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姓氏)와 묘에 관하여
* 성씨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면서 부(父)의 성을 따르는 성씨 제도가 확립되었다. 같은 성씨라 하여도 모두 같은 혈족 즉 같은 시조의 후손인 것은 아니고 본(本)이 같아야 같은 혈족이다. 다만 동일한 본에서 본을 분할한 경우(예컨대 영산신씨와 영월신씨)에는 본이 달라도(同姓異本) 같은 혈족이다.
* 우리나라 성씨는 신라 6촌에서 비롯되었고 신라와 고려에서는 성을 왕으로부터 하사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조 중기까지는 백성의 절반 가까운 천민은 성이 없었다가 1909년 민적법시행으로 전국민이 성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성이 없던 천민들은 대성(大姓)을 선호하여 대성에 투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안동김씨와 같은 세도가는 투탁을 하는 자를 엄벌하기도 하고 족보편찬 시에 진골을 엄격히 심사하는 성씨도 있었으나 임란과 호란으로 절후되거나 상계를 실전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투탁과 가탁이 가능하였다.
* 세종실록과 1980년도 조사시에 성씨는 250개이었고(그 중 40%가 귀화 성) 2천년 인구조사시에 728개(약430개는 해방후 귀화인의 성)이었다가 최근 주민등록상 성씨는 5천여개이고 한자 없는 성씨가 4천개 이상으로 파악된다(귀화인이 2백만명을 넘어선 영향이다). 전통적인 성씨 약 290개중 40%는 인구가 1천명가량이고 하위 42개 성은 백명가량이라 한다. 고려 무신 척준경 처럼 후손이 없어서 사라진 성씨를 亡姓이라고 부른다.
* 현행법상 부모가 합의하면 모(母)의 성을 따를 수 있고, 동성동본 금혼은 우생학적으로 좋은 제도로서 고려말부터 엄격히 시행되었는데 2005년 폐지되었고, 이름은 성을 제외하고 5자까지 허용된다.
* 풍수들은 성씨(姓氏)라고 하면 시조가 누구이고 그분의 묘는 어디에 있는가를 떠올리게 된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그리고 사화로 인하여 후손들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선조 묘의 비석을 파묻고 도망다닌 탓으로 시조묘는 대부분 수백년 내지 천년 가까이 실전되었다. 끝내 찾지 못하면 단소를 차려 봉행한다.
* 인구가 많은 대성(大姓)과 인구가 적은 희성(希姓)의 차이는 번식력이 강한 유전자를 물러 받았는가의 여부가 관건이겠으나 각 성씨의 시조 묘를 간산해본 결과 의외로 대성의 시조 내지 중시조 묘 가운데 조선백대 명당의 상위에 속하는 명묘가 많았다. (2024.5)
첫댓글 오랜만입니다.. 건강 하시죠..^^
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