리의 참 주인이 누군지 아느냐?”
“......,”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스님!”
“찾아 보거라! 누가 노래를 하는지......,”
“......,”
“그것을 찾아 보거라!”
“너는 꾀꼬리다.
꾀꼬리를 찾아 가지고 와 봐라!”
“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조용필은 꾀꼬리가 어디에 있는지 부지런히 찾았다.
스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헛말이 아니고 무언가 뜻이 있을 것이다.
길을 걸을 때도 음식을 먹을 때도 심지어는 화장실에서도 꾀꼬리를 생각했다.
“대체 꾀꼬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몇 달간 이 숙제를 풀기 위해서 고민하던 조용필은 노래를 하나 만들었다.
그 노래 제목이
[못 찾겠다 꾀꼬리]였다.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오늘도 술래
못 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결국 이 노래는 조용필이 경봉스님의 선문답에 걸려서 고민을 하다가 만들어진 노래다.
노래 가사에
“나는 야 오늘도 술래”
라는 구절은 숨바꼭질에서 숨은 아이를 찾는 술래나 나의 주인공을 찾는 술래나 다를 것이 없음을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또
“나는 야 언제나 술래”
라는 구절은 숨은 아이들을 찾지 못하면 계속해서 술래를 할 수 밖에 없듯이 주인공을 찾지 못하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뛰어난 예술가는 어떤 계기에 떠오르는 영감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인연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영감이란 대수롭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이외로 떠오르는 것이다.
동심을 소재로 만들어진 성인가요!
성인들의 아련한 동심을 자극하여 결국은 훌륭한 노래가 만들어 졌다.
이 곡은 ‘가요 톱 10’의 골든 컵이라는 제도를 탄생시킨 대단한 노래로 어린 시절의 감수성을 절절하게 느끼게 만드는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는 발표 후 ‘가요 톱 10’에서 내리 10주나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운 곡이기도 하다.
☞ 조용필이 내세운 2005년 평양공연 4대 조건
〈커리어코치가 된 둘리 PD 블러그에서 퍼온 글〉
조용필은 2005년에 우리나라 가수로는 최초로 단독 평양공연을 하였다.
남북한은 2000년 초반부터 조용필 평양 공연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했지만 조용필이 내세운 4가지 조건을 북한이 충족시키지 못하여 번번이 무산되었다.
8번이나 협상의 난항을 겪은 끝에 2005년에 드디어 성사가 되는데 조용필이 내세운 4가지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공연 내용에 간섭하지 말 것
2. 장소는 예술회관이 아닌 규모가 큰 [정주영 유경 체육관]에서 할 것
3. 남북한 동시 생중계 할 것
4. 방북을 거부하고 있는 [조선일보]를 언론 단으로 참여 시킬 것
이 4가지 조건은 북한 측의 민화협 고위 담당자로서도 결정할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김정일이 전격적으로 승인을 하였다.
그리하여 무산 직전에 성사가 된 공연으로 남북한 문화 교류의 엄청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당시 조용필 공연은 2005년도 조용필 전국 투어명인 [Pil & Peace]의 하나로 평양에서도 한국 공연장에서와 거의 같은 형식과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북한 측은 공연 내용을 일절 터치 하지 않았다.
공연장 스크린에는 조용필의 35주년 [잠실 주경기장]의 화려한 모습이 편집 없이 그대로 나갔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 외에는 사용을 금한다는 ‘태양’, ‘위대한’ 이라는 단어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평양 공연의 오프닝 곡이 ‘태양의 눈’이었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으로 소개가 되었으니 말이다.
당초 북한 측이 제안한 공연장은 [동평양대극장]이었다.
이곳은 2002년 방문한 우리 공연단의 최초의 평양공연이 진행된 곳이다.
그러나 조용필은 거부했다.
그 이유는 일단 규모도 작고(3000여석), 그의 공연은 밴드 위주의 락 베이스 공연이라 극장에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정주영유경체육관(8000석)]을 요구했다.
3번째 요구 조건인 남북한 동시 생중계에 북한도 동의했다.
그러나 결국 동시 생중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북한은 이후 녹화방송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공연을 보고 북한 주민들이 충격을 받을 것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북 직전 4번째 조건인 [조선일보] 방북도 거부했다.
조선일보에 대한 오랜 반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은 조선일보 방북을 거부하면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결국 방북은 승인되었다.
북한 공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내세운 조건을 마지막까지 관철시켜 공연을 하는 것을 보면 가수이기 이전에 그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조용필은 음악의 힘으로 동토 북한에 조금이라도 온기가 돌고 변화의 바람이 불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공연 후 인터뷰에서 기자가
“관객 반응이 처음에는 너무 없다가 나중에야 반응이 나타났는데 어땠어요?”
라고 질문을 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음악이잖아요. 음악은 그런 것을 다 넘을 수 있어요!”
라고 했다.
조용필이 2018년 평양 공연에 다시 참가한 것은 음악이 남북한에 다시 온기를 돌리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시작이 음악이었듯이 말이다.
이후 조용필과 SBS, 민화협은 10만 관객의 [능라도 공연]을 기획하였다.
이때는 한국의 일반 국민들도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조용필을 좋아했던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이 기획은 무산이 되었다.
만약 이 공연이 성사되었다면 남북한 관계는 어찌 되었을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없다!' 지만......,
첫댓글 조용필이 가수이기전에 배포있는 대한의 사나이 였네요.
평양공연 재방 함 보고 싶어요
송이골님 덕분에 못찾겠다 꾀꼬리의 탄생을 알았습니다.
무식을 깨우처 주셔서
고맙습니다.
'불세출의 가수'는 노래만 잘 부르는 것이 아니고 '배포'도 대단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