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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배론 성지
1. 배론성지 개발계획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위원장=배갑진 신부)가 마련하는 「신유박해 200주년 특강」두번째 강연이 5월 12일 오전 11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당에서 열린다. 「성지개발의 특성화 (배론 성지개발 계획)」를 제목으로 한 원주교구 여진천 신부의 강연을 미리 요약한다.
1) 성지 배론의 개요
충북 제천읍 구학 2리에 있는 성지 배론은 한국 천주교 역사상 중요한 세가지 사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첫째, 신유박해 발생시 배론에서 은신하고 있던 황사영은 이 곳에서 「백서」를 완성했다. 황사영의 「백서」는 초기 교회 신자들의 삶과 조선후기 정치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둘째,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요셉신학교」가 설립돼 최고 10명의 신학생들이 서양의 언어, 신학, 철학을 공부한 곳이다. 여기서는 신학생 교육 외에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 사전」편찬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셋째, 우리나라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묘가 있는 것이다. 1849년 서품받고 귀국 후 12년간 사목해 온 최양업 신부는 1861년 문경에서 과로로 사망했고 당시 신학교가 있던 배론에 묻혔다.
배론은 전형적인 「교우촌」이다. 황사영은 신자 김귀동이 배론에 있는 것을 알고 그의 집으로 찾아와 은신했다. 신유박해로 인해 황폐화된 배론은 40여년 뒤 장주기가 오면서 다시 신앙의 싹을 틔우고 신학교가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2) 배론성지의 과거와 현재
가) 연구현황
황사영 백서, 성요셉 신학교, 최양업 신부에 관계된 논문 다수.
나) 개발현황(연혁)
▷ 1899.9 장호원본당 부이용 신부가 배론신학교 방문
▷ 1936.8 일본인 사학자 야마구찌 황사영 토굴 답사
▷ 1940.9 최양업 신부 묘비 세우는 문제를 논의
▷ 1950. 6.25전쟁 기간 중 신학교 건물 전소
▷ 1972.8 성지개발 10개년 계획 수립(신학교의 정리 보존, 최양업 신부 분묘 단장, 사료전시관 건립, 성당과 피정시설, 성직자 묘소, 은퇴신부 요양시설 등)
▷ 1972.9 신학당 터 십자비 제막식 및 순교자 현양미사
▷ 1976.6 성지개발위원회 구성
▷ 1978. 서울대교구 양기석 신부 초대 성지 배론 관리소장에 부임, 1988년부터 현재까지 6대 배은하 신부
▷ 1982.6 성지배론 건물 축복식
▷ 1994.10 「두메꽃 피정의 집」준공
▷ 1999.9 「최양업 기념 대성당」축복식 예정
3) 개발계획에 따른 배론의 현재
가) 성지재산
성지의 모든 동산과 부동산은 원주교구 재단의 소유다. 1969년 이후 원주교구는 성지 개발을 위해 필요한 토지를 매입하였다. 성지의 재정은 순례자와 봉헌자의 성금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 성지시설
현재 시설물은 2000명 수용가능한 대성당과 성당 및 경당, 두메꽃 피정의 집, 십자가의 길, 유물관 등이 있으며 교우촌 복원과 교회사 연구소 건립이 준비 중이다.
다) 성지 행사 및 전례
배론 성지는 1972년부터 매년 순교자성월에 「순교자 현양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순례자를 위한 미사 및 강론, 십자가의 길, 피정 프로그램 등으로 진행된다.
라) 개발계획에 따른 배론의 미래
1) 전문가의 협조를 업어 성지개발에 필요한 토지를 매입, 계속적인 조림사업을 벌인다. 또한 남상교 성인이 순교한 인근 묘재성지와 연계하는 도보 순례 코스를 단장해 순례분위기를 조성한다.
2) 교우촌의 특성을 갈려 개인 및 가족을 위한 피정의 집을 마련하고 지속적인 순교자 영성 연구 운동을 펼친다. 그와 함께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전개하는 등 순교자 영성 연구 및 기도, 묵상의 공간으로 개발한다.
3) 순교자와 신앙선조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한국교회 통사 박물관」과 「교회사 연구소」의 설립을 추진, 신앙교육의 장으로 마련한다.
[가톨릭신문, 1999년 5월 2일, 여진천 신부(원주교구)]
가. 성지배론 역사의 땅, 성소의 땅, 교육의 땅, 거룩한 땅.
성지 배론은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다.
이곳은 오직 하느님만을 선택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화전과 옹기를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이다.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전례된지 얼마 안 되어 1791년 신해교란이 일어나자 교우들이 심심산골인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농사와 옹기구이로 살아가며 6개의 교우촌을 이루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곳이다.
나. 진사 황사영(알렉시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帛書)를 쓴 역사의 땅
황사영 알렉시오은 1774년 당시 유명했던 창원 황씨 가문에서 나고, 자는 덕소(德紹)요, 어려서부터 총명과 재덕이 남달리 뛰어나 이미 16세에 과거를 보아 진사에 장원 급제하였다. 정조대왕이 그를 탑전에 까지 불러 올려 기특하고 귀엽게 여겨 그를 어루만지고 그의 손목을 붙잡고 "네가 20세가 되거든 내게로 오라. 내가 네게 높은 벼슬을 주고 네게 나라의 큰 소임을 맡기겠노라"고하였다.
그때부터 사영은 임금님이 만지신 손목을 붉은 비단으로 감아서 만지지 못하게 하였다. 사영은 학문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 나라에서 유명했던 마재 정(丁)씨 가문을 찾아 약종(若鍾)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정약종은 이미 천주교를 믿고 있었으며 그의 성세 본명은 아오스딩이고 명도회(明道會)회장이었다. 그는 사영의 지혜와 총명에 실로 놀라마지 아니하였고 나라의 큰 벼슬을 하도록 가르치기 보다는 장차 교회의 큰 일꾼을 만들 야심으로 사영의 심리 동태를 오랫동안 면밀히 살펴보았다.
사영은 약종의 형인 약현의 장녀와 결혼하고 선생이요 처삼촌인 아오스딩으로부터 이미 감화되어 성교의 진실함을 터득하였고, 주문모 신부께로 인도되어 영세 입교하여 알렉시오의 세례명을 받았다. 알렉시오은 이때부터 세속의 공명과 영화는 뜬 구름 같이 여겨 교리 연구에만 열중하였고, 교회 안에서도 회장직을 맡아 성실하게 이행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그는 임금님의 총애와 특혜에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였다.
정조대왕은 사영이 천주학을 신봉한다는 소식에 적이 못마땅하게 여겨 불쾌한 듯 하였으나 젊은 사람이 공명을 그처럼 마다함에는 속으로 깊이 감탄하였다. 임금님의 사랑을 톡톡히 받게 될 사영에게 크나큰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그의친척과 친지들은 몹시
나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그해 정초에 지명수배되어 스승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이곳 저곳 피하다가 10일 이내로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의 길을 떠났다. 남이 자신을 알아보기 쉬웠던 탐스러운 수염을 자르고 상복을 입고 2월 15일에 서울을 빠져 나와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마침내 제천 배론 교우촌에 숨어들어 왔다.
이곳에서 이상주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옹기점 옆에 토굴을 파 그 속에서 8개월간 은거하면서 김한빈(베드로)와 황심(토마스)를 외부 연락원으로 교회 소식을 듣곤 하였는데, 8월 23일 황심으로부터 주 신부의 자수와 그의 처형 소식을 듣고 낙심천만 끝에 의분을 이기지 못해 북경 주교께 올리는 탄원서를 명주에 써 옷 속에 넣어 황심과 옥천희를 시켜 북경에 보내기로 계획을 짰었는데, 9월 25일 황심이 먼저 잡히고 4일 후 사영이 잡힘으로 백서는 물론 모든 비밀이 그 주인(황사영)과 함께 포도청으로 압송되고, 10월 3일에는 의금부로 이송되어 23일간 취조와 형벌 끝에 11월 5일 대역부도 죄인으로 나이 29세에 극형에 처단 되었다.
다. 백서의 발견 입수 경위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古今天下)에 둘도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정부는 이를 의금부 창고 속에 집어 넣어 근 백년 동안 숨겨오다가 1894년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할 때 관계관이 이것은 필연코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따로 간직해 두었다가 그의 친구인 천주교인 이건영(李健榮, 요셉)에게 넘겨주고 이씨는 민 주교께 바쳤던 것이었다.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민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기념품으로 봉정하였다. 민 주교는 1924년 이 백서의 실물대사본 2백 여 매와 불문 번역본을 그때 교회내외 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라. 백서 내용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 122줄을 13,384자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히 써진 것이다. 비록 황사영 자신이 쓴 글이나 자기 이름은 숨기고 황심(토마스)등이라 했음은 우선 사영의 겸허한 마음의 표현이요, 사영의 판단에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주교와 신부들을 만났으므로 누구보다도 신임을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제1부분은 신유년 박해에 순교한 이들 중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필두로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제2부분은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의 골육 상잔의 당쟁(黨爭)이었음을 필역하고, 제3부분은 빈사위기에 처한 교회의 희생과 동족학살의 구원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등 자신의 사견을 진술하였다.
마. 황사영 토굴의 위치 확인 및 복원
조선 총독부 시대 일본인 야마구지(山口正之)씨가 1926년에 배론을 답사하고 황사영이 1801년에 8개월간 은거했고, 또 백서를 쓴 토굴을 찾아 그의 저서 조선서교사(朝鮮西敎史)에 "문제의 토굴은 봉양면 구학리 646번지 최재현씨 집 뒷뜰 안에 있다. 여기는 1866년 박해에 처형된 불국인 부루띠에 신부가 1858년경 신학교를 설립했던 유적지이기도 하다. 토굴의 구경(口經)이 약 1미터반 양쪽을 돌로 쌓아올리고 다시 큰 돌로 천장을 꾸몄다. 당일은 매몰되어 있는 까닭에 굴 속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견해서 옹기굴의 요적임을 주찰 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1) 구학리 646번지가 바로 신학당이 있었던 자리로 1976년 10월 18일자 제천군에서 발행한 지적도 등본으로 확인되었고,
2) 야마구지씨가 답사할 때 집주인인 최재현씨가 1858년경의 신학교 교사(校舍)였음을 확증하였고,
3) 이 집 뒤뜰 안에 옹기 가마와 토굴이 있다고 했다.
이 646번지 옛 신학당 터에 옛 집과 그 위 사당 건축공사에 최근 1978년 늦은 가을 11월 11일 지붕 기와 밑에 깔 흙을 올리기 위해 옆 땅을 헤쳤는데 아주 까맣게 탄 돌들이 나왔고 그 밑에는 좋은 진흙이 굉장히 많이 있었고 그 위에는 옹기 가마 자리로 알아볼 수 있으리만치 엇비슷한 언덕에 중간 양쪽으로 얕은 돌담이 3층으로 쌓여 있고 맨 꼭대기에 땅이 꺼진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수목이 자라 있지 않고 2,3년 전에 심은 소나무가 여기 저기 있을 뿐이다. 여기가 옹기 가마와 토굴 자리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황사영이 1801년에 체포되고 옹기점 주인 김귀동 역시 체포되어 순교한 후 이 옹기점은 없어진 것으로 봐야 하고 그후 50여 년 후 646번지 장낙소 살림집에 신품 학당이 시작되었는데 그 집을 장 요셉이 지었는지 원래부터 있던 집을 사서 들었는지 알 수 없다. 처음부터 있던 집이라면 김귀동이 지은 집이 토굴 터 였을지도 모른다.
일본인 야마구지씨가 다녀간지도 벌써 50여 년이 지났고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 공사를 하면서 신학당 자리에서 3,4미터 앞에 담장을 싸려고 기초를 팠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자갈과 모래만이 나왔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1850년대에는 개울이 학당 지척에서 흘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때 학생들이 소리내서 공부를 하지 못했음을(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들킬까 해서) 가히 알수 있다. 오늘의 개울은 학당에서 90미터 밖에서 흐르고 있다. 현재의 토굴은 1988년에 복원했다.
2. 배론성지에서 만난 최양업 신부
교우촌 찾아 밤새워 걷던 길 위에서 선종한 ‘땀의 순교자’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 맞는 삶을 산 목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지만, 최양업(토마스) 신부 또한 그 고백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늘 “하느님과 함께 있기가 소원”이라고 고백하던 최 신부와 시시때때로 옥죄어 오는 박해 속에서 신음하는 조선 교우들의 만남은 11년 6개월에서 시간이 멈췄다. 새로운 조선인 사제가 탄생하기까지 그 뒤로 35년 10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느님 자비와 섭리 없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자신을 통해 이뤄지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도 허사라는 걸 최양업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최 신부는 경상도 남동쪽 끝자락 죽림공소에 숨어 지낸다. 최 신부가 1860년 9월 3일 자로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19번째 마지막 서한에는 이 같은 영성이 아주 잘 드러난다.
“전능하시고 인자하신 하느님, 저희 잘못과 죄과를 기억하지 마시고, 저희 죄악대로 저희를 벌하지 마소서! 저희는 죄를 지었고, 너무나 많은 불의를 행했습니다. 당신이 만일 저희 불의를 헤아리신다면 누가 감히 견딜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 닥친 박해 때문에 교우들이 모든 걸 잃고 이리저리 쫓기고 체포되는 상황을 최 신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신앙을 증오하는 무리가 천주교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언하는 상황에서 최 신부는 시편 130장 3절의 구절을 인용하며 간절한 기도를 바친다.
배론성지와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부주임 성원경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은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돼 만 40세 젊은 나이로 선종하시기까지 자신이 원했던 삶보다는 ‘순명하는 삶’을 사셨다”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매년 7000리씩 걸어 신자들을 만나고 사랑을 주셨던 그 지극하신 사랑의 삶”이라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최 신부는 자기 죽음을 이미 내다보고 있었다.
선종하기 10개월 전에 스승 신부들에게 보낸 마지막 서한 끝 부분에 이 같은 정황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해오는 포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최 신부는 갈수록 쇠약해졌다. 하루에 80∼100리씩 걸어 교우촌을 찾아 신자들을 사목해야 했으니 지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일한 조선인 사제였기에 선교사들보다는 운신의 폭이 훨씬 자유로웠고, 일주일에 제대로 잠이 든 날이 며칠 되지 않을 정도로 사목 활동 반경이 넓었다. 밤새워가며 걷고 걷던 길목에서 결국 그는 과로와 장티푸스가 겹쳐 쓰러졌다. 배론에서 급히 달려온 푸르티에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예수, 마리아”를 되뇌던 그는 1861년 6월 15일 선종했다. 선종지는 문경 교우촌, 혹은 충청도 진천공소로 알려졌지만, 만 40세 젊은 나이에 이 땅의 유일한 조선인 목자는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의 유해는 선종지에 임시 매장됐다가, 그해 11월 초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배론성지로 이장됐다.
1861년 9월 4일 자로 베르뇌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은 최 신부가 박해시기 조선 교회에 얼마나 귀한 사제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굳건한 신심과 영혼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신부 최양업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은 뒤 저에게 자기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로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최 신부가 묻힌 배론은 조선시대 때 제천현 근우면 팔송정리 도점촌으로 불리던 마을로, 지금의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구학리)이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살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파괴됐다가 1840년대에 다시 교우촌이 형성됐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장주기(요셉) 회장과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순교하면서 ‘순교자들의 요람’이 됐다.
계곡이 배(舟)의 밑창을 닮았다는 원주교구 배론성지는 이제 ‘거룩하고 아름다운 하느님의 정원’으로 조성돼 있다. 오늘의 배론성지는 ‘세 가지 보물’로 유명하다. 시기적으로 보면, 신유박해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이 1801년 2월부터 9월까지 머무르며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쓴 토굴이 첫 번째이고, 1855년에서 1866년까지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의 역할을 겸했던 성 요셉 신학당이 두 번째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세 번째다. 그중 장주기 회장의 집에 세워졌던 성 요셉 신학당과 묘소가 최 신부와 직접적 연관을 맺고 있다. 최 신부는 1855년 매스트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배론 성 요셉 신학당에 들러 신학생들을 돌봤고, 1855년 10월 8일 자 11번째 서한을 배론에서 쓰기도 했으며, 사후에는 배론에 묻혔다. 이에 배론성지는 최 신부 탄생 200주년과 선종 160주년을 기념, ‘땀의 순교자, 길 위의 사도, 최양업 신부님의 길을 따라서’라는 이름으로 연중 주말 2박 3일 피정, 교구 피정과 연동해 1일 피정을 진행하고 있다.
‘무덤 지기’를 자처하는 배론성지와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주임 배달하 신부는 “최양업 신부님께서 12년간 목자로 사목하셨던 시간은 지금의 코로나보다 더 즉각적이고 고통스러운 환란의 시대였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신부님은 당신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면서 “하늘나라에서 신부님을 만나기 전 이승에서 신부님을 제대로 만날 마지막 기회로 여기고 신부님의 삶을 읽고, 배우고, 듣고, 걷겠다”고 밝혔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3월 21일, 오세택 기자]
3. 봉헌식 앞둔 원주교구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누구든 언제든 오셔서 기도에 맛들이세요!
가톨릭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다. 기도를 빼놓고는 신앙을 논할 수도 없고, 각자의 믿음을 성장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나 어느 때부턴가 신앙인들은 기도를 잊고 산다. 바쁘게 사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께 무언가 한마디 청하는 것조차 망설여지게 됐다.
이에 원주교구가 한국 교회 신자들의 기도생활을 돕고자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를 세웠다. 신앙생활의 바탕을 이루는 기도의 의미를 다시금 익히고, 기도를 통해 각자가 하느님을 만나도록 지어진 새로운 영적 공간이다.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봉헌을 앞두고 있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배론성지에 자리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를 미리 다녀왔다.
배론성지가 품은 기도 공간
“누구든지 언제든지 와서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기도를 배우고 실천하자.”
원주교구가 건립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의 이념이다. 기도학교는 다양한 종류의 가톨릭 기도를 다시금 깊이 익히고, 묵상하고, 바쳐보며 하느님과 만나고 일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2018년 원주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첫 삽을 뜬 기도학교는 지난해 말 완공해 문을 열었다.
신해(1791년) ? 신유(1801년)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농사짓고, 옹기를 구우며 생활했던 교우촌 위에 조성된 배론성지가 기도학교를 품고 있는 것 또한 특징이다. 백운산과 구봉산 자락 한가운데 아름드리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성지는 1801년 황사영(알렉시오)이 토굴 속에서 백서를 쓴 곳이자,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인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다. 순교자들이 숨어서 바친 기도 소리와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에서 울려 퍼지던 기도가 이제 기도학교를 통해 이어지게 된 것이다.
기도학교는 연면적 약 6800㎡, 건축면적 약 3700㎡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건립됐으며, 성당과 강당, 성체조배실, 기도 정원을 비롯해 한 번에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인 및 4인용 숙소 100여 실과 식당을 갖추고 있다. 설계는 (주)종합건축사사무소 디자인캠프 문박 디엠피가, 시공은 두산건설이 맡았다.
기도학교는 △ 기도 △ 친교 △ 교육 공간으로 구분 지어 설계됐다. 가장 중요한 기도 공간을 위해 곳곳에 정원을 두는 여백의 미를 살렸다. 하늘에서 보면 ‘우물 정(井)’ 모양을 띤 기도학교는 가운데 중정(中庭)에 자리한 묵상의 정원을 비롯해 야외 로사리오 정원, 노아의 정원 등 곳곳이 홀로 또 같이 기도와 묵상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중대형 강의실에서는 신자들이 기도가 뭔지부터 각 기도가 지닌 본래 내용과 의미 등 ‘기도의 맛’을 들일 수 있는 교육과 토론의 장을 열 수 있다.
작고 고요한 옛 성에 온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성체조배실은 옅은 채광을 받으며 24시간 고요함 속에 잘 익힌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꾸몄다. 각 숙소에서는 성지의 사계절을 내다보며 묵상할 수 있다. 유럽의 수도원 내부를 연상케 하는 기나긴 복도와 휴게 공간에서는 신자들이 담소와 함께 기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새하얀 백색 공간 성당과 빛이 새어 들어오는 1층 회랑은 신비로움마저 자아낸다.
개인 · 단체, 자유롭게 피정 가능
개인 단체 누구나 원하는 주제와 형식으로 피정을 할 수 있고, 기도와 관련해 교육 프로그램을 의뢰해 참여할 수도 있다. 현재 사제와 수도자가 성경 및 기도 주제로 진행하는 신청형 피정도 접수하고 있다. 또 ‘쉼’, ‘순교자의 길’, ‘인생의 길’ 등을 주제로 개인이나 가족 평일 피정도 가능하다. 기도학교는 내년 가경자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과 연계해 순례와 함께하는 기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다. 가톨릭 기도의 역사와 배경을 깊이 공부하고, 나에게 맞는 기도를 찾도록 돕는다는 계획이다.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주임 배달하 신부는 “기도학교는 우리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 신앙을 기도와 연계해 체험하고 익힐 수 있는 곳”이라며 “기도의 성격과 형태가 모두 다르듯이 각 개인에게 잘 맞는 기도를 찾아주고, 기도가 신앙생활에 활력소가 되도록 돕는 기도학교를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는 8월 15일 오전 10시 30분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서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한다. 피정 접수 및 문의 : 043-651-4563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를 잇는 끈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원주교구장 조규만 주교는 7월 30일 교구청 집무실에서 만난 자리에서 “3만여 명에 이르는 후원자들의 정성으로 지어진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가 진정 하느님을 만나 대화하고, 기도 안에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기도학교가 지어진 과정 또한 “기적과 같다”며 원주교구 사제단과 교구민, 서울대교구 등 도움을 준 이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했다.
원주교구는 기도학교가 문을 연 올해 ‘기도의 해’를 보내고 있다. 조 주교는 올해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를 주제로 한 교구장 사목 교서를 통해 “기도하지 않고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기도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며 기도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조 주교는 “로마 유학 당시 지도 교수님께서 하셨던 ‘한국에 가면 기도학교를 한 번 해보라’는 권유를 늘 가슴에 지녀왔다”며 “누구나 와서 기도하고 성체조배하고 성사에 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그 뜻을 품은 지 30년 만에 이루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도학교’인 만큼 기도를 더 잘 알고 바치기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조 주교는 기도학교 설계 단계부터 기도와 교육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실무자 및 기도학교 건축위원회 사제들과 논의하며 꼼꼼히 신경 썼다. 조 주교는 올해 벌써 두 차례 기도학교에서 신자들과 함께하는 1박 2일 피정을 지도했다.
조 주교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소중한 친교를 나누고, 또 문제 해결도 함께 해나가듯이 우리는 기도로 하느님께 청원하고, 나아가 그분께 감사하며 친교를 나눌 수 있다면 기도의 의미를 더욱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 주교는 기도학교 봉헌식에 맞춰 가톨릭 주요 기도의 내용을 익히고, 스스로 묵상하며 바칠 수 있도록 집필한 「주님, 날마다 기도하게 하소서」를 발간할 예정이다. 조 주교는 책에서 “기도는 아름다운 시간 낭비”라고 했다.
조 주교는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기도하는 시간이 비생산적이고, 시간낭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아무리 바쁜 삶 속에서도 자기 시간을 기꺼이 주님과 함께한다면 그만큼 아름다운 낭비도 없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기도는 신앙과 사랑을 성장시키는 최고의 표현입니다. 훗날 저는 하느님을 만날 때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 하고 질문하신다면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제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학교에 오셔서 편안히 기도 중에 하느님을 만나고, 주님 사랑 키우는 아름다운 낭비를 함께해봅시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9일, 이정훈 기자]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년)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옆에 세워진 성 장주기 요셉 흉상.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1808-1857년)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1830-1866년)
복원된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옆에 세워진 순교자 푸르티에 신부상.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 신요안(申妖案).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신부(1828-1866년)
복원된 배론 성 요셉 신학교 옆에 세워진 순교자 프티니콜라 신부상.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박(朴).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 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한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1775-1801년)
배론 성지에 세워진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동상.
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 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년)
탄생과 성장
배론 성지의 최양업 토마스 신부상.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뒤 신자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파견하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 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조선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곧바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토마스를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 토마스는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았다. 이어서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 토마스는 1836년 12월 2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경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다음 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 6월 7일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 마카오로 돌아왔다.
그러나 신학생 최 토마스는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을 기대하고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를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다음에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 토마스와 김 안드레아는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으로 들어가고자 입국로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 토마스는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에게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 성모 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을 따라서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 토마스는 1844년 12월 10일경에,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서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사제 수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 토마스 부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의 애통한 소식을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고,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여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 …… 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조선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 토마스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에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조선의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그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조선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하자마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와 5천여 리를 걸어다니며 3,815명의 신자를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11년 6개월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 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토마스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 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그리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긴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조선 천주교회를 도와주십사고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은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저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덮쳐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신심과 열심, 그리고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에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뒤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 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 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 최 토마스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이 서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장 최 토마스 신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선종 뒤,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최 신부의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고, 그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출처 :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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