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출 겹 들다
미처 알아보지 못한 봄바람에 고철 덩어리 같은 기억이라도 찾기 위함인가 여수 동백 섬 안부가 캄캄한 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동백 꽃 철썩철썩 울며 둔치 아래로 내려앉는다 터져라 흩어져라 온몸의 힘을 악물고 밤바다를 표류하다가 어느 이름 모르는 별에 편집 당한 지문으로 닿는다 아서라 말아라, 아침 햇살 깨우는 도마질 소리 가득하고 왔던 것은 가고야 마는 파도 소리 깊다
2) 하나, 하나의 빗물이 흔들릴 때
허공에 걸어 둔 빗줄기 어찌나 꼬리를 살랑살랑 치던지 생각만 하다가 외면할 수가 없었어 뿌리칠 수가 없었어
이쪽저쪽으로 엎눌리어 떠밀리듯 번번이 넘어졌던 내 발자국이었어
짙은 농담을 부르는 몸속의 대화는 한평생 아픔인 성적표였고 늘 함께했던 고집은 흔적 하나 끼워 놓고 졸졸 흐르는 눈물이었으니
깰 수도 찢을 수도 넘을 수도 없는 세포의 유전자
부재를 존재로 드러내는 눈물인가
목덜미부터 발뒤축까지 빗물 되어 흐르는 도랑물 소리를 듣는다
3)풍악골 강천사
강천사 초록 잎이 무심히, 단순히 햇살로 쌈질하는 게 보인다 몇 번의 보쌈질로 배꼴을 채우기 위한 바람을 밀며 당기는 오후, 몸을 바짝 붙이고 입술을 내밀어도 배부른 사람 없다는
말랑말랑한 허리가 만져진다 고개를 끄덕대는 물길처럼 어느 햇살에도 기대지 않는 물결처럼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라는 강천사 밥상 받아 본 적 있다
4) 빈집
참 오랫동안 여닫았는지 삐거덕삐거덕 찍찍 소리가 납니다. 습관처럼 쌓아 올린 투덜거림 때문일까요 고쳐 쓰고자 내팽개쳐둔 연장통 같습니다
많은 것을 잃어가는 동안 내려놓고 싶은 한 단어 한 단어 떠오르는 것조차 두려웠는지도. 익숙함에 길들어졌는지도 모르겠고요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삐걱 소리, 휙 하니 지나갑니다
햇살에 젓갈처럼 곰삭아지고 싶다는 것은 함께 하고픈 사람에게 어깨 한번 빌려준 일처럼 단순한 것인지도 모르는 일인데 선산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처럼 떠나지 못한 쓰라림 엿가락처럼 늘어나는데
텃밭 가엔 아랑곳없이 핀 찔레꽃 참 숨 막히게 향기롭습니다
5) 발싸심하는 봄 터
연둣빛 자음과 모음을 쏟아붓는다 흙 살을 쥐어짜고 있는 바람도 참으로 많은 말들을 참고 살았나보다
전신을 번뜩이는 낙엽의 헛발질부터 눈물 찔끔찔끔 흩뿌려 놓던 장난기 서린 눈발까지
견디어내야 했던 이야기로 시작해서 먹구름이 써 내려가는 눈물까지
뭉게뭉게 새순으로 받아 적고 있는 봄날의 들판
하기야 돌고 돌아가는 쳇바퀴에 휘말리지 않는 건 만물의 터전, 흙뿐일 테니
어쩌랴, 발싸심하는 요소요소 마음 귀퉁이 털어내고 있는 몸짓에 우리는 또 속아 줄 수 밖에
시는 무의식의 그림까지도 그려야 한다
이번 호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심사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시인이란 모름지기 현실을 상징하고 은유하는 소재와 형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시인의 정신이나 시 세계를 관념적으로 답습하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점이다. 유추와 은유는 복잡한 현상들 사이에서 그 시인만의 사상이나 정신세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박명옥의 작품에서는 이런 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시인이 체험을 통해 사유한 소재를 자신의 목소리로 새롭고 당당하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인이 그동안 음지에서 많은 시간 뼈를 깎는 연단을 쌓아왔을까, 그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작품 곳곳에서 자주 나타나 오히려 주제를 흐리게 하는 직유 사용은 앞으로 지양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시란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이지만 더 큰 무의식의 그림까지도 그려내야 한다는 점을 인지했으면 한다. 그런데도 시인을 선한 이유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적 갈등을 안고 계속 진화해 간다면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나은 작품을 생산해낼 것이라는 믿음 떄문이다. 축하드리며 시인의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정수남(평글) 문창길 임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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