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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4절 없음)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6절 없음)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 짠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마가복음9;42-50)
42.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those who believe in me—to stumble, it would be better for them if a large millstone were hung around their neck and they were thrown into the sea. 43. If your hand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maimed than with two hands to go into hell, where the fire never goes out. [44] [b] 45. And if your foot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crippled than to have two feet and be thrown into hell. [46] [c] 47.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tumble, pluck it out.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be thrown into hell, 48. where “‘the worms that eat them do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d] 49.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50.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among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42.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those who believe in me—to stumble, it would be better for them if a large millstone were hung around their neck and they were thrown into the sea.
사람들은 죽음을 말하기조차 두려워합니다.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죽으심을 막더니 주님께서 또다시 죽음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죽음 말만 나와도 딴청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제자들의 귀에 대고 세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없으면 죄인들에게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벧전3:18)
죄인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방식은 그의 죽으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오직 구원입니다.
또 구원의 보장은 오직 그 분의 대속의 죽으심입니다.
제가 진절머리가 나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을 부자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죽으시러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에 대놓고 딴청 하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과격한 표현들을 어디에서 보신 적이 있나요?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진다.
팔을 잘라버린다.
발을 잘라버린다.
눈을 빼버린다.
성경은 왜 이런 과격한 표현을 하신다고 생각하시나요?
첫째 우리는 주님의 말씀도 대충듣고 흘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을 가진 아무리 작은 소자라도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구하신 생명입니다.
그 생명에 대해 진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물에 빠져 죽고 팔 다리가 잘리는 엄청난 희생인데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의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가혹한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근거합니다.
넷째 사회 약자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 나라와 지옥을 결정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이 세상을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행위를 일일이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 없이 한 행동들이 심판의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등등
제 사업이 망했다면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그 행동이 뜻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 현실에 절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묻는 것은 믿는다는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얼마의 비중을 두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중 때문에 지금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팔을 잘라버리고
다리를 잘라버리고
눈을 빼버리고
부자는 날마다 세상을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쉬지 않고 잔치를 베풀 여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날마다 부자집의 대문을 찾았습니다.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짐이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몸뚱이였습니다.
그는 한계 상황의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몸에서 흐르는 고름을 개들이 와서 핥아대도 개를 쫓아낼 힘이 없었습니다.
그 몸으로 부자집 대문을 찾아가서 상아래 떨어지는 것으로 연명했습니다.
땅바닥으로 떨어지 10개 중 9개는 개들이 차지하고 나사로는 하나나 겨우 챙겼을까.......
그 때마다 그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내일 나는 살아있을까?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삶과 죽음의 그 임계선에 서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진지해지지 않습니다.
부자는 오늘 3만 원짜리 탕수육을 차렸으니 내일은 4만 원짜리 불고기를 구워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맞아서 아주 특별한 장소에 오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많겠지만 여러분으로 부자와는 다른 고민을 하게 하는 곳입니다.
천국가게 하는 고민으로!
나사로의 삶은 최고의 악몽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죽고 보니 영원한 악몽의 자리에 놓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가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알려주신 것은 네가 공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와 나사로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과거의 네 삶이 그 근거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 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눅16:25)
거기까지 알고보니 부자집 대문 앞 그 지긋지긋한 나사로의 그 자리가 복이 있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6:20)
좌우간에 부자가 눈을 뜨자 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현실일 줄이야!
1.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모두가 하나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2. 주께서는 하늘에서 사람을 굽어보시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펴보신다.(시14:1,2)
여기 시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집 대문 앞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보실 리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 열원한 불 위에서 지글거리다 보니 정말로 억을한 것이 있었습니다.
판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험한 현실이 자신을 기다렸더라면 하나님께서 이 현실을 더 극적으로 계시하셨어야 옳았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죽은 나사로 정도는 살리셔야지.......
그런데 당장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태도를 봅시다.
주님께서 죽으심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누가 크냐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아주 선택적으로 듣고 있습니다.
아니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둥 마는둥 했습니다.
아니면 그들은 제 편한대로 주님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강대상에 성경을 펴두고는 빤쓰 이야기며 하나님 까불지 말라면 낄낄대면서 아멘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입니다.
그런 식입니다.
복장이 터질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그런 몰상식을 경건으로 알아듣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는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았더라면 제가 불고기와 탕수육 생각만 했겠습니까? 라면 대든 것입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계속 따졌을 때 아브라함은 똑같은 답을 했습니다.
31.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눅16:31)
말씀이면 족하다.!
이브가 죄를 범할 때도 그랬습니다.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3.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창3:2,3)
이브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브는 먼저 그 말씀을 외우더니 그 자리에서 그 열매를 따 먹었던 것입니다.
일본이 핵사고수를 바다에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들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 위험에서 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물고기는 일본이랑 한국이랑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기 때문입니다.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나온 사람이 과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만 1+1=2 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원자력과 교수도 1+1을 두고 100이라고 했나?
그 원자력과 교수가 과학에는 확실하게 더 일가견이 있었을 텐데.......
산소가 없는 곳에 사람을 두면 사람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한 사람 죽음을 두고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산고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다른 고질병이 있어서 다른 이유로 죽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을 죽여보고 아 확실하게 산소가 없으면 사람이 죽는구나 조금 더 과학적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10명에게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으니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한 100명 정도 죽여서 데이터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죽이고 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 과학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산소는 사람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
100보다 1,000을 죽이면 확률이 조금 높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이 아닌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이 공기 중에 적당량의 산소를 태초에 넣어두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그 배려를 믿고 우리가 죽어보지 않고 그 생명을 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은 우리 육적 존재가 갈 수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의 장소로 두고 삽니다.
그러다 보니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데이터를 모을 수도 없습니다.
그 나라에 관한 한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길 외에 길이 없습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롬1:17)
과학은 이미 시체가 돼 봐야 생명을 깨닫는 것을 이릅니다.
그런데 사람 다 죽이고 나서 입증하면 뭐 해!
환경을 다 파괴하고 나서 환경 과학이 나왔습니다.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자신이 무슨 과학자라고 말씀을 확인해 보려하다가 이 사고가 난 것입니다.
그런 모질란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도록 하나님은 이 땅에 선지자를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모지리 밑에서 간신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통해 우크라이나 슬픔에 젖었네 라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눈물을 닦아내며 들었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에 그 노래를 들었더라면 좀 슬픈 노래네 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전쟁 터지고 나서 전쟁이란 비참한 것이라고 확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유행은 러시아 무너지고 중국 개방하고 끝난 지 오래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를 가만 놔두어야 자본주의 경제가 되는데 박정희가 5개년 계획경제를 실천했고 여러분이 득을 보고 있는 복지는 그렇게 욕해대는 사회주의에서 온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돈 있는 사람만 병원가는 것입니다.
구닥다리 이념을 적용하지 말고 주님의 계명을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는 사람에게나 원수이지 하나님께는 모두 자녀입니다.
물론 생명이라면 개의 생명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입니다.
동물 보호법을 세계에서 최초로 만든 사람은 힛틀러였습니다.
개를 사랑하는 자가 600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습니다.
개는 잡아먹을 수 있지만 사람을 죽이면 안 됩니다.
핵국물은 마시게 하면서 왜 보신탕 국물을 못 마시게 해!
점치기 위해 소는 산 채로 껍데기를 벗겨도 되고 개는 아니고!
무슨 일관성을 가져야지!
무슨 영화의 내용인데 6.25때 형은 국군이 되고 동생은 인민군이 되고 전쟁터에서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러면 형이 훈장을 받으려고 이데올로기를 외치며 동생을 총으로 쏴 죽여야 옳습니까?
그 더러운 훈장!
한 형제라는 사실로 껴안고 울어야 정상인 것입니다.
성경은 물에 빠져 죽을 원인을 이르는데 인간 생명에 대한 태도입니다.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42.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those who believe in me
예수님께서는 훗날에 너는 개를 어떻게 대했느냐고 물으실 것이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힛틀러가 천국에 갔을 것입니다.
이 작은 단 한 사람에 대한 태도입니다.
주님의 지적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오직 생명입니다.
그것이 작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일관성이 있습니다.
오직 소유입니다.
그들은 남보다 크고 더 많다는 것입니다.
마태 복음은 이 말씀을 더 보태고 있습니다.
7. 사람을 죄짓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범죄의 유혹이 없을 수는 없으나, 유혹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마18:7)
7. Woe to the world because of the things that cause people to stumble! Such things must come, but woe to the person through whom they come!
연자 맷돌을 제 목에 달고 바다로 뛰어 들어야 할 사람은 인상이 험하게 생기고
전신에 문신을 하고
그런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7. 범죄의 유혹이 없을 수는 없으나
7. Such things must come,
누구도 이 심각한 일에서 자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해놓고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넘어갈 일이라는 것입니다.
농담 한마디 잘못했다가 한 사람이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한 사람이 대뜸 저에게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왜 이런 성 문제를 일으키냐는 것입니다.
그 일은 작은 일이 아니다 보니 그 일로 목사가 수많은 사람의 믿음을 파선하게 했다면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열댓 번 바다에 빠져 죽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4절 없음)
43. If your hand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maimed than with two hands to go into hell, where the fire never goes out. [44] [b]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6절 없음)
45. And if your foot causes you to stumble, cut it off.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life crippled than to have two feet and be thrown into hell. [46] [c]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7. And if your eye causes you to stumble, pluck it out. It is better for you to enter the kingdom of God with one eye than to have two eyes and be thrown into hell,
이런 엄청난 요구들은 모두 죄 때문입니다.
이 글의 주제는 죄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구원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구원을 말하는 그 횟수만큼 우리의 죄를 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구원이란 바로 그 죄의 문제의 해결을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구원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
연자 맷돌을 목을 매달아 바다에 빠져 죽을 일이 바로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에 이르게 하는 주체들입니다.
손 발 눈입니다.
그것들이 사람을 죄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처입니다.
그것을 단호히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체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문장은 이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팔이 자르면 그 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현재 발이 자르면 그 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현재 눈을 빼버리면 그 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
정확하게 현재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언급합니다.
현재의 행위가 그대로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결과와 직결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교통 신호 위반을 했습니다.
속도 위반으로 찰칵 사진이 찍혔는데 저는 며칠 후에 지불할 10 만원 벌금이 그 길 위에서 결정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카메라에 찰칵하고 찍히면 미래 하나님 나라의 징벌을 의미합니다.
그 미래를 결정하는 판단의 근거들은 대단히 윤리적입니다.
무슨 말이나면 바지를 거꾸로 입거나 왕 자를 손에 쓴다거나 이런 미신적인 내용이 그 미래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당들에게는 그것이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이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윤리 기준을 가지고 현재를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입니다.
저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참 으아 했던 것입니다.
선지자라고 하기에 눈감고 술술 미래를 말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선지자들은 두 눈을 더 크게 뜨고 세상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무슨 선지자가 미래가 아닌 현재의 죄만 고발해!
죄짓지 말라고 계속 고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긍정적인 말을 하라는데 선지자들을 부정적인 말만 잘도 골라서 했습니다.
바지가 아니라 윤리가 그의 지옥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지금 그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중에서도 신호 위반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작은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사람은 연자 맷돌을 목에 메야 하고 손과 발과 눈을 빼버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사람이 작은 자 하나의 등을 냅다 불길로 밀어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to causes you to stumble) 했다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뱀이 열매를 따더니 그것을 직접 이브의 입에 강제로 쑤셔 넣은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이브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이브의 귀가 그 입이 그 녀로(her ears and mouth causes her to stumble) 죽음을 향해 걸어 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현대는 눈과 귀가 가장 문제입니다.
전철을 타 보면 사람들이 거의 100% 손에 폰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그 뱀의 짓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영상과 혼란스러운 정보로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가짜 뉴스를 강요해서.......
이 눈과 귀가 전 인격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2003년 미국 유타 주의 블루 존 캐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론은 홀로 등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좁은 절벽 사이를 타고 내려가다가 굴러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른팔이 큰 바윗돌에 눌리고 말았습니다.
팔을 빼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팔 뼈를 부러뜨리고 주머니칼로 팔을 절단하고 살아왔습니다.
그가 힘이 있을 때 속히 그 결단을 못 했더라면 그는 그 바위 사이에서 지쳐 말라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 중 팔을 잘라내기로 정한 것입니다.
그를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내 손이며 내 발이며 내 눈을 말하니 오해를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런 실존적인 나의 문제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신앙이란 오직 내 팔을 자르고 내 발을 눈을 빼버리는 실존적 대안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치명적인 죄란 명확히 그 대상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42.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42. “If anyone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those who believe in me
이런 사회적인 행위를 이르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란 대상을 요구하는 관계 문제입니다.
신앙은 실존적 문제이지만 그 실존은 이 작은 소자에 대한 사회 행위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싱과 한 사람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중이었습니다.
무서운 추위를 뚫고 산 속을 걷다가 얼어 죽어가는 한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썬다싱은 이 사람을 업고 가자고 동료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그러다가는 우리마저 얼어 죽는다며 먼저 가버렸습니다.
썬다싱도 자신의 제안이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죽을 일을 택한 것입니다.
물론 그 때 나나 살자는 생각과 성령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생각을 두고 씨름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생명을 버리고 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다가 얼어죽어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기만 살려고 홀로 먼저 갔던 사람입니다.
반대로 썬다싱과 등에 업힌 그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좋은 일을 하다 보니 썬다싱이 오히려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죽음과 삶의 임계선에서 썬다싱은 자신에게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현실 보장이 아닌 미래 하나님 나라의 보장과 내 중심이 아닌 다른 사람을 가치 중심에 두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심판의 자리에서 바로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마25:34-36)
당장 우리는 당하고 있는 현실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으로 확인한 적이 없고 예수님의 말씀으로만 들었던 그 하나님 나라의 미래로 우리 행위 근거의 무게 중심을 옮기라는 것입니다.
또 지금까지 나를 중심에 두고 행위를 결정해 왔는데 그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행위를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맨 정신으로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가치 전도가 신앙입니다.
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마6:33)
목사가 할 일이 그 일입니다.
교회 예배 드리러 온 사람들의 가치의 주소지를 옮기는 일입니다.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또 나에게서 다른 사람으로
소유에서 존재로
탈북을 돕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가 압록강 변에서 처참한 7살의 꽃제비를 만나고 그를 구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 목사님은 7세의 자신의 아들을 잃은 것입니다.
탈북을 돕다가 등뼈 수술을 하고
죽을 위험을 무릎쓰고.......
그 때 그는 자신의 목뼈를 쇠로 박아도 좋고 하나님 다 좋은데 우리 아들을 왜 데리고 가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졌답니다.
그는 도저히 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내의 마음은 어땠겠습니까!
하나님 이러실 수 있느냐고 40일 금식을 하는데 20일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북에 있는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아라 그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지 않냐?
네 아들은 지금 천국에 있지 않냐?
아내는 알겠다고 하나님께 순복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드린 후에 그 주소지가 옮겨지는 그 어려운 일이 목사님께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교회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그 일을 십자가에서 하신 것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3:16)
주님은 죄인 때문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미래의 하나님 나라 때문에 십자가의 현실을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을 수용하시므로 하나님께 부활을 허락받으신 것입니다.
그 일을 두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고 있었는데 주님을 통해서 사랑의 개념이 제대로 정리된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요일4:7)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8. where “‘the worms that eat them do not die, and the fire is not quenched.’[d]
지옥의 현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의 현실을 믿고 있는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철은 죽으며 자신이 지옥에 빠짐을 한탄했습니다.
그 낙담한 표현을 들어보세요.
그것이 소명감을 가진 자의 활기 넘치는 그런 표현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성철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실을 고백했는데 그 말에 귀를 막고 전혀 달리 해석하는 것입니다.
지옥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지금 소명을 가지고 지옥 간다는 그 중요한 소리를 왜 한마디도 안 해!
그런데 성경을 따르자면 사람이 스스로 지옥을 선택해서 그 지글거리는 불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남들을 전도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제 죄도 감당하지 못하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모조리 죄인입니다.
우리는 지옥의 지글거리는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없는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묘사라는 지옥을 현실로 여기면 유치하다고 말할 도사들이 있을 것입니다.
유치하든지 말든지 기독교는 지옥과 천국을 역사 현실로 믿습니다.
고상하다는 도사들은 물질의 세상을 무시하고 불꽃 위도 감당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제가 그런 존재였더라면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수 없어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철은 스스로 지옥을 택했지만 저는 그런 미친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꼭 천국에 가야 합니다.
저는 나약한 저의 육적 한계를 철저히 인정합니다.
성철은 도사지만 저는 도사가 아니고 도사가 생각도 없습니다.
49.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49. 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지옥이라는 종말의 현실과 현재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옥은 천국과 같이 무한한 영적인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는 비오는 날도 있고 또 맑은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옥의 현실은 지글거리는 불의 현실에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선에 소금을 잔뜩 뿌려놓으면 그것이 상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교회 가스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밥을 하다가 멈추어야 했습니다.
우리 식당 가스불은 꺼질 때가 있지만 지옥의 불은 소금에 절인 것처럼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변함이 없는 고통이 보장된 것입니다.
잠시 쉬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그림책 같은 지옥의 현실을 저는 믿는 것입니다.
부자가 소금에 절여지듯 불에 절여지는 고통을 참지 못해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눅16:24)
그 스님들은 도가 터서 지옥에 전도하러 가지만 나는 이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제가 그런 고도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 이미 가버린 사람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다만 내 영혼이 그 지옥 갈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저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 외의 다른 정보들은 저에게 다 거짓말입니다.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너희는 무엇으로 그 짠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지니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어라."
50. “Salt is good, but if i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Have salt among yourselves, and be at peace with each other.”
그런데 지옥에서 그 지긋지긋한 소금이 현실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이 된장국에 들어가지 않은 경우 먹기 힘들 것입니다.
그 국을 단 하루라도 계속 먹는 경우 토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생선을 썩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 특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이 지구는 시궁창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소금의 특성이 믿는 사람들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특성이란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소금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주님의 역할로 우리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 그 소금의 역할로써 원수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 소금의 덕으로 우리가 적과도 화목을 도모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막힌 담을 허실 것입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엡2:14-16)
주여 이 땅에 형제가 하나 되는 통일을 허락하소서.
전쟁 전쟁하는 자로 길 가다가 팍 꼬꾸라지게 하소서.
4. 그들의 행실과 그 저지른 악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갚아 주십시오. 그들이 한 그대로 그들에게 갚아 주십시오. 그들이 받을 벌을 그들에게 되돌려주십시오.
5. 주께서 하신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수 지으신 것들을 하찮게 여기는 그들. 그들을 벌하시고 그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멸하십시오.(시28:4,5)
오직 이 땅에 그리스도를 통한 평화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