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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11장27~36절
제목 : 말씀을 지키는 자와 거부하는 자
예수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에,
사람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귀신을 쫓아냈으나, 성령이 거하지 않으므로,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가니 그 사람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에 대해 선언하신 후,
예수님은 수 없이 말씀을 듣고,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악한 세대의 불신앙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시대 니느웨 사람들과
솔로몬 시대 남방여왕과 등불의 비유를 들어 교훈하십니다.
1. 말씀을 지키는 자의 복(27~28절).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1) 한 여자는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27절).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엘리사벱이 예수님을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서 찬양한 내용과(1:42)
유사하며, 렌스키는 여기서 1:48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1: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본문의 여인은 단순히 한 선생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한 듯합니다.
본절의 의미는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bless, NIV)을 받았음에 틀림없다"로 보면 될 것입니다(Marshall).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28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 예수님은 여인의 찬사에 대해서 아무런 평가를 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곧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되다는 이야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데 견해의 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Lenski, Tyndale).
그러니까 '오히려'(메눈)는 여인의 이야기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의 이야기, 즉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모친과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말씀과(8:21)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신실성의 문제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順從)과 헌신(獻身)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는'(퓔라쏜테스)은 '파수하다', '준수하다'는 의미의 '퓔라쏘'의 현재 분사형으로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준수하는 것을 임무로 아는 사람임을 뜻합니다.
*시1:1~2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 악한 시대에 보일 마지막 표적(29~32절).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늘본문 29절에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는 12:29절에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할 때(호1:2)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우상 숭배는 곧 음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표적(sign, NIV) 요구가 악한 것으로 규정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여러 가지 이적적인 사건들
-14절에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 내신”일, 그리고 전에 즉,
-4:38~44절에서 “온갖 병자들을 고치신”일
-8:22~25절에서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신”일
-8:40~56절에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열두 해된 혈루병 환자와
죽은 아이로의 딸을 살리신”일 등이
하나님의 권능을 밝히 드러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아예 인정치 않으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눅11:16절에서는 “그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 엘리야가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하나님의 참 선지자임을 증거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역시 엘리야와 같이 예수님께 대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불을 내리실 수 있었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시고,
표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요나 시대 사람들과 솔로몬 시대 남방여인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1) 요나의 표적(30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標的)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요나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구원받은 것이,
곧 예수님의 죽음과 사흘 만의 부활을 예시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을 때 회개 운동이 일어났듯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해야함을 촉구한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알리신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요나이 표적은 증거가 없어도 믿고 돌아온 니느웨 사건을 말합니다.
니느웨 사람은 요나의 말에 증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회개 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에 철저히 회개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2) 솔로몬 시대 남방여인(31절).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여기에 언급된 '남방 여왕'은 왕상 10:1-13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queen of Sheba, NIV)을 말하는데 스바는 남부 아라비아에 있는 오늘날의 예멘(Yemen)을 가리킵니다.
이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무려 2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찾아왔습니다.
이는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땅 끝에서 온 것입니다(마 12:42).
이 여왕의 열정에 비하면 유대인들의 태도는 너무도 완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사람과 함께 살면서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솔로몬보다 '더 큰 이'라고 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거리상 비교도 안 될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 인격의 위대함에 있어서도 솔로몬을 능가하는 예수님과 접할 수 있는
귀한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모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던 셈입니다.
3)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대조함(32절)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 같은 논리가 이번에는 니느웨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대조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창 10:11)로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심한 죄악을 범하였습니다(욘 1:2).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욘 3:5-10).
니느웨 사람들은 일개 선지자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유대인들은 요나보다 비교가 안될 만큼 위대하신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31-32에는 하나의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구원 받음'과 '유대인의 구원 받지 못함'이 대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3. 등불의 비유-빛으로 오신 예수님(33~36절)
1)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둡니다(33절).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본절의 의미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등불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불이 등경 위에 위치하여 주위를 밝게 비추는 일이 너무도 당연하듯이,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에서 항시 생명의 빛을 비추었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2)등불을 복음의 메시지로 간주하는 견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는 말씀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도 비춰주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34절).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몸은 전체적인 인격을 뜻하나 등불에 비유된
눈은 진리를 분별하고 받아들이는 통로에 해당합니다.
눈이 성하다는 것은 영적 안목이 단순하고도 진실되게 진리에만 고정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혹자는 이 단어에 '일편단심'이라는 은유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
"온 몸이 밝을 것이요"를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눈이 건강해서 빛을 받아들인다면 즉 영적인 눈이 일편단심으로 복음의 빛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전 존재는 빛으로 가득할 것이다."
반면 눈이 나쁘면은 그 시선이 약한 것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진리와 복음을 거부하는 눈입니다.
3)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누가는 이 말씀을 하나의 권고(勸告)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
마태는 경고(警告)의 형식으로 기술하였습니다(마 6:2).
*마6:2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속에 있는 빛”은 하나님의 계시를 감지하는 내적 빛 곧 양심(Gilmore) 혹은 스스로 빛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선한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신앙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내 속에 있는 빛이 어둔가 밝은가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4)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36절).
“[36]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엡 5:13,14의 말씀과 유사합니다.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 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믿음의 신령한 눈을 뜨고 있는 자는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가 그 빛을 주위에까지 비추는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엡 5:8).
그러므로 엡5:8~9절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10장11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 가운데 표적을 찾아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표적이 나타나야 믿고 또한 표적을 체험해야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단지 니느웨에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였고,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만 말씀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아무런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솔로몬 시대 남방 여인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서부터 왔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말씀은
31절에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절에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큰 이는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장차 심판 날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또한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서 왔지만 우리는 지금 요나와 솔로몬보다 훨씬 뛰어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34절 말씀에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입니다.
사물을 보는 눈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를 보는 눈입니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는 뜻은 영적인 눈이 열려서 진리를 보게 되면,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6절에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귀가 있어도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진리의 말씀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볼 수 있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 시대 사람들과 솔로몬 시대 남방여인보다
더 회개하고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특히 새벽 예배에 나오고 예배에 출석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남방여인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땅 끝에부터 온 것을 생각하시며 솔로몬보다 훨씬 뛰어난 진리인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요나와 같이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보게 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수님은 당신을 ‘낳은’자가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27,28절).
‘빈집’의 비유(11:20~26)처럼, 하나님의 통치와 말씀이 마음 중심에 자리 잡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죄와 악한 영에 점령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면, 아무리 많이 감탄해도 소용없습니다.
말씀은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입니다.
2) 선지자 요나와 솔로몬 왕보다 더 크고 위대 하십니다(29~32절).
그분보다 더 분명하게 구원의 길을 선포한 이가 없고,
그분보다 지혜롭게 다스릴 왕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전하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고도 무탈할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자(28,36절)가 복된 자입니다.
늘 말씀으로 다가 오시고 참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과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한 해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악한 세대는 수없이 말씀을 듣고 수많은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도 않습니다(29~32절).
참 지혜와 참 표적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독선과 교만에 갇혀 가시적인 표적만 요구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할 구실만 찾는 데 안간힘을 썼습니다.
믿을 만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으려는 마음이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더 많은 증거, 더 극적인 체험이 아니라,
겸손한 믿음, 순전한 마음이 아닐까요?
2) 주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빛입니다(33~36절).
영적인 귀와 눈이 열려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면,
믿음의 생기와 사랑의 온기, 인격의 향기와 인생의 활기가 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이 어둡다면 그 빛을 받을 수 없어
그 만큼 영혼이 시들고 어두워질 것입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하는 악한 영의 역사(고후4:4)를 경계하면서,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도록’늘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