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할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서 쉬다가 고향으로 돌아갔어요.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마을 아이 하나가 고장 난 시계를 가져와 고쳐달라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셨으니까, 시계도 잘 고치실 것 같아서유.”
“그래, 알았다.”
요리조리 시계를 살펴보던 할아버지는 시계 수리점을 하시던 아버지에게 배웠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그래, 그렇게 고치면 될 거야!’ 할아버지는 아이의 시계를 고쳐주었어요.
그러자 아이는 다른 아이의 고장 난 시계도 가져왔어요. 할아버지는 그 시계도 거뜬히 고쳐줬어요.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시계를 잘 고친다는 소문이 산 너머 마을까지 퍼졌어요.
‘시계 할아버지’라는 별명도 붙었지요.
점점 시계 고치는 일이 재미있어진 할아버지는 이제 할아버지가 먼저 고장 난 시계를 찾아 나섰어요.
“오늘은 산 너머 마을에 가봐야겠는 걸.”
할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서 산 너머 마을을 한 바퀴 돌았어요. 어디선가 고운 노랫 소리가 들려왔어요.
길고 커다란 마루 위의 시계는 우리 할아버지 시계
이 시계는 내가 세상 태어나던 날 선물로 받은 시계란다.
언제나 정답게 흔들어주던 시계 할아버지의 고물 시계
이제는 더 가지 않네 가지를 않네
백 년 동안 쉬 잖고 똑딱 똑딱
할아버지와 함께 똑딱 똑딱
이제는 더 가지 않네 가지를 않네.
할아버지는 노랫소리를 따라갔어요. 그곳엔 오래 된 기와집이 하나 있었어요.
기와집 마당엔 할머니가 열무를 다듬고 있었는데, 그 곁에서 한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나타나자 소녀가 노래를 멈추고, 큰 소리로 말했어요.
“할머니, 시계 할아버지가 오셨어유.”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어요.
“어서 오시구려. 시계 할아버지라면 그 핵교 선상님이셨다는 분이시지유?”
“예. 안녕하세요. 할머니. 손녀딸인가요?”
“예.”
"시계 할아버지. 안녕하세유.“
손녀딸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어요.
“그래, 이름이 뭐지?”
“정다운유.”
“호, 노래를 잘 부르던데 학교는?”
“고사리 초등학교 5학년이에유.”
“그래, 참 똑똑하구나.”
할아버지는 마루 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어요. 크고 멋진 괘종시계였어요.
“아, 시계가 열 시에 멈췄군요. 고장인가요?”
“태엽을 감아주던 영감이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고장 난 거나 다름 없지유.”
“아, 그렇군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시계를 볼 때마다 영감 생각이 난다면서 시계를 그냥 가져가라고 했어요.
“우리 영감이 생전에 했던 것처럼 날마다 태엽도 감아주고 아껴주시구려.”
“네. 하지만 시계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다마다유.“
할머니는 아들이 가져다 준 전자시계가 세 개나 된다고 했어요.
“그럼 고맙게 가져가겠습니다.”
할아버지는 마루 위 벽에서 길고 커다란 괘종시계를 내렸어요.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벽에 시계를 걸어놓고 태엽을 감아주었어요.
괘종시계는 품위가 있는 데다 시계 소리도 웅장하면서 은은한 여운을 남겼어요.
“정말 멋진 시계야.”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할아버지는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짐승을 잡으려고 파 놓은
커다란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어요.
“살려주세요!”
할아버지가 소리쳤지만 너무나 외딴 곳이라 아무도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어요.
많은 시간이 흘렀어요. 구덩이 안에서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다 지친 할아버지는
꾸벅꾸벅 졸다가 꿈나라로 갔어요.
꿈속 나라의 할아버지는 생시처럼 한 아이가 가져온 고장 난 시계를 고쳐주었어요.
“자, 다 됐다. 이름이 뭐지?”
“이보람유.”
“집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 마을에 있어유.”
“고사리 마을이 어디냐?”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보람이가 말했어요.
“이곳엔 없고, 현실 세계에만 있어유.”
“현실 세계라, 그러면 내가 꿈속에 있는 건가?”
“예.”
“그렇다면 큰일이구나. 어서 현실 세계로 가야지 않겠니?”
“저를 따라오세유.”
할아버지는 보람이를 따라서 현실 세계로 가 보았어요.
“저기가 할아버지 댁이에유.”
할아버지는 보람이가 가리키는 집 마당을 바라보았어요.
할아버지네 집 마당엔 자전거 한 대가 서 있고, 할머니가 근심스런 얼굴로 자전거를 바라보며 말했어요.
"자전거야, 우리 영감이 어디 갔는지 말 좀 해 보거라."
할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이 소나무 숲, 구덩이에 빠졌다는 걸 기억해 냈어요.
“고맙다. 얘야.”
보람이와 헤어진 할아버지는 나무들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달려갔어요. 그곳엔
구덩이에 빠진 채로 잠든 자신의 몸이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가려는 그 때,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나타나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았어요.
“이봐요, 할아범, 이제는 저승에 갈 때가 되었어요.”
“무 무슨 소리? 그 그럴 리가 없어요.”
할아버지는 저승사자를 뿌리치고 달아났지만 저승사자는 할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어요.
"이봐요. 할아범, 많이 살았는데 무얼 그러세요?"
"안돼요. 나는 고장 난 시계를 고쳐야 한단 말이오. 내 생애 유일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는데
저승이라니 말도 안 되오."
할아버지는 저승사자의 손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빼내곤 냅다 달리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집으로 간 할아버지는 재빨리 벽에 걸린 괘종시계 속으로 들어가 숨었어요.
때마침 괘종시계가 뎅 뎅 뎅 뎅 새벽 4시를 알리자 저승사자가 험악한 얼굴로 말했어요.
“아니 벌써 날이 밝았잖아! 할아범, 내일 밤 다시 올 테니 기다리시오!”
저승사자가 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졌어요.
“고맙다. 괘종시계야.”
“고맙긴유. 할아버지가 태엽을 감아줘서 저의 생명이 연장되었는 걸유. 그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시계야, 나는 지금 저승사자에게 쫓기는 몸인데, 어떻게 하면 내가 저승사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느냐?"
"그러면 할아버지, 사람에겐 일생에 세 번의 행운이 주어지는데, 할아버지는 몇 개의 행운을 사용하셨남유?“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는 걸.”
“그렇다면 과거로 돌아가 보세유."
순간, 괘종시계의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의 몸은 점점 젊어졌다가
열두살 어린이로 돌아갔어요. 열두 살 만복이는 아빠와 엄마가 농사짓던 땅을 판 돈으로
도시 변두리로 이사 왔어요.
방금 외출 준비를 마친 아빠가 말했어요.
“만복아, 오늘은 아빠가 '시계 수리점'을 할 만한 가게를 알아보고 올 테니까 엄마랑 집에 있거라.”
“싫어요. 아빠, 저도 같이 갈래요.”
만복이가 떼를 썼지만 아빠는 어린 동생도 있으니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언제까지 올 건디유?”
“벽시계가 열두 번을 칠 때까진 꼭 돌아오마.”
하지만 아빠는 벽시계가 열두 번을 치고, 다시 한 번, 두 번, 오후 다섯 시가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중에야 삼촌이 알아보니 아빠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이었어요.
“아빠, 아빠!”
엄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간 만복이는 아빠의 침상 아래서 구슬프게 울었어요.
“하늘나라에 계신 하느님, 제발 우리 아빠를 살려주세유.”
만복이의 간절한 기도 때문이었는지, 아빠는 빠른 회복을 보였고, 보름 후엔 퇴원할 수가 있었어요.
병원에서 퇴원한 아빠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면서
엄마와 만복이를 꼭 껴안았어요.
"아!"
그제야 할아버지는 자신의 행운 하나가 여기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시계는 더 이상 거꾸로 가지 않았고 앞으로 돌아갔어요.
빠르게 돌아간 시계 바늘에 따라 만복이는 점점 성장하여 청년이 되어서,
아름다운 아가씨와 함께 꽃길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아가씨의 얼굴은 봄날처럼 화사했고, 마음은 꽃향기처럼 향기로웠어요.
“아, 이 아가씨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내 일생에 최고의 행운일 거야!"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는지 만복이는 그 후로 이 아가씨와 결혼했어요.
“아!”
할아버지는 여기서 두 번째 행운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시계는 다시 빠르게 돌아가서 현재의 할아버지로 돌아왔어요.
“살았다!”
할아버지는 아직 한 개의 행운이 남아 있다면서 괘종시계를 얼싸안았어요.
괘종시계도 감동어린 목소리로 말했어요.
"정말 다행이네유!"
밤이 되자 저승사자가 할아버지 앞에 나타났어요. 할아버지는
당당한 모습으로 저승사자에게 말했어요.
"이봐요, 저승사자! 나에겐 아직 세 번째 행운이 남아 있다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저승사자가 안개처럼 스르르 사라졌어요.
"고맙다. 괘종시계야."
“고맙긴유.”
할아버지는 현실세계로 날아가 구덩이에 빠진 할아버지의 몸속으로 들어갔어요.
신기하게도 할아버지는 구덩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있었어요.
‘이렇게 쉬운 걸. 그 당시엔 왜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할아버지는 집을 향하여 달려갔어요.
할아버지가 달려오는 걸 바라보던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말했어요.
"아니 영감,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시나요?"
"짐승을 잡으려고 파놓은 구덩이에 빠졌었다오."
“그랬군요! 큰일 날 뻔 했네요.”
할아버지는 두 다리로 힘차게 뛰어보았어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기쁨에 찬 할아버지가 길고 커다란 괘종시계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할멈, 이 모두가 저기 걸린 괘종시계 덕분이라오!”
할아버지가 기쁜 얼굴로 괘종시계를 쓰다듬었어요.
"고맙다. 고마워."
괘종시계도 기뻐서 뎅 뎅 뎅 열두 번의 박수를 쳤어요. ♧
ⓒ金慶子(함초롬) 글. 그림. / 월간 문학 게재
첫댓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좋은 작품 읽을 수 있게 올려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신건자 회장님께서 감명깊게 읽으셨다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