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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삼봉 주차장에 도착 ↓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山明楓葉水明沙
석양의 도담삼봉에는 저녁노을 드리웠네
三島斜陽帶晩霞
신선의 뗏목은 푸른 절벽에 기대어 자고
爲泊仙蹉橫翠壁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너울진다
待看星月湧金波
저녁노을로 아름답게 물든 도담삼봉을 보고 퇴계 이황은 〈도담삼봉(嶋潭三峰)〉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도담에 떠 있는 세 봉우리, 아름다운 도담삼봉의 수려한 자태에 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도담삼봉의 절경에 심취해 이곳의 빼어난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이는 수없이 많다.
도담삼봉은 단양팔경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다. 단양시내에서 제천 방향으로 3km 정도 남한강을 따라가면 맑은 물이 굽이치는 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바로 도담삼봉이다. 푸른 강물 위에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중봉)가 가장 높고 각각 남과 북에 낮은 봉우리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중봉은 주봉으로서 장군같이 늠름한 형상을 하고 있고, 남봉은 교태 어린 여인에 비유되어 첩봉 또는 딸 봉이라 하며, 북봉은 이를 외면하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처봉 혹은 아들 봉이라고 한다.
중봉에는 현재 삼도정(三嶋亭)이라는 육각정자가 서 있다. 삼도정은 세 봉우리와 어울려 한층 더 경관미를 돋보이게 한다. 1766년(영조 42)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조정세(趙靖世)가 처음으로 이곳에 정자를 짓고 능 영정(凌瀛亭)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1900년대에 김도성(金道成)에 의해 사각정자가 목조건물로 지어진 후 빼어난 모습을 간직해왔는데 안타깝게도 1972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이후 1976년 콘크리트로 다시 지은 정자가 삼도정이다.
퇴계 이황은 단양을 무척 사랑했다. 단양의 빼어난 경치 때문에 스스로 청해서 단양군수로 부임하기도 했다. 단양군 내에는 명승지가 많았는데 이황은 그중에서도 도담삼봉을 가장 으뜸이라 했으며 아름다운 경승지를 보고 많은 시를 남겼다. 도담삼봉은 황준량, 홍이상, 김정희, 김홍도, 이방운 등의 시인묵객들이 시와 그림을 많이 남긴 곳이다. 그림에 나타나는 도담삼봉은 실경과 거의 비슷하게 묘사되어 있다.
도담삼봉은 조선시대에 이미 잘 알려진 명소였기 때문에 옛 문헌에도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신 증 동국여지승람》 단양군 산천조에는 “도담은 군 북쪽 24리에 있다. 세 바위가 뾰족하게 못 한가운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택리지》 복거 총론 산수 편에는 한강 상류에 위치한 영춘, 단양, 청풍, 제천 등 4군의 산수를 말하면서 빼어난 산과 시내, 기암과 골짜기의 경치로 이담삼석(二潭三石)을 설명하고 있다. 이담삼석이란 도담과 구담, 그리고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을 의미한다.
도담삼봉은 고지도에도 자주 등장한다. 《해동지도》에는 상진 나루, 즉 남한강 가운데 도담이 표시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도담리의 맞은편에 뚜렷하게 세 개의 봉우리가 나타나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에는 상진 나루가 가운데, 은주 암과 도담이 그 양측에 그려져 있다.
조선왕조의 이념적 기반을 구축한 개국공신 정도전은 도담삼봉을 즐겨 찾았다. 태조 이성계의 장자방 역할을 했던 정도전은 도담의 경치를 좋아하여 젊은 시절 이곳에서 오랫동안 청유했고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한 것도 도담삼봉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정도전은 삼봉에 얽힌 전설의 인물로도 전해진다. 전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와 지금의 도담삼봉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양에서는 정선군에 매년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어린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을 정선에서 가져온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어 아무 쓸데없는 봉우리에 세금을 낼 이유가 없으니 필요하면 도로 가져가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후에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과거 남한강의 수운이 번창하던 시기에 도담삼봉의 나루에는 소금배와 뗏목들이 몰려들어 물산이 넘쳐났고, 경강상인과 봇짐장수들이 흥청거렸다. 지금도 당시에 불리던 〈삼봉 용왕 제소리〉와 〈띠뱃노래〉, 〈짐배 노래〉 등 여러 민요뿐만 아니라 삼봉 주막의 주모가 부르던 한탄 섞인 노랫가락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짐배 노래〉는 도담삼봉으로부터 시작된다.
영월 영춘에 내리는 물은 도담삼봉 안고 돌고
도담삼봉 흐르는 물은 만학천봉 안고 도네
영월로부터 흐르는 남한강 물속에 솟아오른 도담삼봉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원추 모양의 기암이다. 도담삼봉 주차장에서 올려다보면 산 위에 이향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 오르면 도담삼봉과 주변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석문으로 오르는 등산로에서 바라보는 모습 또한 매우 아름답다. 현재 도담삼봉의 수위는 충주댐의 조성으로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다. 만수위는 댐 조성 이전보다 2m 정도 상승해 약 3분의 1이 물에 잠기게 된 상황이다.
도담삼봉은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해서 명명한 것으로 알려진 단양팔경 중의 하나다. 도담삼봉을 비롯해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석문, 구담봉, 옥순봉 등 여덟 곳의 경승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지형의 훼손이 많은 곳을 제외한 도담삼봉, 사인암, 석문, 구담봉, 옥순봉 등 다섯 곳이 현재 국가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단양팔경 이외에도 관동팔경, 관서팔경, 양산팔경 등 팔경으로 명명된 아름다운 경승지가 아주 많다. 팔경은 구곡과 함께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지는데 전국의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팔경으로 대표되는 명소를 지니지 않은 곳이 없다. 도담삼봉은 아름다운 산수를 지극히 사랑한 우리 선조들의 인문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승화된 팔경 문화를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 절승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 하늘나라에서 물을 길어 내려왔다가 비녀를 잃어버린 마고할미가 단양의 석문 안에 살고 있었다. 마고할미는 높은 산인 이곳에서 비녀를 찾기 위해 손으로 땅을 팠는데 이것이 아흔아홉 마지기의 논이 되었다. 마고할미는 똑바로 논두렁을 만들어 마치 바둑판처럼 정연하고는 선인들을 위한 농사를 지어 하늘나라의 양식으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봄철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이 논에 물을 대어 못자리를 하고 모를 심을 때면 마고할미의 논에도 물이 차고, 벼가 익어 논에서 물을 뺄 때면 마고할미의 논에도 저절로 물이 빠졌다. 긴 담뱃대를 물고 술을 마시고 있어도 농사일이 저절로 되었기 때문에 마고할미는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오랫동안 살다가 죽은 뒤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석문에는 긴 담뱃대를 물고 술병을 들고 있는 형상의 마고할미 바위가 있다.
단양 석문에 얽힌 마고할미 전설이다. 마치 새의 발톱처럼 긴 손톱을 가진 무속신앙에 많이 등장하는 신선 할머니다. 그 이름은 지방에 따라 노고 할미, 서고 할미, 선문대 할머니 등으로 불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마고할미에 얽힌 설화가 많다. 육지를 비롯해 제주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창조한 여신 마고의 이야기는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산과 강, 바다, 섬들이 마고가 움직이는 대로 만들어졌다는 전설이다. 박제상은 마고를 ‘한민족의 세상을 창조한 신’으로 설명하고 있다. 마고는 단군과 달리 창세신화의 주인공으로 받들어지는 우리의 신이다.
석문은 커다란 문과 같이 생긴 바위다. 도담삼봉에서 남한강 상류 방향으로 200m 정도 올라가면 강변에 우뚝 서 있는 석문을 볼 수 있다. 강변 언덕 아래로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 있는 돌문은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석문은 마치 무지개와 같은 모양의 석주로 높이가 수십여 척에 달하는 구름다리다. 석문의 좌측 하단에는 작은 굴이 있다. 이 굴속 바닥에 깔린 암석은 수십 개의 구획을 이루고 물이 담겨 있어서 마치 수전(水田, 논)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두고 선인의 옥전(玉田)이라 칭한 것이다.
석문은 《신 증 동국여지승람》에 마치 신선이 살고 있는 동천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고할미의 전설이 서린 곳이니 신선의 땅을 의미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석문의 형태가 신비감을 더욱 높여주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지개 형상을 하고 있는 단양 석문은 석회암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자연유산이다. 석회동굴이 붕괴되고 남은 동굴 천장의 일부가 구름다리처럼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양 지역의 지질은 석회암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석회암은 다른 광물에 비해 물에 잘 녹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신비로운 비경을 만들어낸다. 단양 지역의 아름다운 경승지도 대부분이 석회암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석회암 지대의 가장 큰 특징은 동굴이 많다는 것이다. 땅속을 흐르는 지하수가 오랫동안 석회암 성분을 녹여 물길을 따라 흐름으로써 동굴을 형성한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전국에 1,000여 개의 동굴이 있다고 추정되는데 단양 지역에는 고수동굴, 온달동굴, 노동동굴, 천동동굴, 금굴, 구낭굴 등을 포함해 180여 개가 분포하고 있다. 단양에 석회암 지질로 구성된 지대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석회암 동굴은 지표에 가까운 곳에서 동굴 형성 과정이 계속 진행되면 표층이 무너져 마치 웅덩이와 같은 지형을 만들기도 한다. 마치 동굴의 천장이 무너진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석문이 바로 이러한 형태다. 천장이 무너질 때 동굴의 앞부분은 그대로 남고 뒷부분만 무너지면서 마치 돌로 만든 문과 같은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석문 자체의 모양도 특이하고 빼어나지만 석문을 통해 바라보는 남한강과 건너편 농가의 전경 또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이 아름답다. 도담삼봉의 상류에 위치한 석문을 보려면 도담삼봉 분수대에서 북쪽 언덕 위에 있는 이향정을 넘어가거나, 도담삼봉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야 한다. 이향정까지는 걸어서 대략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석문은 매우 기이한 형상을 하고 있어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양 조에도 “도담에서 흐름을 거슬러 수백 보쯤 가면 푸른 바위(蒼壁)가 만 길이나 된다. 황양목(黃楊木)과 측백(側柏)이 돌 틈에서 거꾸로 났고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巖穴如門) 따로 한 동천이 있는 것 같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석문은 단양팔경 중 하나다. ‘8(八)’은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한 숫자다. 우리는 팔괘(八卦), 팔정도(八正道), 팔등신(八等身), 팔도(八道), 팔선녀(八仙女), 팔자(八字), 팔음(八音), 팔 학사(八學士) 등의 단어를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팔은 많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팔경은 여덟 곳의 경승을 뜻하기도 하지만 지역별로 선택된 아름다운 자연경관 전부를 지칭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본래 팔경은 중국 산수화의 제목이었던 ‘소상팔경’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중국 후난 성 동정호 남쪽 양자강 중류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류되는 곳의 아름다운 경승지 여덟 곳을 그린 그림으로 여기에서 팔경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상팔경도》는 모두 여덟 첩으로 〈산시 청람(山市晴嵐)〉, 〈어촌 석조(漁村夕照)〉, 〈원포 귀범(遠浦歸帆)〉, 〈소상 야우(瀟湘夜雨)〉, 〈연사 만종(煙寺晩鍾)〉, 〈동정 추월(洞底秋月)〉, 〈평사낙안(平沙落雁)〉, 〈강천 모설(江天暮雪)〉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송 말기의 문인화가였던 송적(宋迪)이 최초로 그렸다고 하며 지금 전해지는 것 중에서는 남송시대 초기 왕흥의 작품이 가장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시대 초에 《소상팔경도》가 전해지면서 이를 예찬하는 시화가 많이 등장했지만 점차 우리 국토의 자연을 대상으로 팔경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자연 경승지를 팔경으로 명명하는 것은 우리 국토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팔경 문화는 우리 국민의 문화적 자부심의 소산이며, 자연경관에 문화적 의미가 부가될 때 자연 경승의 가치가 얼마나 높아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향정(離鄕亭)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등지고 떠나면서
망향의 아픔을 간직한 채 새로운 보금자리로 흩어져간 주민이 서운하고 아쉬움을 달래기위해 남긴 정자
단양 구경시장
단양 토종마늘순대국밥과 모둠순대로 맛집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점심식사 후
만천하 스카이워크와 잔도 길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