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교통발달사 10
- 일제침략에 이용된 철도사 (鐵道史)
1. 한국 육상 대량수송교통의 혁명을 일으킨 철도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 사신들은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구경한 후 기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후 미국인 제임스 모스가 조선에서 철도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 1895년에 이르러 일본군이 진남포와 평양 사이를 잇는 80km의 전쟁수행용 군용철도를 만들었다. 진평선은 비록 꼬마열차가 달리는 협궤였지만 우리나라에 놓인 첫 철도였다 .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증기 엔진이 개막시킨 철도교통 시대
지난 1765년 영국인 제임스 와트가 완성한 증기기관은 수동식 제조공장을 자동식으로 바꾸는 산업동력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기차와 자동차를 탄생시켜 육상교통의 혁신을 가져온 주역이었다. 1807년 8월 17일 ‘뉴욕 밀러’지는 증기기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증기 엔진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발명보다 훨씬 더 인류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또 증기 엔진은 지구상의 서로 다른 문명권 사람들을 한 데 묶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크기를 축소시킬 것이다’
영국 뉴캐슬에서 광산 엔지니어로 일하던 조지 스티븐슨은 1814년 이 증기 엔진으로 석탄을 더 빠르고 더 안전하게, 더 싸게 운반할 수 있는 움직이는 기계(traveling machine)를 만들어 기관차(locomotive)라고 불렀다.
이 기관차는 그해 7월, 킬링워즈(Killingworth)에 있는 말이 끄는 궤도차용 레일(horse tramway) 위를 30톤의 석탄을 실은 8량의 화차(wagon)를 말보다 더 빨리 끌고 달렸다.
1822년 스티븐슨은 더햄 지역의 풍부한 석탄수송사업을 위한 철도회사를 설립하고 그가 만든 기관차 5대가 끄는 17량의 화차로 석탄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스티븐슨은 탄광용 기관차를 개발한 데 이어 기차 전용 철로를 고안해 1825년 스톡톤과 달링톤 사이에 부설하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화물과 승객 수송을 시작해 철도교통시대를 열었다.
이후 철도는 빠르게 세계로 퍼져나가 프랑스는 1832년, 아일랜드는 1834년, 벨기에는 1835년, 캐나다는 1836년, 이태리는 1837년, 미국은 1839년, 멕시코는 1850년에 각각 개통되었다.
김기수의 일본 기차 시승기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약(朝日守護條約)을 맺어 부산, 인천, 원산 등 4대 항구를 개방하자 서서히 들어오는 서양문명과 서양 사람들을 통해 철도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일수호조약이 체결된 그해 4월 조약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본에 첫 수신사를 파견했다.
이때 수신사로 참여한 예조참의 김기수는 일본에서 각종 신식 문명을 견문하던 중 특히 기차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일본을 다녀온 뒤 기록한 총 4권의 ‘일동기유’(日東記遊)에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일본에서 기차(汽車), 즉 화륜거(火輪車)를 타본 소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요코하마에서 신바시까지 화륜거를 타기 위해 역누(驛樓)에서 잠시 쉬었다. 일행의 행장은 배로 에도(지금의 도쿄)의 항구까지 보내고 필요한 의복과 물건만을 기차에 싣기로 하였다. 차가 역누 앞에 기다린다고 하여 역누에서 장행랑(長行廊=복도)을 따라 수십 칸을 지났으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안내인에게 물으니 이것이 기차라고 대답하였다. 장행랑이라고 한 것이 바로 기차였다. 앞의 1차는 화륜(火輪)이었는데, 앞에는 화륜이 끌고 뒤 객차에는 사람을 실었다.
객차는 3칸 크기 방(屋)이고 반 칸은 마루모양의 승강구였다. 쇠갈고리(連結器)로써 객차가 객차에 연결되어 4∼5차에서 10차까지 이르게 되니 그 길이가 30∼40칸에서 40∼50칸이나 되었으며, 마루를 통해 오르고 내리며 방에 앉게 되었더라.
밖에는 문목(文木)으로 장식하고 안에는 가죽과 털, 담요 등으로 꾸몄다. 방 양쪽에는 의자처럼 높고 가운데는 낮아 편편한데, 걸터앉아서 마주 대하니 한 방에 6인 혹은 8인이나 앉게 되었더라. 양쪽에는 모두 유리로 막았으며 장식이 찬란해 눈이 부셨다.
차마다 모두 바퀴가 달려 있어 앞에서 화륜이 구르면 뒤의 여러 객차의 바퀴들이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레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같이 날뛰었다.
한 시간에 300∼400리를 달린다고 하였는데 차체(車體)는 안온해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초목, 가옥, 사람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하므로 도저히 잡아 보기가 어려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신바시까지 도착했으니 그 거리가 95리나 된다더라’
기차를 타고 열차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서도 그것이 기차인 줄 모르고 긴 복도로 알았고, 기차 안으로 걸어들어 가면서도 기차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기차는 당시 우리 백성에게 낯선 것이었다. 전체 열차의 길이를 우리의 재래수치로 따져 50칸 정도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객차를 10여 량이나 연결해 놓은 것을 말한다.
그해 6월 일본에서 귀국한 김기수가 국왕에게 일본에게서 본 것들을 이야기하자 고종은 특히 기차, 전신, 농기구 등 서양의 과학이기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어서 조미수호조약(朝美修好條約) 체결 때문에 1880년 5월부터 8월까지 일본에 다녀온 수신사 김홍집도 전신, 조세, 관세 등과 더불어 철도가 국가 부흥에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하여 188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철도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고종이 처음 본 모형 기차
우리나라에서 철도가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열강들이 철도부설권을 요구하기 시작한 1882년부터였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정치고문이던 독일인 묄렌도르프(1848∼1901년)는 고종에게 국고가 빈약하니 철도 부설을 연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했다.
개항 초기인 1882년 조선 정부 내에서 철도부설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철도부설사업을 할 자금이 없었고 임오군란으로 정치와 사회가 매우 불안했으며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해 철도부설과 같은 대규모 사업을 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조선정부의 빈약한 재정사정을 간파한 일본과 영국이 철도부설권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온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묄렌도로프는 그의 수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철도에 대한 논의는 1882년 내가 조선에 부임한 직후에 거론되었다. 철도부설권을 놓고 여러 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지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청해 온 회사 중의 일부는 영국에, 또 일부는 일본에 소속된 회사들이었다. 한국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잠시 보류하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조미통상수호조약을 맺은 이후 두 나라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게 되었다. 조미통상조약에 따라 1883년 초 조선 미국공사로 푸트가 부임하자 이에 대한 답례로 고종은 젊은 개화파 정치가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보빙사로 임명해 홍영식 등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아더 미국 대통령을 예방한 뒤 때마침 보스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구경하고 기차를 타본 이들은 귀국 후 기차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외교와 국제무역 업무를 쥐고 흔들던 묄렌도르프가 러시아 쪽에 붙어 청나라를 배반하자 그를 조선 정부에 추천한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점차 묄렌도르프의 세력은 약해지게 되었다.
이 틈을 타서 철도의 필요성을 실감한 우리 정부는 1885년 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總理交涉通商事務衙門) 내에 우정사(郵政司)를 설치하고 여기에 철도를 담당하는 부서를 두었으나 뚜렷한 진전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887년 6월 주미조선공사(駐美朝鮮公使)로 임명된 박정양을 수행한 이하영이 미국체류중 기차를 타보고 그 편리함과 신기함에 감탄한 나머지 귀국할 때 정교하게 만든 기차와 철도 모형을 가지고 와 고종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계기로 철도부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하영이 고종과 대신들에게 철도교통의 편리함과 효용성을 역설하면서 보여준 기차와 철도 모형은 폭이 18∼20cm(6∼7촌), 높이가 25∼30cm(8∼9촌) 정도 되는 쇠로 만든 것으로, 기관차·객차·화물차를 연결해 철로 위로 달리는 장난감 기차였다.
문호가 개방되면서 외국 세력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들이 조선에서 노린 가장 큰 이권은 바로 철도와 광산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 조야(朝野) 인사들도 철도 문제에 대한 인식이 점차 깊어졌다. 그러나 철도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했지만 막대한 시설비 때문에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전기와 통신 사업부터 서둘렀다.
철도 바람이 불었으나 10여 년 가까이 자금과 기술부족으로 철도부설을 미루고 있는 가운데, 1892년 5월 미국인 제임스 모스는 조선에서 철도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에 있던 주미참찬관 이완용과 서기관 이하영을 설득했다.
이에 이완용과 이하영은 귀국 즉시 고종에게 철도부설의 절박함을 주장하고 고종을 설득한 끝에 모스를 고문으로 초청할 것을 허가받기에 이르렀고, 이듬해인 1893년 모스가 조선으로 들어왔다.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이완용과 이하영은 모스와 철도부설을 의논했다. 그러나 비용이 많이 든다는 등의 이유로 우리가 건설하는 것은 어렵다고 반대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자기의 야망을 이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은 모스는 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철도부설권을 쉽게 따기 위해 오히려 조선정부에 왕복여비 등 손해 보상비로 은(銀) 1만 원을 청구하는 비열한 짓을 해 한동안 말썽을 일으켰다.
조선 철도 부설권 탈취 위한 일본의 흉계
한편 1892년 8월, 일본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철도기사 가와노 텐즈이 일행이 부산주재 총영사 무로다 요시부미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으로 변장해 서울∼부산간 철도 선로를 몰래 답사한 후 이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와 도면을 작성해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한국철도를 장악하기 위해 일본이 꾸민 흉계의 시작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통상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침투에 열을 올렸고, 이를 위해서는 철도부설권 획득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철도기술은 물론 신식과학과 기계, 기술 문명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나 다름없었고 재정마저 빈약했다. 이 같은 사실을 재빨리 간파하고 선수를 친 나라가 바로 일본이었다.
가와노 텐즈이가 선정한 경부선 철도노선은 부산에서 낙동강 좌측을 따라 삼랑진∼밀양∼대구∼상주∼문경∼청주를 거쳐 서울 남대문으로 연결하는 총 연장 380km다.
그 뒤 1894년 7월 일본 외상 무츠 무네미츠는 다케우치 츠나를 우리나라에 파견해 서울∼인천간과 서울∼부산간 철도부설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청일전쟁을 치르기 위한 군용으로 이 두 철도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철도부설을 계획하고 있을 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자 일본도 청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동학란을 진압한 후 양국의 철병문제가 화근이 되어 1894년 8월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바로 일본이 중국을 삼키기 위해 바라던 전쟁이었다.
청일전쟁이 급속히 일본의 승리로 기울자 일본은 군용으로 부설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일단 전쟁이 끝난 뒤 경인철도를 부설하기로 했다. 철도부설을 위해 준비한 막대한 자금이 대부분 청일전쟁을 치르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일본군은 1895년 2월 진남포와 평양 사이에 80km의 전쟁수행용 군용철도를 만들었다. 일본식 협궤 철도였다.
일본군의 우세로 일단 주전선이 북상해 평양까지 이르자 막대한 자금과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부산-평양간 철도 부설 대신 선박으로 군대와 군수품을 싣고 서해로 올라와 진남포에 내린 뒤 평양으로 운송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모두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약식 군용철도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크게 쓸모가 없어져 전쟁 후 철거되고 말았다. 비록 협궤에 꼬마열차였지만 진평선은 우리나라에 놓인 첫 철도였다.
한편 진평선을 부설하기 1년 전인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의 승전 여세를 몰아 우리 조정을 협박해 조선의 중요한 이권을 수탈 강점하기 위한 7개 항목의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철도뿐 아니라 전기통신사업 등이 들어있어 일본의 야욕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조선 정부는 1894년 정치, 군사, 경제, 사법, 제도, 사회, 교육 등 각 방면에 걸쳐 서양식으로 개혁하는 갑오경장을 치르면서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국력으로 부설해 일본 등 열강의 탐욕에서 우리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공무아문에 철도국을 두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철도사업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
열강의 철도부설권 쟁탈전
조선에 철도를 부설하는 문제는 이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열강들에게 정치, 경제, 군사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일본은 한반도를 중국대륙침략의 교두보로 삼아 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를 부설하려 했고, 러시아는 한반도 남단까지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해 부산에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다.
또 청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철도부설권을 원했고, 영국 역시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철도부설권을 얻으려 했다.
이들 가운데 조선의 철도부설권 획득에 가장 열을 올린 나라는 일본이다. 조선과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군대와 군수물자를 해상으로 수송하는 것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철도를 부설해 육상으로 수송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빠르다고 판단했기 때문.
결국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895년 4월 청나라는 일본에게 2억 냥의 전쟁배상금과 함께 요동반도와 대만을 내주는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게 된다.
그러자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 등의 세 나라가 시모노세키조약이 부당하다며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못 이긴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3국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쳐 일본의 약점이 폭로되자 친일파 정객과 귀족들이 일본을 배반하고 친러(親露) 쪽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일본의 압력으로 세력이 약화됐던 명성왕후 일파를 중심으로 조종이 꾸려지면서 친러정책이 급진전되었다.
명성왕후는 박영효 등의 친일내각을 누르고 이범진,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한 친러 내각을 조직해 득세하기 시작했다. 정세가 위급해진 일본은 민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꾸며 1895년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한편 청일전쟁의 여파로 재정이 어려워진 우리 정부는 정부 관리의 밀린 봉급을 주기 위해 1894년 일본으로부터 30만 원을 빌린 데 이어, 다시 500만 원의 차관을 일본에 요구해 1895년 3월 양국의 절충으로 차관이 이루어졌다.
명성왕후 시해 사건으로 열강들의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차관을 미끼삼아 이를 모면하는 한편 친러파를 몰아내고 철도, 전신, 광산 등의 이권을 빼앗고자 무력을 앞세워 우리정부의 조직을 일본식으로 개혁하는 을미개혁을 일으켰다.
이렇게 일본이 조선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자 서울에 있던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5개국 대표가 연명으로 철도·전신 등의 중요 이권을 일본에게만 주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강력히 저항했다.
강압과 기만으로 다른 열강 몰래 우리나라의 각종 이권을 탈취 독점하려던 일본의 침략적 행각이 5대 강국의 간섭으로 실패할 위기에 이르자 우리나라는 이 기회를 타서 우리 힘으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대책을 세웠다.
2. 철도부설권 사수 위한 우리 민족의 저항 정부와 민간인들,
철도 부설하기 위해 노력 펼쳐
조선정부는 1900년에 경의선과 경원선을 직접 건설하기 위해 서북철도국을 황실직속으로 세웠다. 정부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첫 민족철도회사 설립자인 박기종은 프랑스가 차지했다가 되돌려준 경의선과 삼마선을 부설하기로 계획했으나 기술과 자금의 부족 및 일본의 방해로 인해 실현하지 못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우리 민족의 철도부설 노력
고종은 지난 1892년 미국에서 철도기사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를 초청해 외무협판 이완용과 외무아문 참의 이하영에게 철도건설을 논의하게 했다. 그러나 이완용 등 친일파 대신들과 각국 공사들의 자국 이권을 노린 방해로 성사되지 못하고 오히려 열강들의 야욕에 불을 지핀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일반 유생들과 반일 대신들 사이에 일본의 야욕과 간섭에 대한 저항이 커지면서 광산 개발과 함께 철도 부설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실현하자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 본격적인 철도부설 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정부 공문서인 농상아문거이(農商衙門去移)를 보면 ‘철도 측량 차 농상아문주사 한 명에게 300냥을 출장비로 주었으며 돌아오는 여비가 부족하면 일본기사에게 궁색한 빛을 보이지 말고 지방관서에서 빌려 쓰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다. 바로 철도부설을 위한 첫 측량 작업이었다.
1897년 4월에 기록한 정부공문서에 탁지부 대신 심상훈이 시흥에서 인천에 이르는 경인간 철도노선용 부지 매입대금으로 1만2,372원의 지출을 이미 내각에서 승인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철도 문제를 하나 둘 독자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11월의 정부공문서에도 탁지부 대신 박정양이 경인간 철도 부지매입비로 5만6,786원의 지출을 내각회의에서 승인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정부는 1894년 갑오경장 직후부터 독자적으로 철도부설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 독일, 미국 등 열강들은 욕망을 꺾지 않고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조선정부를 계속 압박했다. 그러자 독립협회 등 국내의 이권수호 단체들의 여론이 강하게 일어나 조정에서는 1896년 초, 철도 및 광산의 경영은 일체 외국에 허가하지 않는다는 강경한 의지를 선포한데 이어 처음으로 국내철도부설 규칙 7조를 제정 공포했다.
이렇게 우리의 힘으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빈약한 국력으로는 열강들로부터 철도 이권을 지킬 수 없었다.
결국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한 호기를 이용한 러시아 및 미국의 협박과 간계로 경인선은 1896년 3월 철도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모스에게, 경의선은 같은 해 7월 프랑스의 무역상사인 휘브릴의 총지배인 그리예에게, 경부선은 1898년 일본에 주고 말았다.
이후 해마다 철도에 관한 복잡하고 골치 아픈 국내외 문제가 불거지자 이를 담당할 전문 기관이 필요해 1898년 7월 철도사(鐵道司)를 설치하고 탁지부(度支部) 산하에서 화폐주조를 담당하던 탁지부 전환국장 이용익을 철도사 감독으로, 탁지부 전환국 기사 최석조를 철도사 사장에 임명했다.
이때 경부, 경인, 경의선은 외국에게 빼앗겼지만 서울∼목포의 호남선, 서울∼원산간 경원선, 원산∼평양간 평원선, 원산∼진남포간 진원선만은 우리의 힘으로 놓겠다고 검토했다. 그러나 이 역시 우리 국력으로는 역부족이어서 탁상공론이 되고 말았다.
이용익은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1882년에 군제 개혁과 13개월치 월급 체불에 구 군인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임오군란을 피해 민비가 장호원으로 피신하자 특출한 속보(速步)로 고종과 민비 사이의 연락을 속달하여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사람이다.
주요 간선철도는 외국에 다 빼앗겼지만 조선정부는 남은 호남선과 경원선·함경선만은 우리 힘으로 부설하기 위해 철도사를 철도원으로 승격시켜 농상공부(農商工部)에 소속시킨 다음 이를 중심으로 부설운동을 벌였다.
조선정부가 국내 철도 전부를 직접 건설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국 1900년에 철도업무를 황실이 장악해 프랑스가 포기해 버린 경의선과 경원선을 직접 건설하기 위해 서북철도국(西北鐵道國)을 황실직속으로 세웠다.
그러나 서북철도국은 경의선 건설을 착공했지만 기술과 자금의 부족 및 일본의 방해로 인해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이렇게 우리의 철도주권을 지키기 위한 대한제국의 노력에도 일본은 러일전쟁을 미끼로 경의선 부설권마저 빼앗아 사실상 철도주권은 일본에 거의 넘어갔다.
한국 최초의 민족 철도회사 탄생
조선조 말 국운이 기울고 개방과 더불어 들어온 열강들이 한반도를 호시탐탐할 무렵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일본은 근대 한국의 동맥인 철도부설을 강제로 독점해 우리나라를 중국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당시 박기종은 민족주의 철도부설을 열망했던 기업가이자 철도 선각자였다.
박기종은 1839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탁월한 일본어 구사로 1, 2차 수신사(修信使) 통역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 30대에 이미 거상(巨商)으로 자수성가했다.
그는 1898년 부산진과 하단포간 철도부설을 위한 부하(釜下)철도회사를 시초로 경원선의 철도용달회사, 창원-삼랑진간 삼마(三馬)철도회사 등을 차례로 설립한 한국 첫 민족 철도업자다.
부산의 갑부로 검은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개화스틱을 휘저으며 남포동거리를 누빈 화제의 멋쟁이 신사였던 그는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스케일이 큰 철도부설 사업을 계획한 앞서가는 기업인이었다.
박기종이 부산진과 하단을 연결하는 6km의 철로부설을 위해 설립한 부하철도회사는 한국 최초의 민족철도회사로서, 청일전쟁 직후 한국의 철도부설권을 따내기 위해 열강들이 혈안이 되어있던 때에 ‘철도는 우리민족의 손으로 놓겠다’는 자주적 의지를 보인 회사여서 더욱 의의가 깊다.
1898년 농상공부에 제출한 철도부설허가신청서에서 박기종은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면 상업이 제일이요, 상업을 융성하게 하려면 철도부설이 제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이미 ‘국가부강=상업 진흥=철도부설’이라는 놀라운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첫 철도사업인 하단철도 부설은 만만찮은 자금조달에 대한 어려움과 더불어 경제적 가치가 희박한 데다 일본인들의 방해와 일본의 경부선부설 계획에 밀려 몇 차례 측량만 하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기종은 끝까지 단념하지 않고 미국과 일본이 차지한 경인선과 경부선을 제외한 미부설 철도인 경원선과 함경선, 그리고 프랑스가 차지했다가 되돌려준 경의선을 부설하기로 계획했다.
박기종은 세 사람의 자본가들과 합자로 1899년 5월 대한철도회사를 세우고 서울-원산-경흥을 연결하는 경원선과 함경선 부설권을 조선정부로부터 허가받은 데 이어 프랑스가 얻었다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정부에 반환한 경의선 부설권도 얻는 데 성공했다.
정부와의 계약대로 5년 내에 시공하고 시공 후 15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막대한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박기종은 서울과 부산을 누비며 투자자들을 찾아 다녔다. 당시 웬만한 부호들은 그의 방문과 투자요청을 받았으나, 15년 후에 준공하게 되면 그동안 한 푼의 수입도 바랄 수 없는 데다 여러 사람이 출자해 사업을 하는 주식회사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해 선뜻 출자하려 들지 않았다.
조선정부는 박기종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국가가 직접 경의·경원 양 철도공사를 하기 위해 1900년 4월 철도원을 궁내부 직속에 두고 이용익을 철도원 총재로 임명했다. 이어 경원·함경선의 부설권을 일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철도원이 직접 공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이용익은 경의선 부설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서북철도국을 세우고 1902년 5월 경성-개성간 철도 건설의 기공식을 가졌다.
왕실에서 국고를 직접 투입해 경의선 철도를 건설하려는 강력한 의지에 따라 1902년부터 이용익을 중심으로 서북철도회사는 부설공사를 준비하고 1902년 5월 8일에 기공식을 열 예정이었다.
하지만 서북철도국은 경의선 시공예식에 앞서 이미 그해 3월 서울 마포에서 궁내부 소속 광군 300명을 투입해 첫 삽을 펐다.
그러다가 5월 31일 지금의 서대문 밖 독립문 근처에 있던 천연정(天然亭) 정거장에서 성대한 기공식을 열었다.
그후 서북철도국의 경의선 공사는 건설자금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행되었으나 1904년 2월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노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군수물자 수송용으로 경의선을 빼앗고 공병대를 동원해 전격적으로 단선철도를 완공했다.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1905년부터 통감부를 설치해 우리나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 서북철도국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박기종의 대한철도회사가 자금을 구하지 못해 시공도 못하고 쩔쩔 매자 철도원 총재 이용익이 결국 정부에서 직접 부설하기 위해 1902년, 경의·경원선을 궁내부(宮內府) 직속으로 인수하자 대한철도회사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고, 박기종은 또 한 번 좌절의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박기종은 여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1902년 여름 다시 영·호남지선철도회사를 설립하고 경부선에 접속하는 지선인 삼랑진-마산-창원을 연결하는 삼마(三馬)철도와 호남선접속 지선의 부설사업을 계획했다.
삼마선 부설을 착안한 이유는 마산항은 삼남해로의 중심 기항지로서 영남과 호남의 물자가 이 항구에 집합해 내륙 각지로 수송될 만큼 중요한 노선이었기 때문. 부설허가 신청을 받은 정부는 일본이 융자를 미끼로 철도경영권을 강제로 빼앗지 못하도록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매도하거나 양도하면 백지화한다는 조건을 붙여 박기종에게 삼마선 부설을 허가했다.
일본의 흉계에 말려 끝내 좌절한 박기종
박기종이 삼마선 부설권을 받자 일본은 즉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방해공작을 벌였다. 1898년 9월 경부철도회사를 세우고 경부선 부설권을 빼앗은 일본은 삼마선의 지선부설도 계획하고 있던 참에 박기종이 선수를 쳤던 것이다.
당시 서울 주제 일본공사였던 하야시 곤스케는 본국 정부로부터 삼마선 탈취교섭 운동비용으로 4만 원을 받아 조정의 친일파 대신들을 매수해 삼마철도 부설계약서에 일본자본이 들어갈 수 있는 사채조항을 삽입시켰다.
이것은 일본이 이미 박기종에게 자금조달 능력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기 위한 흉계였다. 그런 후 일본공사 하야시는 박기종에게 자금지원을 끈질기게 제안했다.
자금부족으로 그동안의 철도부설사업에서 실패한 박기종은 사채를 쓰지 않고는 삼마선을 부설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일본이 내민 사채를 받아들인 박기종은 일본의 야욕을 충족시켜 주더라도 평생의 꿈인 철도부설을 한 번만이라도 실현시켜 보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실권을 넘겨주고 명의상 사장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민족의 손으로 부설한 철도를 통해 이 나라의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원대한 포부아래 큰아들 정규를 일본 광산학교에, 둘째 아들 창규를 철도학교에 유학까지 시킨 박기종의 꿈은 끝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군사작전상 필요하다는 구실로 한국내의 중요철도를 강제적으로 탈취해 군사용으로 부설하자 박기종의 영·호남지선철도회사는 완전히 간판만 남은 허수아비 회사가 되고 말았다. 이해 5월 삼랑진-마산간의 삼마철도가 개통됐을 때 박기종은 식장 한 구석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한을 씹으며 허무한 눈물을 흘렸다.
1876년 일본의 협박으로 조일수호조약을 맺으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제1차 수신사 김기수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에서 도쿄까지 처음 기차를 타보면서 ‘우리 조국에도 기차의 우렁찬 기적소리를 기필코 울리게 만들겠다’다고 다짐했던 그의 포부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한국 최초의 민족 철도회사 외에 증기선회사도 부산에 처음으로 세웠으며, 부산상업학교를 설립했던 박기종은 관직경력도 화려했다.
1883년부터 1905년까지 경희궁위장(慶熙宮尉將), 부산판찰관(釜山判察官), 다대포검사(多大浦檢使) 겸 부산항검사관(釜山港檢査官), 부산경무관 겸 절영도검사, 외부참사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무임소변리공사(無任所辨理公使) 등의 관직을 역임한 그는 지금, 동해남부선이 통과하는 부산 옆 일광해수욕장 근처에서 영원한 휴식을 취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철마의 기적을 들으며 못다 푼 한을 달래고 있다.
철도부설운동을 벌인 민족 철도 선구자들
정부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족철도부설 운동에 앞장을 선 인물로는 서오순, 이규환, 이채연, 조병식 등을 들 수 있다.
서오순은 1899년 9월 경인철도 남대문 역사 건축에 자재를 납품하면서 철도 부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운수회사를 세우고 공무대신(工務大臣) 이윤용과 손을 잡고 호남선 부설 허가를 받은 즉시 조치원에서 강경에 이르는 56km의 노선부설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가 군사상 중요한 철도 노선으로 이용하기 위해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 결국 1909년 5월 보상금으로 12만9천여 원을 받고 부설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1899년 국내철도용달회사를 설립한 이규환은 1910년 경원선 부설공사를 정부가 착공했을 때 관민 합자로 완공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철도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경의선 부설권이 외국에 넘어가려 하자 동지들을 모아 연명으로 경의선 철도부설에 대한 권리는 대한철도회사에 있다는 청원서를 외부대신 이도재에게 올리는 등 민족의 힘으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성부윤(서울시장)을 역임했던 이채연은 1899년 9월 한강 하류에서 개성간 전기철도 부설권을 획득해 역사상 처음으로 전기철도를 놓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1896년 9월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이 설치되어 초대 총재로 임명된 의정부 찬성을 역임한 조병식은 “우리의 철도는 우리의 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등 초창기에 정부나 민족 자본가들은 한결같이 자력으로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자금과 기술부족에다 일본의 악랄한 방해 때문에 누구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3. 일제의 침략정책을 위한 철도건설 손님이 적어 선전과 호객 쇼를 했던
초기 경인선 기차
1899년 제물포와 노량진 구간을 임시 운행한 경인선은 처음에는 객차 6량으로 오전 오후 각각 1회씩 왕복했다. 객차 중 1량은 황실전용으로 왕족이나 대신들이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1900년 7월에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남대문역이 생겨 서울 중심부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다.
초기에는 차비가 너무 비싸 승객이 늘지 않자 주막 기생들과 사당패들을 동원해 춤판을 벌이며 기차선전에 열을 올렸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미국이 획득한 경인선 부설권
1891년 3월,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Morse)를 고문으로 초빙해 철도 부설을 구체화하려 했으나 수구파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모스는 손해배상금 1만 원을 받고 계속 조선에 머물렀다.
모스는 조선정부가 철도부설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욕심이 치솟았다. 서양문물과 외국인들의 왕래가 번창한 서울∼인천 사이에 철도를 부설하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곧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해 교섭을 벌였다.
모스는 당시 미국공사 알렌과 친미파 대신들을 매수해 부설권을 획득하려 했으나 일본과 유럽 열강들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1896년 2월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기회를 포착한 모스는 미국공사 알렌을 앞세워 친러파 내각의 외무대신인 이완용과 러시아 공사 웨벨을 매수해 그해 3월 29일에 고종으로부터 마침내 여러 열강국 중 최초로 서울∼인천간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모스는 충분한 자기 자본이 없는 국제거간꾼이었다. 황금노다지인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놓았지만 국내에서는 거금의 자본을 조달할 수 없었다.
경인철도 건설 계약을 맺은 그는 당시 인천에서 무역을 하던 친구인 타운센드(William Townsend)와 합자로 경인철도회사를 세우고 미국인 콜브란(Collbran)을 기사장(技士長)으로 경인간 선로측량에 착수해 다음 해인 1897년 3월 인천 제물포의 우각리에서 얼마간의 공사 부지를 산 다음 350명의 우리 노동자들을 투입해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자금이 빠듯한 모스는 돈 부족으로 철로부지와 자재들을 구할 수 없어 공사를 자주 중단했다.
일설에는 모스가 처음에 70만 원으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하나 그 돈이 우리 궁궐로부터 받아낸 것인지 미국에서 가지고 온 것인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70만 원이라는 돈은 당시 쌀 한 가마니에 4∼5원 할 때였으니 쌀 15만 가마가 훨씬 넘는 거금이었다.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공사를 시작할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기세가 등등했으나 조선 내에서는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프랑스, 미국, 독일, 러시아 등의 공사들로부터 눈총을 받아 그 기세가 움츠러들었을 때였다.
모스의 경인간 철도 부설권 획득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선수를 빼앗긴 일본은 1894년 8월에 맺은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들어 일본정부의 승낙 없이 경인철도 부설권을 제3국인에게 준 것은 조약위반이라고 우리 조정에 강력히 항의했으나 외무대신 이완용이 묵살하고 말았다.
한편 모스는 자금이 부족하자 미국으로 자금을 구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렀다. 이를 포착한 일본은 정부와 민간 재벌을 동원해 경인철도를 탈취하기 위해 일본의 재정고문인 미국인 데니슨을 앞세워 모스와 교섭을 벌였다.
미국의 경인선 부설권을 일본이 탈취
모스의 경인선을 빼앗기 위해 1897년 5월 경인철도인수조합(京仁人鐵道引受組合)을 결성한 일본은 경인지역에 사는 일본 거류민들을 동원해 경인선철도 부지를 전부 산 후 터무니없는 비싼 값으로 모스에게 되파는 등의 방해공작을 펼쳤다. 자금이 빈약한 모스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자금 압박과 일본의 방해공작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모스는 동경에서 경인철도인수조합과 인수계약을 맺고 계약금 5만 달러를 받았다. 이 계약에 따라 모스는 18개월 이내에 준공해 조합에 넘겨주기 위해 급하게 공사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계약 체결 후 일본이 경인철도 감독과 기사를 파견해 모스의 공사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조합과 모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심해지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모스는 1899년 1월에 계약금 5만 달러를 포함해 총 180만 원을 받고 경인철도를 완전히 인수조합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경인선 부설권은 완전히 일본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모스는 맨주먹으로 거금을 벌게 되었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은 미완공인 경인철도를 인수해 9월 13일 인천~노량진간 공사를 완공하고 1899년 9월 18일부터 임시 영업을 시작했다. 이어 1900년 6월말 한강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경인간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어 1900년 11월 서대문역에서 개통식을 가졌다.
경인철도 공사 중 한강철교 가설이 가장 어려운 공사였는데, 처음에는 우리 정부의 조건에 따라 오른쪽에 폭 4척의 인도교를 만들기로 했으나 일본의 묵살로 실현되지 못했다.
이 땅에서 제일 먼저 개통된 민수용 철도인 경인선은 1899년 9월 18일 노량진∼제물포 사이 33km가 완성되어 영업을 시작했고, 1900년 6월 한강대교가 준공되어 이해 11월 남대문까지 개통되어 우리나라에 대량수송 교통혁명을 일으키면서 철도시대를 열었다.
경인선 철로 폭을 일본의 협궤를 따르지 않고 광궤인 4피트 8인치 반의 세계 표준 궤도를 채택한 것은 시공자인 모스가 미국의 철로 폭을 따른 때문이었다.
일본은 처음에는 공사비가 많이 드는 광궤를 반대했지만 앞으로 중국·러시아·유럽까지 진출하기 위해서는 이들 나라의 표준 궤도를 따르는 것이 유리함을 간파하고 경인선 이후 부설한 모든 조선내의 간선철도는 표준 궤도를 채택했다.
권세도 안 통했던 첫 기차
1899년 4월 초파일 공중에서 번갯불을 튀기며 나타난 우리 역사상 첫 자동탈것인 전차가 등장한 지 4개월 만인 9월 19일, 두 번째로 기차가 이 땅에 나타나 대량수송 교통혁명을 일으켰다.
9월 18일 오후 재밀(인천 제물포)의 우각리(牛角里)역에서 노들(서울 노량진)간 33km의 단선 철로가 처음으로 개통되어 대량수송 시대를 열었다.
미국에서 들여와 조립된 기관차가 2량의 객차와 1량의 화차를 달고 우렁찬 기적소리와 함께 굴뚝으로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이튿날 개통식에 참석할 조정대신들과 내외귀빈들을 모셔오기 위해 뱀 꼬리 감추듯 노들을 향해 달렸다.
9월 19일 9시, 노들에서 귀빈들을 태우고 다시 재밀의 개통식장을 향해 철길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기차 속의 귀빈들은 놀라운 광경에 탄성을 자아냈다.
서울의 노들과 인천의 우각리는 물론 경인간 철도 연변에는 검은 쇠 당나귀가 연기를 뿜으면서 번개같이 달리는 기괴한 광경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개통식 날 독립신문의 한 기자가 첫 기차를 타고 인천을 다녀온 시승 기사를 보아도 이 일이 당시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경인철도회사에서 작일 개통식을 거행하였던 바 재밀에서 화륜거(火輪車)가 떠나 노들까지 와서 경성의 귀빈들을 화륜거에 영접하야 오전 9시에 다시 떠나 재밀로 향하였더라.
화륜거가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산천초목이 진동하고 기관거의 연통에서 나오는 연기는 반공에 치솟더라. 화륜거 속에 앉아 영창을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내닫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이날 첫 기차 개통식에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다. 개통식을 마치고 서울을 향해 기차가 떠날 무렵, 학부대신(교육부장관) 신기선(申箕善)이 화장실로 갔다.
기차가 떠나려는 데도 학부대신이 보이지 않자 집행관들이 찾기 시작했다. 이때 그의 비서는 화장실에 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몰래 뛰어가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대감나리 화륜거가 떠나려 합니다.”
이때 화륜거가 떠난다는 기적을 ‘왝 왝’ 울렸다.
“저것 보십시오. 화륜거가 떠나려 합니다요. 얼른 나오셔야겠습니다.”
“내 아직 볼일 다 보지 못했으니 냉큼 가서 잠시 지체하라고 해라.”
“황송하옵니다만 화륜거란 시간을 어길 수 없다고 하옵니다.”
“어허, 무슨 말이 그리 많은고, 기다리라면 그리 행할 것이지.”
그런데 화륜거는 드디어 바퀴를 돌리고 말았다.
“아니 저것 보십시오 대감, 화통(기차)이 떠납니다요.”
화가 난 신기선 대감은 화장실 안에서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학부대신인 나를 두고 제 마음대로 떠나! 여봐라 당장에 달려가서 그놈을 잡지 못할고.”
그리고는 바지춤을 움켜진 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뛰어나왔지만 기차는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저놈 잡아라, 저 고얀 화통을 당장에 잡아오지 못하겠느냐.”
이 소란에 기차는 얼마간 달리다가 다시 뒤로 와서 신 대감을 태우고 갔다는 것이다. 말 한마디면 산천초목도 쩔쩔맨다는 기세 높은 대신이지만 기차만은 멈추지 못했다.
가마꾼이나 당나귀, 보부상들도 힘든 하룻길을 사람과 짐을 태산같이 싣고 긴 쇠 몸뚱이를 뱀처럼 비틀면서 경인간 80리 길을 1시간 40분 만에 당도하니 그 빠름이 반나절의 반이라 기가 질릴 수박에 없는 무서운 힘이요, 속도였다.
이렇게 나라 안에서 제일의 혈맥이던 경인간 육로교통의 불편을 덜어준 기차는 빠르고 편리하며 시간을 크게 절약해주는 육로교통의 혁명을 일으켜 서양과의 교류를 더욱 왕성하게 만들었다.
경인선 개통 후 1900년까지는 한강철교가 없어 제물포와 노들(노량진)까지만 운행했다. 처음에는 객차 6량으로 오전 오후 각각 1회씩 왕복했는데, 객차 중 1량은 황실전용으로 왕족이나 대신들이 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1900년 7월에 한강철교가 완공되면서 남대문역이 생겨 서울장안 중심부까지 기차가 들어오게 됐고 승객과 화물의 수송량이 점차 늘어나 이때부터는 하루 4회 왕복했다. 사람들은 첫 기차를 불을 뿜어대는 수레라 하여 화륜거(火輪車)라 불렀다.
최초의 기차요금은 쌀 한 말 값
최초의 기차운임은 얼마였을까? 양반 상놈의 신분차별이 기차에도 적용되어 차비와 객석을 등급으로 나누었다. 상등석은 2인석의 폭신한 의자에 화장실이 딸린 객차로 편도에 1원50전이었고, 중등석은 옆으로 길게 놓은 벤치형 나무의자에 화장실이 없는 객차로 80전을 받았으며, 하등석은 의자도 없는 객차에 40전을 받았다.
물론 상등칸은 귀족이나 세도가, 중등석은 양반, 그리고 하등석은 보따리 둘러맨 일반서민들 전용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가 4원 전후, 황소 한 마리가 2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서민들이 기차 한 번 타고 인천을 다녀오자면 하등석을 이용하더라도 쌀 두 말이 날아갈 판이라 타 볼 엄두를 못 냈다.
이렇게 차비가 비싸 개통 후 얼마동안은 하루에 손님이 많아야 20여 명을 넘지 못했다. 이들도 놀이 삼아 기생을 데리고 타는 상류층 한량들과 외국인들이었다. 나라의 땅을 조상이 물려 준 신성한 유물로 생각했던 백성들은 철로를 놓기 위해 산을 자르고 땅을 깎아내는 것을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양귀(서양귀신)는 화륜선(증기선)을 타고, 왜귀(왜놈귀신)는 화륜거를 타고 몰려든다’는 동요가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할 정도로 반일감정이 깊었던 우리 백성들은 일본이 놓은 기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거부반응 때문에 손님이 적어 적자수렁에 빠지게 되자 경인철도회사는 그 해결책으로 최초의 기차광고를 신문에 냈다.
‘철도는 증기와 기계의 힘으로 여객과 화물 많이 싣고 육상을 쾌주(快走)할 것이니, 경인철도는 한성과 제물포간 80리 길에 부설한 화륜거요, 그 빠르기는 비할 바 없느니라. 한성에서 마포, 용산을 다녀오는 시간이면 인천을 왕래하는 것이 넉넉하고 값도 저렴하다. 화륜거 내에는 상등석 구별이 있으며, 유리창은 비바람을 막고 교의(의자)는 앉기에 편안하고 대소변을 보는 별방(화장실)까지 구비하였으니 일차 승거하시라.’
이렇게 광고를 내도 승객이 늘어나지 않자 이번에는 오류골 주막 기생들과 사당패들을 동원해 제물포, 소사, 노들역 앞마당에서 춤판을 벌이며 기차선전에 열을 올렸다.
지금의 서울 오류동인 오류골은 인천과 서울의 중간지점으로 경인선 기차가 나타나기 전 경인간 행객들이 점심을 먹으며 쉬어가던 교통 요충지이자 상품교역장소로 성황을 이루던 돈 많은 거리였다. 이래서 오류골에는 주막은 물론 기생과 창녀들도 많았다.
이것도 부족해 철도회사는 선무학사(宣撫學使)라는 PR맨을 모집해 기차손님 호객 쇼도 벌였다. 이들은 ‘흥부 박속에서 나온 귀신 미투리요, 신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천리를 난다는 귀신 미투리요’ 또는 ‘귀신들을 거느리고 몇 만 리씩 날아다니는 한나라 비장방의 조선 출도요’라고 외치고 다니며 기차로 손님을 유혹했다.
경인철도가 개통된 지 두 달이 지나도 철도 연변에는 개벽 이래 처음 보는 화륜거를 구경하려고 몰려드는 구경꾼들 때문에 기차가 제 속력을 낼 수 없었다.
부럽다 못해 질투심으로 변한 구경꾼들 중에는 철로를 베고 낮잠을 자거나 기차가 얼마나 강한가를 시험하려고 철도에다 돌무더기나 바위를 갖다 놓기도 했다.
또 우리 의병들은 밤중에 몰래 철로 위에 멍석을 깔아 기차를 탈선시켜 일본사람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고, 정거장을 습격해 모아둔 차비를 강탈하는 강도들도 나타나 첫 기차는 이래저래 수난을 면치 못했다.
참다못한 경인철도회사는 우리조정에 항의하고 기차를 보호하기 위해 철도를 경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독립신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삼개(마포) 건너 영등포로 내왕하는 화륜거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사람이 상하기 쉬운 고로 철도원 총제 이채연 씨가 농공상부에 보고해 경인철도 연변에 순검을 다수 파송한다더라.’
이후 칼 찬 순경들이 군데군데 늘어서서 구경꾼의 접근을 막았고, 그 후 일제 강점기시대인 1930년대까지 철도경찰이 존속하여 철도를 보호했다.
처음에는 경인선 사이에 정거장이 영등포역, 오류역, 소사(부천)역, 제물포역 이렇게 네 곳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기차를 타고 싶으면 철로 가에 나와 손만 들면 그 육중한 몸을 멈추어 태워주었다.
1900년을 넘어서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기차 운임을 내리자 일반인들도 기차의 편리함을 알고 타기 시작하는데, 차비를 깎아달라고 졸라대는 승객들 때문에 차장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도 많았다.
4. 경부선, 3년 9개월 만에 개통한 최고속 성공사 노일전쟁을 위해 일본이
강제로 빼앗은
지난 1898년 9월 경부철도합동조약을 맺으면서 경부철도부설권은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경부철도 공사는 경부철도합동조약 이후 3년 만인 1901년 8월 20일 시작되어 1905년 5월 기공식을 한 뒤 3년 9개월 만에 개통식을 가졌다.
공사비 3,000만 원을 투입해 완공한 경부철도는 일본이 노일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최고속 성공사로 개통시켰다. 1939년 경부선이, 1945년 3월에 드디어 경의선도 복선화되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일본에 의해 무력으로 맺은 잠정합동조관
일본이 경부철도를 부설하려는 가장 큰 목적은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를 막기 위한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대와 군수품 등을 부산에 상륙시켜 경성방면으로 신속하게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1891부터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부설공사를 시작했고, 영국이 이에 대항해 중국에서 경봉철도(북경∼봉천)를 착공했다. 극동에서 열강들의 다툼이 철도를 매개로 날카롭게 전개되자 일본은 한국 철도를 먼저 장악해 일본의 군사력을 한반도까지 진출시켜 이들 두 세력을 견제하려 했다.
일본은 바로 경부선 노선답사를 처음으로 우리 정부 몰래 했다. 서울과 주요 항구를 잇는 철도부설권과 경인·경부철도부설권을 강요했으나 한국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사태가 여의치 않자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점령하고, 1894년 8월 정부를 협박해 잠정합동조관(暫定合同條款)을 맺었다.
이 조약의 핵심은 한국정부가 일본에게 경부·경인철도부설권을 잠정적으로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전격적으로 손에 넣었다.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경부선을 포함한 부산∼의주간의 철도를 중국, 러시아, 인도까지 연결하는 대륙철도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일본이 경부철도부설권 획득을 위해 강제로 맺은 잠정합동조관은 한국정부가 경부철도의 부설에 관한 우선권을 일본정부에 부여한다는 것을 보증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다른 열강에도 철도부설권을 줄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을 간파한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실질적인 조약을 맺는 것이 급했다.
1895년 1월 일본은 경부·경인철도 세목협정교섭안(細目協定交涉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고 체결을 강요했다. 그 내용은 철도의 형식적 소유권은 한국정부에 속하지만 일본자금으로 부설하고 비용을 한국정부가 전부 상환할 때까지 최소한 50년간은 일본이 영업에 대한 권리를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즉 철도이권을 외국이 가져가는 것을 반대하는 한국정부와 민중의 저항을 피하고, 한반도의 철도이권에 집착하는 열강의 시선을 속이기 위해 한국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경부·경인철도를 부설한다는 일본의 간사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요구한 ‘세목협정교섭안’의 속셈을 간파한 한국정부의 거절과 이때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항일투쟁 그리고 열강의 공동 간섭 때문에 처음부터 벽에 부딪쳐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때마침 국제 정세도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점령한 요동반도를 삼국의 간섭으로 청나라에 돌려준 데다 러시아의 압박까지 받아 한국에서도 점차 세력이 밀려나는 판국이었다.
그러자 일본은 잃어버린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친러파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등 악랄한 수단을 동원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격렬한 항일 의병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만행을 피해 고종이 아관파천까지 하게 되자 한국에서 일본의 세력은 더욱 약해졌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호기를 잡은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농간으로 경인·경의철도의 부설권은 각각 미국인(1896년 3월)과 프랑스인(1896년 7월)에게 양도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잠정합동에서 약속받았다고 생각하던 경부철도에 대한 우선권조차 상실해 버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은 다른 열강에 빼앗길 위험상태에 빠진 경부철도를 구하기 위한 간접수단으로 경인철도 부설자금이 부족해 쩔쩔매던 모스를 매수해 경인선을 인수한 후 설립한 경인철도주식회사를 발판으로 경부철도주식회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즈음 독일이 함대로 1897년 11월 중국의 교주만(膠州灣)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이에 맞서 이듬해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빌린 다음 여순과 대련을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하는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이로써 러시아가 시베리아철도의 종착역을 시초에 일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던 한반도 원산에서 요동반도로 이전함에 따라 일본은 경부철도부설에 있어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일본은 이런 국제정세의 틈을 이용, 한국에서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8년 1월 군함 2척을 인천항에 입항시키고 무력으로 고종에게 경부철도 부설권의 양도를 협박했지만 러시아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했다. 그러나 일본은 단념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청나라를 방문 중이던 청일전쟁 발발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전 총리를 해결사로 파견해 고종황제를 무력으로 협박한 끝에 드디어 1898년 9월 전문 15개조로 이루어진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을 맺으면서 경부철도부설권은 일본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한국정부를 허수아비로 만든 경부철도합동조약
경부철도합동조약 내용에서 일본이 강요한 조건은 일본에게 철도 부지를 무료로 제공할 것, 철도 영업이익에는 과세하지 말 것, 완공 후 15년간은 일본이 영업권을 가지며 한국이 매수할 수 없을 경우에는 10년씩 연장할 것 등이었다.
한국정부가 제시한 조건은 철교를 큰 강에 건설할 때
사람과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인도를 병설하고 고가 또는 개폐식으로 할 것,
레일의 너비는 표준궤도로 하고 분묘를 파괴하지 말 것,
한국의 군용품·병정·우편물 등의 운송은 무임으로 할 것,
정거장에는 외국인의 거주를 불허하며 철도건설 노동자는 한국인을 9할 이상 고용할 것,
3년 안에 착공해 10년 이내에 완공하되 그렇지 못하면 본 조약은 무효로 할 것,
한국인 회사 또는 개인을 언제든지 주주로 받아들일 것,
이 철도는 여하한 경우에도 제3국인에게 양도하지 말 것 등이었다.
그러나 경부철도합동조약은 철도 부설과정에서 한국의 조건은 완전히 무시되었고 러일전쟁 후에는 이 합동조약조차 휴지로 변해 버렸다. 이유는 일본이 합동조약의 규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경부철도를 일본 소유로 국유화해 한국통감부 철도관리국에 귀속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이 경부철도를 장악한 근본적인 목적은 군사와 경제적 침략을 한꺼번에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경부철도 부설에서 일본의 침략성은 경부철도의 노선과 레일 너비의 선정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일본은 당초 서울∼용인∼죽산∼청주∼문의∼상주∼대구∼밀양∼부산 노선을 택했다. 하지만 다섯 번이나 실시한 답사에서 중점적으로 검토한 결과 경제면보다는 러일전쟁을 대비한 군사면을 우선적으로 하여 오늘날과 같은 서울∼수원∼천안∼대전∼영동∼김천∼대구∼청도∼삼량진∼부산의 경부철도 직행노선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일본이 경부철도노선을 현재와 같이 선정한 데는 한국 남부지역의 정치, 군사, 사회, 경제적인 지배권을 경부철도 노선을 통해 장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 이 노선이 부산∼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로서, 공사비도 줄일 뿐 아니라 운행시간도 짧아지면서 한반도 동·서쪽으로 뻗는 지선 철도의 중추가 되는 데 적합했기 때문이다.
노선과 더불어 레일의 너비의 선정도 일본이 한국철도를 지배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국철도는 앞으로 만주, 중국, 러시아, 유럽과 연결할 수 없기 때문에 레일의 너비와 레일 선택은 철도 부설에 핵심조건이었다.
실제로 레일 너비는 철도의 연장성을, 레일의 무게는 여객과 화물의 운반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열강들은 저마다 자국의 사정에 맞추어 레일의 너비와 무게를 서로 다르게 채택하고 있었다.
실제 영국이 만들고 있던 중국의 경봉철도는 표준궤(4피트 8인치 반)에 75파운드의 레일이었으며, 러시아가 부설하고 있던 시베리아철도와 동청철도는 광궤(5피트)에 60파운드의 레일을 채택했다. 그리고 일본 국내의 철도는 협궤(3피트 6인치)에 50파운드의 레일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군사적 효용가치를 가장 중시했던 일본 군부는 경부철도를 최대한 빨리 건설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레일과 바퀴를 이용할 수 있는 협궤에 50파운드 레일을 사용하려 했다.
경비와 시간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고, 유사시에는 일본 국내의 재료만으로도 경부철도를 부설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경부철도주식회사는 앞으로 중국, 러시아, 유럽대륙의 철도와 연결해 세계철도의 간선이 되어야 할 경부철도를 단순한 식민지 철도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표준궤를 채택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경부철도는 미국의 카네기회사로부터 레일을 수입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하고 중국철도와 동일한 표준궤 75파운드의 레일을 채택했다.
경부철도를 표준궤로 채택하자, 이와 접속해 일본의 군용철도로 부설된 경의철도도 자동적으로 표준궤를 채택해 만주·중국철도와 직접 연결되어 일본의 대륙 침략통로가 되었다.
일본의 침략자본으로 만든 경부철도주식회사
일본의 민간업체인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설립과 철도부설에 필요한 자본조달은 일본의 권력과 자본가 및 일본 국민을 한국침략에 집결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위로는 왕가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촌장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일본 국민을 대소 주주로 끌어들이고, 이들에게 투자이익을 보장해 주기 위해 일본정부는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설립 움직임은 경부철도부설권을 빼앗으려던 일본정부의 노력이 벽에 부딪쳤던 1896년부터 일어났다.
그 전부터 한국과 깊은 이해관계를 맺고 있던 다케우치, 오자키 사브로, 오미와 초베 등의 관료 자본가들은 경인·경의철도의 부설권이 미국인과 프랑스인에게 넘어가자 그들 자신의 힘으로 경부철도부설권을 획득하려 노력했다.
다케우치 등은 경부철도부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본금을 일본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해 모집한 주식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곧 150명의 자본가들을 끌어들여 경부철도주식회사 발기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발기위원회는 첫 작업으로 경인철도인수조합을 조직하고 미국인 모스로부터 경인철도를 매수해 경부철도를 장악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어 발기위원회는 야마가타 수상과 정치원로인 오쿠마를 비롯해 정치, 군사, 경제계의 거물들과 일본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1901년 6월 경부철도주식회사라는 민간업체를 정식으로 설립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곧이어 2,500만 원의 방대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경제단체 및 언론매체를 동원해 전국적인 자본조달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일본 국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해 주식을 모집했다.
이렇게 하여 경부철도주식회사는 정계나 상업계 대자본가들을 대주주로 포섭했다. 또한 천황 가족에서부터 시골의 촌장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계층을 포섭해 이 회사는 명실공히 일본의 국민기업이 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당시 후진자본국가로서 일본정부가 기대하기 어려웠던 2,500만 원의 방대한 자본을 외채의 도입없이 일본 국민의 애국적 단결심으로 무난히 조달할 수 있었다.
그 후 경부철도주식회사는 일본 국민의 돈으로 1901년 9월부터 1903년 12월까지 2년여에 걸쳐 150km의 경부철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도발을 계획한 일본정부는 경부철도의 부설이 시급한 나머지 민간회사에게만 맡겨둘 수가 없었다.
따라서 1903년 12월 ‘경부철도속성명령’을 내리고 일본정부가 이 회사의 경부철도공사에 끼어들면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회사로 변했다.
경부철도 부설은 경부철도합동조약 이후 3년 만인 1901년 8월 20일 서울 영등포와 9월 21일 부산의 초량 두 곳에서 각각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했다. 부설공사는 급속히 진전되어 1902년 10월에 초량∼구포간, 1903년 12월에는 서울∼수원간, 그리고 1904년 11월에는 서울∼대전간이 개통되었으며 난공사였던 대구∼대전간이 가장 늦게 개통되었다.
드디어 1905년 5월, 3년 9개월 만에 서울의 남대문역에서 경부선 개통식이 열렸다. 복선이 아닌 단선철도였다. 연간 70여만 명의 우리 민족을 강제로 동원해 총 공사비 3,000만 원을 투입해 완공한 경부철도는 일본이 노일전쟁에 사용키 위해 최고속성공사로 개통시켰다.
경부선 개통식에는 일생일대의 야심작을 성공시킨 이토 히로부미는 물론 일본의 원로대신들과 우리 조정의 대신들이 참석했다. 철도가 없던 시절, 부산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15일이 걸리던 여정이 기차의 등장으로 13시간 만에 주파하는 또 하나의 교통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일제는 경부선을 만들 당시 현금대신 어음에 해당하는 500냥짜리 군표를 발행해 이것으로 조선 사람들의 땅을 사고 완공 후 현금으로 지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개통 후에도 우리 국민들은 땅을 판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땅을 강제로 수탈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는 경부선 철도를 비꼬는 타령조 가락이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경부선 경부선의 철도 역사는 굉장하다. 산 뚫고 1천여 리에 지반가(地盤價) 뉘 받았노 군표 제조비는 500냥 들었다네, 500냥 자본으로 경부철도 놓았다네.’
1930년대 말까지 경부선은 단선철도였으나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일본은 만주대륙으로 신속하게 병력과 군수품 수송을 하기 위해 복선공사를 서둘렀다. 그 결과 1939년 경부선이, 1945년 3월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에는 경의선이 복선화되었다.
차관 미끼로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한 휘브릴 상사
경의철도는 일본과 한국을 아시아 대륙으로 연결해 주는 국제적인 동맥철도였다. 이러한 대륙적 특수성 때문에 경의선은 일찍부터 열강이 노리던 이권의 표적이 되었다. 고종이 아관파천한 직후 미국의 강요에 못 이겨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에게 넘겨주자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 기회를 이용해 주한 프랑스 공사 르페보르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를 통해 서울∼의주와 서울∼목포간, 서울∼원산간의 3개 철도부설권을 프랑스의 한국 무역상사인 휘브릴 회사의 지배인 그리예에게 허가해 줄 것을 고종에게 강요했다.
조정에서는 처음부터 철도는 우리의 힘으로 놓으려 했으나 국운이 기울어 재정이 빈약하고 외세의 압력에 견딜 수 없어 놓기 쉬운 경인선을 제일 먼저 내주고 말았는데, 휘브릴사의 부설권 요청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철도는 프랑스 사람이 부설할 터이오. 시공은 3년 내로 행할 것이며 완공은 9년 내로 시행할 터인데, 완공한지 15년 후에는 만일 조선정부가 그 철도를 원하면 매도하기로 약조하였다더라.(독립신문 1896년 7월)’
휘브릴사가 요청한 3개 노선 중 경성∼목포간 철도는 호남의 곡창지대를 통과하는 황금노선이라 경제적, 정치적 차원에서 우리가 부설해야 했기 때문에 외국에 넘겨줄 수 없었고, 서울∼원산간 철도는 외교차원에서 줄 수 없었다.
한꺼번에 세 노선을 프랑스에 주었다가는 국내에 진을 치고 있는 독일, 영국, 러시아, 일본 등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하지만 우리 정보는 경의선 한 개 노선만이라도 프랑스에 줄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국내 철도를 우리의 힘으로 부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는데, 외국돈을 빌리는 차관교섭 대상으로 휘브릴사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 중계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홍종우와 이유인이다.
홍종우는 1894년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을 암살한 공로로 홍문관교리(弘文館敎理) 벼슬을 얻은 후부터 왕실과 수구파의 신임이 두터웠다. 이유인은 천주교 신자로서 법무대신까지 역임한 인물로, 서울로 들어온 프랑스 신부 뮤델 주교와 우리 왕실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했다.
홍종우와 이유인은 즉시 휘브릴사에 차관교섭을 하였고, 휘브릴사는 돈을 빌려주는 대신 담보로 경의선 외 2개 노선의 부설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나머지 노선에 대한 요구는 거절하고 1896년 7월 경의선부설공사만 허가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휘브릴사는 경의선 부설권만 받아 챙긴 후 차관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한국 정부와 프랑스 공사는 1896년 7월 정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경의철도계약’을 맺었다.
‘경의철도 부설권을 프랑스의 휘브릴 회사에 허가할 것,
이 철도의 부설에 필요한 모든 부지는 한국 정부가 무료로 제공할 것,
이 철도는 계약일로부터 3년 이내에 기공하고 그 후 9년 이내에 완공할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본 계약은 자동적으로 폐지될 것,
이 철도는 준공 후 15년이 경과하면 한국 정부가 시가로 매수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10년을 기한으로 매번 연장할 것’ 등으로 되어 있었다.
5. 일본의 흉계에 이용당한 민족 철도회사 마지막 염원인 경의선 민족 부설도
탈취한 일본
휘브릴사는 1898년 2월 경의선의 수익성이 미약하다는 이유로 경의선 대신 서울∼목포간 경목선의 부설권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경의철도 부설권을 갖고 있는 대한철도용달회사 박기종 사장을 회유해 경의철도를 장악하고 경원철도 부설권을 빼앗은 데 이어 1904년 2월에는 조선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일본군대를 동원해 마산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경의선 대신 경목선을 요구한 휘브릴사의 과욕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프랑스 휘브릴사의 총지배인 그리예는 세 차례나 철도노선을 답사했다. 그러나 계약기간 3년이 거의 다 되도록 공사에 착수하지 않고 늑장을 부렸다. 자본 조달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가치가 불투명하고 국제적인 정세 또한 프랑스에 불리했기 때문이다.
1897년 7월 독일이 산동반도 근처의 교주만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독일 세력을 막기 위해 1898년 청나라를 설득하여 산동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租借)했다. 동시에 러시아는 만주∼하얼빈간의 동청철도(東淸鐵道)와 하얼빈과 여순·대련을 연결하는 남만주철도의 부설권을 청나라로부터 획득했다.
시베리아철도의 종착역과 부동항을 한반도에서 확보하려던 정책을 바꾸어 요동반도로 옮기기 위함이었다.
러시아의 한반도 남진정책으로 인해 생기는 경제적 가치를 겨냥해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한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바뀌자 경의선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고 판단한 휘브릴사는 경의선 착공을 지연시킨 것이다.
1898년 2월, 휘브릴사는 경의선의 수익성이 미약한 것을 이유로 경의선 대신 서울∼목포간의 경목선(京木線) 부설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경목선은 경의선보다 공사비가 적게 들뿐 아니라 평야라 부설하기도 쉽고 호남지방은 인구가 많아 경제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휘브릴사의 경목선 요구에 일본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를 앞세워 강력한 방해공작을 폈다. 이 때문에 경목선 부설권이 허사가 되자 휘브릴사는 경의선마저 놓칠 수 없다 하여 1899년 1월 최후답사를 끝냈지만 끝내 착공을 하지 않아 계약위반으로 이해 7월 3일까지 조선정부에 반환할 처지에 놓였다.
경목선 요구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리예는 손해를 볼 수는 없다는 생각에 경의선 부설권을 모스처럼 러시아에 팔아넘기려 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철도부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러시아는 이를 매수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이미 부동항을 요동반도에 건설하기로 청나라와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한반도에 철도를 부설할 필요가 없게 됐다.
러시아로부터 거절당한 그릴은 마지막으로 일본에 추파를 던졌다. 일본은 그리예가 제시한 막대한 매수금액을 보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런데도 휘브릴사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려보자는 심통으로 엉뚱한 조건을 들어 물고 늘어졌다. 계약은 포기하지만 경의선 부설에 프랑스의 자재와 철도기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과욕을 당시 독립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한성과 의주 사이에 법국(法國, 프랑스) 사람이 철도를 부설하기로 계약한 기한이 3년인데 그 기한은 이달 3일인고로, 그 철도 부설권을 대한정부에 돌려보내라는 뜻으로 외부에서 법국 공사에 통보하였는데, 법국 공사가 답변하기를 금후 경의선을 부설할 시 법국의 물자를 사용하고 법국의 기사를 초빙하여 고용해야 비로써 부설권을 돌려 보내겠다더라.’
결국 1899년 6월 경의철도 부설권은 3년 만에 한국정부로 되돌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돌아온 경의선 부설권은 반환된 지 5일 만에 동포 철도사업가인 박기종이 세운 대한철도용달회사로 돌아갔다.
자금부족으로 민족의 철도공사 난항
우리조정의 국내철도 자국건설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알게 된 박기종은 대한철도용달회사를 설립하고 1896년 경원선 부설권을 신청한 데 이어 프랑스의 경의선 부설권이 되돌아오자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경의선 부설권을 1899년 7월 농상공부에 신청했다. 한국정부는 그렇지 않아도 열강의 침탈로부터 철도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므로, 경의철도 부설권을 즉시 대한철도회사에 허가했다.
이렇게 되자 경의선 부설권을 노리던 일본은 그들이 모르는 새 전격적으로 양 철도부설을 조선의 대한철도용달회사에 넘겨 버리자 당시 외부대신인 박재순에게 공문으로 협박했다. 어떠한 이유로든 철도부설권을 저당하여 자본을 외국으로부터 차관하면 일본은 가만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박기종은 경의선 부설권을 획득하기는 했지만 공사비를 조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기종의 경의철도 건설이 지지부진해지자, 정부는 열강의 철도부설권 탈취를 막고 국가의 동맥인 경의선 부설을 다시 외국인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에 궁내부 직속으로 1900년 9월 서북철도국(西北鐵道局)을 설립하여 왕실재산관리부서 책임자인 내장원경(內臟院卿) 이용익(李容翊)을 총재로 임명하여 왕실에서 직접 경의선을 부설하기로 했다. 이용익은 휘브릴사로부터 기술을 지원받아 1901년 7월까지 서울∼개성의 노선 측량을 마쳤다.
서북철도국은 그후 예산에서 우선 300만 원을 받아 서울∼개성의 철로를 협궤로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1902년 3월, 인부 300명을 모집하여 마포에서 첫 공사를 시작했다.
우리 정부는 한국민의 의지를 만방에 알리기 위해 5월 31일 각국의 주요 외교관을 초청하여 서대문 근처에 있던 천연정(天然亭, 남대문 정거장)에서 성대한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 공사는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어 순탄하게 진행하지 못했다.
서북철도국의 경의철도 건설은 일본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고무라(小村) 외상은 1901년 10월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에게 경의철도는 경부철도와 접속하여 아시아 대륙의 간선철도가 되어야 하므로 경의철도를 장악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금이 빈약한 한국정부에 차관굴레를 씌우는 방법을 택하라고 지시했다.
경의철도부설권을 저당으로 서울∼개성의 철도 건설비 300만 원을 한국 정부에 빌려준 다음 준공기간을 제한하고 기간 내에 대부금을 갚지 못할 때에는 서울∼개성의 철도를 일본이 장악한다는 방법이었으나 한국정부의 거절로 실패했다.
다음으로 일본이 경의철도 부설권을 차지하기 위해 이용한 것이 한국의 민간철도회사인 대한철도용달회사였다. 한국정부가 정부직속의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철도를 건설하지만 경의철도 부설권은 대한철도용달회사가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바로 대한철도에 부설자금을 차관해 주고 부설권을 탈취하는 방법이었다.
일본이 철도공사자금을 빌려주겠다는 차관 공세에 휘말려든 대한철도의 박기종 사장은 1903년 5월 서북철도국 총재 이용익에게 경의철도 부설 공사를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박기종은 청원서를 제출한 후 일본으로부터 40만 원의 운동자금을 지원받아 한국정부를 상대로 뇌물공세를 폈다.
일본의 간사한 흉계에 조종당한 박기종의 교섭 활동이 실효를 거두어 1903년 7월 마침내 서울∼평양의 철도 건설을 대한철도회사에 맡긴다는 고종의 칙령이 내려졌다. 이로써 경의철도 부설권을 탈취하기 위한 일본의 1단계 공작이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2단계 공작은 대한철도용달회사에 차관굴레를 씌워 실질적으로 경의철도 부설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대한철도회사와 ‘경의철도차관계약’(京義鐵道借款契約)을 맺어 대한철도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다.
대한철도는 단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서북철도국이나 한국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일본은 이런 교활한 방법으로 서북철도국이 이미 건설중이던 서울∼개성의 공사를 넘겨받고 대한철도가 경의선과 같이 허가받은 경원철도 부설권마저 빼앗아 버렸다.
러·일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경의선 부설권
경의철도를 장악한 일본이 이 철도를 만주로 연결하는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최대의 걸림돌인 러시아와의 한판 전쟁이 불가피했다.
전쟁 전에 양국은 협상을 벌였는데, 러시아의 조건은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는 대신에 일본은 한국 영토의 일부라도 군사상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 것,
북위 39도 이북에 있는 한국의 영토를 중립지대로 지정하여 양국이 모두 군대를 끌어들이지 말 것,
만주와 그 연안은 일본의 이권 밖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 등이었다.
러시아가 제안한 한반도 39도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는 일본이 장악한 경의철도 부설권을 부정하는 조건이었다. 대한철도회사가 고종황제로부터 경의철도 부설권을 허가받은 것은 서울∼평양간이었다.
따라서 북위 39도선 이북을 중립지역으로 지정하자는 러시아의 제안은 경의철도의 북쪽 종점을 북위 39도 선상에 있는 평양으로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러시아가 일본 세력의 북상을 평양 근처에서 저지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일본은 러시아의 조건에 대하여 북위 39도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 안을 철회할 것, 경의철도를 만주로 연장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만주에서 일본인들의 상업 활동에 대한 자유를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양국의 팽팽한 협상은 6개월 동안 계속되었으나 끝내 결렬되면서 러·일 전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일본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1903년 12월 즉각 경부철도의 속성칙령을 내려 경부철도의 부설공사를 1904년 말까지 완공하도록 기간을 단축시켰다. 경부철도의 조속한 개통이 러·일 전쟁을 위해 급박했기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대 러시아 선전포고를 나흘 앞둔 1904년 2월 부대 및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하여 경의철도를 일본 군용 철도로 부설하기로 하고 일본군이 경의철도를 직접 부설하도록 명령하였다.
일본군은 즉시 서울 궁궐을 점령한 후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1904년 2월, 굴욕적인 ‘한일의정서’를 맺었다.
이 의정서를 근거로 한국정부에 경의철도의 군용화 방침을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무력으로 접수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일본·러시아 사이에 오랫동안 이권의 불씨가 됐던 경의철도는 결국 러·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이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은 즉시 경의철도를 군대와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군용 철도로 사용하기 위해 일본 공병대와 송병준 등 친일파가 조직한 일본 협력단체인 일진회가 모집한 조선 근로자들을 투입하여 13개월 만에 무려 528km의 경의선 단선 철도를 완공했다.
경의선 복선공사로 재기한 일본 토목업자들
러·일 전쟁 이후 1939년에 완공한 경의선 복선공사는 불황으로 헤매던 일본의 토목회사들을 살려주었다. 이 공사는 최초로 착암기를 이용한 신공법으로 시공되고, 특히 청천강 철교공사에는 일본 토건업사상 처음으로 잠함(潛函)공법이 적용되는 등 새로운 토목공법이 이용됐다. 그러나 신공법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인부들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모든 철로가 표준궤도로 부설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어 크고 긴 보기(bogie)식 객차와 1량 당 26톤의 짐을 실을 수 있는 화차가 도입되었다. 1905년 1월 첫 영업을 시작한 경부선 열차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완행은 30시간 가량, 급행은 하루에 한 번씩 운행하여 10시간 정도가 걸렸다.
1906년 초에 운행을 시작한 경의선 완행열차는 처음부터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과 평양을 거처 신의주까지 직통으로 달리는 열차로,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27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러니까 부산서 신의주까지 가려면 약 3일이나 걸린 셈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빠른 교통혁명이었다. 1908년 4월 1일부터는 부산∼신의주간에 급행이 등장하여 매일 1회 왕복 운행했으며 편도 26시간 정도 걸렸다.
1907년 7월부터 한국의 각 역과 일본의 각 역간, 한국의 각 역과 만주의 안동역 간의 여객과 화물 연계운송을 시작하여 일본·한국·중국을 연결하는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철도를 사용하였고, 한국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는 일본군의 수송수단으로도 이용됐다. 또 각 철도역 근방은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변했다.
마산은 지금도 남해안 일대에서 부산 다음으로 큰 항구도시이지만 일본세력이 한국에 상륙하기 시작한 19세기 말부터 진해와 함께 군사나 경제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떠올랐다.
일본은 영남 지방의 풍부한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기에 부산항만으로는 부족해 부산의 보조항으로서 마산과 진해를 개발하고 경부선에서 이곳에 이르는 지선철도를 부설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부산의 거상이요, 외부참사관을 지낸 박기종이 1898년 6월 부산에서 낙동강 연안 하단포에 이르는 약 10km의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했으나 일본이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후 1902년 6월, 박기종은 부하철도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하여 영남지선철도회사(嶺南支線鐵道會社)를 조직하고 마산∼삼랑진 사이 철도를 포함한 경부철도 지선 건설을 신청하여 허가를 받았다.
일본은 이 철도회사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를 미끼로 삼아 철도 영업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자본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남지선철도회사에 차관의 굴레를 씌워 마산 철도 부설권을 손아귀에 넣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은 1904년 2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만주에 이르는 병참기지와 군수품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부선·경의선과 마산선 부설이 시급하자 우리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일본 군대를 동원하여 마산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했다. 이로써 박기종의 영남지선철도회사는 허공에 뜨고 말았다.
일본은 1905년 1월에 표준궤도로 착공하여 속성공사로 강행시켜 전장 540m 정도의 낙동강 교량이 준공되자 5개월 만인 1905년 5월에 마산선을 완공했다.
개통 즉시 마산∼삼랑진 사이에 직통 군용열차를 운행시키다가 이해 말부터 일반 여객과 화물의 수송을 시작했다. 삼랑진∼마산∼순천∼광주를 연결하는 남해선은 광복 후 60년대 말에 개통됐다.
6. 일본의 경원선·함경선 부설 연료와 식량, 철강자원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풍부한 수산물을 강탈해 연료와 식량, 철강자원을 이용하고 러시아에 진출하기 위해 경원선과 함경선을 건설했다. 간선철도망을 갖춘 조선총독부는 경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한국을 장악하기 위해 ‘조선국유철도 12개년 계획’을 세워 철도망 확장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경부철도합동조약 제3조의 규정을 내세워 한국정부에 엄청난 땅을 공짜로 요구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조선의병의 항일투쟁 대상이 됐던 경원선
서울∼원산간의 경원선은 경인선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동서양 해안을 연결하는 횡단철도이다. 경원선은 원산에서 동해를 건너 일본과, 경인선은 인천에서 황해를 건너 중국과 연결되는 중요한 철도이다.
특히 경원선은 동해안으로 올라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와 연결해 경제, 산업, 군사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열강의 주목을 받았다.
프랑스와 일본, 독일은 1896년부터 경원선의 부설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모두 거절하고 자력으로 경원선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에 경원선과 함경선의 부설권을 박기종이 설립한 대한철도용달회사에 허가했다.
그러나 박기종이 자금난에 부딪치자 1899년 9월 궁내부 소속 서북철도국이 이를 접수한 뒤 다시 국가의 힘으로 부설하려 했으나 역시 기술과 자금 부족, 일본의 방해 등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部)는 1905년 8월에 용산, 11월에 원산에서 한국정부의 허락없이 강제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한강의 대홍수와 함께 경원선 철도부지에 필요한 서울지역의 땅이 외국인 소유가 많아 토지 매수에 어려움을 겪어 서울에서는 겨우 6km, 원산에서는 12km의 노반만 축조하고는 공사를 중단해 버렸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원선이 군사적 가치가 없어진 데다 전쟁 수행으로 자금도 부족해 철도 부설을 후일로 미루었다.
일본은 1910년 한국을 강제로 합병한 후 정치, 군사는 물론 함경도 지방의 풍부한 광물과 명태 등 수산물을 경성과 인천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경원철도의 부설이 필요했다. 또한 금강산 절경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도 경원철도 부설이 시급했다.
이에 일본은 1910년 10월부터 1914년 8월까지 총공사비 1,218만9,000원을 투입해 용산∼왕십리∼청량리∼의정부∼동두천∼전곡∼연천∼철원∼평강∼검불랑∼삼방∼안변∼원산의 223km에 달하는 경원철도를 완공했다.
최초의 경원선 노선계획은 금강산을 관통해 원산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금강산의 절경을 기차로 연결해 관광수입을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하고 연구해도 바위덩이 고산준령의 금강산을 뚫는다는 것은 최대의 난공사일 뿐 아니라 엄청난 공사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금강산 관통노선을 포기하고 금강산을 비켜 가는 현재의 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일본의 경원철도 부설은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따라서 철도 공사는 의병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강점으로 해산당한 구한국 군인들로 조직된 의병 부대는 경원선이 통과하는 강원도의 험지인 삼방관이나 철원 등에서 철도 공사를 하는 일본인들과 군인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의병의 눈을 속이기 위해 한국인처럼 흰옷 복장을 하고 일본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경원철도 공사를 진행했다.
경원선 공사는 강원도를 들어서면서 높고 험준한 태백산맥을 뚫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검불랑 준령의 두 개 터널은 당시의 기술과 장비로는 매우 어려운 공사였다. 경원선 노반 건설자재는 주로 원산에서 조달했다.
동해안과 인근 내륙의 고산부터는 32km의 자재운반용 철로를 별도로 놓아 자갈과 모래를 실어왔다. 이런 어려움 끝에 1914년, 최대의 난공사였던 경원철도가 완공되어 동서를 관통시키고 강원도와 함경도를 개방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 진출 위해 만든 함경선
1921년 원산∼회령∼나진을 연결하는 함경선이 개통되자 이 철도 때문에 1919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쫓겨난 러시아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함경도로 피난해온 러시아 난민들을 모두 붙들어 함경선 기차에 태워 하얼빈으로 추방했다. 따라서 러시아 난민들에게는 함경선이 한 많은 철도가 되기도 했다.
함경선은 경원선의 원산에서 함경남도의 동해변을 따라 영흥, 흥남, 북청, 성진, 길주, 명천, 청진, 나진을 거쳐 국경 도시 회령에 이르는 동해 북부철도이다.
함경선은 그 주위에 탄광과 철광 등 풍부한 광산지대의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선이다. 게다가 두만강을 건너 만주와 러시아로 연결할 수 있어 일본으로서는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철도였다.
일본은 1914년부터 총 연장 621km의 함경선 부설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자금부족으로 계획보다 3년이나 연기된 끝에 공사비 9,000만 원을 들여 15년 만인 1928년 9월에 본격 개통했다.
함경선 부설문제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러일전쟁 직전부터다. 일본은 이미 전쟁중인 1905년 청진∼회령, 청진∼나남, 서호진∼함흥사이에 협궤철도를 만들어 군용으로 이용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민간인에게 넘겨 일반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고 있었다.
일제가 함경선을 부설하려는 목적은 함경남북도의 석탄과 삼림, 연해의 풍부한 수산물을 강탈해 연료와 식량, 철강자원 부족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데 있었다.
또한 함경선을 만주와 러시아의 철도에 연결함으로써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함경철도의 종단역인 청진, 나남, 웅기항은 동해를 거쳐 일본과 최단거리로 연결되어 한일간 교통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호남철도부설이 부각된 것은 1896년 프랑스의 휘브릴 회사의 지배인 그리예가 한국정부에 경의·경원철도와 함께 경목철도의 부설권을 요구하면서부터다. 호남선은 당초 서울과 목포를 연결하는 철도라 하여 경목철도(京木鐵道)라 불렀다. 프랑스 외에 일본도 이 철도에 눈독을 들였으나 한국정부는 이를 모두 거절하고 경목선을 직접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정부는 1904년 5월, 조선말기에 내무·법부·학부대신을 역임하고 철도원 총재가 된 신기선의 주선으로 궁내부 고문 이윤용을 사장, 서오순을 전무로 하는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철도원은 같은 해 6월 호남철도주식회사에게 충남 직산에서 강경∼군산에 이르는 철도와 공주∼목포 사이의 철도 부설권을 허가했다.
일본은 거대한 자본이 필요한 이 공사를 한국의 자체적인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본을 빌려주어 부설권을 매수하려는 계략을 세웠다.
경목선 부설허가를 받은 호남철도주식회사는 기점을 당초의 직산에서 조치원으로 변경해 조치원에서 강경에 이르는 35마일 노선을 경부선의 지선으로 건설하기로 했다. 하지만 창립위원들이 출자한 공사자금의 부족으로 1904년 11월부터 1907년 8월까지 일부 철도노반 공사밖에 못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는 한국정부를 위협해 1905년 을사늑약을 맺은 후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외교는 물론 내정까지 간섭했다. 이어 한국정부에 압력을 넣어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부설허가를 취소시키고 1909년 5월 호남철도회사에 12만9,000여 원의 보상금을 지불한 다음 부설권을 탈취했다.
결국 호남철도의 직접 건설은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저명인사였던 유길준, 신응희, 장박 등은 철도 자국 부설론을 주장하며 자금조달 운동을 벌였다. 또한 전주에서는 호남철도연구회가 조직되어 관찰사 이하 관민이 협동해 중앙의 유지와 손잡고 주식 공모 운동을 벌이는 등 호남선은 철도 자국 건설운동에 가장 많은 국민들이 참가한 철도였다.
우리 국민들이 이처럼 열렬하게 철도 자력 건설운동을 벌이자 일본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1906년 겨울부터 1908년 5월까지 조치원∼군산∼목포간 총 278km의 노선 측량을 끝냈다. 이어 일본은 목포, 군산 지방의 일본인 거류민들을 동원해 호남철도기성회를 조직하고 전국 각 지방의 일본거류민단과 합세해 우리의 호남철도 자력 건설운동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점하자마자 식민지 지배기반을 신속히 갖추기 위해 1915년까지 호남철도를 완공하기로 하고 공사를 서둘렀다.
일제는 당초 경부선 분기점을 조치원으로 해 군산∼목포까지만 놓을 계획이었으나 공사기간과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대전에서 연결해 강경∼이리∼정주∼목포간 총 261km를 1910년 10월부터 착공한 다음 5년여 만인 1914년 1월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일제가 호남철도를 탐낸 것은 충청남도와 전남북도 지역은 인구가 조밀해 교통량이 많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한국 제일의 곡창지대인 이곳의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한 야욕 때문이었다.
이로써 일제는 경인·경부·경의 철도와 함께 호남 철도까지 부설함으로써 한반도를 ‘X’자형으로 지나가는 간선철도를 전부 장악해 식민지 정책의 기틀로 삼았다.
악랄한 수단으로 철도부설용 부지 확보 간선철도망을 갖춘 조선총독부는 경제뿐 아니라 각 지방의 행정기관과 연결해 정치적으로도 장악하기 위해 철도망 확장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조선국유철도 12개년 계획(1927∼1938년)을 세웠다.
12년 동안 3억2,000만 엔을 투입해 1927년부터 도문선(웅기∼동관진), 혜산선(혜산∼성진), 만포선(순천∼만포진), 경전선(진주∼전주), 동해선(원산∼울산∼부산), 중앙선(영천∼안동∼제천∼원주∼청량리) 등 6개 노선 1,700여 km의 새로운 국유철도를 부설하고, 5개 노선 336km의 사설철도를 매수해 1938년까지 표준궤도로 개축 또는 복선화 한다는 방대한 계획이었다.
이 중 경전선(전주∼진주)은 전라도와 경남의 곡창지대에서 나는 풍부한 농산물과 남해의 해산물을 수송하고 부산을 연결할 수 있으며, 또 여수항을 통해 일본과 연결하는 중요한 철도였다.
전주에서 출발해 임실∼남원∼섬진강을 거쳐 순천에서 광양∼하동∼진주와 여수로 연결되는 남부지역의 유일한 동서횡단선이다. 영남과 호남 해안의 풍부한 해산물을 내륙지방으로 수송하고, 이 지역의 농산물, 임산물, 광산물 등을 개발하기 위한 철도였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본은 1929년 경전선 부설공사에 들어가 1936년 12월 전주∼순천간의 130km 철로를 개통했다. 하지만 1939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공사를 중단해 전 구간을 완공하지는 못했다.
원산∼포항과 울산∼부산을 연결하는 동해선은 한반도 동쪽의 석탄, 목재, 광물, 해산물의 수송은 물론 동해안을 경성과 부산에 연결하는 중요한 철도였다. 동해선은 경원선에서 출발해 동해안의 고성, 강릉, 영덕을 거쳐 포항에 이르는 구간과, 부산에서 시작해 동래를 거쳐 울산에 이르는 구간을 합친 약 551km의 철도였다.
일본이 동해선을 부설하려는 데는 동해안의 산업 및 교통 개발과 더불어 함경선과 연결해 만주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28년 2월 안변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해 1937년 12월 양양까지 192.6km를 개통한 다음 양양∼삼척간 103.9km를 부설하던중 광복을 맞아 공사가 중단됐다. 그리고 광복 후 남북으로 나라가 분단되면서 고성∼양양 사이는 철거되고 말았다.
동해선 남부의 부산에서 울산에 이르는 약 72km 구간은 1930년 7월에 착공해 1935년 12월에 완공했다. 이어 1940년에는 사설철도로 놓았던 울산∼경주와 경주∼대구 사이의 협궤철도를 국유화시켜 표준궤도로 바꾸는 공사를 완공해 울산∼포항과 울산∼경주∼대구간을 개통시켰다.
조선철도 12개년 계획에 따라 한국의 간선철도망을 확대시킨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본격화 한 193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영천에서 경북, 충북, 강원, 경기도를 통과해 서울의 청량리까지 내륙을 종단하는 358.6km의 경경선(현재의 중앙선)을 건설했다.
일본이 영천∼안동∼단양∼제천∼원주∼양평∼청량리를 연결하는 경경선을 부설하려는 목적은 경경선 주변의 풍부한 금, 동, 아연, 흑연, 석탄, 목재, 쌀, 땔감 등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위한 전략 물자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대륙으로 군수물자와 군대를 신속하게 수송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바다에서 적의 함대가 쏘는 대포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경경선이야말로 안전한 군용철도로 안성맞춤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5년여 만에 경경선을 완공했다. 후에 중앙선으로 불리게 된 이 철도는 1936년 ‘조선철도 12개년 계획’ 이후 새로 계획한 철도다. 총 7,046만2,000엔의 예산으로 1936년부터 착공해 1942년 2월 전 노선을 단선으로 하여 개통된 중앙선은 일본이 한국에 부설한 마지막 철도다.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는 한국과 강제로 맺은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 제3조의 규정을 내세워 한국정부에 엄청난 땅을 공짜로 요구했다. 철도 부지를 한국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해 경부철도의 경영에 공동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정거장 부지로 서울 남대문 11만 평과 영등포 6만 평, 부산의 초량 16만 평과 부산진 21만 평 외에 경부선 구간 중의 군소 정거장용 부지 20만 평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땅을 강요했다. 이와 함께 선로용 부지로 전 구간에 걸쳐 너비 24m의 땅을 요구했다.
일본이 이렇게 방대한 면적의 정거장 부지를 요구한 것은 우선 각 정거장에 각종 생활시설을 세우고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경제를 장악하고 군사기지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강요에 대해 재정이 빈약해 민간의 땅을 매입할 능력이 없으며, 1896년 공포한 한국의 철도규칙에 정거장내에는 외국인의 영업을 금지한다는 조항과 일본이나 선진국들의 정거장내에는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정부와 철도부지 문제를 해결도 하지 않은 채 1901년 8월 이미 일본에 매수당한 고위관리들이 사장으로 있던 한국의 토목건축회사들을 끌어들여 영등포와 초량에서 각각 경부선 착공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한국정부와 일본 사이에 밀고 당기던 철도부지 규모에 대한 협상은 철도공사가 시작된 지 1년 만인 1902년 7월에 결말을 보았다.
7. 철도 부지 군용지로 수백만 평 빼앗아 철도부설을 위한 한국인의 희생과 저항
일본군이 탈취하려던 경부철도부설용 토지의 총면적은 269만7,000여 평이고, 경의선, 마산선, 경원선 등은 1,795만 평으로 경부선부지의 4배나 되는 거대한 면적이었다. 토지에 대한 보상비는 한국정부가 돈을 빌려 지급하도록 강요했다. 경부와 경의철도 건설 현장에 끌려 나온 한국노동자들은 혹사를 당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1
일본에 약탈당한 경부선 철도부지
일본은 경부선 철도 건설용 부지 무상 탈취를 위해 한국정부와 강제로 협상을 맺고 서울 남대문 정거장용 부지 5만1,819평, 영등포 정거장 4만1,000평, 초량 5만 평, 부산진 3만 평, 기타 군소 정거장용을 3만여 평으로 정했다.
선로 너비 18m의 단선철도로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일본에게 제공해야 할 경부철도부설용 토지의 총면적은 269만7,000여 평이었고, 이에 대한 보상비 총액은 최저 시가로 45만6,700여 원이었다.
결국 1902년 7월 철도용지매입비와 가옥 이전비 등 276만여 원을 연이율 6%로 경부철도회사가 보상비 조달이 어려웠던 한국정부에 빌려주기로 약속했다.
일본의 간계에 말려든 한국정부는 일본의 경부철도회사로부터 빌린 자금으로 이자를 고스란히 물면서 철도용지를 매입해 다시 일본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할 불운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정부에 약속한 차관을 어기고 민간 소유의 철도부지에 대한 보상비를 지불하지 않은 채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경부철도공사를 계속했다. 그러자 참다못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한국정부와 일본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서울, 부산, 대구 등 도시의 정거장 부지의 가옥과 토지는 물론 지방에서도 노선이 지나가는 곳의 농지, 야산, 조상의 무덤까지 파 엎고 삼림을 마음대로 베어 내는 등 어느 하나 보상비를 받지 못하자 여기저기서 항거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분쟁 때문에 경부철도공사가 지연되자 한반도에서 빠른 시간 내에 군사용으로 경부철도를 놓으려던 일본은 크게 당혹했다. 이에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강제로 경부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1903년 12월 ‘경부철도속성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일본은 경부철도회사 기사들과 공사에 가담한 일본 토목건설업자들 그리고 폭력배나 다름없던 일본인 철도노동자들을 앞세워 부설용 토지를 마구잡이로 빼앗았다. 폭력으로 경부철도를 완공할 때까지 강탈한 토지는 485만 평에 이른다.
국민의 항거에 못 이긴 한국정부는 약속했던 돈을 주지 않고 질질 끌어온 경부철도회사에게 애원하다시피 간청해 겨우 차관 약속액의 10%인 27만6,000원을 차입했다. 하지만 그것도 경부철도가 완공한 후에 받았다. 그러나 이 돈도 중간에서 일본인들과 조선관리들이 착복해 실제 한국정부 손에 들어 온 돈은 20만 원 정도였다.
한국정부가 최저보상비로 계획했던 45만7,000원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였다. 당시 평균 시가가 평당 18원인 땅을 이 돈으로는 평당 7원밖에 처 줄 수 없는 보상비였다. 더구나 이런 보상비마저 소유자인 주민들에게 그대로 주지 않고 일본은 평당 가격 7원에서 20%의 수수료를 떼고 지급했다.
이뿐 아니라 어음인 500냥짜리 군표까지 발행해 완공 후 현금으로 지급한다는 미끼를 만들어 토지를 수탈하고 부도를 내는가 하면, 지방의 군수나 면장들이 중간에서 보상비를 착복해 주민들은 이래저래 토지를 약탈당했다.
이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자금을 축적하면서 일본은 최저 공사비로 경부철도를 완공할 수 있었다. 일본은 한국정부로부터 차관에 대한 이자까지 받아내 야욕을 채운 반면 생활 기반을 빼앗긴 노선 주위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반일 투쟁의 선봉인 의병으로 변해갔다.
경의선 토지와 민족의 수난
경의철도는 처음부터 일본이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급하게 부설해야 했다. 따라서 철도부지 확보를 위한 악랄한 방법은 경부철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이 경의선 부설용 토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2월에 한국정부와 강제로 맺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제4조 ‘한국정부는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할 것’이라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 규정을 이용해 일본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부에 경의선 부설용 토지를 마음대로 탈취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런 다음 토지에 대한 보상비는 한국정부가 일본에서 돈을 빌려 지급하도록 강요했다.
일본의 차관도입 보상비 지급 조건을 한국정부가 강력히 거절하자 일본은 군부에게 직접 토지를 매수하도록 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탈취하려던 군용철도 용지는 경의선, 마산선, 경원선을 포함해 모두 1,795만 평으로 경부선부지의 4배나 되는 거대한 면적이었다.
그 중에 경의선 부설용 토지로 1,450만 평을 강요하고 이에 대한 보상비로 20만 원을 주겠다고 한국정부를 협박했다. 경부선 부지 총 485만 평에 27만 원보다 터무니없이 싼 보상비로 부설용 토지를 빼앗겠다는 흉계였다. 일제의 무력 앞에 굴복한 한국정부는 경의철도 부지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경의선은 러일전쟁 중에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경의선이 지나가는 경기·황해·평안도 지역의 논밭과 무덤, 삼림을 파헤치고 민가를 강제로 철거시켰다. 그러자 일본군의 만행을 중단시켜 달라고 연일 주민들이 관청에 호소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백만 평을 철도부지나 군용지로 빼앗긴 서울과 평양의 주민들이 허탈해하며 서로 껴안고 우는 참상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특히 평안남도에서는 수천 명이 집과 일터를 잃어 피해가 극심했다.
이렇게 일본군의 철도부지 강탈이 노선 각처에서 포악하게 자행되었지만 저지 능력을 잃어버린 한국정부는 일본군의 무력 앞에서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터무니없는 보상비로 인해 서울과 평양 등지의 민심은 민란이 일어날 정도로 악화되어 갔다.
서울에서는 일본군사령부를 비난하는 전단이 살포되는가 하면 한국정부 고관에 대한 테러도 빈발했다. 가장 피해가 극심했던 평양의 경우, 주민들의 저항은 폭력으로 변했다. 일본이 철도와 군용 부지를 빼앗아 철망을 세우자 평양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저지했다.
일본병사들은 이들을 향해 발포를 했다. 격분한 주민들은 돌로 맞섰고 일본 관청을 부수는 일대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주민 수백 명이 살상당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거센 저항에 부닥친 일본은 러일전쟁이 끝난 후 경의선 부지 보상비로 17만 원을 한국정부에 건네주었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이 돈으로는 도저히 보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주민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다. 이것을 안 주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평양주민의 거센 반발에 부딪친 한국정부는 일본의 앞잡이였던 한성부윤 박의병을 내세워 보상비로 평당 10원이 넘는 땅을 7전씩 강제로 지급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집단 항거에 부딪쳐 실패했다.
이렇게 되자 박의병은 보상비를 은행에 예치한 후 경의선이 지나가는 지역 군수와 각 작업장의 대표 및 헌병을 동원해 주민들을 회유하고 협박했다.
그런데 이를 미끼로 박의병은 평양 관찰사 박중양을 앞세워 군수 팽한주와 작업장 대표 백치구 및 일본인 토지 중개인들과 짜고 보상비 수만 원을 가로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평양주민 5,000여 명이 폭발해 관찰사 박중양과 담판을 벌였다.
그러나 관찰사 박중양 역시 박의병 못지않은 일본의 앞잡이로, 일본군을 동원해 진압하는 바람에 관찰부에 몰려갔던 군중들은 많은 피해를 낸 채 해산했다.
평양주민의 저항운동은 일본인들의 토지 강탈에 고통을 받고 있던 국민들의 항일의식을 크게 자극했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일본의 토지강점을 규탄하는 저항시위가 연일 일어났다. 한국정부는 할 수 없이 1907년 8월에 군용지 및 철도부지의 보상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다시 악명 높은 친일파 박의병을 내세웠다.
박의병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보상비로 평당 7전씩을 지급하려 했다. 하지만 주민들의 격렬한 항거가 여전하자 관찰사 박중양을 시켜 저항하는 주민들을 관아로 잡아들여 곤장 50대씩을 치고는 보상비마저 갈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토지 등 생활기반을 약탈당한 경의선 주위지역 주민들은 일본과 친일관리들에 맞서 싸우는 의병으로 변했다.
무력으로 강제동원 당한 한국노동자들
경부·경의·경원 등 일제시대에 개통된 한국의 간선 철도들은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급속하게 건설되었다. 한국 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목숨과 노동의 대가를 착취당하면서 건설된 철도였으나 일본은 한국노동자 동원에 관한 상세한 내용을 밝힐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를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관청 보고서·신문·구전(口傳)에 의해 편파적으로 파악할 정도라는 것이 안타깝다. 특히 경부와 경의철도는 우리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건설되었다. 한국노동자의 동원 실태는 공사의 성격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01년 9월부터 1905년 3월까지 건설된 경부철도는 일본민간기업인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임금을 지불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한국 노동자를 모집해 공사를 한 시기의 노동자 동원실태이다.
경부철도 부설 때의 노동자들은 원칙상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가한 한국인들로서, 대개 전국에서 몰려온 날품팔이꾼, 영세농민, 반상농민(半商農民)의 외지벌이꾼들이 대부분이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철도건설 공사에 빨리 익숙해져, 일본인 감독자들이 놀랄 정도로 능숙하게 일을 했다.
그러나 과격한 노동에 비해 일당 20전 전후라는 터무니없이 싼 임금인데도 그것마저 경부철도회사가 고용한 일본토건회사들의 관리들이 2~5전씩 착취했기 때문에 날로 불만이 쌓여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그렇지만 이들은 경의철도 노동자들보다는 그래도 후한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두 번째는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군대가 경의철도를 군용으로 부설하기 위한 한국 노동자를 강제 동원한 것이다.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급했던 경의철도에는 일본군 철도대대와 공병대가 직접 부설하면서 한국 토건회사들이 밀려나고 일본의 토건회사와 일본인 노동조직이 대거 참여했다.
일본은 경의철도를 빨리 부설하기 위해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직전에 강제로 맺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미끼로 필요한 많은 수의 한국인 노동자들의 동원을 강요했다. 한국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 요청을 받아들여 노선 각지의 관찰사와 군수, 면장에게 일본의 요구에 최대한 협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공사장에 가는 것은 곧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것으로 알고 불응하기 일쑤였다. 실제로 일본헌병이 김포군에 300명의 노동자 동원을 강요했지만 지원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자발적으로 동원에 응하는 군민이 한 사람도 없자 일본헌병과 일본토건회사 직원은 각 군을 돌아다니며 해당지역의 지방 관리들을 협박해 차출인원을 의무적으로 배당시켜 노동자를 강제로 동원하고 일당까지 주민들에게 부담시켰다.
일본의 이러한 만행은 경의선 주변지역의 민심을 극도로 흉흉하게 만들었다. 농민 중에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도피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그런데 일본군과 지방관리 외에도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한국 노동자의 동원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일진회의 우두머리 송병준은 황해도와 함경남북도 일진회원들을 경의철도 건설에 동원시키고,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임금 중에서 식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군사비용으로 일본정부에 헌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일진회가 1904년 10월부터 1905년 9월까지 경의철도공사에 동원시킨 노동자 수는 총 15만 명이나 됐다.
마지막으로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졸속으로 부설했던 경의철도를 보완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벌였던 시기의 노동자 동원실태이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부실공사로 개통했던 경의선 보수공사 때는 한국인의 심한 반발 때문에 강제동원을 완화시켜 일당 30~40전을 지급하겠다는 조건으로 주민들의 자발적인 동원에 응하도록 설득했으나 허사였다.
일당도 일본정부가 주는 돈이 아니라 철도 주위지역의 각 부락별로 할당한 강제모금으로 지급한다는 사실을 안 주민들은 일본의 야만성에 더욱 치를 떨고 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은 다시 한국인 노동자를 무력으로 강제 동원시켰다.
황해도의 경우 2년간 철도 건설공사에 징집된 인원수가 10만 명을 넘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식비와 노무비로 30만~40만 냥을 강탈해 생업을 포기하는 참상을 빚었다. 1909년부터 1911년까지 건설된 압록강 철교 공사는 50만 명 이상의 한국노동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많은 희생을 당했다.
경부와 경의철도 건설 현장에 끌려 나온 한국노동자들은 혹사를 당했다. 철도 공사의 경험이 없었던 한국인 노동자들은 터널의 굴착 또는 다리의 가설처럼 위험한 작업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었다.
따라서 공사 중에 사고로 사망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빨리 완공시키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인 감독들은 칼과 권총으로 한국인 노동자를 소나 개처럼 부렸다. 행동이 조금만 느려도 발길질과 곤봉 세례를 퍼부었다.
특히 경의선 부설공사 중 성현과 증약 터널 굴착공사가 최대 난공사로 공사를 앞당기기 위해 잠을 재우지 않고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이에 견디다 못한 한국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 감독들을 터널 속으로 몰아넣고 공사장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일본군의 총칼 앞에 주동자들이 처형을 당하는 참상을 겪었다.
이후부터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한국 노동자들은 가차없이 처형당했다. 철도 건설 노동자들의 장기간 동원으로 노선 주위지역 농촌은 피폐해졌다. 또 일본의 강제 동원을 피하기 위해 아예 도망쳐 버리는 농가도 속출했다.
철도인부의 강제 동원과 더불어 주민을 괴롭히는 것은 식량과 가축 그리고 나무의 약탈이었다. 철도 건설에 종사하는 일본군과 일본인 노무자들의 식량을 보충하고 철도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곡식뿐 아니라 소, 말, 닭, 돼지 등 가축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그런데 피해는 재산 손실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철도 노동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반항하는 양민을 살해하면서 비협조적인 군수를 구타하는 등의 만행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잔악무도한 일본인들의 만행을 막아달라고 관청에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한국 관리들 역시 일본인들의 협박과 폭력에 눌려 수수방관할 따름이었다. 결국 일본인들의 만행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당시 미국 대통령이 경고할 정도였다.
8. 간선철도를 보조하는 사설철도의 등장과 변천 보조금 제도 만들어 사설철도
사업 추진
경부선, 경의선 주변의 한국인들은 열차 운행과 철도건설을 줄기차게 방해하고 공격했다. 경부선의 시흥군과 경의선 곡산군민들의 저항이 가장 거셌다. 일본은 보조금 제도를 만들어 사설철도 부설사업을 추진했다.
1945년 한국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설철도는 전부 폐지되었고 남한지역의 중요 사설철도는 국유철도로 바뀌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met.net>
우리 민족의 2대 철도저항 사건
경부선, 경의선 철도건설 노동자의 강제동원과 살인적인 노역 그리고 일본인 노동자들의 악랄한 횡포는 노선 주변 주민들에게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과 철도건설에 대한 반항심을 심어 주었다. 우리 백성은 철도를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침략과 수탈의 도구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철도건설을 방해하는 어떠한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에 더욱 격분한 철도노선 주변의 한국인들은 열차 운행과 철도건설을 줄기차게 방해하고 공격했다. 이들이 철도를 상대로 벌인 항일투쟁은 지난 1904년 2월 국내 주권을 침해하는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자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봉기한 의병과 더욱 밀접하게 합세해 세력을 넓혀갔다.
1904년 7월부터 서울·경기도·평안도 지역에서는 일본의 불법적인 군용지와 철도부지 강제수용 그리고 물자의 약탈과 노동력 착취에 저항하는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거나 철도와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의 어용단체인 일진회원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일본군은 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의병이나 한국인들을 붙잡는 대로 총살에 처했다. 그러나 주민과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만행에 굴복하지 않고 열차운행 방해는 물론 철도시설을 습격하거나 파괴함으로써 일제의 침탈에 대항했다.
경부·경의 철도가 완공된 후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한국민의 항일운동과 의병투쟁이 격화되자 일본은 1907년 7월, 보병 1개 여단을 끌고 와 경부철도 주변에 배치하고 철도 경비와 의병을 토벌하게 했다.
1908년 10월 이들은 서울∼대전간의 경부철도에서만 의병 22명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후 일제가 일본군 경비를 조선철도 전 노선으로 확대시키자 우리 백성과 의병들의 항일투쟁은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어 갔다.
경부선 개통직후부터 우리 동포의 반발은 대단했다. 우리의 땅을 강제로 몰수하고 수많은 동포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재산을 강탈하기 때문.
서울∼수원간 개통 때는 시승하던 이토 히로부미에게 돌을 던져 부상시키는가 하면, 1909년 9월에 의병 40명이 경기도 소정리역, 같은 해 10월에 의병장 문태성의 부하 20명이 수원 아래 병점역을 습격해 태워버리는 등 목숨을 건 저항이 끊일 줄 몰랐다.
우리 백성과 의병은 철도뿐 아니라 철도부설에 관여했던 일본인과 친일파도 공격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경부철도의 시흥군과 경의철도의 곡산군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강제동원을 싸고 일어났던 군민의 저항 운동은 가장 큰 규모의 격렬한 충돌이었다.
시흥군민의 대대적인 항거는 1904년 9월 15일에 폭발했다. 이해 7월부터 일본군의 협박을 받은 경기도 관찰부(도청)는 시흥군에 군용역부 80명을 모집해 보내줄 것을 독촉했다. 이를 항의하기 위해 시흥군민 수천 명이 군청에 모여 관찰부의 명령을 철회하라는 호소를 격렬하게 했다.
이에 시흥군수 박우양은 관찰부를 설득해 역부 징집 수를 30명으로 감해 받았다. 하지만 역부에게 줄 비용 3,000냥 가량을 시흥 사람들이 공동으로 부담하라는 조건이 따랐다.
이것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당시 시흥군민 사이에는 군수가 노동자를 모집할 때 수십만 냥을 챙겨 주고 그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수백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무성해 군수에 대한 군민들의 불신과 원성이 컸다. 결국 노역경비의 시흥군민 부담이 불씨가 되어 9월 15일 일어난 시흥 봉기에는 43개 동에서 1만여 명이나 합세했다.
이날 오후 3시쯤 군수에게 항의를 하기 위해 군민들이 군청에 도착했을 때 군청에는 군수의 요청을 받고 달려온 일본인 석공(石工) 10여 명이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쟁 중에 일본인들이 갑자기 장검과 철봉을 휘두르며 공격했다.
순식간에 중상을 입은 군민들은 일단 문밖으로 밀려났다가 돌을 던지며 다시 돌진해 들어가 군수 박우양과 그의 아들을 타살하고 관사를 파괴하는 한편 도망가는 일본인 2명을 살해했다.
일본은 수비대 1개 소대를 급파해 주동자들을 체포한 후 잔혹한 고문으로 전모를 알아내고 주동자 민영훈, 성우경, 하주명 등 1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해 처형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됐다.
곡산군의 저항 운동은 철도건설 노동자의 강제동원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간에 큰 싸움이 벌어져, 쌍방에서 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대사건이었다.
1904년 8월 초 황해도 남천에서 경의철도 건설공사를 하고 있던 일본토건회사 직원 6명이 곡산군청에 와서 노무자 1,000명을 차출해 줄 것을 강요했다. 군수는 500명으로 절충하고 각 면에 차출 인원을 배정했다. 그런데 운중면의 100여 명이 한국정부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로부터 9일 후인 8월 11일, 황해도 관찰부의 명령서를 가지고 일본헌병과 다시 찾아온 일본패거리들은 이번에는 인부 800명을 동원시킬 것을 강요했다. 군수는 하는 수 없이 면의 크기에 따라 노무자 수를 나누고 역부 207명을 먼저 출역시키려 했다.
이때 백성 수백 명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 출역을 가로막았다. 이들은 일본의 요구대로 시행하다가는 고을 자체가 없어질 뿐 아니라 많은 군민을 동원하도록 한 것은 한국인 통역의 간계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일본인들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들은 통역은 곡산군민 수천 명이 봉기해 일본인들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통역을 했다. 이 소리를 들은 일본인들이 칼을 휘둘러 삽시간에 주민 14명을 살해했다.
이에 분개한 주민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지며 공격해 일본인 7명과 통역 1명을 타살했다. 사건을 통보받은 일본군은 8월 24일 보병 1개 소대와 헌병 3명을 파견해 주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동자 21명을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다.
사건 직후 일본군이 곡산군청을 살기등등하게 점령하자 군민들이 모두 도망가는 바람에 마을은 텅 비어 버렸다. 일본은 이 사건에 대한 앙갚음으로 곡산군수에게 노무자 6,000명의 동원을 강요했다.
이때 일본의 앞잡이인 곡산군 일진회 회원들이 앞장서서 그들의 강요를 들어주는 데 한 몫을 했다.
총독부의 보조금 미끼로 부설된 사설철도
총독부는 조선의 산업과 경제를 개발해 수탈하기 위해 철도를 계속 부설하고 발달시키는 것이 시급했다. 일본은 간선철도인 경인·경부·경의·경원선을 계속 건설했으나, 대규모의 철도자금을 마련하는 데 재정상의 제약을 받아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어려움은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사설철도를 건설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사설철도는 지방교통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간선철도를 보조하는 철도로서도 중요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가 빈약해 일본에서 민간 자본가를 유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의 사설철도는 장거리가 많고 막대한 자금이 드는 데다 건설에 긴 시일이 필요했기 때문에 쉽게 투자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투자의욕을 자극하기 위해 보조금 제도를 만들어 사설철도 부설사업을 적극 추진했다. 이렇게 하여 1914년 9월 ‘경편철도보조 내규’가 제정되었고, 이때부터 10년간을 기한으로 보조금 지원을 시작하자 이에 매력을 느낀 일본 자본가들이 사설철도회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차례 개정되어 1923년 4월에는 보조기간이 15년으로 연장되었다. 보조금도 연 총액 250만 엔에서 300만 엔으로 늘었다가 1925년 4월에 450만 엔으로 올리자 이를 노린 사설철도회사 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총독부는 사설철도건설을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1930년에는 보조금 최고한도액을 500만 엔으로 올렸다.
그러나 사설철도회사들 중에는 보조법을 악용해 형식적으로 회사를 세우고는 보조금만 착복하고 사라지는 유령 사설철도회사도 많았다. 일제 강점기동안 부설한 한국의 사설철도부설공사는 이와 같이 전부 일본 업자들이 독점했다.
또한 총독부의 보조금 미끼에 걸려든 일본민간자본의 사설철도회사가 많이 나타나 지선철도는 전국적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다가 1940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군사용으로 필요한 것 외에는 전면 보조금을 금지해 사설철도 붐도 열기를 잃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한국정부가 들어서면서 불필요한 사설철도는 전부 폐지되었으며, 남한지역의 중요 사설철도는 국유철도로 바뀌었다.
남한지역에 부설된 주요 사설철도
부산진∼동래선: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6명이 출자해 1909년 6월 설립된 (주)부산궤도회사는 자본금 10만 엔으로 한국 최초의 사설철도인 부산진∼동래온천간 협궤 철도를 부설, 1909년 12월부터 운행시켰다.
이 노선은 얼마 뒤인 1911년 부산의 전차·가스·전등사업을 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1910년에 세운 회사인 (주)조선와사전기에 넘어갔다. (주)한국와사전기가 매수한 부산진∼동래간 9.5km 협궤열차는 1일 5회 왕복했다.
기관차 2량에 1등 객차 1량, 2등 객차 2량, 3등 객차 2량으로 운행하다가 1915년부터 부산진∼초량간 전차가 개통되면서 동래선과 연결해 증기열차를 철거하고 대신 전차를 운행했다.
이리∼전주선: (주)전북경편철도회사는 호남선이 전주를 거치지 않자 이리역을 기점으로 전주에 이르는 연장 25km 협궤철도를 부설하고 1913년 12월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이 철도는 이리역을 통과하는 호남선 때문에 개업 초부터 호황을 맞았다.
이 회사는 1914년부터 보조금을 받았으나 1916년 들어 영업 호황으로 주주들에게 1할의 이익 배당을 할 정도로 영업 성적이 좋아 영업이 부진한 다른 사설철도의 부러움을 샀다. 현재는 협궤가 표준궤도로, 이리 대신 익산으로 이름이 바뀐 채 전라선에 연결되어 여수까지 달리고 있다.
대구∼경주∼포항선: (주)조선중앙철도회사는 경부선 대구역∼경주∼포항간을 연결하는 단선 협궤철도를 1917년 2월 대구에서 공사를 시작해 1918년 11월에 개통했다.
이 철도는 영남내륙의 주요 도시인 대구를 중심으로 하여 노선주변의 농업과 산업을 발전시키고 동해안의 울산·포항을 연결해 해산물을 내륙으로 운송할 뿐 아니라 노선 지역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경주 불국사의 신라 유적을 관광명소로 개발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철도 역시 표준궤로 바뀌어 현재 경주와 울산, 부산을 잇는 동해남부선과 연결되어 있다.
조치원∼청주∼충주선: 사설철도인데도 처음부터 표준궤도로 놓은 것이 특이하다. 총독부는 중부 내륙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충청북도를 횡단하는 철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 간파한 조선중앙철도는 간선철도처럼 표준궤도로 부설하겠다는 조건을 들어 총독부로부터 재정과 부설토지매수에 대한 특혜를 받아 표준궤도로 사설철도를 부설했다.
경부선 조치원역을 연결해 청주를 거쳐 충주에 이르는 연장 93.5km 중 조치원∼청주간 22.5km의 표준궤도 부설공사를 1920년 3월 착수해 1921년 11월 개통했다. 이어서 청주∼충주간 71km가 1928년 12월 개통되어 충북횡단 단선철도를 완성함으로써 충북내륙의 오지교통에 혁명을 일으켰다.
호남선∼광주, 진주∼마산간 남해선: (주)남조선철도는 1918년 호남선 송정리역에서 마산에 이르는 남해안 횡단철도를 계획하고 송정리∼광주간과 진주∼마산간의 표준궤도 부설허가를 받았다.
송정리∼광주간 15km는 1923년 7월, 광주∼담양간 21.4km는 1922년 12월에 개통되었다. 하지만 1928년 1월 국유철도로 매수된 후 경제적 가치가 적어 철거되고 말았다.
마산∼진주간 70km는 1922년 6월 착공해 7년의 공사를 거쳐 1929년 6월 개통되었으나 1931년 4월에 국유철도로 흡수되고 말았다.
철원∼금강산간 전기철도: 금강산전기철도회사는 1919년 8월 금강산의 수력전기를 이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철도로, 경원선 철원역에서 강원도의 금강산 입구에 이르는 총연장 100km를 표준궤도로 부설하는 허가를 받았다.
1924년 8월, 1차로 철원∼금화간이 개통되면서 해마다 관광객이 증가하자 공사를 서둘러 부설허가를 받은 지 12년 만인 1931년 7월 철원∼내금강에 이르는 전 노선을 개통시켰다.
천안∼장항, 천안∼안성철도: 조선경남철도회사는 1919년 9월 경부선 천안역에서 충청남도 서부해안으로 남하해 장항에 이르는 구간과 천안에서 동북상해 안성에 이르는 총 연장 158km의 표준궤도 철도부설 허가를 받았다.
충남과 경기도 중부를 종단하는 철도로서 선로 주변의 광대한 농지에서 나는 농산물과 서해안의 해산물을 수탈하고 경기도 내륙산업과 내륙교통을 개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선경남철도는 1922년 6월 유명한 온천이 있는 천안∼온양∼예산간을 먼저 개통한 다음, 1931년 8월 천안∼장항간을 완전 개통시켰다. 천안∼안성간은 1925년 11월에 개통해 광복 후 국유철도로 흡수했으나 물류 수송량과 경제성이 떨어져 철거되었다.
김천∼상주∼예천∼안동선의 경북선: (주)조선산업철도는 1919년 김천∼상주∼예천∼안동간의 경북선 부설을 허가받아 협궤로 공사를 시작해 1924년 12월 김천∼상주∼점촌간을 개통했다. 이어 1931년 10월 안동까지 완공함으로써 12년 만에 118.1km의 경북선 전 노선을 개통시켰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태평양전쟁으로 모든 물자가 궁핍한 가운데 특히 철도건설용 자재가 부족하자 예천∼안동간 궤도를 철거해 군수물자 수송에 긴급히 필요한 다른 군용철도 부설에 전용했기 때문에 예천∼안동간은 현재 노반만 남아 있다.
그 후 경북선을 영주∼삼척간의 태백선과 연결하기 위해 1942년 예천에서 중앙선의 영주를 잇는 철도를 부설해 전 노선이 개통된 중앙선과 연결했다.
서울∼춘천간 경춘철도: 1920년 10월 (주)경춘전기철도가 경성에서 강원도 춘천에 이르는 연장 79km의 철도부설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925년에 허가가 취소되었다. 경춘철도는 1936년 다시 서울 청량리에서 춘천에 이르는 연장 92.2km의 증기와 경유열차운행용 표준궤도 철도부설 허가를 받았다.
춘천은 강원도의 도청소재지로서 중요한 지방 도시였기 때문에 철도부설에 대한 강원도민의 요구가 일찍부터 있었으나 경제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총독부가 묵살해 버렸었다.
이후 산업개발이 추진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경성과 춘천 관민이 투자한 자본금 1,000만 원의 경춘철도가 1935년에 탄생했다. 처음에는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92.2km 노선을 계획했으나 이듬해 6월 기업인들의 요청에 따라 청량리에서 제기동으로 출발점을 옮겨 93.5km로 늘어났다.
대다수의 사설철도가 일본자본가들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경춘철도는 유일하게 한국인과 한국자본으로 부설된 사설철도로서 1939년 7월 단선으로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광주∼순천∼여수와 전주∼순천∼여수의 전라선: (주)남조선철도는 1927년 4월 순천∼여수간 개통에 이어 1930년 12월 순천∼광주에 이르는 120km를 완공해 광주∼순천∼여수간 총 연장 160km의 단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광주선은 1936년 3월 국가에 매수된 후 이해 12월 전주∼남원∼순천간의 전라선이 완공되면서 서울∼광주∼여수선을 전라선에 연결해 서울∼전주∼여수선으로 바뀌었다.
최후의 수인선 협궤 열차: 1931년 12월 (주)조선경동철도가 경부철도의 수원을 연결해 이천∼여주간에 협궤철도를 개통시켰다. 그 후 1935년 9월 수원∼인천간 52km의 협궤 철도 부설을 허가받아 1937년 8월 완공해 인천∼수원∼여주간을 완전히 개통시켰다. 따라서 이 철도는 경기도 내륙과 서해를 연결하는 산업과 교통철도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광복 후 수원∼여주선은 이용도가 날로 감소해 철거되었고, 경기도민의 명물로 인기를 얻었던 수인선 협궤 열차를 마지막으로 95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37년 일제가 이천과 여주 지역의 곡창지대와 인천 근방 소래와 남동 등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곡물 및 소금을 수탈해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부설한 철도이다.
소금을 많이 수송해 ‘소금기차’로도 불렀던 꼬마 열차는 미니 증기 기관차에 객차 5량과 화차 3량을 달고 운행하며 상인과 통학생의 중요 교통수단이 되었다.
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승객이 많아 안산의 원곡고개를 넘을 때는 남자들이 내려 밀고 넘을 정도였고, 80년대부터는 디젤 열차 2량을 연결해 운행하면서 젊은이들의 주말 데이트 코스로, 그리고 낚시꾼들에게는 낭만의 미니열차로 퇴역 때까지 인기를 끌었다.
사설철도를 흡수한 총독부의 국철: 1927년에 만든 ‘조선철도 12개년 계획’ 중의 하나는 그동안 일제의 총독부와 민간자금을 동원해 육성시킨 사설철도들을 국유철도가 흡수하는 것이었다.
3억2,000만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해 1927년부터 12년에 걸쳐 국유철도 5개 노선 1,376km를 신설한 다음 국철과 접속하는 사설철도 5개 노선 336km를 매수해 국유화하는 것이었다. 이 사설철도 흡수작업은 1927년부터 1931년까지 계속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한국의 국철과 사철을 경제개발이라는 목적에다가 군사수송용 철도의 역할을 부과시켜 철도 수송능력의 확장과 개선을 가속화시켰다.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사태가 급변하자 한반도는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전략기지로 변했다. 따라서 사설철도 역시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국유화하여 근대식으로 적극 개보수했다.
9. 국산 기관차의 등장과 변천 첫 국산 기관차 1927년 용산철도 공장에서 출시
우리나라에 등장한 첫 기관차는 지난 1899년 7월 인천 공장에서 조립한 미국 부룩스 회사의 모굴 탱크였다. 1919년 화물전용인 미카도를, 1922년 여객전용으로 패시픽을 미국에서 들여와 간선철도에는 화물과 여객 전용 기관차가 운행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조선 기능공들이 첫 국산 기관차를 만들었다. 이듬해 대구∼경주간 철도노선에 레일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등장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met.net>
국내에 철도 차량 공장 설립
처음부터 일본의 침략 도구로 설치된 철도는 국내의 독자적인 철도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차량의 제조와 수리기술이 우리에게 이전되었으나 선진국과 일본을 의존하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철도 초기를 벗어나면서 한국인의 노력으로 철도차량공업은 비교적 일찍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초기에는 철도차량공업이 발달하지 못해 1920년대 전반까지 미국에 의존했었다. 한국 첫 철도인 경인선도 미국인이 착공했던 관계로 미국산 기차를 도입했다. 그러나 일본 철도차량공업이 1910년대부터 선진국 의존에서 서서히 벗어나 철도차량 제조와 수리를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 한국에도 차량의 제조와 수리 공장이 설치되어 철도차량공업은 비교적 빨리 발전할 수 있었다.
1906년 이전의 기관차 및 객차는 대부분 미국에서 들여왔고, 그 후에도 기관차는 오랫동안 미국과 유럽제품을 사용했다. 1907년 들어 비로소 일본의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객차와 화물차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산량이 적어 일본 내의 수요도 따르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은 자체적으로 차량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어 1907년 부산 초량에 공장을 세워 25톤급 객화차 100량을 제작했다. 이후 서울 용산에도 철도공장이 설립되어 1920년대 말까지 완전히 객화차를 한국에서 생산해 자급자족했다.
객화차보다 만들기가 몇 십 배나 어렵고 까다로운 기관차는 1922년까지 미국 볼드윈과 아메리칸 로코모티브 회사에서 들여왔다. 1912년 도입한 프레이리형 탱크 기관차가 유일한 독일제품이었다.
한국철도공장에서는 1918년부터 기관차 제작을 계획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단 중지했다. 1927년 처음으로 10륜형 기관차 2대를 용산 공장에서 제작한 후 1930년대까지 철도용 기관차를 국내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1936년 12월부터 서울∼부산 노선에 투입한 급행열차 아까쓰기호를 일본과 함께 제작했는데 최고시속 110km, 평균시속 70km로 6시간 만에 주파한 것은 놀라운 발전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과 만주를 통치하는 데 철도운영의 통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총독부는 일본이 만주에 설립한 남만주철도 회사에 1917년부터 1925년까지 한국의 철도운영을 위탁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대륙철도에 맞추기 위해 차량구조와 기술·부품을 통일시키기 시작했다. 한국의 열차가 만주와 중국대륙에도 기술적 문제없이 달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1926년 총독부 직영으로 한국철도운영권을 남만주철도로부터 되돌려받은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때 일본이 중국철도를 포함한 대륙철도기술계획을 세우면서 차량이 늘어나고 대형기관차가 출현했으며 객차와 화차설비가 개선되었다.
국내 기관차의 발전사
1950년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기관차는 전부 석탄연료를 사용하는 증기기관차였다. 우리나라에 등장한 첫 기관차는 경인선에 사용된 미국 부룩스사의 모굴 탱크(Mogul Tank)였다. 1899년 7월 분해식으로 들여와 인천 공장에서 조립한 모굴 탱크 기관차는 무게가 35톤으로 수십 년 동안 사용했다.
경부선은 개통 당시 미국 볼드윈사가 만든 18대의 ‘플레이리 탱크’와 6대의 ‘콘소리데이션 텐더’ 기관차를 사용했다. 그후 1906년까지 10륜 텐더 6대와 10륜 복식 텐더 6대의 기관차를 볼드윈에서 구입해 부산 초량과 인천 공작창(工作廠)에서 조립 사용했다.
또한 1904∼1906년 볼드윈과 부룩스가 만든 플레이리 탱크 기관차 52대를 들여와 경의선에 48대, 마산선에 4대를 투입했다. 곧이어 4륜 텐더 중고 기관차 2대를 더 미국에서 들여와 경의선에 사용했다.
초기 기관차들 가운데 전체 기관차 중 절반을 차지하는 플레이리 탱크 기관차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국내 철도 실정에 맞도록 대대적으로 개조해 사용했다.
대형인 10륜 텐더 기관차는 여객과 화물열차에 적합해 여러 대를 도입해 1920년대 말까지 대표적인 기관차로 사용했다. 수송량의 증가로 기관차도 견인력이 강하고 대형인 텐더(Tender)형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발틱 10륜 텐더와 아메리칸 텐더 등을 미국서 도입해 간선철도용으로 사용했다.
또한 기관차를 여객전용과 화물전용으로 나눠 사용하기 위해 1919년 화물전용인 미카도를, 1922년 여객전용으로 패시픽을 미국에서 구입했다. 이 때부터 간선철도에는 화물과 여객 전용 기관차가 운행하게 되었다.
1923년부터 일본의 기차회사와 가와사키 조선소는 1923년부터 미카도와 패시픽 기관차의 설계를 약간 변형시킨 일본판 패시픽을 제작해 한국철도에 12대를 투입했다. 이 기관차가 미국제품의 수입을 억제하고 일본제 기관차를 사용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갈탄을 연료로 열차 3량을 견인하는 소형 기관차를 1924년 개발해 경인선에서 운행함으로써 단거리 경열차(輕列車)의 시대를 열었다.
우리 민족이 철도 역사상 처음으로 기관차를 만들어 낸 것은 1927년 7월이었다. 당시 철도국 경성공장에서 근무하던 조선 기능공들이 2년간의 노력 끝에 일본제 기관차보다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른 기관차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한 것. 10륜의 이 기관차는 제작비와 인건비를 합해 일본제품의 절반 값인 5만1,000원에 완성되어 일본을 놀라게 했다.
단거리 운행용 동차의 인기
한국의 지형은 거의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철도 역시 급경사와 곡선이 많은 데다 양질의 석탄이 적어 증기기관차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풍부한 수력자원으로 수력전기를 이용한 전철화를 추진했다.
1924년 경원선의 철원∼금강산 금화간에 처음으로 전철이 개통되고, 1931년 7월 철원∼내금강간 금강산 전기철도가 완성되면서 전동열차가 처음 나타났다. 이어 서울∼인천간의 전철화를 계획했으나 이 노선은 평지라서 뒤로 미루었다.
대신 1937년 경원선 중 가장 높고 구배가 심한 복계∼고산 구간의 전철화 공사를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으로 일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군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다시 공사가 재개되었다.
금강산 전철용 전동차량은 일본 도시바에서 만든 객차일체형 전동차를 사용했다. 전기기관차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43년 일본 도시바제인 ‘테로1’ 1호였다.
그해 12월 부산 공장에서 조립되었으나 이 때까지 복계∼고산구간에는 전선이 완비되지 않아 금강산 전철 철원역 구내에서 직류 1,500V로 시운전을 했다.
이후 복계∼고산간의 전선공사가 1944년 완성되어 그해 4월부터 전기기관차가 객화차를 달고 운행을 시작했다. 이후 도시바전기 제품인 전기기관차 6량이 부산으로 들어와 해방될 때까지 운행됐다. 이로써 복계∼고산간은 증기기관차를 밀어내고 전기기관차 운행구간으로 변했다.
동차란 열차처럼 한 기관차가 여러 대의 객·화차를 뒤에 연결해 운행하는 보통기관차가 아니라 객차 1량에 기관차를 포함시킨 단칸 기차로, 주로 빈번하게 운행하는 단거리 노선에서 사용했다.
1923년 7월 경인선을 시작으로 한국에서 처음으로 동차를 운행되었다. 일본기차회사가 제작한 기동차 ‘제하’가 바로 그것인데, 이 동차는 소형증기기관차 뒤쪽에 정원 63명의 객실 겸 소화물실을 설치하고 다시 보통 3등 객차 1량을 뒤에 연결해 운행했다.
그러나 속도를 내면 동요가 심해 후에 지방의 지선철도로 돌리고 다시 기관차와 객차가 분리된 2량 동차를 만들어 운행했다. 1928년 12월에는 영국 센티넬 회사에서 기관차와 객차 일체식 기동차 2량을 들여와 경인선과 지방 지선에서 운행했다.
이 기동차는 객차 앞부분에 기관실을 설치하고 최고출력 30마력의 증기 엔진을 달았다. 센티넬 증기 동차는 휘발유 엔진 동차 설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초의 휘발유 엔진 동차는 1928년 대구∼경주간에 등장한 ‘나케하’ 1호다. 일본 차량 회사에서 제작한 승합차형으로 포드 A형의 33마력 엔진을 얹은 이 휘발유 엔진 동차는 승객 정원이 좌석 21명, 입석 9명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동차는 증기 열차에 비해 견인력이 약해 불편했지만 제작비가 적게 들고 경쾌하며 운전이 쉬워 교통량이 적은 노선이나 빈발한 신속수송이 필요한 도시근방 철도에 적합했다. 대구∼경주간에 사용된 협궤 동차는 30인승 소형이었으나 주행장치, 제어장치 등이 뛰어났다.
국산 동차가 처음 제작된 것은 1930년 대구∼경주간에서 운행한 것으로 6기통 62마력 휘발유 엔진을 얹은 45인승 협궤 동차를 경성철도공장에서 제작했다. 길이 20m의 첫 표준궤도형 동차는 일본에서 만들어 사용했는데, 6기통 107마력 엔진을 마루 밑에 얹었다.
승객 정원 100명에 최고시속 70km의 고속 동차로서 한국철도의 표준 동차가 되었다. 휘발유에 이어 1931년 디젤 엔진 동차가 선보였다. 차체의 구조는 휘발유 동차와 같았으나 차량의 앞뒤 부분을 반유선형으로 만들었고 6기통 110마력 벤츠 디젤 엔진을 마루 밑에 달았다.
경성철도공장에서 만든 디젤 동차 후 한국에는 휘발유와 디젤 동차가 달려, 연기없는 기차로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차 대전 중 유류난으로 기화기를 개조해 알코올, 솔벤트, 목탄가스를 사용하다가 6·25 전쟁 직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구∼경주간에 등장한 첫 궤도 버스
1928년 9월, 대구∼경주간 철도노선에 레일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등장해 한동안 큰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 광경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대구∼학산(포항)간에 운행하던 경동선 철도가 국철로 매수된 후 동해중부선으로 이름을 바꾸어 종래와 같이 여객과 화물을 수송 중인데 이 노선에는 열차 왕복이 매일 몇 번 되지 않는데도 화물열차가 많고 여객열차가 적어 일반 여객에게 불편함이 많으므로 철도국에서는 10월 1일부터 궤도자동차를 운행키로 결정하고 이미 주문한 자동차 5대가 도착해 9월 24일 오전 9시 30분에 대구역에서 경주까지 시운전을 하였다.
당분간 대구∼경주간에만 운행하며 차체는 경성의 부영버스와 흡사하나 바퀴는 기차바퀴 같아서 레일 위로만 운행하도록 만든 것인데 버스처럼 휘발유 엔진으로 달리며 좌석은 20인승이더라. 조선에서 궤도자동차를 운행키로 한 것은 몇 해 전에 조치원과 공주간에 이것을 부설하려다가 못하고 이번이 처음이라 성적이 좋으면 증설하리라 한다.’
경인철도와 경부철도 개통 초기의 객차는 ‘보기’형으로 중앙에 통로가 있는 중앙관통식이었다. 보기식 객차는 길이 15m, 너비 2.8m으로서 목조차체를 얹었다.
경인철도 개통 1년 후인 1900년 7월 고종황제 어용으로 일본의 평강 공장에서 제작한 객차는 제작비 1만5,000원을 들여 구조와 자재 및 내부 장식을 최고급으로 만들었고 뒤쪽에 전망대까지 설치했다. 어용객차는 1936년까지 귀빈차로 활용했다.
1930년대 초까지 국내 객차들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에서 들여와 사용하면서 여러 차례 개조하고 구조를 변경해 해방 전까지 사용했다. 한국에서 객차를 처음 제작한 것은 1932년. 경열차용 3등 객차를 경성철도공장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 뒤 가볍고 튼튼한 경객차가 개발되어 경부선 특급 아까쓰기에 사용했다. 1926년 이전까지의 객차는 차체를 거의 목재로 만들었다. 그러다가 1927년부터 국내 철도공장에서 반철제 객차를 만들어 수명을 연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