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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말 영산강에서 취항한 전통한선 '황포돛배 목포호'. 40여명이 탑승할수 있는데 조선시대 여객선의 전형이 아닐까 싶다. |
조선시대 배들은 매우 튼튼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표류사건을 다룬 각종 표해록을 보면 당시
목선이 어떤 태풍에도 끄떡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추자도 앞바다에서 표류해 중국 절강성 쪽으로
13일 동안 망망대해를 헤맸던 최부 일행이 탄 배는
대양 위에서 수차례 태풍을 만났으나 파손되지 않았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몰아쳐 바닷물이
배속으로 쏟아지면서 침수될 위기는 여러차례
선원들이 합심해 물을 퍼내면 배가 다시 정상을 되찾았다.
바람을 이기지 못해
돛이 부러지기는 했으나
선체가 훼손되지는 않았다.
1770년 12월 제주도~강진 사이에서
표류 했던 장한철 일행 29명이 탄 배도
12일 동안 일본 해역등에서 수차례 폭우가
동반된 태풍을 만났으나 선체는 멀쩡했다.
장한철 일행이 탄 배는
완도 청산도 해안으로 표착하면서
바위에 부딪혔을 때 파손됐을 뿐이다.
이를 볼때 조선시대 한선제작술이
상당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바다를 멀리 했던 시기였다.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까지
해외무역 일반화, 원양 항해 다반사
항해술과 조선술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철저한 쇄국정책이 시행
원양항해는 부산에서 일본 후쿠오카 사이에
사신들이 왕래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조선술과
항해술이 자연스럽게 침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그 무렵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제주~강진 남포마을' 항해하다
표류한 장한철 일행이 겪은 일을 보면
조선시대 우리의 해양 세력은 왜소했다.
1770년 12월 장한철 일행은
일본의 오키나와 소속 무인도에서
베트남 상선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조된다.
이 상선은 베트남에서
일본으로 콩을 팔러가는데
그 상선의 규모가 엄청났다.
상선의 선원들은 일단 장한철 일행을
상선으로 타게 한 후 29명이 탔던 장한철
일행의 배를 상선 아래쪽 창고로 넣었던 것.
이 배는 중선 두척을 넣을 정도의
큰 창고를 배 아래에 가지고 있었다.
창고문은 바로 바다와 연결돼 있어서
언제든지 배를 바다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만큼 배의 규모가 컸다.
장한철은 배의 규모를 넓이가
백보, 길이는 곱절 정도 된다고 표현.
4층 배는 방들이 셀 수 없이 많았고,
추녀가 이어지고 난관이 교차되어 있으며,
겹창과 겹문들이 즐비했다.
장한철은 구조된 다음날
새벽 닭울음 소릴 듣고 깨어나
상선이 어느 마을 가까이 도착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닭울음 소리는
배에서 키우는 닭들이 훼를 친 것이었다.
베트남 사람의 안내로 배를 둘러보았는데,
닭만 키우는게 아니었다. 거위와 양과 염소,
개, 돼지 등도 키웠고 파와 채소밭도 있었다.
배 4층을 이리저리 따라다녔는데
'한번 내려가고 한 번 올라옴에
길이 서로 같지 않았다' 일본으로
콩을 팔러다니는 베트남 상선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거대한 배에는 각종 출입구가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장한철 일행은 난생 처음 보는 배의
규모에 압도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1770년 장한철 일행이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초대형 베트남 상선을
보았을 때 대양에서는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1600년대 들어 유럽에서는
대항해 시대라고 해서 열강들의
아시아 진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637년 일본 나가사키에 설치된
네덜란드 상관에는 1847년까지
606척의 동인도회사 선박이 도착,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도
열강의 영향을 받아 대외교역 활발.
1653년 제주도 남쪽 해안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탄 배도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네덜란드 상관이 있는 나가사키로 가던 상선이었다.
하멜이 표착할 때도 그랬지만
하멜이 탈출한 1666년 9월 이후에도
조선은 여전히 쇄국정책을 고수해 넓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마도 베트남은 서양의 영향을 받아
그 정도의 상선이 많이 보급됐을 것이며,
이를 토대로 일본 등 다른 나라와 국제무역
1770년 장한철 일행이 본
국제해양문화는 개벽천지.
이렇듯 조선시대는 바다를 멀리했고,
국제사정에 캄캄했다. 그 결과 조선후기들어
열강들의 공격에 취약했고, 내부적으로
이를 견딜만한 힘을 구비하지 못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는
바다를 멀리했을 때 쇠락. 강진도 마찬가지.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지만
강진만에 배가 줄어들고 대외적인 항로가
끊기는 시기와 강진의 인구가 급감하고
쇠퇴를 거듭한 시기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강진만을 되살리고
옛 뱃길을 복원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향수에
젖어 드는게 아니다.
대단히 현대적이고
실리적인 발전방향.
.................
.................
1945년 8월20일 새벽 완도 청산도 앞 해상에서
원인 모를 화재로 선박이 침몰해 118명이 숨졌다
황산면과 문내면 등의 출신으로
숨졌던 옥매광산 광부들인 이들은
1945년 3월 하순 일본경찰과 헌병에
의해 제주도로 끌려가 서귀포 등지에서
군사시설인 굴을 파거나 진지작업 등에
동원되었다가 돌아오던 중에 변을 당했다.
2017.08.08
2017.09.06
일본 아사다공업은 1924년부터
황산면 옥동리에 옥매광산을 개발
명반석 고령토 납석 등을 캐냈다.
이런 광물들은
항공기나 특수기계
등을 제작하는데 쓰였다.
일제는 1945년 3월 미군의
본토 공략이 임박하면서
제주도에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이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모슬포 등지 진지공사에
강제동원 이들은 5개월 만에
해방을 맞자 어렵사리 배를 구해
고향으로 향했지만 225명을 태우고
해남으로 향하던 배는 완도군 청산도
앞바다에서 불이 나 침몰하고 말았다.
탑승자 중 한국인 222명 중 118명이
수몰됐고, 일본인 3명 중 2명도 숨졌다.
사망자 나이는 16살부터 40대 중반까지였다.
생존자는 일제 경비정에 구조
청산도까지 헤엄쳤던 한국인
104명과 일본인 1명에 그쳤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비정은
일본인 수습을 마치자 현장을
그대로 떠났다는 증언도 나왔다.
.
이런 참사는 생존자 김백운(90·전남 목포)씨
등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정부는 57년,
2005년, 2012년 세차례 진상을 조사했다. 하지만
별 후속조처를 하지 않아 유족들이 애태우고 있다.
..............2017.11.07
완도 & 옛모습
.................완도..........................
완도는 전라남도를 대표하는 여행지로
지금은 해남군과 다리로 연결되어 누구나
쉽게 여행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완도는 남도의 기후를 받아
온대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면서도,
비자나무 등 아열대식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완도의 풍경을 잘 느낄 수 있는
여행지를 찾는다면 청해포구촬영장.
드라마 ‘해신’ 촬영장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서동요, 신돈, 천만영화인 ‘명량’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기 드라마와 영화가 만들어진 장소이다.
통일신라시대 해로 요충지였던 완도에
청해진 설치후 동아시아 해상 질서 주도.
해상왕 장보고가 활약했던 청해진의 옛터.
완도에는 촬영장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실제 유적지도 있다.
장좌리 앞바다 전복을 뒤집어
놓은듯한 장도(장군섬)가 그곳.
청해진의 실제 유적지.,장도.
장좌리마을에서 장도까지는 180m
하루 2차례 썰물 때 걸어 다닐 수 있다.
통일신라 생활양식을 볼 수 있는 기와,
토기 등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고,
청해진 방어를 위해 준비된 통나무목책
1000여 개가 썰물 때 옛 모습을 드러낸다.
완도타워는 완도읍 동만산
정상에 76m 높이의 관광타워.
더불어 5만 3000㎡ 관광타워는
광장, 산책로, 쉼터 등을 갖추어
데이트를 즐기기에도 손색 없다.
타워전망대에서는 청산도,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등
주변 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
거문고까지 볼 수 있어
남도 절경을 즐길 수 있다.
완도타워는 해돋이
일몰 때 찾으면 좋다.
일출 때 멀리 펼쳐지는 다도해.
제주도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며,
일몰에는 화려한 빛으로 가득한
완도타워 색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
완도 타워.
완도 모노레일
완도타워 레이져 쇼
느림의 미학, 삶의 쉼표가
필요한 여행자라면 청산도.
완도에서부터 19.2km 떨어진
다도해 최남단섬인 청산도는
완도항에서 뱃길 50분 소요거리.
경관이 아름다워
청산여수(靑山麗水).
신선이 노닌다고 해서
선산(仙山), 선원(仙源)
청산이란 이름 역시
산,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러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 까닭에 2007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선정되기도 한 여행 목적지
청산에는 빠르게 이동할 필요 없이
걷는 것 자체로 자연을 느낄 수 있는데,
주민들이 마을 간 이동로로 사용되던 길.
총 11코스(17길) 42.195km.,청산도 슬로길
청산도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청산도 전망대' 범바위가 있다.
범의 웅크린 모습과 함께
바람이 불면 범의 울음소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더불어, 청산도에
전하는 전설을 들으며
남도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
1608년(선조 41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조선시대 사람이 처음 입도했다는.,청산도.
그렇다면, 선조가 재위 중에 운명하던 그 해.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청산도
동경 126°59′, 북위 34°08′에 위치하며,
완도에서 남동쪽으로 19.7㎞ 지점에 있다.
면적은 33.27㎢이고, 해안선 길이 42㎞이다.
서쪽에 대모도(大茅島),
동쪽에 황제도(皇帝島),
남쪽에 여서도(麗瑞島)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청산도는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이 입도
1866년(고종 3)에 청산도에 진(鎭)이 설치.
1895년 진이 폐지되고, 1896년 완도군 청산면.
지명은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하여 청산도
'신선이 사는 곳' 선산(仙山) 또는 선원(仙源).
지질 대부분
산성화산암류
불국사화산암류.
대봉산(大鳳山, 379m)·
매봉산(梅峰山, 385m)·
보적산(寶積山, 330m)
등의 산지가 발달하였다.
동쪽이 지대가 높으며,
평야는 서쪽과 중앙에
복잡한 해안선 사이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1월 평균기온은 1.0℃,
8월 평균기온은 27℃,
연강수량은 1,285㎜,
연강설량은 5㎜이다.
...........................
.
도청항
........영화 서편제(임권택 감독)....
1993년 4월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관객 113만 명 이상을 동원하면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았다.
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초 전라도 보성 소릿재,
30대 동호는 소릿재 주막주인의
판소리를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소리품을 팔기 위해 어느 마을
대가집 잔치집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은 그곳에서 동호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양딸 송화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아기를 낳던 금산댁은 아이와 함께 운명.
유봉은 소리품 파는 틈틈이 송화에게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소리꾼과 고수로 키운다.
그러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동호는
어미 금산댁이 유봉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과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간다.
유봉은 송화 또한 떠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해 약을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을 다해 돌보지만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일을 사죄하고 숨을 거둔다.
유봉이 죽자
송화는 떠돌면서
소리를 하며 살아간다.
그로부터 몇년 후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나선 동호는
어느 이름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만난다.
북채를 잡은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아비와 똑같은 북장단
솜씨인 그가 동호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헤어짐의 길을 떠난다.
......
......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
“이청준의 원작소설은 우리
판소리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원작을 바탕으로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
한을 맺고 푸는 사람들의 삶,
우리 소리의 느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영상을 그리고자 했다.
우리 판소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 양식인지를 알리고 싶다.”
.
평론가
들의 변.
.
“가장 낮은 소리로
우리의 꿈은 이제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우리의 정서는 이제 어떤 모양으로
변해버렸는지를 소리꾼 집안의 연대기적
서술로 그려내고, 영화 속의 힘은 고난과
만남에 의해 발동하고 혼을 일으키는 소리와 장”
한국 기네스 북
최다관객동원 영화.
이 영화는
1993년 상해영화제
최우수감독상(임권택),
최우수 여우주연상(오정해),
제3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감독상,
제14회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남우주연상(김명곤),
제4회 춘사영화예술상 대상·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오정해),
청룡영화제 최다관객상·대상·작품상·
촬영상·신인여우상·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
.............서편제(西便制)................
전라도의 서쪽지역에 전승되는 판소리.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대가닥조에서
처음으로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으로 구분.
전라도 서쪽지역의 소리제이며,
섬진강을 중심으로 서편지역, 즉,
광주· 보성· 나주· 고창 등이 전승지.
슬픈 계면조 노래가 대부분,
정교한 시김새(꾸밈음)를 사용
가벼운 발성으로 소리를 일관한다.
부침새(노래말을 선율에 부침)는
비교적 섬세하게 구사되며, 구절의
끝 음을 길게 빼는 경우가 많다.
소리의
들거나
뉘는 것도
제에 따라
다른데,
서편제에서는
꼬리를 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서편제는
동편제 보다 많은
기교를 쓰기 때문에
장단의 진행 속도가
비교적 느리고,
계면조(界面調)의
쓰임이 많은 것이 특징.
서편제는 가장 늦게 생긴 소리제.
여러 유파 가운데 가장 세련된 면이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기교를 쓴다.
서편제 소리는 박유전(朴裕全)의
법제를 표준으로 전승되어 온 것.
박유전 소리는
수제자 이날치(李捺致)와
정재근(鄭在根)에게 전해졌다.
이날치 소리는
이창윤(李昌允)·
강룡환(姜龍煥)·
김채만(金采萬)에게
전수되어 전해온다.
이창윤, 강룡환 소리제는 끊어졌고,
김채만 소리는 공창식·박종원·박동실·
성원목(成元睦)에게 전수되어 전해온다.
공창식·박종원·박동실
소리는 김소희· 한애순·
한승호에게 일부 전해진다.
김소희 심청가는
박동실제를 중심으로
짠 것으로 LP와 CD음반
으로 취입한 바 있다.
한애순은 박동실제 심청가
전 바탕과 춘향가 일부를 보유
한애순 심청가는
가장 박동실제에
충실하다고 한다.
정재근이 이어 받은
박유전(朴裕全)의 소리는
정응민(鄭應珉)에게 전해졌다.
정응민은
춘향가·심청가·
수궁가·적벽가
네마당을 잘했다.
,
심청가도
정재근에게
배운 박유전제이고,
수궁가·적벽가도
박유전제이다.
춘향가는
깁찬업(金贊業)에게 배운
김세종(金世宗)제 춘향가로
서편제 판소리가 아니다.
정응민의 심청가는
정권진(鄭權鎭)·성우향(成又香)·
안채봉(安彩鳳)·성창순(成昌順)·
조상현(趙相賢)이 이어 받았다.
정응민제 수궁가는
정권진(鄭權鎭)·조상현(趙相賢)이,
적벽가는 정권진에게 전승되었다.
서편제의 한 분파인
강산제(또는 보성소리)는
서편제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박유전의 심청가를 듣고 대원군이
“네가 강산 제일”이라 극찬한데서 유래.
강산제는
그의 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 뒤 강산제는
정재근(鄭在根)과
정응민(鄭應珉), 정권진
등 전라남도 보성(寶城)의
정씨 문중을 통해 전수되었다.
현재 성창순·성우향·
조상현 등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
청송해변
상서마을
..............청산도....................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최남단 섬.
동경 126°59′, 북위 34°08′에 위치.
완도에서 남동쪽으로 19.7㎞ 지점.
면적 33.27㎢
해안선 길이 42㎞
서쪽에 대모도(大茅島),
동쪽에 황제도(皇帝島),
남쪽에 여서도(麗瑞島)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지정.
임진왜란 이후 주민들이 입도.
1866년(고종 3)에 진(鎭)이 설치.
1895년에 진이 폐지되고, 1896년에
완도군 청산면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물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하여 청산도.
'신선이 사는 곳' 선산(仙山), 선원(仙源).
지질 대부분
산성화산암류
불국사화산암류.
대봉산(大鳳山, 379m)·
매봉산(梅峰山, 385m)·
보적산(寶積山, 330m)
등의 산지가 발달하였다.
동쪽이 지대가 높으며,
평야는 서쪽과 중앙에
복잡한 해안선 사이로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1월 평균기온은 1.0℃,
8월 평균기온은 27℃,
연강수량은 1,285㎜,
연강설량은 5㎜이다.
2007년 신안 증도, 담양 창평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
돌멩이로 투박하게 쌓아 올린 담장,
바다와 어우러진 다랭이논, 얕은 바다에
그물을 친 뒤 줄다리기하듯 전통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휘리, 제주에서 건너와 정착한
해녀의 미소… 청산도의 자연과 사람이
모두 슬로시티로 지정된 배경이다.
섬이 지향하는 슬로건
‘삶의 쉼표가 되는 섬’.
느림의 종, 쉼표 조형물 등
느림을 형상화한 조각물들.
뭍에서 청산도를 오가는 여객선 이름
‘아시아 슬로시티호’ ‘슬로시티 청산호’
청산도의 이미지에는 영화 한 편이 큰몫.
청산도항에서 당리 언덕길을 오르면
<서편제> 촬영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은 느리게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간을 반영한다,
청산도에서 볼 수 있는
인상적인 풍경 가운데
구들장논이 한몫한다.
논바닥에 돌을 구들처럼 깔고
흙을 부어 만든 논으로, 그 아래
배수로가 연결, 자투리땅을 활용해
농사를 짓던 이색적인 논과 경작 방식은
국가중요농업유산이자 세계중요농업유산.
슬로길 6코스를 지나다 보면
'구들장논'을 구경할 수 있다.
........................................
청산도.,고등어 파시.
1930년대 일제때 시작.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척이 드나들고
수천 외지인들이 섬에 북적거렸다.
한적하던 청산도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도시로 변모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했고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주민들에게 점포를 임대해 사용.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 집이었다.
색시 집에는 조선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 기생 게이샤들까지 흥청댔다.
고등어 선단은 한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 고등어를 어획.
운반선으로 처리 못할 정도로
많이 잡히면 일부는 바다에 버렸다.
도청리 앞바다는
고등어 썩는 냄새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였다.
주민들은 고등어를 얻어다
소금 간 해서 간독에 저렸다.
그래도, 남는 고등어들은 어비
(퇴비)로 만들어 쓰기도 했다.
지금처럼 생선이 귀한 시절에
고등어 퇴비는 전설 같은 이야기.
........청산도 고등어파시................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부터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래서, 당시 신문에서는 청산도 파시를 다룬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동아일보 1934년 9월 25일 기사 동아일보 1937년 11월 5일 기사 조선일보 1940년 7월 25일 기사 경향신문 1949년 5월 31일 기사. 1934년 청산도에서 고등어가 특별히 많이 잡혀서 한 마리의 평균 23전의 가격으로 잡아도 작년도의 한 마리에 대한 5전 정도 많아 지금까지 총산액 20만원 에 달하였다. - 동아일보 1934년 9월 25일 기사 - 1934년 청산도 근해 삼치 고등어 잡이는 매년 6, 7월 사이에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8월만 되어도 물고기 때를 보기 힘든 것이 통례여서 올해도 역시 8월이 되자 어업 중단. 그런데 해안 수온의 변화 때문에 때 아닌 9월 30일경에 삼치의 떼가 청산도 근해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동해조(東海祖), 대곡조(大谷祖), 대림조(大林祖), 빈강조(斌岡祖) 등의 삼치떼가 급격하게 와서 이틀 동안 58만 마리를 잡았으며 지금도 계속 잡는다고 한다. 1940년 7월에는 전남의 여러 어장에는 진작부터 고등어잡이가 시작되었으나 그다지 활기를 보이지 못하다가 약 일주일 전부터 각 어선은 긴장하며 청산도를 위시로 한 어장의 매상고가 최고 3만 마리 이상을 보였으며 청건착망 어선은 대개 한 어장에서 이백여 척이 대기하고 어군을 노려보고 있다고 전하였으며 역시 풍어를 점쳤다고도 하였다. 1949년 6월 중순 고등어 성어기를 앞두고 거문도, 초도, 청산도 어민들이 출어준비에 만반을 기하고 있었다. 벌써 많은 수가 어선과 운반선이 조업하고 있으며 수일 내로 약 10만 킬로 정도의 어획량을 자랑할 것을 추측했다. 작년 1년 동안 어획량이 6100톤 정도 되었는데 올해도 이정도의 어획고를 돌파 할 것으로 예상. ..................... . |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 고갈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삼치가 몰려와 그 뒤로 맥을 이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척이 늘 대기.
당시 청산도는 완도보다 중요한 해상교통 요지.
청산도를 기점으로
여객선이 목포로 2척,
부산으로 3척이나 다녔다.
대부분의 섬들이 하루 한척도
제대로 배가 다니지 않던 시절.
완도 사람들까지
청산도로 술을
마시러 왔다.
지금은 채 3천명도 못되지만
1973년 청산도 인구는 13,500명
그러나, 남획으로 삼치 씨가 말랐고
1980년대 청산도 파시는 막을 내렸다.
물고기떼가 사라지자
어선도, 사람도 함께
떠나가 버리자 다시
청산도는 한적한 섬.
청산도 근해에서는 더 이상
물고기들이 잘 잡히지 않는다.
요즈음은 큰 배들이 제주도 부근
바다에서 싹쓸이해버리니 살아남아
청산도까지 올라오는 물고기도 드물다.
이제 섬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미역 등 양식에 기대 살아간다.
청산도 신전
당리.,당집.
슬로시티로 지정되고
청산여수길이 생기면서
청산도 탐방객이 많아졌다.
청산여수길에서
현재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시멘트 포장 서편제길이 아니다.
보리밭 가운데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다.
당리 당집이다.
서편제길 초입 솔숲,
돌담 속에 낡은 건물
당리 마을의 당집이다.
당집
.
하지만, 서편제 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은 대문짝만하게 있는데
당집 안내판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당집 앞에 작은 비석만 하나 서있을 뿐.
오랜 세월 섬사람들 신앙의 성소.
섬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셨던.,신전.
당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화재 아닌가.
지금은 영화 세트장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
청산도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고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청산면사무소 최민교 계장은
솔밭 당집 아래 돌무덤에서
옛날 동전이나 칼자루 같은
것을 줍던 어린 시절을 증언.
무덤은 이미 일제 때 도굴
당집에는 한 장군뿐 아니라
부인신 영정을 함께 모셨다.
지금은 영정이 사라졌다.
당리마을 할머니로부터
그 사연을 듣는다.
"한압씨 함마이가 있었는디
어떤 놈이 불 처질러 부렀소.
아주 기분 나뻐서 죽을 뻔 했어요.
교회 다닌 놈이 그랬소."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다니지 못했다.
말이나 가마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부터 내려야 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 당제.
예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정결하게 살았던 사람을 제주로
뽑았지만 지금은 이장이 제주를 겸한다.
제관은 제주 이장
포함 5명이 맡는다.
제관으로 뽑히면 보름 전부터
상가를 가거나 부부관계 등의
부정 타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
제를 지내러 가는 날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하고
올 정도로 금기가 철저하다.
많은 섬들을 다녔지만
청산도 당리 당처럼
당제가 지내지는
곳은 희귀하다.
홍보만 잘 한다면
세계적인 관광상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소중한
문화유산 아닐까?
...........................
청산도 읍리 고인돌
............................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사람살이.
청산도 읍리 고인돌
하지만 조선왕조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수 없었다.
청산도 사람살이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
선조 41년(1608년) 주민 거주.
숙종 7년(1681년) 수군 만호진 설치.
왜구, 해적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
주민 거주가 금지된 섬들은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르러
상선을 약탈하고, 무명 50필, 미곡 30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중종 27년 실록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달량도(소안도),
추자도,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한다. 전란 전부터
섬들은 이미 왜구의 수중에서 농락당했으니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조선 후기에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
.
청산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하다.
<표해록>은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문다.
장한철은 청산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다.
..........................
쌀 3말도 채 못먹고
시집간 청산도 큰애기
................................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구들장논들이 남아 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랭이논.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아 그래서
생긴 것이 저.,"구들장 논"이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넓적한 구들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 - 속담.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마을들.
얼마나 다행인가.
새마을 운동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다.
새마을 운동 때 돌담을 헐어내고
세웠던 시멘트 블록 담은 불과 40년
세월을 못 버티고 시커멓게 썩어간다.
고흥 득량만 섬들에서 나그네는
허물어져가는 시멘트 담들을 목격.
청산도 돌담들은 수백년 지났어도 견고.
돌담은 바람의 방어벽이 아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담도 오랜 세월
큰 바람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지 않았다.
바람을
분산 통과
시켜주기 위해
돌담을 쌓았던 것.
돌들 사이에
틈을 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람과
섬사람들
사이에 생긴
평화협정 산물.
청산도 돌담은
바람의 통로.
..................
바람의 장례
청산도.,초분.
....................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
초분 1기가 땅 위에 떠있다.
초분
풍장,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다.
볏짚은
삭을대로
삭았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다.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청산도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이다.
청산도에서는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른다.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 가능.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 기다린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분은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2중 장례 풍습이다.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래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매장되기도 한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어제는 섬을 집어 삼킬듯
풍랑 거세던 바다가 오늘은
또 간데없이 평화롭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하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 데도 배가 필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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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느림의 행복' 슬로시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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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에서 남쪽으로 19.2km 떨어진 청산도(靑山島)
옛부터 청산도는 흑산도, 거문도와 더불어 전국 3대 어장.
1930~1970년대 후반까지.,고등어 삼치 파시 어업 전진기지.
‘청산(靑山)’은
하늘, 바다, 산이
모두 푸르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때는 청산도를 일러
‘선산(仙山)’, ‘선원(仙原)’.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얄리 얄라셩”
‘가시리’
청산에서
자지러지고도
싶었는지 모른다.
...................
‘감성돔 1번지’
강태공들의 천국
......................
청산도는 맑고 깊은 바다에서
느끼는 입질 손맛 탓에 옛부터
‘감성돔 1번지’ 강태공들의 천국.
사계절 낚시가 가능하고
어느 갯바위에서나 낚싯줄을
던져 놓고 나면 바로 씨알 좋은
물고기와의 만남이 가능한 섬이다.
청산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울퉁불퉁 귀가 튀어 나온., 소라.
그 모양새만큼 유난히 섬모롱이와
물속에 잠긴 ‘여’가 많고 어장이 풍부.
바위에서 바닷물을 바라보노라면
망망대해 빛깔이 아주 독특한 색깔.
사색의 공간으로서 빠져드는 에머말드.
고대 로마 보석 연마공들은
이 빛깔이 마음을 평온케 하고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 하여 에머랄드
보석을 앞에 두고 일했다고 하지 않던가.
영화 서편제의 압권이던 진도아리랑.
그 언덕배기 소리가 바로 청산도 들판.
등짐 멘 아버지가 돌담길에 싸여 있는
황톳길을 내려오며 아리랑을 선창하자
딸이 화답하고 아들이 북채를 두들기며
절창을 연출해 관객의 가슴을 쥐어짠 섬.
아리랑을 선창하던 그 황톳길을 따라
영화 속에서는 멀리 산자락을 비추다가
푸른 들판을 클로즈업하며 앵글을 맞춘다.
그 화면에 세 가족들이 들어서고
마침내 애잔한 서편제 가락이 깔리며
척박한 황톳길에서 끈끈하게 살아오던
남도인의 구슬픈 정서를 솟구치게 한다.
청산도는 해적과 외침이 잦았던 곳.
이순신 장군이 전략요충지 진을 설치.
청산도는 목포를 거쳐
완도로 가던 배가 일주일에
한 차례 거쳐 가던 섬이었다.
이 항로에서
고래 떼를 만나기도
했다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 외딴 섬들을
47년째 운행 중안
이정남 철부선 선장
“당시에는
기상특보나
기상예보도 없었고
낡은 목선을 타고 그저
바다에 운명을 맡긴채 운항”
“새벽에 완도항을 출발해
오로지 감으로 파도를 헤쳐
모도, 소안도, 청산도, 넙도 등
외딴 섬들을 모두 거치고 나면
11시간 만인 밤에 목포에 당도”
“하루 한척의 목선이
육지로 나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탓에
섬을 다 거쳐야 했고
섬사람들은 가능한
많은 보따리를 들고
승선해 76톤 여객선
정원은 80명을 훌쩍
넘겨 200명 정도가
타고나면 배 하중에
무리가 따라 흔들리며
목숨 건 항해를 반복했다”
지금은 완도항에서
45분 만에 닿는 뱃길
20km 해상에.,청산도.
세월과 함께 주민생활도 많이 변모.
썰물이면 바다에 나가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아 팔 수 있으며 밀물 때는
밭과 논일을 하며 농사와 어업을 겸한다.
어쨌든 푸른 보리밭에
봄 햇살 아낙의 주름살에
봄바람과 함께 스쳐 지났고
보리밭길에는 곰부레 들꽃이
밭두렁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겨울을 뚫고 연분홍 꽃을 피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곰부레 들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온다고 믿었고 병아리를
키우면서 설사를 할 경우 이를
삶아서 먹이면 멎는다고 했다.
갑자기 김을 매는 아낙의 위로
꿩 한 마리가 나래를 털며 난다.
청산도 앞바다는 한 폭의 수채화.
청산도 관문 도청항 등대
주위로 어선들이 똑딱인다.
어선 따라 갈매기 떼들도 동행.
등대 주위로는 각종 양식장임을
일러주는 색색의 부표와 깃발들.
청산도 방파제 등대는 삶의 등불.
1960년대에는 어업전진기지로서,
1970년대에는 고등어와 삼치 파시.
청산도 파시 황금어장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물량에 비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철따라 멸치, 갈치어장 형성,
바다 공동양식장에서 소라, 전복, 미역
등 해산물 채취 만선의 깃발을 휘날린다.
거센 비바람 불면
정박의 닺을 내리던
삶의 기항지.,청산도.
지금도 항구에는 위판장 건물이 있고
이들 어선에서 바로 구입해 파는 활어
횟집과 어부들과 나그네들이 잠시 쉬는
다방이 바다로 창을 내고 자라잡고 있다.
다방에 들어서자 아가씨가
잠옷 바람에 나와 나그네 일행을
반갑게 맞을 정도로 오고 가는 사람들
경계하지 않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선이
도드라져 청산도 사람들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어느 다방을 가나
동양화 몇점, 풍란 몇 그루,
수석 몇 점을 기본 장식품으로
내 놓고 있을 정도로 남도인의
예술적인 정서도 읽어낼 수 있다.
................................
항구에서 언덕배기 따라
오르다보면 읍리에 고인돌
...................................
청동기 시대 유물로
60년대 중반 이곳에서
석검이 발견되기도 했다.
바닷가 쪽으로 조금 더 나가면
당리인데 음력 정월 초사흘에는
마을 안녕과 만선을 비는 풍어제.
다시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신흥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도청리 선착장 반대편이다.
맑고 푸른 청산도 바닷물 색깔을
가장 가까이에서 구경할 수 있는 곳
바닷물이 바로 넘쳐 오를 것만 같다.
낮은 도로가 바다에 딱 붙어
파도가 살결을 맞대고 있다.
파도가 나그네 옷깃을 잡는다.
그만큼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다.
부드러운 모래로 2Km를 달린다.
밀물 때는 갯바위에서
모래무지, 도다리, 우럭,
농어, 감성돔 등이 낚인다.
썰물에는 조개와 바지락 등.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 할 수 있는 백사장.
해변에는 해송이 방풍림.
청산도 들판은 그림으로
그려놓은듯 꼬불꼬불 들길.
.
그 언덕 아래는 돌담길 따라
울긋불긋 이국적인 마을 지붕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어선다.
.
그런 풍경을 하고 있는 섬모롱이
한 굽이를 넘다 보니 갯돌밭
해변인 진산해수욕장이다.
청산도 해안선에 산재한
7개소의 갯돌밭 중 가장
고운 갯돌이 있는 곳이다.
폐교가 된 분교 운동장은 수련회,
단체야영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해변 서쪽 계곡은 해안선과 잘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랑.
“특히 낚시를 좋아한다면,
잘 닦인 해안일주도로 따라
섬 풍경을 조망하다가 해변으로
잇는 아무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
갯바위에 자리를 잡으면 될 정도로
청산도는 모든 곳이 낚시 포인트죠."
"청산도는 난류의 길목에 위치한
외해(外海)에 접해있고, 평균 해상
수온이 15℃정도를 유지해 멸치, 삼치,
고등어, 도미, 광어 등의 어종이 풍부해
우럭, 놀래미, 도다리, 광어, 농어,
참돔낚시가 연중 가능하다”.
“혹시 배낚시를 즐기고 싶다면
청산도 부속섬 여서도, 인근 모도,
불근도, 황제도를 권하고 싶다”
“여름에는 참돔, 감성돔, 벵에돔,
농어 우럭이 잘 잡히고,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에는 감성돔, 우럭,
놀래미 낚시하기에 좋다”.
다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섬을 한바퀴 빙 돌기 시작했던
그 원점인 도청항이 나온다.
청산도는 이처럼 해안도로따라
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섬이다.
초가집과 현대풍 마을풍경.
이국적 섬과 한국적인 농어촌
이미지를 동시에 풍기는 섬이다.
도청항 횟집에서
갓 잡아온 가자미회
우럭, 감성돔, 광어회
맛보며, 배를 기다린다.
그렇게 멋과 맛이
어우러진 청산도
여행을 갈무리한다.
.................
해상국립공원
....................
1.다도해 해상국립공원,
2. 한려해상국립공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은
1981년 12월 23일 전남지역
바다와 섬을 중심으로 지정된
전라지역 국립공원을 말한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은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부터
거문도, 나로도, 완도, 보길도,
진도, 도초도, 비금도, 흑산도, 홍도
등 1600개 크고 작은 섬들로 이뤄졌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은
크게 8개 지구로 나뉘는데,
흑산·홍도, 비금·도초도, 만재도,
조도, 소안·청산도, 거문·백도,
나로도, 금오도 지구 등이다.
청산도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중 하나.
청산도는 오랜 해식으로
기암괴석이 발달한 해안지형과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난대성 식물이
무성한 경관을 이루고 손꼽히는 어장이다.
대표적인 다도해이며
신라시대에는 장보고가,
고려시대에는 신안과 함께
송, 원나라와 해상무역 중심지.
조선시대에는
이순신이 진을 설치
임진왜란 왜적을 격파
전략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서울에서 하루의 시간을 벌기 위해
새벽 1시에 떠나는 심야 버스를 타고
광주에 도착하니 새벽 5시. 이윽고
5시 50분 완도행 첫버스를 타고
도착한 시간이 7시 40분이다.
완도항에서 아침 8시 20분 첫 배를 타고
떠날 때만 해도 시야를 가린 안개와 구름.
뱃길 속에 지루함이 밀려들기 시작할 무렵,
바다 저 끝으로 등대 하나가 시야에 잡힌다.
이윽고 한 점으로 떠오르는 청산도.
아침 햇살에 푸른빛을 더해가는 바다.
청산도를 노래한 시조가 절로 생각난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청산도는 대모도, 소모도, 여서도, 장도
등 4개 유인도와 9개 무인도 부속 도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삼치와 고등어
파시(波市)로 완도에서는 이름난 어항
그러나 수자원의 고갈로 당
시 1만여 명이 넘던 주민들 중
상당수는 육지로 떠나고, 현재
거주하는 3천여 명의 주민들
대부분은 농업에 의존한다.
섬 중앙에 보적산 등
해발 3백m 산들이 있어
식수 사정은 좋은 편이다.
사실 완도군 남쪽 끝자락 청산도는
파시로 성시를 이루던 60년대 이후
수십년 동안이나 ‘잊혀진 섬’이었다.
잔잔한 다도해의 다른 섬과는 달리,
옛부터 이곳은 바람과 풍랑이 심했다.
게다가 평지보다는 산비탈이 많은 지형.
밭농사에 의존해야 하는 주민생활은 열악.
자연스럽게 섬 주민들은 거센 바다 속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억척스런 삶을 꾸려나갔다.
그리고
거센 바다는
청산도에 하나의
장례 풍습을 낳았다.
‘초분(草墳)’.
남해안 도서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장례 문화의 하나로, 부모에 대한 효성과
뭍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있는 장례풍습이다.
인근 노화도와 보길도 등에서 간간이 행해졌으나,
새마을운동에 밀려 청산도 만 유일하게 남은 전통.
사람이 죽으면 집 인근 공터에 돌을 약 50cm쯤 쌓고,
관을 올려놓은 뒤 짚으로 지붕 비슷하게 만들어 덮는다.
그리고 비바람이나 짐승으로부터
초분을 보호하기 위해 산에서 베어온
억새로 용마름을 엮은 후, 3년을 두어
뼈만 남은 뒤에야 매장하는데 썩지 않은
성한 몸으로 선산에 들면 조상이 노해
풍랑을 일으켜, 사람들을 저 세상으로
잡아간다는 믿음에서 생긴 풍습이다.
...........청산도 찾아가는 길............
완도항 여객터미널(061-552-0116)에서
청산도까지 배가 하루 네 차례 왕복운행
여름 성수기에는 증편. 첫 배는 오전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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