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몽재는 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이 명종 3년 순창 점암촌에 지은 강학당이다
하서 선생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계승 하는 견해로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아 이를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송강 정철.월계 조희문 등 당대 최고의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 훈몽재는 순창지역이 호남 유학의 산실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자료이기도하다 .
최초 하서 선생이 훈몽재를 지은곳은 현재 위치하고있는 대학암의 위쪽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때 소실되어버린 훈몽재는 선생의 5대손인 자연당 심시서에 의해1680년
원래의 자리 인근에 자연당 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되었다가 퇴락하였다.
푸른 하늘아래 보이는 시원한 훈몽재의 모습
하서 김인후 선생이 순창의 점암촌 백방산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김인후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곳.
전라도 지방에 산 교육을 펼쳤던 그곳이...바로 이곳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훈몽재에 들어서자 양정관에서 시원한 마루에 앉아 잠깐동안에
학업의 열기를 불태우는 대학생들을 보았다.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이 학생들이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이곳을 찾아 들었다는것에 참 흐믓하고 기분이 좋다...
이곳에 공부를 하러 온 대학생들 인듯 합니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있었네요.잠깐의 시간을 이용해서
시원하게 수박도 잘라먹고 다과의 시간을 갖고있는 모습입니다.
이 삼연정은 하서 선생의 문학적 시상인 삼연 산[山] 수[水] 인[人]을 구현한 정자다
하서 선생이 지은 1.600여 수의 시에 가장 많이 언급된 내용인 삼연 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하서 선생의 사위이자 제자인 고암 양지징의 48 영시 중 14번째 원규투류[담장
밖에서 뚫고 가는 물이 흐름을 엿보다]는
삼연이 잘 드러난 시이기도 하다.
둔전리 백방산 아래 추령천변에 위치하여 현재도 30여명이나 되는 인원이 앉을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문하생 이었던 송강 정철의 친필
대학암이 암각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하서 선생이 정철을 비롯한 많ㅇ느 제자들에게
[대학]을 강의했다고 한다.송강 정철은 훈몽재에서 13세까지 공부하였다고 한다.
대학연 바위에 암각되어있는 한자입니다.
옆에서 보아야 잘 볼수 있는데 글자는 눈에 확 보일정도로
잘 보이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유현이 하서선생의 은거 강학하였던 훈몽재 앞마당 가운데에 있는 이돌이 지석묘이다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 부르며 .청동기시대에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진 족장 등 지배층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다.
이 곳 훈몽재 터는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아왔던곳임을
추정할수 있게 해주고있다.
자연당이라 불리는곳이다.김인후 선생이 건립했던 훈몽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 후 하서 선생 5대 손인인 김시서선생이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하였다.
하서 선생이 낙향하면서 자신의 자연귀의 사상을 자연가 라는 시를 통해서
표현하였는데 김시서 선생이 자연당을 지어 이를 구현했다고 볼수 있다.
앞서 말씀 드린바와 같이 이 훈몽재는 원래의 자리가 아니었음에
현재 자리보다 윗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훈몽재의 뒷쪽으로 가게되면 원래의 훈몽재가 있던 터를 볼 수 있다.
훈몽재는 학문학과 대학생등 유학을 배울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여름방학 예절교육반도 참가할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훈몽재 문의전화를 하시면 아실수 있습니다.
훈몽재
주 소 // 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둔전리 45-1번지]
전 화 // 063 652 0076
첫댓글 순창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네에 정말 경치도 좋고 조용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