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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51) - 제 9장 선과 조오현 1. 절간 이야기
1. 절간 이야기
나는 무산(霧山) 오현 스님의 책 <절간 이야기>(2003)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이 책을 시집으로 읽었다. 이 책은 시조집도 아니고 수필집도 아니고 사진집도 아니다. 물론 전반은 산문이고, 후반은 시조이다. 그러나 책 어디에도 시조집이니 수필집이니 하는 장르 규정이 없다. 시조니 수필이니 하는 장르 구분이 부질없고 허망한 짓이리라. 이 책에선 수필이 그대로 시이고 시가 그대로 수필이다. 물론 수필은 수풀일 수도 있고 우리는 수필이 아니라 수풀을 읽을 수도 있다. 말이 되는가? 말이 되면 어떻고 말이 안 되면 어떤가?
원래 언어와 사물 사에엔 무슨 내적 필연성은 없고 따라서 언어는 태생적으로 사기이고 허구이고 환상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도 언어 사기이고 시도 언어 사기이고 그저 사회적 약속에 의해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쓸 뿐이다. 무슨 진리가 있고 본질이 있는가?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의 맨 끄트머리 바위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침 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오현 스님, <절간 이야기 2> 부분
<절간 이야기 2>의 일부이다. 다음 날도 초로의 신사는 거기 있고 아직도 갈매기가 돌아오자 않았느냐는 스님의 질문에 그는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한다. 이 신사 이야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의미를 강조하고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선문답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김종삼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오현 스님은 내용 없는 삶을 이야기 하고 이런 이야기가 시이고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가 때문에 시다. 무주(無住)의 시여. 이상은 다른 글에서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것. (이승훈, <언어여 침을 뱉어라-禪과 후기현대시의 방향> <현대시의 종말과 미학>, 집문당, 2007, 228~229쪽 참고)
이 글을 쓰면서 내가 강조한 것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 우리 시의 방향이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적 특성은 원본이 없는 가상적 실체의 세계, 따라서 원본/이미지, 실재/헛것이라는 이항 대립체계를 부정하고 철학적으로는 본질/현상, 존재/사물의 관계에서 본질을 찾고 존재를 찾는 이른바 서구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해체한다. 절대적 초월적 기의를 상실한 기표들의 놀이, 유희, 표류를 이 시대의 예술의 위기, 시의 위기라고 근심하고 걱정하지만 이런 위기가 축복이고, 시를 쓰는 시쟁이들은 이런 위기를 축복으로 전환할 의무가 있고 그것은 마음을 버리는 시쓰기, 언어를 버리는 시쓰기를 지향하고 지향해야 한다. 선(禪)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부분에서다, 서구 형이상학의 종말은 동양 종교, 특히 선불교를 매개로 극복되고 되어야 한다는 게 그때 내가 강조한 내용이고 우리 현대시도 이런 사유를 토대로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형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오현 스님의 시집 <아득한 성자> (2007)를 읽고 이런 사유는 좀 더 깊어진다. 이 시집은 제5부가 산문으로 되어 있고 내가 관심을 두는 부분이 여기다. 나는 시인으로서 그리고 스님으로서의 전위성을 본다. 산문 가운데 일부는, 예컨대 <절간 이야기 2>는 이 책에도 수록되지만 제목은 <신사와 갈매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산문은 두 번 써먹는 게 아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제목이 다르면 다른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절간 이야기 2>와 <신사와 갈매기>는 다른 작품이다. 오현 스님의 전위성, 아방가르드 의식 혹은 무의식은 이런 데서도 발견된다.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의 대부 뒤샹은 전시장에 변기를 그대로 전시하고 다만 제목을 '샘'이라고 붙이고 다른 사람 이름을 작가로 붙였을 뿐이다. 그는 창조한 게 아니고 현실이나 자연을 재현한 것도 아니고 정서를 표현한 것도 아니고 무슨 고상한 정신, 본질을 추구한 것도 아니다. 다만 당대 부르주아 예술의 인습을 조롱하고 웃기고 부정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오현 스님의 시는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다. 그러나 뒤샹의 전위성을 지배하는 것이 유머와 장나이라면 스님의 전위성을 지배하는 것은 선(禪)사상이다. 아니 나는 뒤샹의 아방가르드 의식을 지배하는 것 역시 선이라는 입장이고 서구 아방가르드를 선의 시각에서 해석한 바 있다.(이승훈, <아방가르드는 없다> 태학사, 2008) 예컨대 뒤샹은 캔버스, 그림틀을 포기하고 유리를 사용한 '커다란 유리' 시리즈에 대해 자신의 해석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말이 강조하는 것은 유리의 투명성이고 이 유리는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어떤 관념도 없다는 점에서, 그런 관념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선이 강조하는 무분별, 무아(無我)사상과 통한다. '내 해석은 없다.' '아무 관념도 없이 무조건 제작만 한다.' 는 그의 말은 그리고 그의 행위는 조주 선사가 강조한 무분별과 통한다. (이승훈, <선과 마르셸 뒤샹> 위의 책)
오현 스님의 산문시는 시도 아니고 시조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콩트도 아니다. 그러나 시집에 수록되었기 때문에 시이고 스님은 자신의 산문시를 콩트시라고 부른 바 있다. 콩트시는 콩트와 시의 분별이 부질없다는 것, 나아가 일체의 문학 장르가 부질없다는 것, 아니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 일체의 사물들이 차이가 부질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이런 무분별은 선기(禪機), 곧 오랜 선 수행으로 체득한 무아(無我)의 경지에서 나오는 마음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콩트시는 선을 매개로 선과 함께 선을 지향하며 마침내 선도 없다는 시인으로서의 그리고 스님으로서의 전위성을 보여준다.(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52) - 제 9장 선과 조오현 2. 예술은 축구가 아니다
2, 예술은 축구가 아니다
물론 나는 선을 모른다. 선에 대해서는 공안에 나오는 스님들이 이야기를 기호학적 시각에서 해석한 책을 한 권 낸 적이 있고, 그것은 선문답에 대한, 선에 대한, 언어학적 산책이고 철학적 산책이다.(이승훈, <선과 기호학>, 한양대 출판부,2005) 결국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경우 선은 수행이 아니라 사유이고 언어학이고 언어학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언어의 산물이고 언어의 노예이고 언어의 감옥에서 고통 받기 때문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해탈이고 깨달음 아닐까?
그러니까 내가 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어에 대해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이게 내 선 공부의 한계이다. 오현 스님의 산문시, 콩트시의 토대가 되는 선에 대한 논의 역시 이런 한계를 넘을 수 없고 한계는 한계령이 아니다. 요컨대 이 글 역시 이런 한계 속에서 진행된다. 그 책에서 나는 일상과 시와 선, 일상적 어법/시적 어법/선적 어법(공안)의 차이를 밝힌 바 있고 그러므로 그때 이론(이승훈, <화두와 시적 기능> 위의 책)에 기대어 스님의 산문시, 콩트시의 특성을 해명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님의 산문시가 보여주는 실험성과 일상과 시와 선의 경계를 해체하고 그런 점에서 일상과 시와 선의 차이가 부정된다. 차이를 강조하는 것이 법이고 규칙이라면 스님의 시는 이런 규칙을 깨는, 위반하는, 배반하는 반칙의 세계이고 그러나 위대한 반칙의 세계이고 이런 반칙의 세계가 아방가르드의 세계이다. 우리 시단은 이런 의미로서의 반칙을 모르고 그런 점에서 미적 보수주의자들이 판을 치고 스님은 반칙을 알고 나는 스님의 반칙에 매혹되고 스님의 반칙을 옹호하고 내 시쓰기 역시 이런 반칙을 지향한다. 스페인 태생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말한다. '예술은 축구와 다르다. 왜냐하면 대부분 반칙의 위치에서 득점하기 때문이다.' 선의 세계 역시 크게 보면 일상세계를 지배하는 언어 질서, 법, 규칙을 깨는 세계이고 따라서 반칙의 세계이고 이 반칙이 깨달음과 통한다. 몇 가지 측면에서 스님의 산문시가 보여주는 실험성과 전위성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스님의 산문시에서는 일상적 어법, 시적 어법, 선적 어법의 경계가 해체된다.(앞으로 나는 일상적 어법을 일상어, 시적 어법을 시어, 선적 어법을 선어(禪語)라고 요약해 부를 것이다. 이 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전자보다 후자가 부르기 편하고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님의 산문시에서는 일상어와 시어와 선어의 경계가 해체되고 이때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 선불교 식으로 말하면 불이(不二)사상, 곧 세 영역이 같은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 것도 아닌(不異) 이른바 중도의 세계를 함축한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사상은 선과 통한다는 게 내 입장이다.
언어가 시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언어가 기의(내용)가 아니라 기표(말소리), 발언 내용(무엇)이 아니라 발언 행위(어떻게)를 지향할 때이고 이런 기능이 이른바 미적 기능과 통한다. 그러나 이런 언어의 기능, 이른바 시적 기능은 일상어, 시어, 선어(공안)에 모두 나타난다. 다만 시에서는 지배적이고 일상어에서는 2차적이고 선어에서는 이런 기능을 수용하면서 미적 기능은 부정된다. 그렇다면 스님의 산문시는 어떤가? 앞에서 인용한 <신사와 갈매기> 앞 부분을다시 인용하자. 그 시로부터 너무 멀리 왔고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낙산사의 의상대 깍아지른 절벽 끄트머리에 곱게 늙은 초로의 신사가 앉아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본다. 그때 스님이 묻는다.
"노인장은 어디서 왔스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오현 스님, <신사와 갈매기> 부분
먼저 스님의 질문은 일상어의 수준에서 수행된다. 그러나 신사의 대답은 일상어의 수준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일상어의 수준에서는 이런 대답이 아니라 예컨대 '서울에서 왔습니다.'같은 어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사의 대답은 시어의 수준이고 이런 사정은 다음 날의 대화 '아직도 갈매기 두 마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라는 스님의 질문에 신사가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라고 대답할 때 더욱 그렇다. 어제는 바다가 울고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다는 대답은 그 자체가 시적인 표현이고 이런 말은 바다에 대한 지시적 기능이 아니라 정서적 기능을 강조하고 어제-울다/오늘-울지 않다의 대립이 미적 기능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전날의 대답에 나오는 갈매기 역시 상징이 된다.
그러나 스님으 질문은 일상어의 수준에서 수행된다. 그러므로 이런 대화는 첫째로 질문(일상어)과 대답(시어)이 아이러니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일상어와 시어의 경계가 해체된다. 이런 아이러니와 해체는 선어의 경우에도 드러난다. 다음은 유명한 조주 선사의 <뜰 앞의 잣나무 공안>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스님은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학인을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다."
-조주 선사, <뜰 앞의 잣나무 공안> 부분
이 공안 역시 질문과 대답은 아이러니의 관계에 있다. '뜰 앞의 잣나무' 는 앞의 시에 나오는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처럼 비유어, 상징어로 읽을 수도 있고, 따라서 시어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같은 시어라도 공안은 깨달음을 지향하고 앞의 시는 미적 기능을 강조한다. 요컨대 선어는 시어를 수용하면서 미적 기능을 부정한다. 그런 점에서 둘째로 앞의 시는 시어와 선어의 경계가 해체된다. 왜냐하면 질문과 대답이 아이러니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선어의 특성을 보여주기만 대답은 미적 기능을 강조하고 따라서 시어의 특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53) - 제 9장 선과 조오현 3. 설봉 스님의 선화(禪話)
3. 설봉 스님의 선화(禪話)
둘째로 스님의 산문시에서 읽을 수 있는 일상어/시어/선어의 해체 양상은 이른바 언어의 사역적 기능(명령, 청원)의 수준에서도 드러난다. 일상어의 경우 명령은 수신자의 직접적 반응이나 행동을 유발한다. 말하자면 발신자가 '밥 먹어!' 라고 명령하면 수신자는 밥을 먹거나 먹지 않는다. 그러나 시어의 경우 이런 명령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고, 따라서 수신자(독자)를 지향하지 않고 미적 기능을 나타내고 선어의 경우에는 명령이 수신자를 지향하지만 직접적 행동과 반응을 유발하지 않는다. 예컨대 조주 스님의 유명한 '차를 마시게' 공안이 그렇다. 이런 명령은 마시다/안 마시다의 양변을 여의는, 육조 혜능이 말한 즉리양변(卽離兩邊)을 강조한다. 무슨 물음, 따지기, 분별을 벗어나라는 것.
그렇다면 스님의 산문시에서는 사정이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면 스님의 산문시에서는 이런 경계가 해체된다. 예컨대 <자갈치 아즈매와 갈매기>. 이 시는 평생 옷 한 벌과 지팡이 하나로 산 설봉 스님을 소재로 한다. 그 무렵 곡기를 끊고 곡차를 즐기시던 스님은 자갈치 어시장에 들리고 그때 늙은 '아즈매 보살' 이 비쩍 마른 스님의 손목을 잡고 돈 오천 원을 곡차 값으로 쥐어주고 일만 원권 한장을 흰 봉투에 담아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둘째 미누리 아이가 여태 태기가 없다캐도 - 잠이 안 온다 캐도요, 둘째놈 제대 만기제대하고 취직하자 시님 은공 갚을끼라캐도요. 그마 시님이 곡차 한 잔 자시고요, 칠성님께 달덩이 머스마 하나 점지하라카소. 약소하다캐도 행편 안 그렁교?"
하고 빠꼼빠꼼 스님을 쳐다보자 스님은 흰 봉투 속을 들여다보고는 선화(禪話) 하나를 만들었지요.
"아즈매 보살! 요새 송아지 새끼 한 마리 값이 얼마인 줄 아고 캅니까? 모르고 캅니까? 도야지 새끼도 물 좋은 놈은 몇만 원 한다카는데 이것 가지고 머스마 값이 되겠니꺼?"
그러자 그 맞은 편 좌판 앞에서 물오징어를 팔고 있던 젊은 보살이 쿡쿡 웃음을 참다못해 밑이 추지도록 웃고 말았는데, 때 마침 먹이를 찾아왔던 갈매기 한 마리가 그 웃음 소리를 듣고 멀리 바다로 날아갔는데, 그 소문을 얼마나 퍼뜨렸는지-
그 후 몇 해가 지나 설봉 스님 장례식 때는 부산 앞바다 그 수백 마리 갈매기들이 모여들어서 아즈매 보살들의 울음소리를 흑흑흑-흉내를 내다기 눈물 뜸뜸 떨구었지요.
오현 스님 <자갈치 아즈매와 갈매기>
이 시의 기본 구조는 늙은 아즈매 보살의 청원과 설봉 스님의 반응과 갈매기 이야기로 되어 있다. 늙은 아즈매는 설봉 스님에게 만원을 주면서 둘째 며느리가 아들을 낳게 빌어달라고 청원한다. 이런 청원은 일상의 수준이다. 그러나 스님은 선화로 대답하고 이 선화가 문제다. 선화는 내가 앞에서 말한 선어에 속한다. 선어는 조주 스님이 끽다거 공안이 그렇듯이 명령이나 청원에 대한 직접적 반응을 보여주지만 일상어와 다르다. 이 시의 경우 일상어의 수준이라면, '좋소 들어주겠소.' 혹은 '그런 청원은 못 들어주겠소.' 같은 형식이 될 것이고 선어의 수준이라면 '차나 마시고 가게.' 같은 형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봉 스님의 어법은 일상어에 속하며 선화라는 점에서 선어에 속하고 그러므로 일상어도 아니고 선어도 아니고 선어가 아닌 것도 아니다. 설봉 스님의 반응은 마치 뒤샹이 변기를 전시장에 놓고 '샘'이라고 제목을 붙여 당대 환쟁이들을 웃긴 것처럼 재미있고 그만큼 파격적이고 아이처럼 순수하고 천지하고 거리낌 없는 세계이고, 이게 선이다. 장욱진의 그림 역시 그렇다. 결국 선의 극한에는 선도 없고 일상 자체가 선이다.
그런 점에서 오현 스님의 전위성은 언어의 경우 일상어/선어의 경계를 해체하고 마침내 일상이 선이고 선이 아닌, 그러니까 일상/선의 구별이 없는 경지를 노린다. 한편 이 시에서 갈매기에 대한 표현은 너무나 시적이다. 말하자면 미적 기능이 강조된다. 갈매기가 소문을 퍼뜨리고 설봉 스님 장례식 때 수백 마리 갈매기들이 우는 장면은 스님의 입적에 대한 슬픔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나아가 인간/ 갈매기의 경계도 해체한다.
셋째로 오현 스님의 산문시가 보여주는 실험성과 전위성은 이렇게 일상어/시어/선어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뿐만 아니라 시의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현대시는 그리고 현대산문은 요소들의 유기적 통일을 강조하고 이런 통일성이 구조를 형성하고 미적 기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스님의 산문시는 하나로 통일된 유기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두 이야기를 병치하고 혹은 섞고 인용과 진술이 병치된다. 물론 이런 기법이 강조하는 것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콜라주가 그랬듯이 동성일 미학에 대한 부정, 근대 미학에 대한 부정과 통한다.
예컨대 <백장과 들오리>는 전반부는 선어, 후반부는 이 선어를 대상으로 하는 경봉 스님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다. 언어학의 수준에서는 전반부가 텍스트, 후반부는 메타텍스트에 해당한다. 한편 전반부는 인용이고 후반부는 스님의 진술이다. 전반부는 스승 마조(馬祖)와 제자 백장(百丈)의 이야기. 스승과 제자가 해 저문 강기슭을 걸을 때 한 무리 들오리 떼가 울며 줄지어 날아간다. 문득 스승이 제자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소리냐?"
"들오리 떼 울음소립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스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 들오리 떼 울음소리가 어디로 갔느냐?"
"멀리 서쪽으로 날아갔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스승은 제자의 코를 잡고 힘껏 비틀었는데 얼떨결에 당한 제자가 "아야! 아야!" 하고 비명을 내지르자 스승은 벽력같은 호통을 내리쳤습니다.
"날아갔다더니 여기 있지 않느냐?"
-오현스님, <백장과 들오리 <부분>
스승의 질문에 '들오리 떼 울음소립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은 일상어에 속하고 이때 대답은 사물에 대한 지시적 기능이 강조된다. 말하자면 이런 말은 사물을 지시하고 사물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고 이 정보에 의해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하다. 다음 대화 역시 비슷하다. 그러나 스승은 "멀리 서쪽으로 날아갔다." 제자의 대답을 부정한다. 제자의 코를 잡고 비트는 행위가 그렇다. 이때 제자는 "아야 아야!" 비명을 지르고 스승은 "들오리 떼 울음소리가 여기 있다." 말한다. 그런 점에서 이말은 일상어를 부정하는 선어가 되고 선어는 지시적 기능의 혼란, 부정, 해체의 양상으로 드러난다. 곧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요컨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6경(境)을 부정한다. 6조 혜능이 강조하는 즉리양번, 중도,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한다. 이 공안의 경우 있다/없다. 오리울음/인간 비명의 양변을 여의라는 것. 기본 구조는 질문(표면-일상어/ 심층-선어)/대답(일상어)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후반부는 오현 스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통도사 경봉노사(鏡鋒老師)를 찾아가 묻는 장면이다.
"들오리 떼는 분명히 날아갔는데 스승은 왜 여기 있지 않느냐고 호통을 쳤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경봉노사는 이렇게 혀를 차시는 것이었습니다.
"니가 공부꾼 같으마 들오리 떼 울음이 강물에 남아 있다카겠으나 니는 공부꾼이 아니니 저 아래 돌다리 밑으로 떠내려가는 부처를 보고 오너라. 니가 보고 듣는 세계도 무진장하지만 니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세계도 무진장카다는 것을 알고 싶으미-쯧 쯧 쯧"
-오현 스님 <백장과 들오리> 부분
나는 이 시의 전반부를 텍스트, 후반부를 메타텍스트라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것은 오현 스님의 질문이 전반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님의 질문과 노사의 대답 역시 크게 보면 공안의 구조를 띠고 있다. 스님의 질문은 수행과정에 있는 제자의 의심을 암시하고 노사의 대답은, 특히 '돌다리 밑으로 떠내려가는 부처를 보고 오라.' 는 말씀은 전형적인 선어이다. 노사가 강조한 것 역시 보는 것, 듣는 것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대한 부정이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들리지 않는 것의 양변을 버리라는 것. 언어의 수준은 이때 질문은 일상어, 대답은 선어에 속한다.
이 산문시가 노리는 것은 수행의 어려움, 선 공부의 어려움이고 이런 주제는 오현 스님의 산문시에 자주 나타난다. 따라서 스님의 산문시는 시이며 동시에 공안이고 화두이고 이런 점은 이 시대에 발표되는 이른바 선시(禪詩)와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스님의 산문시는 언어의 수준에선 일상어/시어/선어의 경계가 해체되고 이런 것이 스님이 보여주는 전위성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