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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저서에서 참고 글 2 / 주님의 응답으로 오는 계시와 지각,
그리고 신성한 진리의 입류와 인간의 깨달음에 대하여
- 말씀을 읽을 때 내적인 것이 열려 천국의 빛 속에 있는 자들은
깨달음 얻어 그것을 내부에서 본다.
내부에서 외부를 보는 것은 유입에 의해서다.
천비 1954
사람의 내적 시각의 경우에서 보듯
더 높은 것에서 더 낮은 것으로, 내부에서 외부로
보는 행위를 유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유입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 더 높은 것에서 더 낮은 것으로,
또는 같은 의미에서 내부에서 외부로 보는 행위를
유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보는 것은 유입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적 시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 내적 시각이 끊임없이 그의 외적 시각,
즉 눈의 시각으로 유입되지 않는 한
이 눈의 시각은 어떤 대상도 파악하거나 분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을 통해 눈이 보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내적 시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보는 것은 결코 눈이 아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눈이 본다고 믿는 사람은 그만큼 감각의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사실 눈을 통해 보는 것은 그의 영의 시각, 즉 내적 시각이다..’
천비 10551
말씀을 읽을 때 깨달음 속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내부에서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인 것이 열려 있고,
내적인 것이 열릴 때 그것은 천국의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사도 말씀이 읽힐 때 그것을 지각하는데
천사는 그것을 영적으로,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자연적으로 지각한다.
내적인 것이 열린 사람도 말씀을 영적으로 지각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의 영적 사고가 겉 사람의 자연적 사고로
흘러 들어와서 거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사고다.
‘.. 여기서 외부(without)에서 보는 것이 무엇이고
내부(within)에서 지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 하겠다.
말씀을 읽을 때 깨달음 속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내부에서 본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적인 것(internal)이 열려 있고,
내적인 것이 열릴 때 그것은 천국의 빛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 빛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흘러 들어와서 깨닫게 한다. ·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이 빛이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지식들로 흘러드는데
이 지식들은 자연적인 빛 속에 있고
이 지식들로부터 사람은 생각하기를, 마치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는 유입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깨달음 속에 있다는 것을
그는 다양한 표시들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리를 위해 그리고 삶의 선을 위해
진리를 아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 한,
또 그가 삶을 위해 신성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한,
자신이 깨달음 속에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은 속은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으로부터 신성한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모든 깨달음은 주님이 사랑받을 때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또한 깨달음을 가져다주는
유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천사도 말씀이 읽힐 때 그것을 지각하는데
천사는 그것을 영적으로, 그리고 사람은 그것을 자연적으로 지각한다.
내면이 열린 사람도 말씀을 영적으로 지각하지만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그의 영적 사고가 겉 사람의 자연적 사고로 흘러 들어와서
거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사고다..
.. 하지만 그들은 내적인 사고를 구성하는 관념이
영적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이것들이 자신의 차원에서 아래로 유입할 때
자연적 관념으로 바뀌고 나서 다른 모양과 모습을 취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겉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자연적 사고뿐이기에
영적 사고가 흘러들어올 때
상응에 의해 그 관념이 자연적 사고로 바뀐다.
내적인 사고를 구성하는 영적 관념이
자연적 관념으로 바뀌고 나서 다른 모양과 모습을 취하기에
자연적 관념만 인식하는 인간은
그것이 영적 관념으로부터 온인 줄 알지 못한다.
비록 겉 사람은 자연적 사고로부터 깨달음을 얻는다고 여기지만
정작 깨달음을 주며 주님의 유입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은
내적인 사고다.)
- 이해는 내적으로 보는 것이며 이해의 활동은 생각으로 나타난다.
세상에 있는 대상들은 태양 빛에 의해 눈을 통해 들어와
시각적 인상으로 기억에 저장된다.
그것들이 기억에서 떠올려지는 것을 내적 시각인 이해가 보고
그때 그것들은 생각으로 나타나며
또 그것을 더 내면적인 빛으로 보는 것이 지성이다.
천비 8780, 2245, 4526
이해는 내적 시각, 곧 내적으로 보는 것이며
이 내적 시각은 세상의 빛 그 위에 있는 빛 속에서 기능한다.
보는 것이 이해의 기능이라면 그 이해의 활동은 생각으로 나타난다.
‘.. 이해가 신성한 빛(천국의 빛)으로 깨우침을 받게 될 때
무엇이 진리인지 진리가 되는 것을 지각하고
그것을 내적으로(inwardly) 시인하고 마치 그것을 보듯이 한다..’
(천비 8780)
‘.. 이해는 내적 시각, 곧 내적으로 보는 것이고
이해의 활동이 생각이다. 즉 이해에서 생각이 일어난다.
또 내적 의미에서 '보는 것'은 이해이고
'바라보다'는 내적 시각 또는 이해의 활동인 생각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내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천비 2245)
‘.. 눈은 이해와 상응하기에
눈의 시각은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련이 있다.
이해는 내적 시각이며 이 내적 시각은 세상의 빛,
그 위에 있는 빛 속에서 기능한다..’ (천비 4526)
천비 9394
이해가 비록 내적 시각이지만 그것은
물질계로부터 받은 인상들을 저장한 기억의 지식들을
생각으로 떠올려 볼 수 있다.
겉 사람이 육체의 눈을 통해 물질계를 보듯
속사람은 이해를 통해 겉 사람에 있는 기억의 지식들을 본다.
.. 기억 속에 배워 저장된 모든 것들은
그 기억으로부터 이해의 시각 앞에 불러낼 수 있는데
그것을 기억의 지식들(memory-knowledges)이라고 하며
그것들 자체로 자연적인 사람, 또는 겉 사람의 이해 부분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기억의 지식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보는 일종의 거울처럼
속사람 또는 합리적인(rational) 사람의 시각에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풀과 꽃,
여러 종류의 농작물과 나무로 가득한 들판이나
여러 가지 유용하고 즐거운 물건으로 장식된 정원이
물질계에 있는 ‘겉 사람의 시각’(육체의 눈의 대상)에 속하는 것처럼
이 기억의 지식들은
‘속사람의 시각’(내적 시각인 이해의 대상)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인 내적 시각은
기억을 형성하는 사물의 들판이나 정원에서
그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일치하는 것만을 보고
또한 그가 사랑하는 주요 원리와 일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천비 4408(천비 1953 참고)
세상에 있는 대상들은 태양 빛에 의해 눈을 통해 들어와
시각적 인상으로 기억에 저장되고
그것들이 기억에서 떠올려지는 것을 내적 시각인 이해로 볼 때
그것들은 생각으로 나타나며
또 그것을 더 내면적인 빛으로 보는 것이 지성이다.
눈의 시각과 이해의 시각 사이에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잠시 멈춰서 성찰하는 사람에게 분명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대상들은
각각 태양 빛을 끌어들임으로 눈을 통해 들어와
시각적 인상(impressions)으로 기억에 저장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기억에서 떠올리는 것들은 그 사람에게 내적으로 보인다.
그것들은 사람의 상상력의 근원이며,
철학자들은 그 관념을 물질적 관념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람이 이러한 대상들을
자신 안에서 더욱 내적으로 볼 때 그것들은 생각으로 나타나며
다시 시각적 인상과 비슷한 것으로,
그러나 더 순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관념을
비물질적이라고 부르고 또한 지성적이라고 부른다.
내면적인 빛 안에는 생명이 있고 따라서 지성과 지혜가 존재하며
그 빛이 내면적인 시각을 비추고 외적인 시각을 통해 들어온
것들과 만난다는 것은 매우 명확한 사실이다.
또한 그 빛의 활동은
세상의 빛에 존재하는 것들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청각을 통해 들어오는 것
역시 세상의 빛으로부터 오는 시각적 이미지와
같은 형태로 내부에서 변환된다.
- 천사와 영들이 사람에게 유입할 때
천비 2470
생각을 구성하는 내면적 기억에 속하는 관념들(ideas)은
마치 그들의 그릇처럼 외면적 기억의 내용으로 흘러들어가서
거기서 그것들과 합쳐진다.
그때 그의 내면적 기억은 외면적 기억과
거의 하나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은 살 동안
자신에게 내면적 기억이 있다는 것을 거의 알 수 없다.
천사와 영들이 사람에게 말할 때
그들의 관념들이 사람의 언어 표현(단어)으로 흘러든다.
..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자신에게 내면적 기억이 있다는 것을 거의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때 그의 내면적 기억은
외면적 기억과 거의 하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을 구성하는 내면적 기억에 속하는 관념들(ideas)은
마치 그들의 그릇인 것처럼 외면적 기억의 내용으로 흘러들어가서
거기서 그것들과 합쳐진다.
이것은 천사와 영들이 사람에게 말할 때와 비슷하다.
그때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수단인 관념들은
사람의 언어 표현(단어)으로 흘러든다.
그들의 관념들은 그 표현들과 너무나 매끄럽게 합쳐져서
그들은 자신이 그 사람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전적으로 믿는다.
그런데도 사실 관념들은 그들의 것이지만
이 관념들이 흘러들어가는 표현들은(단어들은) 그 사람의 것이다.
이것은 내가 영들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주제이다.
브루스목사 요한복음 서문에서
천사들은 상응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라는 저장소에서 발견하는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에 옷을 입힘으로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
‘.. 천사들의 말은
자연계의 대기를 통해 전달될 수 없고
따라서 외적인 방법으로 해서 인간에게 올 수 없다.
천사들은 상응에 의한 내적인 방법으로 사람들과 말한다.
천사들은 상응에 의해
인간의 기억이라는 저장소에서 발견하는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에 옷을 입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각 사람과 그들의 언어로 말한다..’
천국과 지옥에서
256
천사나 영은 그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해서는 안 되고
오직 사람의 기억만을 사용해야 한다.
천사나 영은 그 자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의 기억만을 사용해야 한다.
천사와 영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있다.
만일 어떤 영이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에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그 때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자기 것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영의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전에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떤 것을 회상하는 것과 같다.
허락하심에 따라 나는 이것을 경험해 보아 알게 되었다.
이런 현상 때문에 고대인들 중에는
자기들은 수천 년을 지나 자기들의 전생과
전생에 행한 모든 것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돌아왔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때때로 전에
보지도 듣지도 않은 것이 기억처럼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영들이 그 자신의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의 생각 안으로 유입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298
영들을 통해서 사람에게 유입되는 것은
그들의 기억과 생각이 아니라 오직 선과 악에 대한 애정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자유가 있고 선택을 할 수 있다.
영들을 통해 흘러드는 애정은
사람의 애정과 조화되는 정도만큼 그의 생각 속에 받아들여진다.
이는 사람의 내적 사고가
그의 애정, 즉 사랑과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천국에 결합된 영들이나 지옥에 결합된 영들 모두
결코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사람에게 유입시키지 않는다.
만일 영들이 자기들의 기억과 생각을 가지고
사람에게 유입해오면
사람은 영들의 것을 모두 자기 것으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들을 통해 사람에게 흘러드는 것이 있는데,
천국으로부터는 선과 진리를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지옥으로부터는 악과 거짓을 사랑함에 따르는 애정이 유입된다.
그러므로 흘러드는 애정이
사람의 애정과 조화되는 정도만큼
그 애정은 그 사람의 생각 속에 받아들여진다.
사람의 내적 사고는
그의 애정, 즉 사랑과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흘러드는 애정이
사람의 애정과 조화되지 않으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영들을 통해서 생각은 사람에게 들어오지 않고
오직 선에 대한 애정, 악에 대한 애정만 들어오기 때문에
사람에게 자유가 있고 따라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생각에 의해
선을 받아들일 수도 악을 거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이 그의 애정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받아들인 것은
무엇이든 자기 것이 된다.(appropriated to him)
반면 애정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으로 천국으로부터 사람에게 유입되는 선한 입류와
지옥에서 사람에게 유입되는 악한 입류의 본질을 알 수 있다.
- 합리적인 사람, 속사람은 겉 사람에 속한 것을 볼 수 있고
따라서 그들은 유입을 통해 신성한 진리가 자연적 차원으로
내려온 것을 지식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의 지식’으로부터 생성된 자연적 진리에
천적인 것들이 흘러들어 생명을 주면
기억의 지식을 통해 합리적 진리를 얻게 된다.
천비 1944
합리적인 사람(합리적인 마음, 합리성)은
자기 안에 진리와 선에 모순되고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태어나고
겉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주님으로부터 인식할 수 있다.
‘.. 합리적인 사람은 자기 안에 진리와 선에 모순되고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생명을 받고, 모태에 있고, 태어난다고 말하며
그러한 악과 거짓을 제거하고 정복하고자 할 때
점점 더 합리적으로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이것을 보고 인식할 수 없다면,
그가 아무리 합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합리적인 마음은 속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수단이며,
따라서 겉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을 주님으로부터 인식할 수 있다..
천비 3391
겉 사람에 속한 것을 보는 것은 속사람이고
따라서 지식에서 진리를 보는 것은 속사람이며
지식은 자연적 인간에 속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합리적 개념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신성한 진리는 합리적인 마음을 거쳐 자연적 부분으로 흘러들어
그곳에 마치 거울에 비친 많은 사물들에 의해 생성된
형상(image)처럼 나타나기에
속사람은 지식을 통해 자연적 차원으로 내려온 진리를 볼 수 있다.
창 26:8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 따라서 '창문으로 내다보는 것'은
보이는 것들, 즉 일반적으로 겉 사람에 속한
지식과 같은 것들을 내적 시각을 통해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개념 또는 이와 동일한 것으로
외현(appearances)의 진리, 다시 말해 영적 진리는
지식이 아니라 지식 그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합리적 인간에 속하고
따라서 속사람에 속하기 때문이며
겉 사람에 속한 것을 보는 것은 속사람이고
따라서 지식에서 진리를 보는 것은 속사람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자연적 인간에 속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합리적 개념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신성한 진리는 합리적인 마음으로 흘러들고
합리적인 마음을 거쳐 자연적 부분으로 흘러들며 그곳에 마치
거울에 비친(반영된) 많은 사물들에 의해 생성된
형상(image)처럼 나타난다.’
천비 1495
유입의 질서는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유입하여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섬기도록 적응시키고
같은 방식으로 영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에,
또 합리적인 것 역시 기억 속의 지식에 유입하여
이를 자신에 적응시키는 것이지만 사람에게는 역방향으로 보인다.
사람이 교육을 받을 때 기억의 지식에서 합리적 진리로 나아간다.
즉 기억의 지식을 통해 합리적 진리를 얻는다.
.. 사람이 교육을 받을 때 기억의 지식에서 합리적 진리로,
나아가 지성적 진리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천적인 진리로 진행된다.
기억의 지식과 합리적 진리에서 지성적 진리를 매개로 하지 않고
천적 진리로 곧바로 진행한다면 천적 진리는 해를 당하게 된다.
기억의 지식을 통해 얻은 합리적 진리와
천적 진리를 연결하는 것은
지성적인 진리를 매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유입의 질서는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유입하여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섬기도록 적응시키고
같은 방식으로 영적인 것이 합리적인(rational) 것에 유입하여
이를 자신에 적응시키고
또 합리적인 것 역시 기억의 지식에 유입하여
이를 자신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린 시절에 교육을 받고 있을 때는
사실 같은 질서가 존재함에도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즉 그 사람은 기억의 지식에서 합리적인 것에로,
또 그것에서 영적인 것에로,
그리하여 마침내 천적인 것에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도록 교육을 받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
천적인 것에로의 한 길이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교육은 단지 하나의 길을 여는 것이다.
그 길이 열리는 만큼, 또는 같은 정도로 용기가 열려지는 만큼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그것에 따라 질서 있는 입류가 이루어지는데
거기에는 천적-영적인(celestial-spiritual) 것들로부터 온
합리적인 것들이 입류한다.
합리적인 것들 안에는 천적-영적인 것들이 입류하고
천적-영적인 것들 안에는 천적인 것들이 입류한다.
이들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들은
끊임없이 그들 자신을 나타내며 열려지려는 용기들을
그들 자신을 향해 준비시키며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기억의 지식의 기능이나 합리적인 기능은
그 자체로는 죽었으나
다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현을 가지는 것뿐인데
이는 그것들에 입류하는 내면적 생명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각’은 청각과 후각이 귀와 코의 감각이듯 눈의 감각을 뜻하나
때로는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각도나 입장을 뜻하고
‘시력’은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능력을,
‘시야’는 보는 범위를 뜻한다.)
천비 1928
‘기억의 지식’에서 비롯된 진리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부터 입류되는 진리와 결합될 때,
즉 진리들이 천국적 사회들의 형태를 따라 결합될 때
주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이
‘기억의 지식’으로부터 생성된 자연적 진리에 흘러들어 생명을 준다.
이처럼 신앙에 속한 진리가 생명을 가지려면
사람이 인애 안에서 살아야 한다.
.. ‘기억의 지식’에서 비롯된 진리가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으로부터 입류되는 진리와
결합 또는 연합되었을 때
그 진리는 생명에 도달했다고 언급된다.
왜냐하면 ‘진리에 속한 생명’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것들의 결합, 즉 진리들의 결합은
그들과 상응하는 천국 안에 있는 사회들의 결합과 꼭 같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의 내면적인 것에 한한 한
하나의 작은 천국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것들, 즉 진리들이
천국적 사회들의 형태를 따라 결합되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생명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주님에게서 비롯된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이
적응해서 흘러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양측이 비슷할 때,
즉 사람의 작은 천국(little heaven)이
대천국(Grand Heaven)에 상응하는 형상일 때
먼저 생명을 받는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천국적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없다.
스스로 우주적 천국을 다스리시는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의 겉 사람, 즉 주님의 인간 안에 있는
진리와 선을 그와 같은 질서에 적응시키셨다.
그러나 주께서는 첫 잉태된 그분의 합리적인 것이
이와 같은 성품에 속한 것이 아님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숙고하신 끝에 그 원인을 생각해내셨고
또 ‘기억의 지식’으로부터 생성된 자연적 진리가
아직 생명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도,
즉 그 진리가 아직 천국적 질서에 적응되지
못했다는 것도 깨달으셨다.
그뿐 아니라 사람이 인애 안에서 살지 않으면
신앙에 속한 진리도 전혀 생명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도 깨달으셨다.
왜냐하면 신앙에 속한 모든 진리들은
인애로부터 입류되고 인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인애 안에 있을 때,
그리고 인애에서 비롯되었을 때 그것들은 생명을 갖는다.
인애 안에는 생명이 있지만
인애에서 떠난 진리 안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 합리적인(내면적인) 것과 자연적인(외면적인) 것 사이
상응이 존재할 때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차이
천비 5427
내면적인 사람(그의 영)은 외면적인 사람 안에
존재하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그들 사이 상응과 매개자(intermediary)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 경우 외면적인 사람에게 내면적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따라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응이 있을 때는 외면적인 사람은 매개자를 통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다.
내면적인 사람이 가진 빛이 매개자를 통해 외면적인 사람
또는 자연적인 사람이 가진 빛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즉, 천국의 빛이 자연적인 빛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밝게 하고
이 더 밝은 빛 속에서 내면적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외면적인 사람에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외면적인 사람이 소유한 지성과 지혜의 기원이다.
..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알아보았다.'(창 42:8)
이것은 교회에 알려진 일반적 진리들이(요셉의 형제들)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요셉)’에 보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으로부터 그 진리들이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이 거하는 빛에 의해,
따라서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이 소유한 빛에 의해
보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빛은 신성으로부터 온 진리(n. 5417)이며
이 빛 속에서 그 아래에 있는 모든 진리,
즉 자연적인 것 속에 있는 모든 진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 반대는(역방향으로 보는 것은)
매개자(intermediary)가 없다면 불가능하고
상응과 상응을 통한 결합이 없다면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것은 천국에 있는 천사, 즉 천국의 빛 속에 있는 천사가
천국 바로 아래에 있는 영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더 낮은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 지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는 볼 수 없다.
더 높은 천국의 천사들은
그들 아래에 있는 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매개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매개자 영들은 또한 앞뒤로 소통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더 낮은 위치에 있고 매개자가 없는 자들,
특히 그들 위에 있는 자들과 상응이 없는 자들이 천국의 빛을 볼 때
그들은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완전히 모호한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것은 내면적인 사람 또는
그의 영혼이라고도 불리는 영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The same is similarly true of a person's interior man or spirit,
which is also called his soul.)
내면적인 사람(그의 영)은 외면적인 사람 안에 존재하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상응과 매개자가 없으면 볼 수 없다.
따라서 상응이 없는 외면적인 사람에게는
내면적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누군가 내면적인 사람에 대해 어떤 것을 말했을 때
외면적인 사람에게 그것이
너무 모호해서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또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응이 있을 때는 외면적인 사람은 매개자를 통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다.
내면적인 사람이 가진 빛이 매개자를 통해 외면적인 사람
또는 자연적인 사람이 가진 빛으로 흘러들기 때문이다.
즉, 천국의 빛이 자연적인 빛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밝게 하고,
이 더 밝은 빛 속에서 내면적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외면적인 사람에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외면적인 사람이 소유한 지성과 지혜의 기원이다.
그러나 매개자가 없다면, 특히 상응이 없다면
내면적인 사람이 외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지각하며
어느 정도는 그것을 인도하지만 그 반대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나아가 만약 반대가 존재한다면,
즉 외면적인 사람이 내면적인 사람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왜곡하거나 소멸시킨다면
내면적인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받는 빛을 박탈당하고
천국은 내면적인 사람에게 접근할 수 없으며
지옥과 외면적인 사람의 소통이 열린다.
(사람의 겉이 지옥으로 향하면
그의 속도 천국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천비 3493
상응이 존재하면 합리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대상들을 명확하게 보는데
이는 그때 세상의 빛에 속하는 것들이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에 의해 밝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상응이 없다면
합리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 사람이 거듭날 때
합리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보다 먼저 거듭난다.
그 이유는 합리적인 것이 내적인 것이어서
신성에 더 가깝고 또한 더 순수해서
자연적인 것보다 신성을 받아들이기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을 거쳐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것은 거듭났지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나지 않았을 때 그 경우
합리적인 것은 스스로 어두워진 것처럼 보인다.
(자연적인 것이 어둠 속에 있어 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둘 사이에 아무런 상응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합리적인 것은 천국의 빛으로부터 시력을 받는 반면
자연적인 것은 세상의 빛으로부터 시력을 받는다.
그러나 둘 사이에 상응이 없다면
합리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림자와 같거나 심지어 짙은 어둠과 같다.
그러나 일단 상응이 존재하면
합리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대상들을 분명하게 보는데
이는 세상의 빛에 속하는 것들이
그때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에 의해 밝혀지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빛이 비추어져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상응할 때 세상의 빛에 속한 대상들이
천국의 빛에 속한 대상들에 의해 불 밝혀져
실제로 환해지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의 내용물을 빛 안에서 보게 된다.
When they do correspond, however,
the rational sees the contents of the earthly in light,
because the objects of earthly light are then lit
by those of heavenly light and become virtually transparent.)
.. 합리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에
신성한 빛을 비춰 깨우쳐주기 원한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천비 3679 (아래 천비 978 참조)
사람 안의 자연적인 것이 그의 합리적인 것에 상응할 때는
천국의 빛이 주님으로부터 합리적인 것을 통해 자연적인 것으로
흘러들어와 지성과 지혜로 그것을 밝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합리적이고 영적으로 생각하게 되지만
자연적 것이 그의 합리적 것에 상응하지 않을 때는
소통이 닫히고 일반적으로 주변에 제한된 양의 빛만이
틈새를 통해 합리적 것에서 자연적 것으로 흘러들어올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합리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리는
천국의 빛의 유입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사람이 육체 속에 사는 한
사람은 자연적 것 안에서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에
상응하거나 상응하지 않거나에 따라 차이가 있다..
자연적 것이 상응할 때 사람은 합리적이고 영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연적 것이 상응하지 않을 때는
그는 합리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적 것이 그의 합리적 것에 상응할 때는
천국의 빛이 주님으로부터 합리적 것을 통해 자연적 것으로
흘러들어와 지성과 지혜로 그것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합리적이 되고 영적으로 생각하지만
자연적 것이 그의 합리적 것에 상응하지 않을 때는
소통이 닫히고 일반적으로 주변에 제한된 양의 빛만이
틈새를 통해 합리적 것에서 자연적 것으로 흘러들어올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합리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리는
천국의 빛의 유입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생각은
선과 진리에 있어서 자연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의
상응의 상태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들과 천사들은
거의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들의 생각 역시 궁극적으로 자연에 기초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자연적 기억 전체와
그것과 관련된 감정 또는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기억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2475-2479)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구성하는 관념을 위한
토대나 기초로 그들에게 제공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 자연적 기억을 사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구성하는 관념을 위한
토대나 기초로서 작용하여
그들의 생각의 관념이 그 안에서 종결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그들의 생각을 구성하는 관념은 더 내면적이고
그들의 말은 사람과 같이 언어적 표현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실제적인 것들(actual things)의 형태를 취한다.
이것으로부터 그들 생각의 본질 역시 그들의 자연적 생각과
그들의 합리적 생각의 상응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합리적이고 영적으로 생각하는 영들이 있고
합리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영들이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두 가지의 차이는 그들의 애정과
그에 따른 생각의 본질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유일한 결정 요인은
그들이 육체적 삶 동안 무엇을 원했고 따라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즉 그들이 세상에서 획득한 삶의 상태와 일치한다.
- 신성한 진리인 천국의 빛이 천사와 영,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는..
천비 2776
천국의 빛은 천사와 영들의 시력과 이해력을 동시에 비춘다.
..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모든 빛이 나온다.
이 천국의 빛은 영들과 천사들의 시력을 비추는 동시에
그들의 이해력도 비추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해력을 밝혀주는 이러한 능력이 본래부터 그 빛 안에 존재하기에
천국에 있는 사람이 외적인 빛을 많이 가질수록
내적인 빛, 곧 이해력도 많이 가지게 된다.
이것은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영적인 자들의 눈과 이해력을 밝히는 것은
주님의 신성한 인간이지만
주님께서 인간적 본질을 신성한 본질과 결합하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을 결합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의 인간이나 천국에 있는 어떤 영적 천사도
더 이상 선하고 진실한 것을
이해하거나 지각할 능력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구원도 소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주님께서 인간을 취하여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셨다면
인류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해진다.
천비 7004
신성한 진리가 천국의 천사나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교리가 그 안에
신성한 진리를 수용하고서 유입되어야 한다.
‘.. 그러므로 신성한 진리가
천국의 천사나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선과 진리에 대한 교리가 그 안에 신성한 진리를 수용하고서
그들에게 유입하는 방법이 필요한데
이것이 신성한 인간(the Divine Human)으로부터
간접 발출한 신성한 진리이다.
주님으로부터 간접 발출하여
그 안에 신성한 진리를 수용하고 있는 선과 진리의 교리가
천계의 천사나 사람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천계를 통과함으로
천사나 인간의 성품에 적합하게 되기 때문이다.’
- 합리적인 것에서 생겨난 것들은 자연적인 것 안에 나타나고
이로써 자연적인 사람은 지성과 지혜를 가진다.
따라서 기억의 지식은
더 깊은 것을 반영하는 수단이며 거울과 비슷하다.
천비 3368
합리적인 것에 생겨난 것들은 자연적인 것 안에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많은 것들의 형상(image)이
동시에 거울 안에 비쳐지는 것과 꼭 같이 나타난다.
이것이 그들이 인간에게 또 천사들에게도
그들 자신이 나타나는 방법이지만
영들의 세계와 영적-자연적 영역에 있는 자들과는 달리
천사들에게는 합리적 개념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그다지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고 따라서 진리의 표징을 취해서 나타난다.
‘.. 그 안에 신성이 있는 모든 외현의 진리는
합리적인 것에 속하므로 합리적인 진리와 외현의 진리는 동일하다.
반면에 기억의 지식은 자연적인 것에 속하므로
자연적인 진리와 기억에 속한 진리는 동일하다.
합리적인 진리, 곧 외현의 진리는
신성이 합리적인 것에 유입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합리적인 것을 통해 자연적인 것에 속한 기억의 지식에
유입하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 없고 생겨날 수도 없다.
그때 합리적인 것에서 일어난 것들은 자연적인 것 안에 나타나는데
그것은 마치 많은 것들의 형상(image)이
거울 안에 동시에 비쳐지는(반영되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것이 인간은 물론 천사들에게도 그것들 자신이 나타나는 방법인데
영들의 세계나 영적-자연적 영역에 있는 자들과는 달리
천사들에게는 합리적 개념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그다지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고 따라서 진리의 표징을 취해서 나타난다..
(This is how they present themselves to men and to angels also,
though with angels the presentation of rational concepts in the natural
is not very manifest, as it is with those in the world of spirits
and the spiritual-natural realm,
who therefore have representatives of truth.)
신성한 진리는
자연적인 사람의 기억의 지식에 직접 흘러들 수 없고
앞서 말했듯이 합리적인 생각들을 통해서만 흘러들 수 있다..’
3573
자연적인 것은 합리적인 것과 결합하기 전까지
거듭날 수 없다.
이 결합은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과 진리 안에 흘러드는
합리적인 것의 직, 간접 입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결합이 이루어지면,
이는 거듭난 사람들의 경우와 같은데
그의 합리적인 마음에서 의지하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신을 그의 자연적인 마음에 뚜렷하게 드러내고
그리고 자연적인 마음은 그 자신을 그의 얼굴에 똑똑히 드러낸다.
창 27:26 “(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 가장 높은 뜻으로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주님 안에 있는 자연적인 것(the Natural)의 영광화(glorification)이다.
다시 말해 주께서 자신 안에 있는 자연적인 것을
어떻게 신성으로 완성하셨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 주제의 표징적인(representative) 뜻으로는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인 것의 중생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결합이 그 주제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것은
그것이 합리적인 것과 결합하기 전까지는
중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결합은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과 진리 안에 흘러드는
합리적인 것의 직, 간접 입류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에 속한 선으로부터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 안으로의 입류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을 거쳐
자연적인 것에 속한 진리 안으로의 입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합리적인 것에 속한 진리를 거쳐
자연적인 것에 속한 진리 안으로의 입류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 자연적인 것에 속한 진리로부터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 안으로의 입류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결합의 예들이 여기서의 주제인데, 이와 같은 결합은
신성이신 주님께서 장만하신 방법을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진정 이러한 사실은 사람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런 사실에 관해 사람은
이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에 의해서는,
즉 사람과 같이 하는 자연적인 빛에 속한 것들에 의해서는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지만
그러나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의 방편에 의해서는,
즉 합리적인 빛에 속한 것들의 방편에 의해서는
어떤 개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모든 방편들은
성언의 속뜻 안에 명확히 열려져 있고
이 속뜻 안에 있는 자들 앞에서는,
즉 사람의 이해에 적합한 방식으로 펼쳐지고 설명될 수 없는
그러한 수많은 것들을 보고 지각하는 천사들 앞에서는
아주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합리적인 것들의
이러한 결합의 상황이 어떠한지가
결과들이나 그 결과들의 표시들(signs)로부터 어느 정도 나타나있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마음, 즉 사람의 이해와 의지의 내적 영역은
마치 자연적인 마음이 얼굴이나 그 표정들(expressions)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자연적인 마음에 그 자신을 드러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마음이 얼굴과 얼굴 표정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듯이,
얼굴 역시 자연적인 마음의 외적 표정이고,
따라서 자연적인 마음도 합리적인 마음의 외적 표정이어야 한다.
그 결합이 이루어지면,
이는 중생한 사람들의 경우와 같은데
그의 합리적인 마음에서 의지하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신을 그의 자연적인 마음에 뚜렷하게 드러내고
그리고 자연적인 마음은 그 자신을 그의 얼굴에 똑똑히 드러낸다.
천사들은 이런 얼굴을 가지고
천적인 사람들이었던 태고시대 사람들도 이런 얼굴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 이외에는 어떤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이나 의도에 관해 아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에 의해 인도받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선 이외의 어떤 것을 결코 생각하지도 의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성품의 상태라면
그때 선 측면의 합리적인 것은
그 자신을 직접적으로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과 결합하고
그리고 이것을 통해 그것의 진리와 결합한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그 진리를 통해 합리적인 것에 있는 그 자체와
자연적인 것에 속한 진리와 결합하고
이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는 선과 결합한다.
이런 식으로 결합은 아주 확고하게 된다..
천비 4302
천국의 빛이 자연적인 빛에 흘러들어
천국의 사물들이 마치 거울이나 일종의 표징적인 이미지처럼
자연적인 빛의 사물들 안에 나타날(반영될) 수 있도록
이 자연적인 빛을 정렬시킬 때
자연적인 사람은 지성과 지혜를 가진다.
.. 진리들이 선에 들어갈 때(이 경우는 천적-영적 선을 가리킨다.)
그 진리들은 반드시 질서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해 이해가 쉽도록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전에 먼저 질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다음 진리들에 속한 질서가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질서가 진리에 적합한지)
또한 천적-영적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다음 진리들이 어떻게 선에 의해
천적-영적 선에 들어가는지를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내용들이 기술될 수 있다고 해도
그럼에도 그것들은 천국적인 지각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특히 오직 자연적인 지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적인 지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비롯된 천국의 빛 안에 있고
그 빛 안에는 지성이나 지혜가 존재하지만
그러나 자연적인 빛 안에 있는 사람들은
천국의 빛이 자연적인 빛에 흘러들어
천국의 사물들이 마치 거울이나 일종의 표징적인 이미지처럼
자연적인 빛의 사물들 안에 나타날 수 있도록
이 자연적인 빛을 정렬(dispose, adapt 적응)시키지 않는 한
어떤 지성이나 지혜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빛은
천국의 빛이 그 안에 흘러들지 않을 경우
영적인 진리에 관해 아무 것도 시야에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정 기독교 11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
자연적 신앙을 영적 신앙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비춰보는 거울이다.
‘..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거울이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얼굴이 아니라 등이 자신에게 향한 거울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수은이나 어떤 어두운 반죽으로 덮여 있기 때문에
이미지를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소멸시킨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영혼으로부터,
이해의 더 높은 영역으로 들어가는 선행(先行) 경로를 통해
인간에게 들어오는 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은 후행(後行) 경로를 통해 들어오는데
왜냐하면 그 지식들은 이해가,
계시된 말씀으로부터 육체적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형태의 유입은 이해의 중간에서 만난다.
거기서 단순한 신념인 자연적 신앙이
참된 시인인 영적 신앙으로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는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정제 용기와 같다..’
천비 5201
기억의 지식은
더 깊은 것을 반영하는 수단이며 거울과 비슷하다.
.. ‘갈대에서 풀을 뜯는 것’은
기억의 지식에서 교훈을 받고 이러한 지식을 통해
진리와 선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기억의 지식은 내면적인 것이 마치 거울처럼
그 자신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단과 비슷하다.
(기억의 지식은 더 깊은 것을 반영하는 수단이며 거울과 비슷하다.)
거울과 마찬가지로 이 (내면적인 것의)이미지 안에
신앙의 진리와 선이 반영되고 표징 되어 결과적으로
천국에 속한 것과 영적인 것으로 불리는 것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내면적이기 때문에
인애에서 비롯된 신앙에 있는 사람들 외에는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다..
- 사람 내면의 여러 단계들의 종결과 입류에 대하여,
그리고 지성적인 단계와 합리적인 단계를 거쳐
기억의 지식으로의 입류에 대하여..
자연적인 것이 중생되는 동안
영적 세계에서 온 모든 내면적인 진리와 선이
기억의 지식으로 수집되어 나타나게 된다.
천비 657
주님은
사람의 지성적인 단계를 통해 합리적인 단계에,
그리고 그 합리적인 단계를 통해 기억의 지식에 입류하시는데
이 지식에서 시각이나 청각에 속한 감각의 삶이 비롯된다.
비록 사람이 거짓과 악의 영향을 받을 때조차도
주님의 생명은 의지의 애정과 지성적 개념을 통해 유입된다.
그러나 유입되는 것들은
이해력이 취하는 형태에 따라 합리적 부분에서 수용되어
사람을 합리적이 되게 한다.
사람 안에는 이해에 속한 세 영역이 있다.
그의 가장 낮은 단계는 기억의 지식(사실적 지식, 과학지)이고
중간 단계는 합리적인(rational) 개념이고
가장 높은 단계는 지성적인(intellectual) 개념이다.
이 세 단계들은 서로서로 엄밀히 구분되기 때문에
그것들은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람이 이런 사실에 관해서 무지한 이유는
그가 삶을 오직 감각적 경험과 기억의 지식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런 것에 집착하는 한 그는 합리적인 부분이
기억의 지식과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고
나아가 지성적 부분이 그렇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사람의 지성적인 단계를 통해 합리적인 단계에,
그리고 그 합리적인 단계를 통해 기억의 지식에 입류하시는데
이 지식에서 시각이나 청각에 속한 감각의 삶이 비롯된다.
이것이 참된 유입이며 또한 영혼과 육체의 참된 교류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지성적인 개념으로,
아니 오히려 의지의 애정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면,
또는 의지의 애정을 통해 지성적 개념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지성적 개념을 통해 합리적 개념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면,
또 합리적 개념을 통해 기억의 지식으로 유입되지 않는다면
결코 인간에게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비록 사람이 거짓과 악의 영향을 받을 때조차도
주님의 생명은 의지의 애정과 지성적 개념을 통해 유입된다.
그러나 유입되는 것들은
이해력이 취하는 형태에 따라 합리적 부분에서 수용된다.
(비록 우리가 거짓과 악에 얽매여 있지만 주님의 생명은
여전히 우리가 원하고 이해하는 것들을 통해 들어온다.
그러나 우리의 합리적인 마음은
이해력이 취하는 형태에 따라 그러한 영향을 받아들인다.)
또한 이 유입은 사람을 합리적이 되게 하고, 성찰하게 하고,
진리와 선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천비 5373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기억의 지식은
질서의 궁극(마지막)이자 가장 낮은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세계를 그 안에 붙잡아 두는
최종 한계는 사람의 자연적인 것이며,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안에 표징의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이 중생되는 동안
영적 세계에서 온 모든 내면적인 진리와 선이
기억의 지식으로 수집되어 나타나게 된다.
.. “온 땅이 이집트로 왔다”는 말은
선과 진리가 기억의 지식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는 본래 좋은 의미에서
‘교회에 속한 기억의 지식들(교회에 알려진 사실들)’을 뜻한다..
그 상황은 이러한데 사람의 자연적인 것이 중생하는 동안
선과 진리는 모두 기억의 지식에 하나로 수집된다.
기억의 지식에 자리 잡지 못한 것들은
자연적인 것에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자연적인 마음에 있어서 이해에 종속된 부분은
(지성의 통제 하에 있는 부분은)
오직 기억의 지식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것에 속하는 기억의 지식은
질서의 궁극이자 가장 낮은 차원이며,
이전 차원의 것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나와서 스스로를 나타내려면
궁극이자 가장 낮은 것에 있어야 한다.
여기에 더 나아가 이전 차원의 모든 것들은
가장 바깥쪽 차원(경계 또는 목적)으로까지 확장되어
거기에서 동시에 공존한다.
마치 원인이 그 결과 안에 공존하거나
더 높은 차원이 그것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하는
더 낮은 차원에 공존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기억의 지식은
그러한 궁극이자 가장 낮은 것들이기 때문에
영적 세계를 그 안에 붙잡아 두는 최종 한계는
사람의 자연적인 것이며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은
그 안에 표징의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영적인 것들이 자연적인 것 안에서 표징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세상에 있는 그런 것들에 의해서는 전혀 인식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연적인 것이 중생되는 동안
영적 세계에서 온 모든 내면적인 진리와 선이
기억의 지식으로 수집되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5145
사람의 내면들은 여러 단계들(degrees)로 구분되고,
각 단계들마다 종결되며(terminate)
그 종결 지점(플랫홈)에 의해 바로 아래의 단계와 분리된다.
천국에 인도될 수 있는 성품을 갖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단계들에서 종결이 잘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다음 것과 분리시켜주는
그 자신만의 특정한 종결로 끝을 맺어야 한다.
그 단계들이 그러한 종결을 가지고 서로 구별될 때
각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머물 수 있는 평면이 되어 거기서 그 선은 받아들여진다.
평면으로서의 이러한 단계들이 없다면
선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치 구멍 난 체나 바구니를 통과하듯이
감각적인 단계로까지 흘러내려간다.
.. 사람의 내면들은 여러 단계들(degrees)로 구분되고,
각 단계들마다 종결되며(terminate)
그 종결 지점(플랫홈)에 의해 바로 아래의 단계와 분리된다.
이것은 가장 안쪽에서 가장 바깥쪽까지 모든 단계가 그러하다.
내면적 합리적인 것이 첫 번째 단계를 구성하는데
여기에는 천적인 천사들, 또는 가장 안쪽 세 번째 천국이 있다.
외면적 합리적인 것이 두 번째 단계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영적인 천사들, 또는 중간의 두 번째 천국이 있다.
내면적 자연적인 것이 세 번째 단계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선한 영들이 있거나
마지막이자 가장 낮은 첫 번째 천국이 있다.
외면적 자연적인 것 또는 감각적인 것이 네 번째 단계를 이루는데
여기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의 이러한 단계들은 매우 뚜렷하다.
그러므로 그가 선 안에서 산다면
그 사람은 그의 내면들에 있어서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며
또 그의 내면들은 세 천국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인애와 사랑의 삶을 살았다면
그는 사후에 세 번째 천국까지 인도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성품을 갖기 위해서는
그의 모든 단계들에서 종결이 잘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다음 것과 분리시켜주는
그 자신만의 특정한 종결로 끝을 맺어야 한다.
그 단계들이 그러한 종결을 가지고 서로 구별될 때
각 단계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선이 머물 수 있는 평면이 되어 거기서 그 선은 받아들여진다.
평면으로서의 이러한 단계들이 없다면
선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치 구멍 난 체나 바구니를 통과하듯이
감각적인 단계로까지 흘러내려간다.
그 통과 과정에서 어떤 방향으로도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더러운 것으로 변한다.
즉 그 선은 자기애와 세상에 대한 사랑의 즐거움으로,
따라서 증오, 복수심, 잔인함, 간통, 탐욕의 즐거움으로,
또는 단순한 방종과 사치로 변한다.
이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단계들이
중간 어느 곳에서도 종결 지점이 전혀 없을 때,
즉 그 안에 구멍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러한 종결과 그에 따른 평면이 있는지 아는 것은
실제로 가능한데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과 양심의 지각이
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진 자들, 즉 천적인 천사들의 경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각 단계마다 종결이 있다.
각 단계마다 자체 종결 없이는 그러한 지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적 천사와 같이 양심을 가진 자들에게도 종결이 있지만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단계에서 마지막 단계까지만 있고
첫 번째 단계는 그들에게 닫혀 있다.
두 번째 또는 세 번째 단계라고 말하는 이유는
내면적인 양심과 외면적인 양심의 두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내면적인 양심은 영적인 선과 진리에 관련이 있고
외면적인 양심은 정의와 공정에 관련이 있다.
양심 자체는 신성한 선이 흘러들어 머무르는 내적 평면이다.
그러나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유입을 받을 내적 평면이 없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선은
외면적 자연적인 것, 즉 자연적-감각적인 것으로 흘러내려
앞서 말했듯이 거기에서 더러운 즐거움으로 변한다.
때때로 이런 사람들은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양심이 아니다.
그것은 지위, 부, 명예, 삶, 쾌락 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의
우정과 같은 즐거움을 잃은 데서 생기는 고통이다.
이것은 그가 가진 종결(플랫홈)이
이와 같은 즐거움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다음 세상에서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단계들이
종결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것들이 종결된 사람들에게는
영적인 선과 진리, 혹은 정의롭고 공평한 것에 대한 열정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선이나 진리를 위해 선을 행했고
부나 지위 등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나 공정을 위해 정의를 행했기 때문이다.
의지의 내면이 종결된 모든 사람들은 천국으로 데려가진다.
왜냐하면 흘러들어오는 신성이 그들을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지의 내면이 종결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들어간다.
신성이 흘러들어와 지옥 같은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의 열이 더러운 배설물에 떨어져 악취가 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양심이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받는다.
그러나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
- 생명이 궁극적인 것에 있는 것 같으나 사실 생명은
내면적인 것들에 존재한다. 겉 사람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
또는 속사람이 겉 사람 안에서 생각한다.
천비 6451
모든 내면적인 것들이 마지막이자 가장 낮은 것에
모두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습은 마치 생명이 궁극적인 것에,
즉 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생명은 내면적인 것들에 존재하며
그럼에도 그것은 거기 있지 않고 가장 높은 것,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또한 외면적인 것의 생명이 내면적인 것의
생명과 비교하면 모호하다.
.. 사람 안에는 가장 깊은 것이 있고,
가장 깊은 것 아래에 내면적인 것들, 외면적인 것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가장 정확하게 구별된다.
그것들은 연속적인 순서로 하나씩 이어지므로
가장 깊은 것에서 가장 바깥쪽으로 이어지고
그 연속적인 순서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의 흐름도 있다.
그러므로 생명은 가장 깊은 것을 통해 내면적인 것으로 흐르고
내면적인 것을 통해 외면적인 것으로 흘러들어간다.
따라서 그것들은 이어지는 순서에 따라 이루어지며
순서의 궁극(마지막)이자 가장 낮은 것으로 흘러들어가
거기서 멈추기 때문에
내면적인 것들은 궁극이자 가장 낮은 것 안에서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다음과 같은 순서로 존재하다.
흘러들어온 가장 깊은 것이 중심을 잡고 있고
가장 깊은 것 아래에 있는 내면적인 것들이 중심을 둘러싸며
외면적인 것들이 그 둘레를 만든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세부적인 것에서도 그렇다.
전자의 질서는 "연속적인 질서"라고 불리고
후자는 "동시적인 질서"라고 불리며,
이 후자의 질서는 전자에서 유래한다.
왜냐하면 모든 경우에 있어서
동시적인 것은 연속적인 것에서 유래하며,
그렇게 유래되었을 때 그것은 연속적인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내면적인 것들이
마지막이자 가장 낮은 것에 모두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 모습은 마치 생명이 궁극적인 것에, 즉 몸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내면적인 것들에 존재하며
그럼에도 그것은 거기 있지 않고, 가장 높은 것,
즉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 안에 있다.
그러므로 또한 외면적인 것의 생명이
내면적인 것의 생명과 비교하면 모호하다.
왜냐하면 외면적인 것의 생명은 전적으로 일반적이며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산출된 많은 것,
아니 무수히 많은 원리들이 유입되어 모두 함께
일반적인 하나의 단일체로 보이기 때문이다..
천비 1953(천비 4408 참고)
말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내면의 청력이지만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내면의 시력 또는 마음의 시각이고
또 시각적 대상에서 끌어낸 첫 번째 관념은 물질 기반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보고 생각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시각이다.
이처럼 자신의 합리성으로 거짓된 것을 지각하거나
거기에서 빛나는 진리를 지각할 때
그러한 능력은 속사람을 통한 주님의 유입에서 비롯된 것이다.
.. 합리적 마음(사람)은
결코 자신의 본성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자신을 들여다볼 이무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더 내적이거나 더 높은 것이 있어야 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합리적 마음을 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귀를 생각해 보자.
귀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말을 알 수 없고 지각할 수는 더욱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청력(interior hearing)이다.
귀는 단지 명료한 소리나 단어를 분별할 뿐이다.
말한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내면의 청력이며
그 뒤 그것을 지각하는 것은 내면의 시력 또는 마음의 시각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청력을 통해 말의 의미를 지각하게 된다.
시각적 경험의 경우도 비슷하다.
시각적 대상에서 끌어낸 첫 번째 관념은 물질 기반이며
그래서 물질적 관념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보고 생각하는 것은 더 깊은 차원의 시각이다.
동일한 것이 사람의 합리적인 마음(합리성)에도 적용된다.
합리성은 결코 자신을 진정으로 볼 수 없으며
자신의 본성을 조사할 수는 더더욱 없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것이 있어야 하다.
따라서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즉 자신의 합리성으로 거짓된 것을 지각하거나
거기에서 빛나는 진리를 지각할 때,
특히 싸우고 승리하는 것을 지각할 수 있을 때마다
그러한 능력이 속사람을 통한
주님의 유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비 634
사람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이 가장 외적인 부분이고
욕망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내면적이고,
애정과 합리적 개념들은 그보다 더 내면적인 반면,
선을 향한 의지와 진리에 대한 이해는 가장 내면적인 것이다.
.. 이와 같은 이유로 그들은 내면적인 것,
그보다 더 내면적인 것, 그리고 실제로 가장 내면적인 것이
모든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사람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부분이
가장 외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욕망과 기억에 속한 것들은 내면적이고,
애정과 합리적 개념들은 그보다 더 내면적인 반면,
선을 향한 의지와 진리에 대한 이해는
가장 내면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천비 978 (위 천비 3679 참조)
생각이 겉 사람에 속한 것이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것은 겉 사람이 아니라
합리적인 사람 또는 속사람이 겉 사람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참고 3679
우리의 생각은
감각을 통해 들어온 것에 기초하고 세상에 속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사람 또는 겉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인 사람 또는 속사람이다.)
.. 그들이 이 주제를 숙고할 때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학식이 없는 사람이나
속사람을, 생각하는 능력 이외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능력이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겉 사람을,
감각적 능력과 쾌락을 지닌 몸으로 여기는데
왜냐하면 이것들은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속사람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속사람에 속하지 않는다.
속사람에는 주님의 선과 진리 외에 아무것도 없으며
내면적인(interior 상대적으로 안쪽에 있는) 사람에는
양심이 주님에 의해 심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자, 실제로 가장 악한 자조차도
생각을 소유하고 있으며
양심이 없는 사람들도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사람의 생각은
속사람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연적 것이 그의 합리적 것에 상응하지 않을 때,
소통이 닫히고, 일반적으로 주변에 제한된 양의 빛만이
틈새를 통해 합리적 것에서 자연적 것으로 흘러들어올 뿐이다.
그 결과 그는 합리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겉 사람에게서 나오는 생각은
속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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