武夷之溪,东流凡九曲,而第五曲为最深,盖其山自北而南者,至此而尽,耸全石为一峰,拔地千尺,上小平处微戴土生林木极苍翠可玩而四隤稍下则反削而入如方屋帽者旧经所谓大隐屏也屏下两麓坡坨旁引还复相抱抱中地平广数亩抱外溪水随山势从西北来四屈折始过其南乃复绕山东北流亦四屈折而出溪流两旁丹崖翠壁林立环拥神剜鬼刻不可名状舟行上下者方左右顾瞻错愕之不暇而忽得平冈长阜苍藤茂木按衍迤靡胶葛蒙翳使人心目旷然以舒窈然以深若不可极者即精舎之所在也直屏下两麓相抱之中西南向为屋三间者仁智堂也堂左右两室左曰隐求以待栖息右曰止宿以延宾友左麓之外复前引而右抱中又自为一坞因累石以门之而命曰石门之坞别为屋其中以俟学者之群居而取学记相观而善之义命之曰观善之斋石门之西少南又为屋以居道流取道书真诰中语命之曰寒栖之馆直观善前山之颠为亭回望大隐屏最正且尽取杜子美诗语名以晚对其东出山背临溪水因故基为亭取胡公语名以铁笛说具本诗注中寒栖之外乃植楥列樊以断两麓之口掩以柴扉而以武夷精舎之扁揭焉经始于淳熈癸夘之春其夏四月既望堂成而始来居之四方士友来者亦甚众莫不叹其佳胜而恨它屋之未具不可以久留也钓矶茶灶皆在大隐屏西矶石上平在溪北岸灶在溪中流巨石屹然可环坐八九人四面皆深水当中科臼自然如灶可㸑以瀹茗凡溪水九曲左右皆石壁无侧足之径唯南山之南有蹊焉而精舎乃在溪北以故凡出入乎此者非鱼艇不济总之为赋小诗十有二篇以纪其实若夫晦明昏旦之异候风烟草木之殊态以至于人物之相羊猿鸟之吟啸则有一日之间恍惚万变而不可穷者同好之士其尚有以发于予所欲言而不及者乎哉
精舍
琴书四十年,几作山中客。 一日茅栋成,居然我泉石。
仁智堂
我惭仁知心,偶自爱山水。 苍崖无古今,碧涧日千里。
隐求斋
晨窗林影开,夜枕山泉响。 隐去复何求,无言道心长。
止宿寮
故人肯相寻,共寄一茅宇。 山水为留行,无劳具鸡黍。
石门坞
朝开云气拥,暮掩薜萝深。 自笑晨门者,那知孔氏心。
观善斋
负笈何方来,今朝此同席。 日用无余功,相看俱努力。
寒栖馆
竹间彼何人,抱瓮靡遗力。 遥夜更不眠(宋本作明),焚香坐看壁。
晚对亭
倚筇南山巅,却立有晚对。 苍峭矗寒空,落日明影翠。
铁笛亭
山前旧有夺秀亭,故侍郎胡公明仲尝与山之隐者刘君兼道游涉而赋诗焉。刘少豪勇,游侠使气,晚更晦迹,自放山水之间,善吹铁笛,有穿云裂石之声。胡公诗有“更烦横铁笛,吹与众仙听”之句。亭今废久。一日,与客及道士数人,寻其故址,适有笛声发于林外,悲壮回郁,岩石皆震,追感旧事,因复作亭以识其处,仍改今名。
何人轰铁笛,喷薄两崖开。 千载留余响,犹疑笙鹤来。
钓矶
削成苍石棱,倒影寒潭碧。 永日静垂竿,兹心竟谁识。
茶灶
仙翁遗石灶,宛在水中央。 饮罢方舟去,茶烟袅细香。
渔艇
出载长烟重,归装片月轻。 千岩猿鹤友,愁绝棹歌声。
............................ 朱熹(주희)의 「武夷精舍雜詠并序」와 韓元吉의 武夷精舍記 작성자새벽(看齋)|작성시간11.06.21|조회수414
朱熹, 晦菴集 卷9, 「武夷精舍雜詠并序」
武夷之溪, 東流凡九曲, 而第五曲爲最深. 蓋其山自北而南者, 至此而盡, 聳全石爲一峰,
拔地千尺. 上下平處微戴土, 生林木, 極蒼翠可玩. 而四隤稍下, 則反削而入, 如方屋帽者, 舊經所謂大隱屛也.
무이의 시내가 동쪽으로 흘러 무릇 구곡이 되었는데 제 5곡이 가장 깊다. 대개 그 산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리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다하는데 완전한 바위가 우뚝 솟아 하나의 봉우리가 된다. 땅에서 천척이나 솟았는데 위의 조금 평평한 곳에 약간 흙이 덮여 있고 나무가 자라 매우 푸르러 감상할 만하다. 네귀는 약간 수그러지다가 치켜 올라가면서 절단되어 마치 방목에 모자를 씌운듯 하니 옛 경전에 이른바 大隱屛이라는 것이다.
屛下兩麓, 坡陀旁引. 還復相抱. 抱中地平廣數畝, 抱外溪水隨山勢從西北來, 四屈折始過其南, 乃復遶山東北流, 亦四屈折而出. 溪流兩旁, 丹崖翠壁, 林立環擁, 神剜鬼刻, 不可名状.
대은병의 양쪽 산록은 매우 험하여 멀리 뻗어갔다. 다시 들어와 서로 얼싸안으니 둘러 쌀인 땅은 넓어 수묘가 되고, 이 분지 밖에 계곡은 산세를 따라 서북에서 흘러와 네번 꺾이다가 처음으로 남쪽을 지나다가 다시 산을 감싼다. 동북에는 흐르는 물 역시 네번 꺽이다가 두 줄기가 계류를 이루 양쪽 단애와 취병에는 숲이 무성하니 그 솜씨가 귀신의 조각같아 이루 형언할 수 없다.
舟行上下者, 方左右顧瞻, 錯愕之不暇, 而忽得平岡長阜, 蒼藤茂木, 桉衍迤靡, 膠葛䝉翳, 使人心目曠然以舒, 窈然以深, 若不可極者, 即精舍之所在也.
배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좌우를 돌아보면 뜻밖에 놀라운 경관이 그치지 않다가 홀연히 평평한 언덕과 긴 언덕을 얻어 푸른 등나무가 뻗어서 사람의 마음과 눈을 시원스럽게 해주고 아늑하게 깊어 끝나지 아니한 듯한 곳에 곧 정사가 있다.
直屏下兩麓相抱之中, 西南向爲屋三閒者, 仁智堂也. 堂左右兩室, 左曰隱求, 以待棲息; 右曰止宿, 以延賓友. 左麓之外, 復前引而右抱, 中又自爲一塢, 因累石以門之, 而命曰石門之塢. 別爲屋其中, 以俟學者之群居, 而取學記相觀而善之義, 命之曰觀善之齋.
바로 대은병의 아래 두 산록이 서로 안고 있는 가운데 서남향에 있는 세 칸의 집은 인지당이다. 당의 좌우 두 실은 왼쪽은 은구실인데 쉬는 이를 대접허는 곳이고 오른쪽은 지숙실인데 손과 벗을 맞이하는 곳이다. 왼쪽 산기슭의 밖에 다시 앞으로 끌어당겨 오른쪽 감싸 안은 가운데에 또 스스로 하나의 언덕이 있으니 인하여 돌을 쌓아 문을 내어 석문오라고 이름하였다. 따로 그 가운데 집을 만들어 학자들이 두루 살게 하였고 학기에서 서로 살펴서 선하게 된다는 뜻을 취하여 관선재라고 명명하였다.
石門之西少南, 又爲屋以居道流, 取道書眞誥中語, 命之曰寒棲之館. 直觀善前山之顚爲亭, 回望大隱屛最正且盡, 取杜子美詩語, 名以晩對. 其東出山背, 臨溪水, 因故基爲亭, 取胡公語, 名以鐵笛, 說具本詩注中. 寒棲之外, 乃植楥列樊, 以斷兩麓之口, 掩以柴扉, 而以武夷精舍之扁掲焉.
석문오의 서쪽 남쪽에 또 집을 만들어 도류를 살게 하였는데 도서인 진고 중의 말을 취하여 한서관이라고 명명하였다. 관선재 바로 앞산 아래에 정자를 지어 대은병을 돌아보게에 꼭 알맞아서 두자미의 시어를 취하여 晩對亭이라고 하였다. 그 동쪽에는 산등성이가 불쑥 나와 물가에 임하니 또한 정자를 지을 장소로 삼고 胡公의 시어를 따서 鐵笛亭이라 하였는데 설명은 본시 주석 속에 갖추어져 있다. 한서관 밖에 나무를 심고 울타리를 만들어 두 산록의 입구가 끊어진 곳에 사립문을 설치하고 武夷精舍의 편액을 걸었다.
經始於淳熙癸卯之春, 其夏四月旣望堂成, 而始來居之. 四方士友来者亦甚衆, 莫不歎其佳勝, 而恨他屋之未具, 不可以久留也.
淳熙 癸卯년(1183, 54) 봄에 시작하여 그 여름 4월 16일에 인지당이 완성되어 비로소 와서 살았다. 사방의 사우들이 오기 시작하여 그 수가 매우 많았으며, 좋은 경치를 감상하여 마지 않았으나 다른 집들을 갖추지 못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釣磯 茶竈 皆在大隱屛西, 磯石上平, 在溪北岸, 竈在溪中流, 巨石屹然, 可環坐八九人. 四面皆深水, 當中科臼自然如竈, 可㸑以㵸茗.
낚시터와 차 끊이는 부엌 등 모두 대은병 서쪽에 있고 이 낚시터 바위는 위가 펑퍼짐 한데 계곡 물 가운데 있는데 커다란 바위가 우뚝하여 8~9인이 둘러앉을 수 있다. 바위는 사면이 모두 깊은 물에 맞닿아 있으며 가운데가 확돌처럼 우묵하여 자연히 아궁이를 이루어 쩌낸 새싹차를 다릴 수 있다.
凡溪水九曲, 左右皆石壁, 無側足之徑. 唯南山之南有蹊焉, 而精舍乃在溪北, 以故凡出入乎此者, 非魚艇不濟. 總之爲賦小詩 十有二篇, 以紀其實.
계곡 물은 모두 구곡을 이루는데 좌우가 모두 석벽이여서 발디딜 틈이 없지만 남산 양쪽에 샛길이 나 있다. 정사가 계곡 북쪽에 자리잡아 이곳을 드나들려면 모두 ㄱ고기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지은 시가 12편으로 그 실상을 기록하였다.
若夫晦明昏旦之異候, 風烟草木之殊態, 以至於人物之相羊, 猿鳥之吟嘯, 則有一日之閒恍惚萬變而不可窮者. 同好之士, 其尙有以發於予 所欲言而不及者乎哉!(御纂朱子全書 卷66, 晦菴集 卷9 宋 朱子 撰)
대저 밝고 어두운 것과 아침, 저녁 노을의 다름과 안개와 초목의 여러 모습이며 인물의 모습과 원숭이나 새들의 울부짖음에 이르기까지 하루종일 여러가지로 변화여 다 알 수 가 없다. 同好之士들도 이와같은 생각이 있어 나에게 나에게 표현하라고 했는데 이를 말로 나타내고자 하나 이루지를 못 하도다.
먼저 주희의 〈무이정사잡영〉 12수를 살펴보겠다.
정사(精舍) 12-1
琴書四十年 거문고와 책을 벗 한지 40년
幾作山中客 몇 번이나 산중의 객이 되었던가
一日茅棟成 어느 날 띠 집 하나를 완성하니
居然我泉石 확실히 나의 샘과 산이 되었네
인지당(仁智堂) 12-2
我慙仁知心 나는 인과 지의 마음에 부끄러운데
偶自愛山水 우연히 스스로 산수를 사랑하도다
蒼崖無古今 푸른 산악은 예나 지금이나 같고
碧澗日千里 푸른 시내는 날마다 천리에 있네
은구실(隱求室) 12-3
晨窓林影開 새벽 창에 숲 그림자 열리고
夜枕石泉響 밤중 베갯머리엔 샘물 소리 울리네.
隱居復何求 은거함에 다시 무엇을 구하며
無言道心長 말없는 가운데 도의 마음은 자라네
지숙료(止宿寮) 12-4
故人肯相尋 친구가 서로 찾는 것을 즐겨하여
共寄一茅宇 함께 띠 풀 집에 머물렀네.
山水爲留行 산수에 머물렀다 가니
無勞具鷄黍 힘쓰지 않아도 닭 모이를 갖추어주네.
석문오(石門塢) 12-5
朝開雲氣擁 아침이 열리면 구름 기운에 안기고
暮掩薜蘿深 해 질 녘이면 담쟁이 넝쿨 무성 하네
自笑晨門者 새벽 문에 기대어 홀로 웃는 이
那知孔氏心 어찌 공자님의 마음을 알까?
관선재(觀善齋) 12-6
負笈何方來 스승 찾아 어디에서 오셨는가?
今朝此同席 오늘 아침 자리를 함께 했네
日用無餘功 날마다 하는 공부로 다른 일 없이
相看俱努力 서로 격려하며 같이 노력할 뿐
한서관(寒棲館) 12-7
竹間彼何人 저 대숲에 서있는 이 게 누구인가
抱甕靡遺力 옹기를 안고 힘쓰기를 버리지 않네
遙夜更不眠 긴긴 밤 다시 잠 못 이루어
焚香坐看壁 향 피우고 앉아 벽만 처다 보네
만대정(晩對亭) 12-8
倚笻南山巓 지팡이에 의지해 남산 정상에 오르니
卻立有晩對 도리어 만대봉(晩對峰)이 서 있네
蒼峭矗寒空 푸르고 높게 차가운 하늘과 가지런한데
落日明影翠 저녁놀은 푸른 절벽을 선명하게 비추네
철적정(鐵笛亭) 12-9
何人轟鐵笛 어떤 사람이 철적을 요란하게
噴薄兩崖開 뿜어내어 양쪽 언덕을 열었네
千載留餘響 천년의 남은 소리 남아 있으니
猶疑笙鶴來 오히려 생황 부는 학이 오는 듯하네
조기(釣磯) 12-10
削成蒼石稜 깎아 세운 푸른 모서리
倒影寒潭碧 찬 못에 비쳐 푸르도다
永日靜垂竿 종일 조용히 낚시를 드리우니
兹心竟誰識 이 마음을 끝내 누가 알리
다조(茶竈) 12-11
仙翁遺石竈 선옹이 돌 아궁이 남겨 놓았으니
宛在水中央 완연히 물의 한 중앙에 있도다
飲罷方舟去 차를 다 마시고 배로 나아가려고 하니
茶烟裊細香 차 연기는 향기를 내며 하늘거리네
어정(漁艇) 12-12
出載長烟重 나갈 때는 무거운 안개를 오래 싣고
歸裝片月輕 돌아올 때는 가벼운 조각달을 싣고 오네
千巖猿鶴友 많은 바위는 원숭이와 학의 친구이고
愁絶棹歌聲 뱃노래 소리에 근심이 사라지네
武夷精舎記 韓元吉
武夷山在閩, 粤直北, 其山勢雄深盤礴. 自漢以來, 見于祀事. 閩之諸山, 皆後出也. 其峰之最大者, 豐上而歛下, 巋然若巨人之戴弁, 縁隙磴道, 可望而不可登, 世傳避秦而仙者, 蛻骨在焉. 溪出其下, 絶壁髙峻, 皆數十丈, 岸側巨石, 林立磊落竒秀, 好事者, 一目不能盡, 則卧小舟杭溪而上, 號爲九曲.
以左右頋視, 至其地, 或平衍景物環㑹, 必爲之停舟, 曳杖倚徒而不忍去山, 故多王孫. 鳥則白鷴鷓鴣, 聞人聲, 或磔磔集崖, 上散漫飛, 走而無驚懼之態. 水流有聲, 其深處可泳, 草木四時敷華, 道士即溪之窮, 僅爲一廬, 以待遊者之 食息, 往往酌酒未半, 已廹曛暮而不可留矣.
山距驛道, 纔一二里許, 逆旅遙望不憚, 僕夫馬足之勞, 幸而至老氏之宮, 宿焉. 明日始能裹飯, 命舟而溪之長, 復陪於驛道之遠, 促促而来, 遽遽而歸, 前後踵相属也. 予舊家閩中, 兩宦于建安, 盖亦遽歸之一耳.
吾友朱元晦, 居于五夫山. 在武夷一舎而近. 若其外圃暇則遊焉. 與其門生弟子, 挾書而誦, 取古詩三百篇及楚人之詞, 哦而歌之. 得酒嘯詠, 留必數日, 盖山中之樂, 悉爲元晦之私也. 予毎愧焉. 淳熙之十年, 元晦既辭使節於江東, 遂賦祠官之祿. 則又曰, 吾今營其地, 果盡有山川之樂矣. 盖其遊益數, 而於其溪五折, 負大石屏, 規之以爲精舎, 取道士之廬猶半也.
誅鋤草茅, 僅得數畝, 面勢清幽, 竒木佳石, 拱揖暎帶, 若隂相而遺我者. 使弟子, 具畚鍤, 集瓦竹, 相率成之. 元晦, 躬畫其處, 中以爲堂, 旁以爲齋, 髙以爲亭, 密以爲室, 講書肄業, 琴歌酒賦, 莫不在是. 予聞之, 恍然如寐而醒, 酲而析, 隠隠猶記其地之美也.
且曰其爲我記之. 夫元晦, 儒者也. 方以學, 行其郷, 善其徒, 非若畸人隱士, 遁藏山谷, 服氣茹芝, 以慕夫道家者, 流也. 然秦漢以來, 道之不明, 久矣. 吾夫子所謂, ‘志於道’ 亦何事哉. 夫子, 聖人也, 其歩與趨莫不有則, 至於登泰山之顛, 而誦言於舞雩之下, 未嘗不遊, 胷中盖自有地. 而一時弟子, 鼓瑟鏗然, ‘春服既成’之詠, 乃獨爲聖人所予. 古之君子息焉者, 豈以是拘拘乎? 元晦, 既有以識之, 試以告夫來者, 相與酬酢於精舎之下, 俾或自得 其幔亭之風, 抑又何如也. 是嵗八月, 頴川 韓元吉 記.
(欽定四庫全書, 古今事文類聚續集 卷8, 宋 祝穆 撰 居處部 亭臺)
觀善 崇安武夷山有峰夷下鋭上號大隱屏朱熹築室其下 有仁智堂 隱求齋 觀善齋 止宿寮 石門塢 寒棲館 晩對亭 晦庵 釣磯 茶竈 韓元吉有記
武夷精舍詩武夷溪九曲多湍激獨第五曲平廣而最深大隐屏臨其上屏下兩麓相抱先生淳熈癸卯卜築其間堂曰仁智堂左曰隐求右曰止宿左麓之外復引而右抱為塢曰石門别爲屋其中曰觀善齋以居學者石門之西少南曰寒棲館以延道流觀善前山之顛為亭囬望大隐屏曰晚對東出臨溪為亭曰鐡笛而緫扁麓之口曰武夷精舍釣磯茶竈皆在大隐屏西溪左右皆石壁無側足之徑又為漁艇以濟出入各賦一詩凡十二篇又别為櫂歌十章詠九曲云(欽定四庫全書黄氏日抄卷三十四宋黄震撰讀本朝諸儒理學書晦庵先生文集二一)
仁智堂 隠求齋 觀善齋 止宿寮 石門塢 寒棲館 晚對亭 鐵笛亭 조기다조魚艇 ○朱元晦行視武夷精舍作神仙九折溪㳂泝此中半水深波浪闊浮綠春渙渙上有蒼石屏百仭聳雄觀嶄岩露垠堮突兀倚霄漢淺麓下縈迴深林久叢灌胡然閟千載逮此開一旦我乘星村舡輟棹青草岸榛莽喜誅鋤面勢窮考按居然一環堵妙處豈輪奐左右矗竒峯躊躇極佳玩是時芳節闌紅綠紛有爛好鳥時一鳴王孫逺相喚暫遊意已愜獨往身猶絆珍重舍琴人重來足幽伴
○詩云
琴書四十年幾作山中客一日茅棟成居然我泉石
我暫仁智心偶自愛山水蒼崖無古今碧澗日千里
晨葱林影間夜枕山泉嚮隠去復何求無言道心長
負笈何方來今朝此同席日用無餘功相看俱努力
故人肯相尋共宿一茅宇山水為留行無勞具雞黍
朝開雲氣擁暮掩碧蘿深自笑晨門者那知孔氏心
竹間彼何人抱甕靡遺力遙夜更不明焚香坐看壁
倚笻南山嶺卻立有晚對蒼峭矗寒空落日明影碎
舊名奪秀亭故侍郎胡公明仲嘗與山之隠者劉君兼道游陟而賦焉劉少豪勇游俠使氣晚更晦迹自放山水之間善吹鐵有穿雲裂石之聲胡公詩有更煩横鐵吹與衆山聴之句○
何人轟鐵噴薄兩崖開千載留餘響猶疑笙鶴來
削成蒼玉稜倒景寒潭碧永日静垂竿茲心竟誰識仙翁遺石竈宛在水中央飲罷方舟去茶烟裊細香出載長烟重歸裝片月輕千岩猿鶴友愁絶掉歌聲(欽定四庫全書, 方輿勝覽卷十一, 宋 祝穆 撰, 建寧府)
寄題朱元晦武彞精舍十二詠精舎
憶我南溪北千巖萬壑亭妬渠紫陽叟詫殺一峯青仁智堂學子可憐生逺來參老子仁智若為談指似秋山水隱求堂夢裏長逢孟羮中亦見顔癡兒入吾室真作采薇看止宿寮一老説談話諸君未要眠開放山月把酒奏溪泉石門塢亂石堆成玉雙峯便是門莫將塵底脚踏涴塢中雲觀善齋觀棊不作秋觀斵不作石要知麗澤功秪个是消息寒棲館鍊玉雲粘杵朝真露濕衣一聲夜半鶴月裏羽人歸晚對亭大隱翠屏孤何許最正面日落未落時亭上來相見鐵笛亭誰將㸃漆金鑄作孤竹笛林外吹一聲震落千峰石釣磯月夜乗醉來垂竿曲溪曲水清無寸鱗釣得半輪玉茶竈茶竈本笠澤飛來摘茶國墮在武夷山溪心化為石漁艇精舎何曽逺秪在九曲北漁艇若不來弱水萬里隔(欽定四庫全書, 誠齋集巻二十八, 宋 楊萬里 撰)
武夷九曲棹歌圖
第一曲 幔亭峰三姑石大王峰真昇洞仙畫鶴投龍洞换骨崖漢祀壇獅子峯
第二曲 觀音巖車錢巖煉丹爐虎嘯巖玉女峯三杯石
第三曲 架壑船試劍石
第四曲 大藏巖金雞巖仙機巖題詩巖
第五曲 鐵笛亭 晩對亭 精舍 隱求齋 止宿寮 寒栖館 石門塢 仁智堂 觀善齋 釣磯 茶竈 大隱屛.
五曲山髙雲氣深長時烟雨暗平林林間有客無人見款乃聲中萬古心 晦菴
五曲雲厓有許深石門書屋著修林堂堂不泯清風在一片寒潭印我心 元剛
五曲溪流深復深數椽茅屋舊書林市朝山澤皆堪隠誰識先生出處心 傅雍
山頭有路接紅塵欲覔王孫試問津瞥向蒼厓髙處見 三三兩兩鏡中人 稼軒
聞道誰吹鐵笛聲石厓轟裂老龍驚當年人已服丹去千古荒亭秋草生 玉蟾
(欽定四庫全書書畵彚考卷五十四刑部左侍郎卞永譽撰畵二十四)
第六曲 天柱峯仙掌峯仙浴堂山門響聲巖瀑布陷石堂仙跡巖.
第七曲 鑄錢巖觀山亭石梯石臺水澗漁艇一線天遊仙溪.
第八曲 三層峰鼓樓巖廪石鐘摸石鼔子峰石碁盤
第九曲 新邨市 齊雲峯 毛竹洞
游武夷九曲記
天下山川之名勝 崖壑水石之秀 而清竒者曰洞天 凡三十又六 而武夷九曲為之首 予居林屋洞天之上 故少好登涉 嘗暮乎武夷之勝 適元季兵起寰宇割裂者二十餘載 故未遑如願皇明統一宿留歲月 又二十又二年予始戴白曳杖入閩關 遊九曲 時洪武己巳冬十月也 即其景信天下之竒觀 世間之絶景 宜神仙隱者之所居 朱子蔡氏之所愛也 於是㩦仙流倩篙人 泛舟泝流 酌酒詠棹歌 左瞻右眺 而風景滿目中峯之雄偉上 方而四垂者曰慢亭 絶而險峻上 舒而下歛者曰大王峯 樓閣參差臺閣高下而金碧相暎曰㑹仙觀 此水之第一曲也
觀音雲髻之昂霄玉女簪花而臨水二曲也舟駕懸崖試劍斷石三曲也
夾水石壁金雞鳴晨大小二峯若佛藏之淩空四曲也
山高雲深 平林烟雨 峯回而水轉 鐵笛對景二亭之清麗 精舍寒栖二館遺址 釣磯茶竈 界乎其中山 至此而愈秀 水至此而愈竒 宜朱子所愛而卜築焉 五曲也
天柱仙掌突兀而立瀑布濺沬天姥留踪六曲也
石梯石臺天開一線游仙之溪在焉七曲也
鼓樓巖高三層峰起八曲也
山勢兩開平川桑麻新村市齊雲峰清微宫乘駟橋咸在烟嵐中九曲也
曲曲之間 峭壁絶壑 懸崖層巒 飛嶠危磴 磷磷然如罨畫 如屏幛 竒峰怪石 幽岑崇岡 森森然若瑶簪 若玉笋態 狀不一 然皆蒼翠蓊鬱 清潤秀㧞 古木蘿藤 野花山卉 襍出其間 水源自西來至此 則縈迴屈曲 盤旋轉折 衝崖激石 湛然其清 琅然其聲 望之或山合而水斷 即之則崖開而水注 九曲之間 深則渟 淺則奔 寛
則潴 狹則注 水從峽而行 峰夾水而峙 山水之中 仙踪聖跡 清風幽景 莫能殫記 既而夕陽在山 篙人返棹 予與仙流 亦皆微醉天風 泠然而月上東山之樹 乃從而歌之曰 山九折兮森球琳 水九折兮調瑤琴 兩儀秀結兮自開闢 五行秀鍾兮古迨今 幔為亭兮綵為屋 雲裀霞褥兮月流金 鶴鳴松端兮萬籟息 清風泠然兮和玉音 雲車龍駕兮青鸞導 玉皇天姥兮來登臨 宴曽孫兮 良夜虹橋現兮 秋隂彼神仙之美景 予試游兮 幽尋與仙流兮 同醉樂世外之閒心 又二年辛未冬十月既望 又十日 徐達左 書于樵陽官舍(欽定四庫全書趙氏鐵網珊瑚卷十一明趙琦美編; 書畵彚考卷五十四 刑部左侍郎卞永譽撰畵二十四))
퇴계가 지은 구곡시(九曲詩)의 대상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강호(江湖)가 아니라 그 옛날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이었다. 그는 이 시를 지으면서 무이구곡이 가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이렇게 읊었다.
不是仙山託異靈 선산은 이령을 붙이지 않나니 滄洲遊跡想餘淸 창주의 유적을 생각함에 맑아라 故能感激前宵夢 그러므로 전날 밤의 꿈에 감격하여 一櫂賡歌九曲聲 노를 두드리며 구곡가를 이어서 부르네
我從一曲覓漁船 내가 일곡에서 고깃배에 찾아 오르니 天柱依然瞰逝川 천주봉이 의연하게 서천을 굽어보네 一自眞儒吟賞後 진유가 한 번 음상한 후로부터는 同亭無復管風烟 동정에 다시 풍연을 관장함이 없어라
二曲仙娥化碧峰 이곡이라 선녀가 변화한 푸른 봉우리 天姸絶世靚修容 아름답고 빼어나게 단장한 얼굴이라 不應更覬傾城薦 다시는 경국지색 엿보지 않노라니 閭闔雲深一萬重 오두막엔 구름이 깊고 깊게 드리우네
三曲懸厓揷巨船 삼곡이라 높은 벼랑에 큰 배가 걸려 있어 空飛須此怪當年 공중을 날아와 걸린 그 때가 괴이하다 濟川畢竟如何用 내를 건넘에 마침내 어떻게 할 것인가 萬劫空煩鬼護憐 오랜 세월 귀신 보호와 사랑이 부질없네
四曲仙機靜夜巖 사곡이라 선기암은 밤이 되어 고요한데 金鷄唱曉羽毛毿 금계에 새벽 되니 깃털이 길게 보이네 此間更有風流在 이 사이에 참으로 풍류가 있으니 披得羊裘釣月潭 양구 벗고 월담에서 낚시를 하리라
當年五曲入山深 그 때 오곡은 산 깊이 들어가니 大隱還須隱藪林 대은이 도리어 수풀 속에 은거하네 擬把瑤琴彈夜月 요금을 빗겨 안고 달밤에 타노라니 山前荷簣肯知心 산 앞의 하궤자가 이 마음 알겠는가 六曲回環碧玉灣 육곡이라 푸른 옥만이 둘러 있고 靈蹤何許但雲關 신령한 자취는 어디인가 운관뿐이로다 落花流水來深處 물 위에 꽃잎은 심처에서 오나니 始覺仙家日月閑 비로소 알겠네 선가의 한가로움을
七曲橕篙又一灘 칠곡이라 노를 잡고 또 한 여울 오르니 天壺奇勝最堪看 천호봉의 기이한 풍경 가장 볼 만하네 何當喚取流霞酌 어찌하면 신선 먹는 유하주를 얻어서 醉挾飛仙鶴背寒 취하여 비선을 끼고 학의 등을 타려나
八曲雲屛護水開 팔곡이라 구름이 걷히니 호수가 열리고 飄然一棹任旋洄 표연히 노에 맡기고 물 위를 선회하네 樓巖可識天公意 고루암은 조물주의 뜻을 가히 알아서 鼓得遊人究竟來 유인을 불러서 끝까지 찾아오게 하네
九曲山開只曠然 구곡이라 산이 열리니 눈 앞이 트이고 人烟墟落俯長川 사람 사는 촌락이 장천을 내려다 보네 勸君莫道斯遊極 그대는 이곳이 유극이라 말하지 말라 妙處猶須別一天 묘처는 오히려 모름지기 별천지가 있어라23)
李滉, 退溪全書권1, 詩, 「閑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권오영, 퇴계(退溪)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의 이학적(理學的) 함의(含意)와 그 전승
이 글은 退溪李滉의 「陶山雜詠」의 시 작품에 담긴 理學的의미와 그 전승과정을 역사학적 관점에서 탐구한 논고이다. 퇴계의 「도산잡영」은 주자의 「武夷精舍雜詠」의 전통을 이어 퇴계 자신의 문학과 理學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특히 「도산잡영」시의 몇 편은 天理, 敬, 義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天淵臺>, <天光雲影臺>, <玩樂齋>시에서 자신의 이학적 정서를 잘 표현하였다. 퇴계의 敬과 理에 대한 탐구는 `天光雲影`과 `鳶飛魚躍`으로 상징된다. 그는 `천광운영`에서 敬을 드러내고 `연비어약`에서 天理의 생동적인 모습을 표현하였다. 송대 이학에서 새롭게 제기된 천리는 이제 퇴계에 의해 도산의 공간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리고 程?에 의해 제기된 敬은 완락재에서 퇴계에 의해 실천되었다. 그는 완락재에서 敬과 義, 無極과 太極, 陰陽과 五行의 오묘함을 부단히 탐구하였고, 자연의 理가내 마음에 이른다는 `理到`설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퇴계는 「도산잡영」을 통해 도산에 펼쳐진 자연이 그의 마음에 다가와서 하나가 되는 理學의 최고 경지인 和의즐거움을 맛보았다. 퇴계의 「도산잡영」은 이미 당대의 학자에게도 크게 주목 받던 작품이었고, 후대의 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퇴계의 제자인 奇大升은 「도산잡영」詩韻에 의거하여 퇴계 이학의 함의를 드러내었다. 특히 기대승은 「완락재」시에서 涵養공부를 강조하였고, 敬과 義가 순환하는 묘리의 탐구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퇴계의 「도산잡영」을 그대로 모방하여 시를 짓고 기문을 쓴 학자는 李象靖이다. 이상정의 「高山雜詠」은 주자가 武夷九曲을 경영하고 「무이정사잡영」을 읊었던 것과 퇴계가 도산을 경영하고 「도산잡영」을 읊었던 것을 수용하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산수 공간을 시로 읊은 것이다. 이상정은 삼라만상과 사귐에 자신의 즐거움이 삼라만상과 더불어 무궁하다고 하였다. 그는 퇴계의 이학을 정리하면서 산수로 대표되는 자연 속에서 `仁`과 `智`를 제기하여 퇴계의 이학의 최고 경지인 樂(즐거움)을 구현하려고 했다. 주자의 「무이정사잡영」에는 아직 敬과 義의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퇴계는 「도산잡영」에서 주자의 「觀書有感」등 작품에서 과감하게 이학에 해당하는 내용을 수용하여 도산을 이학의 공간으로 만들고 이학적 함의의 시를 읊었다. 그리고 程顥의 `天理`와 程?의 敬, 周敦?의 太極의 묘를 탐구하는 공간임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다. 퇴계가 구축한 이러한 理學의 詩세계는, 조선시대에 詩로서 이학을 논한 하나의 전형이 되어 그뒤기대승과 이상정 등 많은 학자들에 의해 더욱 闡明되고 전승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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