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베르 주교의 1839년 박해 보고서
: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Vol. 1254, pp. 141〜 154.
O 김성우 안토니오와 형제들
3월 21일에 서울에서 4리외(약 40리) 떨어진 광주(廣州)에서 김(성 우) 안토니오의 두 동생(김덕심 아우구스티노와 김 베드로 알칸타라)과 그들의 자녀들 가운데 한 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약간의 돈을 주어 석 방되었으나 얼마 후에 다시 체포되어서 감방에 갇히고 고문을 받았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사형 언도를 받아 머리가 잘렸다지만 이 소문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한 포도대장이 이들에게
“임금이 내린 명령을 따르겠다는 말 한 마디라도 해라. 그 한 마디를 하는 것이 그리 큰 죄가 안 될 터이니 너희의 천주도 용서할 것이라.”
고 여러 번 간청했다는 말이 있어서 더구나 (확인해야 할 소문이다).
O 이 바르바라와 이 아가타
4월 11일에 키가 큰 이(영희) 막달레나와 그녀의 언니 (이정희 바르바 라)와 그들의 어머니(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들의 조카딸(이 바르바라), 그리고 두 미혼 여인(김성임 마르타와 김 루치아)은 남(명혁) 다미아노 와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자녀들의 열성에 감격하여 포도청에 자진 출두하였고,자신들도 천주교 신자들이며 천주님을 위하여 죽을 용의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포청에서 두 번이나 쫓겨 나간 이들은 포졸들 의 초소가 된 (남명혁) 다미아노의 집으로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 곳에서 포졸들이 체포한 이 여섯 명을 결국 포청에 가두어 두었다.……
4월 20일에 형조판서는 우선,형조에서 어린이들을 심문하는 일이 불 법이라는 이유로 (남명혁) 다미아노의 아들과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딸(이 아가타)과 아들, 이(영희) 막달레나의 14세 된 조카딸(이 바르바 라)을 포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형조판서는 또한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의 8세 된 아들과 80세가 넘은 노모를 (강제로) 내보냈다. 이들 모두가 가족들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별 수 없었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네 명의 소년 소녀는 천주님께서 도와주시어 여러 번 당한 고문과 특히 그곳에서 겪은 굶주림을 영웅적으로 참아 내고 신 앙을 굳게 지켰다. 악마의 앞잡이 형리들은 네 명의 소년 소녀에게 부모 들이 (형조에서) 배교하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믿게 하려고 하 였으나 허사였다. 이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배교하시고 안 하시는 것은 그분들의 일이지 어렸을 때부터 천주님을 공경해 온 우리는 그분을 절대로 배반하지 않겠다.”
고 대답하곤 하였다.……
4월에 잡힌 처녀들(이 아가타,김 루치아,이 바르바라,이영희 막달레 나)은 꾀가 더 많아서 그처럼 과감하게 분명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그 들은 사실과 비슷한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조선인들의 재치로
“적합한 배우자를 찾지 못했다.”
라고 하거나
“너무 가난해서 혼기를 놓쳤다.”
라고 하여
“이렇게 나이를 먹고 말았다.”
라고 했었다.……
(5월) 27일 월요일이었는데,이날에 키가 큰 이(영희) 막달레나의 14 세 된 조카딸(이 바르바라)도 죽었다. 4월 11일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던 이 불쌍한 소녀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었다.
O 성국보 프로타시오
같은(1839년) 5월 12일에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천주님은 그 형조판서 가 또 다른 훌륭한 일을 보게 해 주셨다. 정 프로타시오라는 신자가 박 해가 시작되었을 때에 포청 에서 불행하게도 배교했다. 집으로 돌아간 그 는 눈물만 홀리고 식사를 안 하다가,죄책감에 이끌려서 거리로 나와 형 조 입구에서 형조판서의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형조판서가 퇴근하자 그 앞에 엎드려
“전에 배교한다고 한 말을 후회하니 저를 다시 가두어 달라.”
고 애원하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라고 물어본 형조판서에게 프로타시오는
“그렇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감방에 들어가라.”
라고 형조판서가 대답하자, 가련한 배교자는 기뻐하면서 감방으로 달 려 갔다.
갇혀 있던 다른 수감자들의 격려와 축하를 받은 프로타시오는 기쁨이 더하였다. 5월 19일에 그는 배교했던 포도청으로 이송되고,20일에 거 기서 치도곤을 맞았다. 조선인들은 (곤장을 칠 때) 치명적인 타격과 그 렇지 않은 타격을 가할 줄 아는 잔혹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一맞은 15 대의 치도곤의 타격은 치명적인 것이었다一,프로타시오는 밤사이에 회 개하였기 때문에 순교자로 숨을 거두었다.
O 장성집 요입
(5월 26일이었던) ‘삼위일체대축일’ 에 고문을 받다가 죽은 장(성집) 요셉은 1838년 4월에 나에게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이었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며,가난해도 열심한 신자였다. 마찬가지로 비단 을 짜는 부자이지만 냉담한 어떤 신자도 같은 날에 고문을 받았다가 밤 사이에 죽었다. 이들은 목이 잘린 영광스러운 순교자들이 아니었어도, 치프리아노 순교 성인에 의하면 옥사 순교는 ‘참수’ 순교와 같은 순교요,같은 의미가 있고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O 유 아우구스티노와 베드로 부자,
유 체칠리아와 성 엘리사위 모녀(7월) 17일에 소중한 통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유대철 베드로)이 체포되었고,다량의 중국 서적과 성물도 압수되었고,홍 베드로와 6개월 된 아기를 젖 먹이는 그의 아내가 나루터에서 잡혔고, 마르타와 도망 다니는 처녀 , 김 (성우) 안토니오의 아우들도 잡혔다.
19일이나 20일에는 주교 댁이 되는 집의 정든 주인들인 (정하상) 바 오로와 그의 어머니(유 체칠리아)와 그의 동생(정엘리사벳)과 세 명의 하녀가 체포되었다.
O정화경 안드례아
같은 날 (7월 30일) 아침에, (이재의) 토마스와 (이) 요한이 서울을 향해 떠났다. 8월 7일에는 정(화경) 안드레아가 찾아와 7월 31일 아침 7시에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을 습격하여 60명 이상의 신자가 체 포되었고, 10명 정도는 피신하고 동네가 황폐해졌다는 슬픈 소식을 알 려 주었다.
정(화경) 안드레아는 이 (지연) 우의정의 지시를 받은 배신자가 주교님 을 서울로 압송하려고 다섯 명의 포졸을 데리고 가까운 곳까지 와 있다 는 소식도 알려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