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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찬양
2014년 9월 21일 / 갈현제일교회 성가대 헌신예배 / 시편 23:1-6
성가대원의 수칙
① 찬송은 모든 것이 주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 찬송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나 다른 세상의 피조물을 위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초대교회 사도들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3일 만에 부활하심, 재림이었다.>
② 지휘자와 반주자를 비롯한 모든 성가대원들은 정성된 행동과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보다는 정성된 목소리이다. <가사 내용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대곡(大曲)보다는 예배자들이 ‘아멘’ 할 수 있도록 차라리 찬송가를 택하는 편이 낫기도 하다.>
③ 예배의 시작에서부터 마치는 찬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찬양을 주관하기 때문에 그 역할은 막중하다.
<총회장은 설교 30분하지만, 찬양 맡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모든 예배를 주관케 된다.>
④ 같은 성도이면서도 예배 중 다른 이들과는 좀 다르게 예배를 한다. 다른 이들이 기도할 때에 그들은 찬양하고 다른 이들이 그들을 주시하는 가운데 찬양을 한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형식적인 찬양에 치우치도록 만들기가 쉬우므로 찬양대원들은 삼가 조심해야 한다.
⑤ 묵도송, 기도송, 폐회송과 같은 찬양은 자신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하며,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야지 절대로 사람을 향해서 해서는 안 된다. <성가대의 모든 찬양은 하나님께 상달케 함에 초점을 두어야지 사람들에게 들려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⑥ 자신의 목소리를 과신하지 말고 늘 겸손히 철저하게 찬송을 연습하여 정성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모든 음악은 처음에는 mf에서 시작한다. 독창하던 사람이 합창에는 어울리지 못한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들어내지 말라. 이름도 빛도 없이 봉사하고 충성하라. 그리하여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해 주실 것이다.>
⑦ 성가 지휘자는 반주자와 대원들에게 다음 주에 할 곡을 미리 알려줌으로 음악적으로도 준비하도록 하되 많은 기도와 더불어 가사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여 찬송다운 찬양을 드리도록 독려하라. <세상 연주회나 독창회도 수없는 노력의 결실이듯이 성가대도 마음을 받으신다고 하여 음악적인 문제를 게을리 해서도 안 된다. 정성을 다 한다는 것에는 음악적인 노력도 포함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처럼 연습 시간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연습 없이는 좋은 찬양을 할 수 없다.>
⑧ 예배시 연습도 하지 않고 성가대 자리에 앉는다거나, 앉아서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거나, 예배시간에 잡념을 하는 것은 금물이다.
찬송하면 큰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하여야 문제가 해결되고, 역사가 일어나는 줄을 알지만 찬송을 하여도 많은 기적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역사는 다음과 같다.
1. 질병이 치료되었다(삼상 16:23).
삼상 16:14-23 / 여호와께서는 사울에게서 성령을 거두어 가시고, 그 대신 악령을 그에게 보내어 자주 그를 괴롭히도록 하셨다. 15) 그러자 사울의 신하들이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임금님을 괴롭히는 것은 악한 영입니다. 16) 이럴 때는 수금 소리가 좋으니, 저희가 수금 잘 타는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그러면 악한 영이 와서 괴롭힐 때 수금을 타도록 하시고, 그 소리를 들으시면 기분이 좋아지실 것입니다.” 17) 사울이 대답하였다. “좋은 생각이오! 수금 잘 타는 사람을 하나 구해서 데려오시오!” 18) 그러자 젊은 신하들 중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아뢰었다. “제가 그런 사람을 압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인데, 수금을 잘 탑니다. 그는 좋은 집안에 태어난 용감한 청년입니다. 그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말도 잘하고, 용모도 잘생겼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19) 그러자 사울이 이새에게 신하를 보내어 “부디 그대의 아들 다윗을 … 왕궁으로 보내 주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 21) 이렇게 해서 다윗은 왕궁으로 들어와 사울을 섬기게 되었다. … 23) 그리하여 왕궁에 머물게 된 다윗은 악한 영이 사울에게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탔다. 그러면 사울의 답답한 마음이 가벼워지고 악한 영도 그에게서 떠나갔다.
2.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임하였다(대하 5:11-14).
대하 5:11-14 / 모든 제사장들은 잔치를 위하여 몸을 정결히 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준비를 이미 끝내고 있었다. … 12) 성전의 가수들도 한 사람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레위 지파의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들의 아들들과 친척들은 가는 모시로 만든 흰옷을 입고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들고 제단의 동쪽에 들어서고 그들 곁에는 제사장 120명이 나팔을 들고 서 있었다. 13) 나팔을 든 제사장들이 일제히 가수들과 함께 악기들을 울리며 노래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잘 대해 주셨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그치지 않으신다!” 그 장엄한 순간에 여호와의 지성소가 구름으로 가득히 덮였다. 14) 여호와의 영광이 지성소 전체를 가득히 채우자, 그 구름 때문에 제사장들이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구름 속에서 장엄하게 나타나 지성소를 주님의 전으로 삼으셨다.
3.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대하 20:20-23).
대하 20:1 [여호사밧이 크게 승전하다] 그런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큰 군대를 이끌고 여호사밧을 치러 왔다. 유다 남쪽의 마온 족속들까지 그들과 합세해 있었다. … 3) 여호사밧이 몹시 놀라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기로 결심하고, 유다 온 나라에 금식을 선포하였다. 4) 유다 온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와서 여호와께 도움을 간구하였다. … 12)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대신 그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 엄청난 군대에 대항하기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도 약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직 우리는 지금 주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13) 유다 온 백성이 부녀자와 젖먹이들까지 모여 여호와 앞에 금식하며 간구하고 있었다. 14) 이때에 여호와의 영이 군중 속에 섞여 있던 레위 사람(아삽 지파에 속한 스가랴의 아들 야하시엘에게 임하였다. 15) 야하시엘이 여호와의 영에 사로 잡혀서 이렇게 외쳤다. … “너희는 두려워 말라! 저 대군을 보고 겁을 먹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싸우는 것이다. 16) … 17) 그러나 너희가 직접 싸울 필요는 없다. 너희는 그저 가만히 서서 나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대신 싸우고 승리하는 것을 똑똑히 보기만 하라. 그러므로 유다와 예루살렘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라. 내일 너희는 그들을 향하여 출전하기만 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며 대신 싸우리라.”
대하 20:21-23 / 여호사밧은 온 백성의 지휘관들과 의논한 다음, 성전 가수들에게 성가대원의 예복을 입혀 모든 군대의 선두에 세워 놓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노래를 계속 불러 여호와를 찬양하게 하였다. “여호와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으니, 너희가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22) 성가대원들이 노래를 시작하자,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향하여 밀려들어오는 원수들을 혼란에 빠뜨려 서로 쳐 죽이게 하셨다. 23) 처음에는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 세일 산지에서 온 지원군들에게 달려들어 모조리 쳐 죽이더니 다음에는 암몬 군대와 모압 군대가 서로 달려들어 저희들끼리 쳐 죽였다.
4. 쇠사슬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행 16:25-34).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들려 옥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 원망대신 오히려 찬송할 때에 옥문이 열리고 손과 발에 묶였던 쇠사슬이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간수장과 그의 가족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오늘도 찬송할 수 없는 어려움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면 병든 자는 치료의 역사가 임하며, 매인 자는 풀어지는 역사가 있으며, 모든 일에 승리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들어낼 것입니다.
■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유래 / 작사 및 작곡 : 마틴 루터(1483~1546)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대학교수인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성당 정문에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관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신호탄이 됐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성직을 사고 팔 정도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사면 연옥의 고통을 면할 수 있다고 유혹하여 면죄부를 팔기도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돈이 헌금함에 땡그랑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서 천국으로 운명이 바뀐다는 거짓말로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돈으로 천국에 가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에 분노한 젊은 사제 루터는 오직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이단으로 몰린 그는 황제 찰스 5세(Emperor Charles V)의 소환을 받아 법정에 섰을 때, 입장을 철회하라고 회유하는 재판장에게 외쳤습니다. “교황 앞이나 의회에서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의 주장은 분명히 잘못되었고 모순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확신하므로 결코 내 입장을 철회할 수 없다. 내게 다른 길은 없다. 하나님, 저를 도우시옵소서.”
1529년 그의 친구들은 생명이 위험하니 의회에 출두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루터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곳(보름스, Worms) 지붕위의 기왓장들이 마귀가 되어 공격하더라도 나는 가겠다.”라며 각오를 다졌습니다. 격렬한 법정 싸움이 있을 보름스 의회가 열리기 전날, 루터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것이 바로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 찬송은 루터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는 말씀을 의지하여 쓴 것입니다.
그는 천재적인 작곡가나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음악성과 신앙을 통해 코랄을 집대성하였고 코랄을 찬양의 도구로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코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바흐의 칸타타, 베토벤의 캐논, 멘델스존의 교향곡, 막스레서의 오르간을 위한 코랄 환상곡에 쓰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는 음악적인 기법만이 아니라 음악을 통한 그의 삶 가운데 그의 신앙고백이 더 많은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음악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때로는 음악가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들을 뛰어넘으려고 애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물론 활발한 음악활동, 뛰어난 연주 실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음악인이든 음악인이 아니든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인 음악이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되고, 기도가 되고,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합니다.
● 다윗이 지은 시편 23편에서 1절을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을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찬송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신앙고백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함께 얻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다윗을 꼽고 있습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어, 무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먼저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유다왕국을 다스렸고, 온 이스라엘을 33년 동안 다스렸습니다(삼하 5:4-5).
다윗은 이렇게 오랫동안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하나님과 백성들의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다윗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다윗의 시편 중 많이 읽혀지는 시편은 8, 18, 22, 23, 24, 51, 69, 96, 103, 139편 등을 꼽을 수 있는데, 가장 아름답고 이해하기 쉬운 것은 23편일 것입니다.
양치기였던 다윗이 23편에서 양과 목자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양치기로 있던 때에 이 시를 쓴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일생을 보내면서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때에 너무 감사해서 이 짧은 표현으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 다윗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무엘상 16장입니다. 백성들의 요구에 의해 맨 처음 세워진 왕 사울은 왕이 된지 2년 만에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되는 잘못에 하나님은 사울을 대신해서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삼상 13:14).
그때 하나님의 눈에 찼던 인물이 다윗으로, 하나님은 올바른 왕을 세우지 못한 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기름을 부으라고 하셨습니다(삼상 16:2).
행 13:22 / 그리고 사울을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하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은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새의 집을 찾아간 사무엘은 이새의 7명 아들을 전부 만나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 이새가 막내가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그 막내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버지 이새를 도와서 주로 양을 치는 목동으로, 이 날도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막내인 다윗을 선택하신 걸까요? 사무엘이 보기에 장남이었던 엘리압은 왕 되기에 충분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장남인 엘리압이 아닌 막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압이 아닌 다윗을 왕으로 선택하신 걸까요?
삼상 16:6-7 / 이새가 자기의 아들들을 거느리고 성소로 들어서는데, 맨 먼저 엘리압이 사무엘의 눈에 띄었다. 그래서 사무엘은 속으로 ‘그가 틀림없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아들이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그의 용모가 특출하고 키가 큰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지 마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 사람은 눈에 뜨이는 외모를 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 본다.’
아버지 이새에게 다윗이 어떤 아들이었습니까? 아버지 이새가 막내 다윗에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사무엘 선지자 앞에 막내 다윗을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양을 칠 때의 자세와 태도를 주목해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양치는 다윗의 모습 속에서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보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비록 아버지가 맡겨주신 작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해 양을 쳤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택하신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양을 치는 일이 손쉬운 일도 하찮은 일도 아닙니다. 양은 늘 들짐승들의 표적이 됩니다. 잘못하면 사나운 들짐승들에게 양 전부를 잡아 먹힐 수 있습니다. 양을 치려면 상당한 용기와 담력 그리고 빠른 판단력과 양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양을 잘 칠 수 있습니다.<작은 일에도 남이 보던 아니 보던 정성을 다하라. 사람은 못 볼지라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골리앗을 죽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삼상 17:34-37 /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에게 굽히지 않았다. “임금님, 제가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한 마리라도 물어 가려고 하면, 35) 당장 뒤쫓아가서 때려죽이고 그 아가리에서 양을 살려 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맹수가 제게 덤벼들면, 그 머리채를 붙잡아 때려죽이기도 하였습니다. 36) 저는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습니다. 그러니 저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쯤이야 짐승보다 더 쉽게 쳐 죽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였으니, 그 죄값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37) 다윗이 끝으로 사울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사자의 발톱이나 곰의 발톱으로부터 저를 보호해 주신 여호와이시니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틀림없이 저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양을 칠 때에 자신의 전심을 쏟아 부엇습니다. 그는 사자나 곰이 양떼에게로 달려 올 때에 비겁하게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맞섰고 곰과 맞섰습니다. 그는 양을 위해 자신의 생명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 재목으로 보신 원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안위보다 양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사자와 곰들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함으로 사자와 곰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습니다. 다윗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사자와 곰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또 다윗은 한 마리의 양이라도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사자나 곰이 양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날 때, 끝까지 추적해서 사자와 곰의 입에서 양을 건져내었습니다. 그는 한 마리의 양도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양을 칠 때에 이런 태도를 갖고 있었기에 아버지는 다윗에게 양을 맡길 때에 늘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고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양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지킬 왕의 모습을 보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다윗은 선한 왕이요, 선한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글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시 한 편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양치기 소년 다윗이 시편 23편을 쓴 것은 자신이 목자로서 양을 돌보아 주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것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 10:11)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양을 치며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양이라는 말이 약 500번 넘게 나옵니다. 양은 창세기 4장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양은 인류 시초부터 사람과 함께 살아온 동물입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축을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마을마다 공동 소유로 양의 우리를 지었던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이리와 짐승 떼와 도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양의 우리는 약 3m 정도의 높이로 울타리가 처졌고 밤이 되면 목자들은 그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었고, 문지기는 그 앞에서 밤새도록 보초를 섰습니다. 그런데 이런 양들을 노리고 몰래 찾아오는 자들이 있었으니, 절도요 강도였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밤에 양들을 훔치려고 아무도 모르게 담을 넘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아무 거리낄 것이 없기에 떳떳하게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목자들이 오면 문지기는 문을 열어 줍니다. 그러면 목자는 들어가 각각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들은 신기하게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고 양이 그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인격적이고 긴밀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목자는 양들을 도매금으로 부르거나 번호를 붙여 부르지 않습니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살피며 일일이 이름을 붙여주고, 양도 목자가 자기에게 붙여준 이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친히 양의 문이 되셨고 우리가 어떤 문으로 들어가야 되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1. 양의 특성
양의 특성을 이해하면 왜 예수님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개와 고양이 등은 쉽게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의 시력은 3m 앞도 잘 보지 못한답니다. 제비나 연어 같은 동물은 오랜 시간 먼 거리를 여행하고도 자기의 본향을 찾아가는 놀라운 방향감각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양은 쉽게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길과 진리와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잘 따라가고 있습니까?
②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습니다. 고슴도치는 밤송이처럼 생겨서 구분이 잘 안되고 잘못 접근하면 찔립니다. 카멜레온은 자신을 위장하는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스컹크는 가스를 내뿜습니다. 그런데 양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빨리 도망갈 수 있는 다리가 있던가요? 아니면 남보다 큰 덩치가 있습니까? 양은 특별한 무기가 없습니다. 공격할 수 있는 무기도, 피할 수 있는 빠른 발도, 상대에게 치명을 가할 수 있는 독(毒)도, 위협을 줄 수 있는 덩치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양은 평안한 가운데서 살며 번식도 합니다. 그 이유는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단에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비무장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목자로 섬겨야 합니다.
③ 양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양은 스스로의 방어능력이 없는 만큼 겁이 많은 짐승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께 무리를 지어 살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무리도 얼룩말처럼 다른 짐승으로부터 특별한 방어수단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저 겁이 많기 때문에 모여 있을 뿐입니다. 이리가 한 마리만 양 우리로 뛰어 들어와도 양들은 힘을 합해서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모두 흩어지고 맙니다. 돌봐 주는 목자가 없다면 결국 죽고 맙니다. 목자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양의 특징은 항상 목자와 연관됩니다.
④ 양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들의 몸을 혀로 핥아서 씻든지, 풀에 구르든지, 물로 씻든지 하면서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물이 몸에 묻으면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씻어줄 때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깨끗케 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죄에서 사하여 주시고(요일 1:7), 죄악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⑤ 양은 양식이나 물을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먹이를 찾는데, 양은 돌봄이 없으면 독초도 해로운 줄 모르고 뜯어먹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돌봄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아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양은 이처럼 부족한 것이 많은 동물입니다. 양에 대한 문화적 인식에 차이가 있는데, 우리 한국에서는 좋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순하고, 인간과 가까이 생활하고, 깨끗한 동물, 하얀 털을 갖고 있는 호감 있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생각이 모자라는 놈,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심한 욕이 ‘개새끼’라면 중동에서는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갈 길로 갔거늘...”(사 53:6)이라고 하였듯이, 양은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한 동물입니다. 우리보다 오래 전부터 양을 치며 살아온 중동의 사람들이 양에 대해서는 더 정확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양이 잘하는 것 하나 있습니다. 양에게 발달된 것이 있다면 귀뿐입니다.
2.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요 10:3-5 / 문지기는 그에게 문을 열어 주며, 양은 그의 음성을 반긴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4) 양들은 앞장 서서 걸어가는 그를 뒤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낯선 음성이 들리면 오히려 피하여 달아난다.
양의 주인은 자신의 양들이 알아듣는 이름을 부릅니다. 양들은 사람과 달리 청각이 발달되어 있어서 목자의 음성과 타인의 소리를 구분합니다. 목자가 아니면 양들은 순간 흩어져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한 상황을 피합니다. 양은 아무 능력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재주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3.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양이 300마리 이상일 경우 대규모 목축에 속하기 때문에 별도로 양을 칠 일꾼을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렇게 고용된 삯군 목자는 목자가 아닌 것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있어서 제일 경계해야 되는 것은 이리떼나 맹수들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킵니다. 다윗도 양을 칠 때 사자와 곰과 정면으로 대결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7:34-37). 이런 위협이 있을 때 삯군 목자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습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목자의 책임 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부터의 공격은 막아야 할 책임이 있지만, 2마리 이상의 이리떼나 다른 맹수들로부터 지킬 책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삯군목자는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요 10:12)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 10:17) 그리고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고 하셨듯이 우리들을 위해서 선한 목자로서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는 목자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양인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 대하여 더 잘 알고 계십니다. ① 양에게 필요한 것 ② 양의 건강 상태 ③ 양의 요구 등을 잘 알고 계십니다.
■ 다윗과 찬양 / 중요한 시편 51편 → 인애하신 구세주여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행 13:22).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을 실망시킨 치명적 실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충실한 부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것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인구 조사를 해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기도 했으나, 성경에는 밧세바와 간음한 것 외에는 다윗의 평생이 온전했다고 했습니다.
상 15:5 /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을 제외하고는 평생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기 때문에 주께서 그의 왕위에 계속 후계자를 앉혀주시고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셨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아 택함받은 다윗이 일생에 단 한번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았던 그 때에 지었던 시편이 아직도 전해 옵니다. 바로 51편입니다. 이 시편은 다른 다윗 시편과는 다릅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에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던 ‘마음이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에서 멀어져 있었던 바로 그 유일한 시점에 지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특기요 주무기였던 정직함과 깨끗함은 그 순간 소멸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전심으로 바라던 그가 한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간음과 살인이라는 이중적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대한 집중력이 성경상의 어떤 인물보다 뛰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을 잃고 율법을 어기고 남의 아내로 만족을 얻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자기를 택했던 단 한 가지 이유가 되었던 ‘정직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윗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죄를 알았습니다(3절). 그 죄는 백성들이나 밧세바에게 피해를 끼친 것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일편단심이 흔들려 하나님을 실망시킨 것이었기에 안타까왔습니다(4절). 다윗은 하나님이 다윗의 중심이 진실하기를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6절). 다윗은 만약 자신에게 깨끗한 마음이 다 없어졌다면 주님이 다시 창조하시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다시 품기 원했고, 정직함이 낡아져 버렸다면 다시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10절). 그는 주님의 임재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11절). 그는 다시 찬양하기를 다짐합니다(14-15절).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 예배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16-17절). 여기에 중요한 찬양 원리가 있습니다.
시 51:16-17 / 주께서 제사를 즐기지 않는 줄 아오나 나는 바치리이다. 내가 드리는 번제를 마다하지 마소서. 17)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제물은 찢어진 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지고 터진 이 마음뿐이오니 업신여기지 마소서.
다윗에게서 하나님을 향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빼 버리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마음이 그의 특기요 상표입니다. 그런데, 밧세바의 일로 인해 다윗이 가장 내세울 만한 장점이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요? 다윗은 자신의 마음이 예전과 같이 흠이 없든지 범죄한 후 깨어져 버렸든 지간에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참 예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크게 인정받은 점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장점들을 합당하게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이 자랑이던 한 형제의 마음에 교만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자신 있었던 부분에 가장 치명적인 실수와 패배를 경험하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럴 경우, 각자 자신에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난 겸손한 것이 아니었구나. 겸손때문에 내가 이제껏 주님께 쓰임을 받았는데, 이젠 주님이 날 안 쓰시겠지?”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부족하고 찢기고 고통받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실망감조차 그대로 숨김없이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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