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 시(時) 편
제1장 주요한(朱耀翰) 편
*주요작 : (샘물이 혼자서, 새벽꿈, 불노리, 비소리, 채석장)
(1) 명치학원 재학시절 일본에 소개된 프랑스의 신낭만주의 시인 포올 포르, 앙리 드 레니에 등과 서구 이미지즘 시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2) 1918년 중진 시인 카와지 루코의 추천으로 일본 시단에 전식으로 등단. 그의 유학시대는 후일 그가 주장하게 된 민요시론과 "밝은 시"론의 사실상의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중시된다.
(3) 1919년 김동인과 함께 한국의 첫 문예종합지인 [창조]를 발간, 여기에 "불노리", "해의 시절" 등 초기작 발표
(4) 1925년 민요시 운동 및 "건강하고 밝은 시"론을 펴면서, 도산의 국내조직인 "수양동우회"를 이광수와 더불어 이끌었다.
(5) [창조]에 수록된 시들과 시집[아름다운 새벽]으로 대표되는 그의 시세계는, 김억과 더불어 한국근대사의 출발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시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6) 근대시로의 이행과정에서 있어서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였던 1910년대 이광수, 최남선 및 [학지광]에 수록된 시들은, 주요한과 김억에 와서 비로소 근대적인 주제와 형상적 요소들을 성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시적 주체의 확립이라는 성과와 자유시형의 확립이라는 형상적 측면의 성과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7) 주요한의 시는 한국의 근대시가 자유시로 발전하기 위하여 통과해야 했던 "산문형 자유시"의 벽을 무너뜨린 귀중한 시사적 공헌을 하였다.
(8) 그의 시는 비록 그 관념적 측면이 문제시되고 있기는 하나, 한국 시사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밝고 건강한 시"의 전통을 초기에 세웠다는 점에서도 그 뚜렷한 시적 개성을 남기고 있다.
제2장 김억(金億) 편
*주요작 : (봄은 간다, 삼수갑산(三水甲山), 오다가다, 사공의 아내, 잃어진 그옛날)
(1) [태서문예신보]를 통해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들과 베를레느 등의 상징주의 계열 시인들의 작품 및 시론을 번역, 소개하면서 근대문학 형성기의 국내 시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 1919년 이후 [폐허], [창조] 동인에 참가하여 활동하였으며, 이후 민요시 운동 등을 펴면서 서정시의 민족적 형식의 창출에 노력하는 한편으로 수많은 번역시집을 내어 시단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3) 주요한이 프랑스의 밝고 목가적인 신낭만주의 계열의 시를 "근대적"이라고 본 반면에, 김억은 베를레느 등 애상적 정서와 음악성을 간조한 프랑스 상징주의의 한 계열을 "근대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한국근대시가 나아갈 방향으로 추구하였다.
(4)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김억은 자신의 초기 시관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민족적 형식 되찾기 운동"인 민요시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3장 이상화(李相和) 편
*주요작 : (나의 침실로, 말세의 희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상 - 구루마꾼, 엿장사, 거러지)
(1) 1921년 서울에서 현진건과 박종화를 알게 된 이후 [백조] 동인으로 활약하게 된 것이 그 시초였으며, 그 지면에 말세의 희탄, 가을의 픙경, 나의 침실로 등을 발표
(2) 1925년부터 신경향파에 가담하여 사회성이 짙은 작품을 계속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주권과 국토를 빼앗긴 참담한 현실에서 흔들리지 않는 대지와 대자연의 살아있음을 통해 민족혼의 살아 있음을 통해 민족혼의 살아 있음을 형상화하고 있다.
(3)이상화의 초기 시들은 1920년대 초반 국내 문단과 문화계를 휩쓴 소위 "퇴폐적"조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죽음이나 꿈, 밀실 등을 이상향으로 예찬하는 말세의 희탄, 나의 침실로 등이 그것으로 이 작품들은 그 사상저 위약성과 더불어 당대 현실에 대한 젊은 시인들의 좌절감의 깊이와 그 내적 성실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성이 있다.
제4장 김소월(金素月) 편
*주요작 : (진달래꼿, 산유화, 먼후일, 제이엠 에쓰,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보섭대일땅이잇섯더면)
(1) 1920년 낭인의 봄 외 5편을 [창조]에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2) 시 세계는 식민지적인 정치, 빈궁 상황에 대한 소월 나름의 현실 인식태도가 사실적이고 보다 남성적인 어조로 그려져 있는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제이엠에쓰, 나무리벌의 노래 등)을 빼면 대체로 현실에 대한 체념적 인식의 성향이 강한 개인적 정한의 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3) 그의 시에 있어서 현실이나 어떤 대상은 간절한 욕망의 표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욕구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성격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현실인식이 체념과 원망이라는 정서, 그리고 한국적인 리듬과 맞물려 형상화되는 것이 그의 "정한의 시"가 지닌 핵심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진달래꼿"은 존재의 근본 원리를 이별이라는 상황설정을 통해 형상화한 존재론의 시이다.
제5장 한용운(韓龍雲) 편
*주요작 : (님의 침묵, 알수업서요, 리별은 미의 창조, 복종, 나룻배와 행인)
(1) 1909년 "불교유신론"을 발표하는 등 불교계의 혁신 운동을 폈다.
(2) 그의 시세계는 "님의 침묵"으로 표현되는 식민지 현실, 혹은 바람직한 어떤 가치가 없는 공간 속에서 "님"과 끊어지지 않는 유대 관계를, 끊임 없는 있음과 없음의 변증법을 통하여 제시하는 고도의 형이상성을 지니고 있는 세계로 평가된다.
(3) 상실과 회복의 변증법적인 긴장관계를 연애중에 빠진 듯한 여성화자의 어조를 통해 표현함으로써 예술적인 형상성 역시도 풍부하게 확보하고 있다.
(4) 그의 시는 개인과 사회, 종교적 진리와 예술이 차원 높은 수준에서 접맥되는 세계를 창조하는 한편, 폭이 깊은 은유와 상징적인 시적 진술의 방법론을 실현시켜 한국현대시사의 사상적, 형상적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시사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제6장 정지용(鄭芝溶) 편
*주요작 : (카페 프란스, 유리창, 향수, 장수산, 백록담)
(1)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발간, [시문학]동인으로 활약, [카톨릭청년]지 편집고문.
(2) 대상에 대한 명징한 감각적 포착 및 그의 이미지화로 1930년대 시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또 수많은 추종문인들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그의 시세계는 대체로 네 단계로 나눈다. ①대상의 감각적 형상화 자체와 이국적 정조에 집착한 시기
②[향수]와 같이 편안한 리듬에 의존하면서 소박한 향토적 정조를 드러낸 세계
③카톨릭의 세계관에 입각한 종교시 역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④후기를 장식한 동양적 은일과 절제의 세계는 식민지 치하라는 역사적 조건이 싸늘한 비애의 정서로 표출되면서 획득한 미학으로 그의 최고작들인 것으로 평가.
(3) "카페 프란스"는 서구 지향의 포말리즘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낯설고 이질적인 어휘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7장 김영랑(金永郞) 편
*주요작 : (가늘한 내음, 내마음을 아실이, 독을 차고, 춘향,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1) 1920년대 시단과 1930년대 시단과의 경계를 긋는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인 영랑의 시 세계는 전기, 후기의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전기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닙에 빛나는 마음]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착, 대상에 대한 유미적 집착, 그리고 시의 음악성에 대한 집착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
②후기는 초기의 짧은 시형과 유미적 색조에 변화가 일면서 판소리를 연상시키는 긴 호흡의 리듬과 식민지 말기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표독스런 견딤의 주제들이 [춘향], [독을 차고] 등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제8장 신석정(辛夕汀) 편
*주요작 : (임께서 부르시면, 봄의 유혹, 아직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 산으로 가는 마음, 슬픈 구도)
(1) 1939년 처녀시집 [촛불] 발간을 시작으로 하여 [슬픈 목가], [빙하] 등 다수의 시집을 남겼고, 김동명, 김상용 등과 1930년대 대표적인 목가적 풍경에 대한 지향을 나타내는 전원파 시인이다.
(2) 그의 시세계는 당대 현실에 대한 절망감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3) 그의 당대 현실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이상 공간, 절대 휴식이 제공되는 모성적이고도 원초적인 공간을 지속적으로 그린 바 있는데 이러한 공간은 당대 현실이 지닌 냉혹성과 더불어 하나의 반어적 긴장의 층을 형성하는 미학적 개성을 이뤄내고 있다.
제9장 이용악(李庸岳) 편
*주요작 : (북쪽, 낡은 집,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오랑캐꽃, 절라도 가시내)
(1) 이용악의 시가 주목받는 가장 큰 이유는 시화된 그의 가족사 이야기와 만주, 시베리아 유이민들의 고난스런 삶의 이야기들이 식민지시대 조선민중의 고난스러운 삶의 보편성과 맞닿아 있다는 데에 있다.
(2) 광복 이후에도 귀향한 유이민들이 해방정국 속에서 겪는 고통을 계속해서 주제화하고 있다.
(3) "낡은 집"은 시베리아나 만주로 유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조선인의 참상을 균형있게 그리는 작품이다.
제10장 백석(白石) 편
*주요작 : (여우난골족, 외가집, 팔원,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 일제에 의한 왜곡된 근대화가 농촌지역의 근본적인 토대를 파괴하고 있던 현실 속에서, 백석은 파괴되기 전의 농촌공동체의 공동체적 정서를 풍부한 평안도 방언으로 표현해 낸 시인이다. 이러한 경향을 모국어의 고수, 그리고 민속화의 정경의 확보라는 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면 이것은 간접적인 의미에서는 이미 이러한 공동체적 신화와 질서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 식민지 지배질서에 대한 문화적 저항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제11장 이상(李箱) 편
*주요작 : (꽃나무, 정식, 소영위제, 거울, 오감도)
(1) 이상은 모더니즘 논의가 한창이던 1930년대 초, 중반 한국의 도시공간에서 첨단적인 서구 문예사조를 "바람직한 현대적" 예술로 믿고 있었던 대표적 문인으로 이 방면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실천태도를 지니고 있었던 문인이다
(2) 사회적 공간과 극단적으로 유리되어 있는 개인 의식의 깊이, 그리고 그 개인의 내면에 분열적인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도시형 인간들의 소외적 양상을 해체적인 양식으로 그려내는 하나의 선구적 전형을 한국시사에 확립하였다.
(3) 그의 시는 기존의 사회 및 문화체계 전반에 대한 일종의 근본주의적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겠다.
제12장 김기림(金起林) 편
*주요작 : (해상, 태양의 풍속, 조수, 바다와 나비, 연가)
(1) 1930년대 이 땅에 소개된 모더니즘 문학이론의 소개자로서, 또한 이를 당대의 한국적 실정에 맞는 이론으로 정립시키려 한 시인 겸 비평가로서 중요한 시사적 위치를 차지한다.
(2) 그는 자신의 이론을 통하여 한국시 역시 세계정세와 문학의 조류에 발맞추어 "음악보다 회화, 감성보다 지성, 전원보다 도시공간, 애상과 감상보다 명랑하고 경쾌한 정서를, 국지적 정세보다 세계문명 비판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
(3) 참신하고 밝은 감각적 심상과 재기있는 문명비판을 통해 한국시의 시야를 넓히는 데에 일조하였으면서도, 한국시가 안고 있는 민족, 계급모순이라는 근본적 문제를 이와 결부시키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의 시를 피상적인 문명 비판적 측면에 머무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받고 있다.
제13장 김광균(金光均) 편
*주요작 : (설야, 와사등, 추일서정, 녹동묘지에서, 은수저)
(1) 1926년 중외일보에 시 [가는 누님]으로 등단
(2) 대상에 대한 보다 명료하고 선명한 언어적 포착이라는 나름의 대상관을 바탕으로 한 이미지즘적인 방법은 음악성과 사상성, 운동성 등에 시의 중심을 두어왔던 1920-1930년대 시단의 형상화 수준을 1930년대 후반의 수작들로 끌어올리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3) 그의 시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엷은 애수를 통해서 그가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를 짐작 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것들로는 파시즘과 제국주의 아래 식민지 제국이 신음하고 있는 보다 본격적인 "현대적 상황"에 대한 사상적 고뇌나 대결내용을 담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4) 이국적 풍경이라든가 서구적 풍물 등을 소재로 하여 선명한 감각적 형상성을 보여준다.
제14장 서정주(徐廷柱) 편
*주요작 : (자화상, 화사, 국화옆에서, 상리과원, 무등을 보며)
(1)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벽]이 당선,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활약
(2) 한국의 보를레르라 불리우며 악마주의적, 관능주의적인 소재와 버림받은 자로서의 심각한 소외의식으로부터 작품세계를 출발한다.
(3) 그의 시작품에는 현실로서의 역사공간이 없다는 비판도 있긴 하나 유머러스하고 긍정적인 인간관의 계속적인 제시와 함께 그의 시는 한국적 토속의 미학을 독자적으로 제시하는 귀중한 시사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4) "화사집"에서는 악마주의적이고 관능주의적인 소재와 버림받은 자로서의 심각한 소외의식이 나타나 있다.
(5) "귀촉도"에서는 초기의 갈등과 열정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동양적인 인생파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6) "질마재신화"에서는 한국적 설화와 향수에 대한 탐구를 보여준다.
제15장 유치환(柳致環) 편
*주요작 : (그리움, 기빨, 원수, 일월, 생명의 서)
(1) 서정주와 더불어 "생명파"라 불리면서 1930년대 시단에 나온 그의 시는 현세적 세계를 초월적인 세계와 대비시키면서 인간은 그 현세적 삶이 일회성 및 허무성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현세 속에서 끊임없이 초월성을 희구 하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2) 그의 시는 언제나 사변적, 명상적 어조를 띠면서 초월적 세계에 실존적으로 대결해 가는 비장한 자세를 보여주면서 그 나름의 시적 개성을 확보한다.
(3) 그의 시가 지닌 주제의식이 이 현실을 뛰어넘는 그 나름의 미래관을 열어 보지 못했다는 점과 강점기 말까지 이러한 초기의 "비장한 허무의 포즈"가 지속되고 있었던 점은 유치환의 한계로 의구심을 낳고 있기도 하다.
제16장 이육사(李陸史) 편
*주요작 : (청포도, 절정, 교목, 꽃, 광야)
(1)그의 시작품은 짧고 개인적인 순수서정시, 실패한 모더니즘 시 등도 포함하고 있으나, 그의 삶을 특징지웠던 지사적인 면모를 기준으로 보면, 삶의 내면적 고독과 실향의식을 다룬 연약한 작품들과 예언자적인 굵은 목소리로 민족 생존문제의 실상과 그 미래를 형상화한 강한 작품군으로 나눠진다.
(2) 그의 시는 비극적인 생에 자체나 "암흑기의 별"이 라는 통칭이 갖는 정신사적인 의미에서뿐만이 아니라, 선이 가냘픈 여성주의적 발상과 모더니즘적 요소가 주된 흐름을 이뤘던 1930-1940년대 시단에서 선이 굵은 남성적 목소리와 한시적 발상법으로 민족현실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매우 튼튼한 시사적 위치를 지니고 있다.
제17장 박두진(朴斗鎭) 편
*주요작 : (향현, 묘지송, 도봉, 푸른 하늘아래, 해)
(1) 조지훈, 박목월 등과 청록파 시인
(2) 천신한 자연미와 식민지 현실을 기독교적 이상으로 지탱해 나가는 개성적인 주제를 제시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3) 강한 민족의식과 현실의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시창작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의 시는 기독교 윤리가 한국시사, 그리고 현실과 긍정적으로 접맥된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제18장 조지훈(趙芝薰) 편
*주요작 : (고풍의상,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봉황수)
(1) 본명은 조동탁이며,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으며,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2) 그의 초기 시 역시 청록파의 다른 시인들과 같이 자연을 주대상으로 한 점이 공통적이라 하겠다.
(3) 청록파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이러한 정신적 특질은 불교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던 조지훈에게서는 특별히 고풍스러운 전통 소재에 대한 유미적 집착과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도인풍의 관조적 자세, 그리고 선적인 형상성을 지닌 채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제19장 박목월(朴木月) 편
*주요작 : (길처럼, 나그네, 난, 하관, 윤사월)
(1) [청록집]에 수록된 그의 시는 애상과 슬픔이라는 정서를 주된 모티브로 하여 짧은 단시형에 절제미와 운율미가 한껏 가미된 형상화 방법을 택하고 있다.
(2) 해방 후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그의 시는 점차 가난과 이별 등 일상사의 고뇌를 담는다든가 삶과 죽음에 얽힌 실존적 고뇌 등의 문제를 추구하기 시작하나,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이 역시 소시민적인 삶의 애환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3) 초기에는 청신한 자연미와 식민지 현실을 기독교적 이상으로 지탱해 나가는 개성적인 주제를 제시했다.
(4) "거미의 성좌"나 "인간밀림" 등에서부터는 기독교적 윤리의식에 입각한 준열한 현실비판의 세계를 보여준다.
(5) 그의 시는 기독교 윤리가 한국시사, 그리고 현실과 긍정적으로 접맥된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이다.
제20장 윤동주(尹東柱) 편
*주요작 : (소년, 십자가, 또 다른 고향, 서시, 쉽게 씌어진 시)
(1) 주요 작품들은 대개 암담한 현실과 자아와의 대치라는 긴장구조로 그 내적 짜임이 설명된다. 이러한 짜임은 계속하여 유약하고 소극적인 자아에 대한 윤리적 성찰과 부끄러움의 고백으로 표현 되는데 결국 이러한 갈등은 [십자가]가 보여주는 비극적인 자기희생의 세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2) "부끄러움의 미학"이라는 말이 그의 시 세계의 핵심을 잘 지적한 표현이라고 여겨지는 바 그는 지사적이고 큰 목소리가 식민지시대의 이상적인 시라고 여겨져온 풍토 속에서, 자신에 대한 진지하고 내면화된 윤리적 성찰과 그 부끄러움의 고백이라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통해 오히려 높은 정신사적, 시사적 위치를 획득한 시인이다.
제 II 부 소설(小說) 편
제21장 안국선(安國善) 편 - 공진회(共進會)
(1) 1907년 [정치원론], [연설방법] 발간
(2) 1908년 [금수회의록] 발간
(3) 1915년 단편집 [공진회] 발간
(4) [공진회]는 기생, 인력거꾼, 시골노인 이야기의 3편으로 구성된 단편소설집이다.
제22장 이해조(李海朝) 편 - 자유종(自由鐘)
(1) 1906년 잡지 [소년 한반도]에 백화체 한문현토소설 [잠상태] 연재
(2) 1910년 [자유종] 발표
(3) 1911년 매일신보에 [화의 혈] 연재
(4) 1912년 고소설 [춘향전]을 [옥중화]로, [심청전]을 [강상련]으로, [별주부전]을 [토의 간]으로, [흥부전]을 [연의 각]으로 개작
제23장 이광수(李光洙) 편 - 어린 희생(犧牲)
(1)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유학
(2) 1909년 처녀작 [사랑인가]를 일본어 [愛か]로 명치학원의 백금학보에 발표
(3) 1917년 [무정] 매일신보에 연재, 단편[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발표
(4) 1918년 도일하여 '조선청년독립단'조직, 1919년 2.8독립선언서 기초, 단편[방황], [윤광호] 발표
(5) 단편(거실, 무명씨전, 어린 희생, 가천 교장, 원술의 출정,)
(6) 중편(선도자, 혁명가의 아내, 사랑의 다각형, 무명)
(7) 장편(춘향전, 마의태자, 단종애사, 이순신, 흙, 유정, 그 여자의 일생, 이차돈의 사, 애욕의 피안, 그의 자서전, 사랑, 원효대사, 꿈)
(8) 미완 장편(사십년, 서울, 운명), 중단된 장편(봄의 노래, 그들의 사랑)
(9) 최초의 근대적 장편소설 [무정] 발표
제24장 김동인(金東仁) 편 - 광염(狂炎)쏘나타
(1) 1919년 <창조>창간호에 소설[약한 자의 슬픔] 발표
(2) 1921년 단편 [목숨, 배따라기] 창조에 발표, [연산군] 개벽에 발표
(3) 단편(태형, 이 잔을, 눈을 겨우 뜰 때, 정희, 명문, 시골 황서방, 감자, 원보부처, 여인, 송동이, 죄와 벌, 배회, 증거, 순정, 구두, 포플러, 신앙으로, 광염쏘나타, 광화사, 뺏기운 대금업자, 거지, 잡초, 박첨지의 죽음, 발가락이 닮았다, 붉은 산, 적막한 저녁, 화중난무, 대탕지 아주머니, 가신 어머님, 가두, 곰네)
(4) 중편(마음이 옅은 자여, 김연실전)
(5) 장편(젊은 그들, 대수양, 아기네, 운현궁의 봄, 제성대, 을지문덕)
(6) [광염쏘나타]와 그 경향이 같은 작품으로는 [광화사]가 있다.
제25장 현진건(玄鎭健) 편 - 술 권하는 사회
(1) 1920년 <개벽>에 처녀작 [희생화] 발표
(2) 1921년 <개벽>에 [빈처], 단편[술 권하는 사회] 발표, <백조> 동인에 참가
(3) 1923년 육당 최남선 주재 <동명>의 편집동인
(4) 단편(피아노, 유린, 까막잡기, 그립은 흘긴 눈, 운수 좋은날, 불, B사감과 러브레터, 새빨간 웃음, 사립정신병원장, 신문지와 철창, )
(5) 중편(타락자, 지새는 안개, 할머니의 죽음)
(6) 장편(적도, 흑치상지)
제26장 염상섭(廉想涉) 편 - 표본실의 청게고리
(1) 본명 상섭(尙燮), 필명 상섭(想涉), 아호 제월, 횡보
(2) 1920년 첫소설 [백래묘] 발표, 첫시작품 [법의] 발표
(3) 1921년 <개벽>에 [표본실의 청개구리] 발표,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인간의 심리를 다룬 작품이다.
(4) 단편(암야, 제야, 금반지, 조그만 일, 두 출발, 전화, 추락, 임종, 두파산, 일대의 유업, 해방의 아침, 짖지 않는 개)
(5) 장편(묘지->만세전, 이심, 광분, 삼대, 사랑의 죄, 무화과, 그 여자의 운명, 청춘항로, 홍염, 취우, 지평선, 화관, 대를 물려서)
(6) 단편집(견우화. 삼팔선, 해방의 아들, 일대의 유업)
제27장 최서해(崔曙海) 편 - 탈출기(脫出記)
(1) 아명은 저곡, 필명은 서해
(2) 1924년 <조선문단>창간호에 단편 [고국]이 추천되어 발표
(3) 단편(토혈, 십삼원, 탈출기, 살려는 사람들,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큰물진 뒤, 폭군, 오원칠십오전, 백금, 금붕어, 8개월, 이역원귀, 무서운 인상, 홍염, 전아사, 낙백불우, 행복, 무명초, 같은 길을 밟는 사람들, 잊지 못할 사람들, 누이동생을 따라)
(4) 장편(호외시대)
(5) 수필(여름과 물, 미덥지 못한 마음, 잡담, 병신의 넋두리)
(6) 창작집(혈흔, 홍염)
(7)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간도지방에서의 조선인 이주농민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홍염], [박돌의 죽음] 등을 발표
제28장 조명희(趙明熙) 편 - 낙동강(洛東江)
(1) 1923년 동경에서 귀국, [영혼의 한쪽 기행], [봄 잔디밭 위에서] 발표
(2) 1924년 적로라는 별호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서] 발간, 이후 경향파 작가로 활약
(3) 1925년 KAPF 창립에 주도적 역할, [땅속으로], [나에게 반성의 낙월을 다고] 발표
(4) 1927년 [낙동강], [저기압], [동지], [한여름밤의 꿈] 발표
(5) 1928년 소련으로 망명, 장편 [붉은 깃발 아래] 탈고
(6) [낙동강]은 KAPF 제2기 목적의식기의 대표적 작품
제29장 이기영(李箕永) 편 - 홍수(洪水)
(1) 1924년 [오빠의 비밀편지] 현상공모 당선, 본격적인 작가생활 시작
(2) 주요작품들 (가난한 사람들, 민촌, 농부 정도령, 홍수, 부역, 서화, 고향)
(3) 일본 방적 공장에 팔려 갔던 주인공 박건성을 통하여 당시 조선 농민의 비참한 삶을 그린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다.
제30장 한설야(韓雪野) 편 - 과도기(過渡期)
(1) 1925년 카프 결성에 참가, 처녀작 [그날밤]을 이광수의 추천으로 발표
(2) 1927년 [계급대립과 계급문학]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이론가로 등장
(3)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연맹 조직 결성 주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결성 주도,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장편 [역사]로 인민상 수상
(4) 장편노동소설(황혼), 장편(청춘기, 탑)
(5) [과도기]는 식민지 자본주의화 현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씨름]은 그 속편이다.
제31장 강경애(姜敬愛) 편 - 소금
(1) 1923년 장연에 와 있던 양주동과 만나 문학에 입문, [파금]으로 문단에 데뷔
(2) <북향>동인 중편(소금, 지하촌), 장편(인간문제)
(3) 강경애는 간도에 거주하면서 식민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작가이고 그의 대표작 [소금]은 봉염 어머니를 통해 조선인 하층민들의 고난한 삶을 잘 그리고 있다.
제32장 박화성(朴花城) 편 - 홍수 전후(洪水前後)
(1) 1925년 단편 [추석전야]를 <조선문단>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2) 1932년 장편 [백화]를 츨간한 이후 [고향 없는 사람들], [홍수 전후] 등
제33장 채만식(蔡萬植) 편 - 치숙(痴叔)
(1) 1923년 처녀작 [과도기]를 탈고 <문학사상>에 유고로 발표
(2) 1924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
(3) 단편(불효자식, 생명의 유희, 산적, 그 뒤로, 병조와 영복이, 사라지는 그림자, 창백한 얼굴들, 화물자동차, 조그마한 기업가, 앙탈, 산동이, 부촌, 농민의 회계보고, 레디메이드 인생, 보리방아, 명월, 동화, 이런 처지, 쑥국새, 두 순정, 치숙, 용동댁의 경우, 소망, 정자나무 있는 삽화, 순공있는 일요일, 반점, 모색, 이런 남매, 흥보씨, 패배자의 무덤, 남식이, 차 안의 풍속, 냉동어, 회, 혹, 근일, 사호일단, 집, 병이 낫거든, 해후, 암소를 팔아서, 강선달, 덕원이 선생, 고약한 사돈, 향수, 삽화, 흥보전, 종로의 주민, 맹순사, 역로, 미스터 방, 논 이야기, 해방문학선집, 처자, 낙조, 돼지, 민족의 죄인, 아시아의 운명, 역로, 늙은 극동선수, 역사)
(4) 중편(배비장, 심봉사, 허생전, 소년은 자란다)
(5) 장편(인형의 집을 나와서, 탁류, 생명, 황금원, 부전딱지, 천하태평춘->태평천하, 금의 정열, 아름다운 새벽, 어머니->여자의 일생, 여인전기, 옥랑사), 미완장편(소)
(6) 희곡(가죽버선, 농촌스케치, 조조, 인텔리와 빈대떡, 영웅모집, 심봉사)
(7) 채만식은 풍자와 해학의 기법을 통해 식민지 현실을 그린 작가이다.
(8) 작품 [탁류]는 초봉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비극적 운명을 그린 세태소설이다.
제34장 이상(李箱) 편 - 종생기(終生記)
(1) 시(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의 유희, 꽃나무, 이런 시, 거울, 오감도, 정식, 지비, 산촌여정 등)
(2) 소설(날개 등)
제35장 이효석(李孝石) 편 - 노령근해(露領近海)
(1) 단편(도시와 유령, 행진곡, 기우, 노령근해, 하루빈, 깨뜨려지는 홍등, 약령기, 마작철학, 서점에 비친 도시 일면상, 초설, 상륙, 북국사신, 프레류드, 오리온과 능금, 북국점경, 첩첩자를 질타 함, 무풍대, 돼지, 수탉, 가을과 서정, 수난, 주리야, 일기, 두 처녀상, 성수부, 성화, 성찬, 개살구, 인간산문, 낙엽기, 장미 병들다, 해바라기, 늪의 신화, 가을과 산양, 수선화, 상하의 윤리, 황제, 일표의 공능, 산정, 유경식보, 화초, 주을 가는 길에, 산협, 사랑의 판도, 라오 코왼의 후예, 북경호일, 풀잎, 일요일, 분녀,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석류)
(2) 장편(화분, 벽공무한)
(3) 평론(즉실주의의 길로, 설화체와 생활의 발견)
(4) [노령근해]는 동반자 작가의 특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제36장 이태준(李泰俊) 편 - 복덕방(福德房)
(1) 1925년 <시대일보>에 [오몽녀]로 데뷔
(2) 1929년 개벽사 입사 후 <학생>, <신생> 등 편집에 관여, 이화여전 강사
(3) 1933년 구인회 동인
(4) <문정>지 주관,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제37장 김유정(金裕貞) 편 - 금 따는 콩밭
(1) 1935년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당선
(2) 주요작(금따는 콩밭, 떡, 만무방, 산골, 봄봄, 산골나그네, 옥토끼, 동백꽃, 정조, 야맹, 슬픈 이야기, 따라지, 땡볕, 정분, 생의 반려-미완성장편)
제38장 이무영(李無影) 편 - 제1과 제1장
(1) 1926년 처녀장편 [의지없는 청춘]을 청조사에서 간행
(2) 1927년 장편 [폐허의 울음]을 청조사에서 간행, 무영이란 아호를 쓰기 시작(본명은 용구)
(3) 단편(두 훈시, 미남의 최후, 구성영감과 의학박사, 아내, 만보노인, 취향, 오도령, 약혼전말, 반역자, 꾸부러진 평행선, B녀의 소묘, 흙을 그리는 마음, 나는 보아 잘 안다, 루바슈카, 오전영시, 궤도, 당기삽화, 우심, 농부, 용자소전, 유모, 산가, 오열, 분막, 일요일, 적, 전설, 딸과 아들과, 제1과 제1장, 어떤사내, 민권, 이름없는 사나이, 원주댁, 승부, 귀소, 모우지도, 청기와집, 굉장소전, 청개구리, 석전기, 불암, 산정삽화, 죄와 벌, 미애)
(4) 중편(지축을 돌리는 사람들)
(5) 장편(먼동이틀때, 명일의 포도, 세기의 딸, 농민, 그리운사람들, 노농, 창, 계절의 풍속도)
(6) 희곡(한낮에 꿈꾸는 사람들, 모는 자와 쫒기는 자)
제39장 박영준(朴榮濬) 편 - 모범 경작생(模範耕作生)
(1) 아호는 만우, <교우지>에 [M에게]라는 시 발표
(2) 1934년 처녀장편 [일년]이 <신동아>에, 단편 [모범경작생]이 <조선일보>에, 콩트 [새우젓]이 <신동아>에 거의 동시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
(3) 중편(푸른치마, 태풍지대, 파도여 내일도, 여인삼대, 불안지대, 유전, 부부, 흑색광선, 파도 속에서, 소요, 절박 속의 순수, 유실, 지붕밑, 몽현기, 파하기, 사랑의 공포, 저녁에 피는 꽃)
(4) 장편(쌍영, 한류의 어족, 열풍, 애정의 계곡, 청춘병실, 형구, 파도여 내일도, 파도와 모래의 합창, 결혼학교, 종각, 가족, 산이운다, 고속도로, 보라색가면, 뛰는 사람들, 겨울등산)
(5) 전쟁소설(빨치산)
제40장 김정한(金廷漢) 편 - 사하촌(寺下村)
(1) 아호는 요산
(2) 1931년 단편 [구제사업]이 <신계단>에 제목만 실리고 내용은 전문 삭제 당함
(3) 1936년 소설 [사하촌]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 단편 [옥심이] 발표
(4) 주요작(항진기, 기로, 그러한 남편, 낙일홍, 추산당과 곁사람들, 월광한, 생산문학론, 모래톱 이야기, 한국의 센티멘탈리티, 고시조에 반영된 농민, 과정, 입대, 곰, 유채, 축생도, 제3병동, 구랄이, 수라도, 뒷기미 나루, 지옥변, 독메, 인간단지, 실조, 산거족, 사밧재, 산서동 뒷이야기, 회나뭇골 사람들, 어떤유서, 위치, 교수와 무래무지)
(5) 1977년 장편소설 [삼별초] 발표
----------------------------------------------
주요한
호 송아(頌兒). 평남 평양(平壤) 출생. 초등학교 졸업 후 도일,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등부와 도쿄[東京] 제1고등학교를 거쳐 3 ·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후장[滬江]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을 지냈고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실업계에 투신하여 화신상회(和信商會) 중역으로 있었다. 8 ·15광복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경제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을 거쳐 4 ·19혁명 후 장면 내각 때는 부흥부장관 ·상공부장관을 역임했고 5 ·16군사정변 후에는 경제과학심의회 위원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지냈다.
메이지학원 재학중에 문학에 뜻을 두고 학우들과 회람지를 발행하는 한편 일본 시인 가와지 류코[川路柳虹]의 문하에서 근대시를 공부하다가 1919년 《창조(創造)》 동인에 참가함으로써 문단에 진출했다. 1919년 《창조》 1호에 발표한 시 〈불놀이〉는 서유럽적인 형태의 최초의 근대시로 평가된다. 그 후 계속 〈아침처녀〉 〈빗소리〉 등, 낭만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였다. 1924년에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간행했고, 그 밖에 이광수(李光洙) ·김동환(金東煥)과 함께 펴낸 《3인시가집(三人詩歌集)》(1929)이 있다. 한편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시부 회장, 1945년 조선언론보국회 참여 등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김억
호 안서(岸曙). 본명 희권(熙權). 평북 정주(定州) 출생.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중퇴하였다.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서도 근무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등을 지내면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다가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20세 때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특히 투르게네프 ·베를렌 ·구르몽 등의 시를 번역 ·소개하여 한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는 베를렌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것으로서 한국 시단에 상징적 ·퇴폐적 경향을 낳게 하는 촉매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타고르의 《기탄잘리》 《원정(園丁)》 《신월(新月)》 등을 번역하였고, 그 밖에 A.시몬즈 시집 《잃어버린 진주》와 한시의 번역 시집인 《꽃다발》 《망우초》 《중국 여류시선》 등이 있다.
1923년에 간행된 그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으로서 인생과 자연을 7 ·4조, 4 ·4조 등의 민요조(民謠調) 형식으로 담담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선구적 연구가로서 1920년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한 상설 강습소를 만들었는데, 한성도서에서 간행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1932)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이다. 그는 특히 오산학교에서 김소월(金素月)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을 남겼다.
이상화
호 상화(尙火). 본관 경주. 대구(大邱) 출생. 1919년 서울 중앙고보를 3년 수료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시위운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문예지 《백조(白潮)》 동인, 〈말세(末世)의 희탄(欷嘆)〉 〈단조(單調)〉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이중(二重)의 사망〉 등을 발표하고 이듬해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했다. 《개벽》지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하였으며 1935년부터 2년간 중국을 방랑하고 1937년 조선일보사 경북총국을 맡아 경영하기도 했다.
그후 교남학교(嶠南學校)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했고 1940년 이후 독서와 연구에 몰두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등의 집필을 기획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작품으로 위에 적은 외에 《비음의 서사》 《마음의 꽃》 《조소(嘲笑)》 등 다수가 있다.
김소월
본명 정식(廷湜).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龜城)에서 출생하였다.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19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그후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19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자신의 저서에서 “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19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지적하였다. 7·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한용운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정지용
1902년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모교의 교사, 8·15광복 후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편집국장을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수시인이었으나,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에 관계하다가 전향, 보도연맹(輔導聯盟)에 가입하였으며,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에 끌려간 후 사망했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이상(李箱)의 시를 실어 그를 시단에 등장시켰으며, 1939년 《문장(文章)》을 통해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의 청록파(靑鹿派)를 등장시켰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 작품으로, 시 《향수(鄕愁)》 《압천(鴨川)》 《이른봄 아침》 《바다》 등과, 시집 《정지용 시집》이 있다.
김영랑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 3·1운동 때에는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C.G.로세티, J.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신석정
본명 석정(錫正). 전라북도 부안(扶安)군 출생.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강원에서 약 1년간 불전(佛典)을 연구하였다.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활동을 본격화,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8 ·15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 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역시 8 ·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 그 뒤 계속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용악
함북 경성군(鏡城郡) 출생이다. 일본 도쿄[東京] 조치[上智]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 《신인문학(新人文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 문단에 등단했다. 김종한(金鍾漢)과 함께 동인지 《이인(二人)》을 발간했고, 《인문평론(人文評論)》지의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초기의 시 가운데 《북국의 가을》 《오랑캐꽃》 등은 대체로 모더니즘적 취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뛰어난 감각적 이미지의 구사에도 불구하고 그 예술적 형상이 단편적이라는 지적도 받았다. 그의 시의 탁월함은 모더니즘에의 유혹이 축소, 완화되고 대신 구체적인 자기 삶에 굳건히 바탕을 둔 '이야기 시'를 지향할 때 비로소 발현된다.
《눈 나리는 거리에서》 《슬픈 사람들끼리》 등의 ‘이야기 시’가 가진 매력은 당시 조선민중의 삶을 압박하는 정치·경제적 고통을 구체적인 경험에 긴밀히 관련시켜 하나의 분명한 예술적 형상, 또는 문학적 전형을 창출해 보이는 데서 찾아진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맹원으로 활약하다가 군정당국에 의해 수감되었고, 6·25전쟁 중에 월북했다. 그 밖의 작품에는 시에 《버드나무》 《두메산골》 《구슬》, 시집에 《분수령(分水嶺)》 《낡은 집》 등이 있다.
백석
본명 기행(夔行).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하였다.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근무하였으며,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이상
본관 우봉(牛峯). 자 운거(雲擧)·숙우(叔羽). 호 타우(打寓). 시호 문목(文穆). 송시열(宋時烈)을 통해 김집(金集)의 학문을 이어받았다. 1658년(효종 9) 산림들이 진출할 때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諮議)·진선(眞善)에 임명되었다.
1661년(현종 2) 이후로 사헌부의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고, 1681년(숙종 7) 이후 사업(司業)·형조참의·우윤·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학문적 정치적으로 송시열을 충실히 따랐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는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고, 1680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재기하였다. 노론 ·소론이 분기될 때도 송시열을 따라 소론의 남인 등용론에 반대하였다.
1688년 재산을 탐내어 먼 친척을 모함했다는 혐의로 처벌받았으며, 서인이 실세한 기사환국(己巳換局) 뒤 옥사하였다. 1717년에 복관되었고, 이조판서를 추증받았다. 충남 전의(全義)의 뇌암서원(雷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김기림
본명 인손(仁孫), 필명 편석촌(片石村). 함경북도 학성군 학중(鶴中)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보성고보(普成高普), 일본 니혼[日本]대학을 거쳐 도호쿠[東北]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0년대 초반에 《조선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특히 시 창작과 비평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문학 활동은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본격화되어, I.A.리처즈의 주지주의(主知主義) 문학론에 근거한 모더니즘의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고, 그러한 경향에 맞추어 창작에 임하기도 하였다.
첫 시집 《기상도(氣象圖)》(1936)는 현대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주지적인 성격, 회화적 이미지, 문명비판적 의식 등을 포함한 장시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 시집 《태양(太陽)의 풍속(風俗)》(1939)에서는 이미지즘이 더욱 분명한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8·15광복 후 월남하였으며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정치주의적인 시를 주장하였고,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중앙대학교 등에서 문학을 강의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시집에 《바다와 나비》(1946) 《새노래》(1948)가 있고, 저서에 《문학개론》(1946) 《시론》(1947) 《시의 이해》(1949) 등이 있으며, 1988년 《김기림전집》이 간행되었다.
김광균
1914년 1월 19일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송도상고를 졸업하였다. 《중앙일보》에 시 《가는 누님》(1926)을 발표한 뒤 《동아일보》에 시 《병》(1929) 《야경차(夜警車)》(1930) 등을 발표했으며, 《시인부락》(1936) 동인, 《자오선(子午線)》(1937) 동인으로 활동했다. T.E.흄, E.파운드, T.S.엘리엇 등 영국 주지주의 시운동을 도입 소개한 김기림(金起林)의 이론과 시작에 영향을 받고 “시는 회화(繪畵)다”라는 모더니즘의 시론을 실천했다.
도시적 소재와 공감각적(共感覺的) 이미지를 즐겨 사용했으며, 이미지의 공간적인 조형(造形)을 시도한 점 등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시집으로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가 있다. 6·25전쟁 후에는 실업계에 투신, 문단과는 거의 인연을 끊었으며, 제2시집 이후 10여 년 만에 문단 고별 시집 《황혼가(黃昏歌)》(1969)를 출간했다
서정주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고향의 서당에서 공부한 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으로 등단하여 같은 해 김광균(金光均)·김달진(金達鎭)·김동인(金東仁)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1941년 〈화사(花蛇)〉〈자화상(自畵像)〉〈문둥이〉등 24편의 시를 묶어 첫시집 《화사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1942년 7월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4년까지 친일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스무 살 된 벗에게》(1943)와 일본어로 쓴 시 〈항공일에〉(1943), 단편소설 《최제부의 군속 지망》(1943), 시 《헌시(獻詩)》(1943), 《오장 마쓰이 송가》(1944) 따위의 친일 작품들을 발표했다.
1948년에는 시집 《귀촉도》, 1955년에는 《서정주 시선》을 출간해 자기 성찰과 달관의 세계를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정조로 노래하였고, 이후 불교 사상에 입각해 인간 구원을 시도한 《신라초》(1961), 《동천》(1969), 토속적·주술적이며 원시적 샤머니즘을 노래한 《질마재 신화》(1975)와 《떠돌이의 시》(1976) 외에 《노래》(1984),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을 출간하였다.
1948년 《동아일보》 사회부장·문화부장, 문교부 예술국장을 거쳐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후 조선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9~1979)를 지낸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 종신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1년 현대시인협회 회장, 1972년 불교문학가협회 회장, 1977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1984년 범세계 한국예술인회의 이사장, 1986년 《문학정신》 발행인 겸 편집인을 지냈고, 2000년 12월 24일 사망하였다.
저작에는 《한국의 현대시》《시문학원론》《세계민화집》(전5권) 등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의 시집 외에 《흑산호》(1953), 《국화 옆에서》(1975), 《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대한민국예술원상, 5·16 민족상, 자유문학상 등을 받았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자체 조사하여 발표한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자 1차 명단(708명)'에 포함되었다.
유치환
호 청마(靑馬). 경남 통영 출생. 유치진의 동생으로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귀국하여 동래고보(東萊高普)를 졸업,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1년 만에 중퇴하였다.
정지용(鄭芝溶)의 시에서 감동을 받아 시를 쓰기 시작, 1931년 《문예월간》지에 시 《정적(靜寂)》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데뷔, 그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시작을 계속, 1939년 제1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를 간행하였다.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허무와 낭만의 절규 《깃발》을 비롯한 초기의 시 5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읊은 시 《수(首)》 《절도(絶島)》 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이 무렵의 작품들을 수록한 것이 제2시집 《생명의 서(書)》이다.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는 한편 시작을 계속, 1948년 제3시집 《울릉도》, 1949년 제4시집 《청령일기》를 간행하였고, 6·25전쟁 때는 종군문인으로 참가하여 당시의 체험을 《보병과 더불어》라는 종군시집으로 펴냈다. 그후에도 계속 교육과 시작을 병행, 중·고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통산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도도하고 웅혼하며 격조 높은 시심(詩心)을 거침 없이 읊은 데에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자칫 생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기교보다도 더 절실한 감동을 준다.
제1회 시인상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상·예술원공로상·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에 그의 오랜 연고지인 경주에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가 있다.
이육사
호 육사(陸史). 본명 원록(源祿), 활(活). 경북 안동(安東)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박두진
1916년 3월 10일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단하였다. 1946년부터 박목월(朴木月)·조지훈(趙芝熏) 등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활동한 이래, 자연과 신의 영원한 참신성을 노래한 30여 권의 시집과 평론·수필·시평 등을 통해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연세대·우석대·이화여대·단국대·추계예술대 교수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아세아자유문학상(1956)·삼일문화상(1970)·예술원상(1976)·인촌상(1988)·지용문학상(1989) 등을 수상했다. 저서에 《거미의 성좌》 《고산식물》 《서한체》 《수석연가》 《박두진문학전집》 등이 있다.
2001년 6월 프랑스 아비뇽 근처 고대 로마유적지로 알려진 베종 라 로망(Vaison la Romaine)에 시비가 세워졌는데, 대표작 〈해〉의 첫 구절이 앞면은 한글로. 뒷면은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있다.
조지훈
본명 동탁(東卓).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 엄격한 가풍 속에서 한학을 배우고 독학으로 혜화전문(惠化專門)을 졸업하였다. 1939년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지의 추천을 받아 시단에 데뷔했다. 고전적 풍물을 소재로 하여 우아하고 섬세하게 민족정서를 노래한 시풍으로 기대를 모았고,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과 함께 1946년 시집 《청록집(靑鹿集)》을 간행하여 ‘청록파’라 불리게 되었다.
1952년에 시집 《풀잎 단장(斷章)》, 1956년 《조지훈시선(趙芝薰詩選)》을 간행했으나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민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시집 《역사(歷史) 앞에서》와 유명한 《지조론(志操論)》은 이 무렵에 쓰인 것들이다. 1962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여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를 기획, 《한국문화사서설(韓國文化史序說)》 《신라가요연구논고(新羅歌謠硏究論考)》 《한국민족운동사(韓國民族運動史)》 등의 논저를 남겼으나 그 방대한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서울 남산에 조지훈 시비(詩碑)가 있다.
박목월
본명 영종(泳鍾). 경북 경주(慶州)에서 태어났다.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을 졸업하고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장하였다.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1963년 교수가 되었다.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에 선임되었고,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이 되었다.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자유문학상·5월문예상·서울시문화상·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받았다. 저서에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고, 시집에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시》,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등이 있다.
윤동주
북간도(北間島) 출생. 용정(龍井)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을 거쳐 도일,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재학 중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하다 사상범으로 일경에 피체, 1944년 6월 2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용정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연길(延吉)에서 발행되던 《가톨릭소년》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고 1941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도일하기 앞서 19편의 시를 묶은 자선시집(自選詩集)을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가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그의 사후에 햇빛을 보게 되어 1948년에 유고 30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된 윤동주는 일약 일제강점기 말의 저항시인으로서 크게 각광을 받게 되었다. 주로 1938~1941년에 씌어진 그의 시에는 불안과 고독과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돌파하려는 강인한 정신이 표출되어 있다. 《서시(序詩)》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십자가》 《슬픈 족속(族屬)》 등 어느 한 편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울분과 자책, 그리고 봄(광복)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다. 연세대학교 캠퍼스와 간도 용정중학 교정에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1995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도 대표작 《서시》를 친필과 함께 일본어로 번역, 기록한 시비가 세워졌다.
안국선
호는 천강(天江)이며, 1878년(고종 15) 경기도 양지군 봉촌(지금의 안성시 고삼면 봉산리)에서 태어났다. 월북작가 안회남(安懷南)의 아버지이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을 거쳐 도쿄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1899년 7월에 졸업하였다.
그해 귀국한 뒤 11월에 박영효와 관련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4년이 넘게 미결수로 수감되었다가 1904년 3월 재판에서 태형 100대에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접도로 유배되었다.
1907년(융희 1) 3월 유배에서 풀려난 뒤 돈명의숙(敦明義塾)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대한협회 등 사회단체의 일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 11월부터 1개월 동안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 사무관, 1908년 7월부터 1910년의 국권피탈 때까지 탁지부 관리로 일하였으며, 1911년 경상북도 청도군 군수로 임명되어 2년 3개월 동안 재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금광·개간·미두(米豆)·주권(株券) 등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였고, 1926년 서울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개화기의 대표적 지식인이며 신소설 작가로서 초기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한 작품을 썼으나 뒤에는 친일 성향을 드러냈다. 1908년 2월에 펴낸 《금수회의록》은 동물들을 내세워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국권수호와 자주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치안방해라는 이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판매금지 소설이 되었다.
191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단편소설집 《공진회(共進會)》를 펴냈는데, 《기생》, 《인력거꾼》, 《시골 노인 이야기》 등 3편의 단편에서 방관자나 패배주의에 빠져 현실에 순응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이밖에 필사본 《발섭기(跋涉記)》 상·하 2권과 《됴염전》을 썼다고 하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교단에서 정치·경제를 가르치면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외교통의》 《정치원론》(1907) 등을 썼으며, 당시 유행하던 사회계몽 수단인 연설 토론의 교본으로 《연설법방(演說法方)》(1907)을 지었다. 또 《야뢰(夜雷)》, 《대한협회보》,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등에 시사적인 논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해조
호 열재(悅齋)·우산거사(牛山居士)·선음자(善飮子)·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신안생(神眼生)·해관자(解觀子)이다. 경기 포천(抱川) 출생이다.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제국신문》과 《매일신보》 등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신소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종(自由鐘)》(1910)은 주인공들의 토론형식을 빌어 정치이념을 제시한 작품이며 《화(花)의 혈(血)》(1910)은 부패관리의 부정을 폭로한 소설이다. 대체로 그의 신소설은 신교육과 개화사상을 고취하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반영하였다.
《철세계(鐵世界)》는 프랑스의 베른의 소설을 번안한 것이며, 그 밖에도 한국의 고대소설을 신소설화하여 《춘향전(春香傳)》을 《옥중화(獄中花)》, 《심청전》을 《강상련(江上蓮)》 등으로 개작 발표하였다. 그 밖에 《춘외춘(春外春)》 《빈상설(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汫╨죠ϊ명, 임시정부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이광수
호 춘원(春園).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소작농 가정에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동학(東學)에 들어가 서기(書記)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추천으로 도일, 메이지[明治]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허영숙(許英肅)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再生)》 《마의태자(麻衣太子)》 《단종애사(端宗哀史)》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滿浦)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사랑》 《원효대사》 《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김동인
본관 전주. 호 금동(琴童)·금동인(琴童人)·춘사(春士). 창씨명(創氏名) 곤토 후미히토[金東文仁]. 평안남도 평양 출생. 일본 도쿄[東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를 중퇴하였다. 1919년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발간하는 한편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고 귀국하였으나, 출판법 위반 혐의로 일제에 체포·구금되어 4개월 간 투옥되었다.
출옥 후 《목숨》(1921) 《배따라기》(1921) 《감자》(1925) 《광염(狂炎) 소나타》(1929)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간결하고 현대적인 문체로 문장혁신에 공헌하였다.
이광수(李光洙)의 계몽주의적 경향에 맞서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 수법을 사용하였으며, 1925년대 유행하던 신경향파(新傾向派) 및 프로문학에 맞서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순수문학 운동을 벌였다. 1924년 첫 창작집 《목숨》을 출판하였고, 1930년 장편소설 《젊은 그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1년 서울 행촌동(杏村洞)으로 이사하여 《결혼식》(1931) 《발가락이 닮았다》(1932) 《광화사(狂畵師)》(1935) 등을 썼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에 《운현궁의 봄》을 연재하는 한편 학예부장(學藝部長)으로 입사하였으나 얼마 후 사임하였다.
1935년부터 《왕부(王府)의 낙조(落照)》 등을 발표하고 야담사(野談社)를 설립하여 월간지 《야담(野談)》을 발간하였다. 극심한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소설 쓰기에 전심하다가 몸이 쇠약해진 후에 마침내 마약 중독에 걸렸다. 병마에 시달리던 1939년 '성전종군작가'로 황군 위문을 떠났으나, 1942년에는 불경죄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내고, 1944년 친일소설 《성암(聖岩)의 길》을 발표하였다. 1948년에는 장편 역사소설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단편 《망국인기(亡國人記)》의 집필에 착수하였으나 생활고로 중단하고 6·25전쟁 중에 숙환으로 서울에서 작고하였다. 소설 외에 평론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특히 《춘원연구(春園硏究)》는 역작이다.
김동인은 작중인물의 호칭에 있어서 'he, she'를 '그'로 통칭하고, 또 용언에서 과거시제를 도입하여 문장에서 시간관념을 의식적으로 명백히 했으며, 간결하고 짧은 문장으로 이른바 간결체를 형성하였다. 1955년 사상계(思想界)에서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제정·시상하였으나, 1979년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시상하고 있다.
현진건
호 빙허(憑虛). 1900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일본 도쿄[東京]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上海] 외국어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20년 《개벽》지에 단편소설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 1921년 발표한 《빈처(貧妻)》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으며 《백조(白潮)》 동인으로서 《타락자(墮落者)》·《운수 좋은 날》·《불》 등을 발표함으로써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사실주의(寫實主義)를 개척한 작가가 되었고 김동인(金東仁)과 더불어 한국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시대일보》·《매일신보》의 기자로 근무하였고 1935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일장기 말살사건(日章旗抹殺事件)으로 1년간 복역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작품에 《술 권하는 사회》·《할머니의 죽음》·《지새는 안개》·《까막잡기》·《B사감과 러브레터》·《사립 정신병원장》 등 단편이 있고, 《적도(赤道)》·《무영탑(無影塔)》·《흑치상지(黑齒常之)》(未完) 등 장편이 있다.
염상섭
호 횡보(橫步). 서울 출생.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도일하여 교토부립중학[京都府立中學]을 졸업, 게이오[慶應]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1920년 《폐허(廢墟)》지 동인에 가담하여 문학의 길에 투신했다. 1921년 《개벽(開闢)》지에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적인 위치를 굳히고 1922년에는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하던 주간종합지 《동명(東明)》에서 기자로 활약했으며, 현진건(玄鎭健)과 함께 《시대일보》 《매일신보》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과 동시에 편집국장, 6·25전쟁 때는 해군 정훈국에 근무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만세전(萬歲前)》 《잊을 수 없는 사람들》 《금반지》 《고독》과 장편 《삼대(三代)》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도 《두 파산(破産)》 《일대의 유업(遺業)》 《짖지 않는 개》 등의 단편과 장편 《취우(驟雨)》 등이 있다.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문학을 이 땅에 건설한 최초의 작가로서 김동인(金東仁)·현진건과 함께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처녀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적인 소설로 평가되며, 그 후의 대부분의 소설은 전형적인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으로 일관되었다. 1953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종신회원에 추대되었으며,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장에 취임하고 아시아자유문학상, 195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62년에 3·1문화상(三一文化賞), 1971년 문화훈장 은관 등을 받았다.
최학송
호 서해(曙海). 함경북도 성진(城津)에서 출생하였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각지로 전전하며 품팔이·나무장수·두부장수 등 밑바닥 생활을 뼈저리게 체험, 그 귀중한 체험이 그의 문학의 바탕을 이루었다. 1924년 단편 《고국(故國)》이 《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 계속 《탈출기(脫出記)》 《기아와 살육(殺戮)》을 발표하면서 신경향파문학(新傾向派文學)의 기수로서 각광을 받았다. 특히 《탈출기》는 살 길을 찾아 간도로 이주한 가난한 부부와 노모, 이 세 식구의 눈물겨운 참상을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으로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빈곤의 참상과 체험을 토대로 묘사한 것이어서 그 간결하고 직선적인 문체에 힘입어 한층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예술적인 형상화가 미흡했던 탓으로 초기의 인기를 지속하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일찍 죽었다.
그가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이면서도 1925년의 카프 발족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그의 ‘빈궁(貧窮) 문학’이 어디까지나 목적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체험과 생리에서 우러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작품으로는 전기 외에 《십삼원(拾參圓)》《금붕어》《박돌(朴乭)의 죽음)》《살려는 사람들》《큰물 진 뒤》《폭군》《홍염(紅焰)》《혈흔(血痕)》 등이 있다.
조명희
호 포석(抱石). 충북 진천(鎭川) 출생.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요[東洋]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문학활동은 《김영일의 사(死)》(1921) 《파사(婆娑)》(1923) 등 현실과 인간성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이어 《영혼의 한쪽 기행》 등 서정시를 쓰다가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 1927년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하였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 니콜스크에 살면서 대작 《만주의 빨치산》을 썼다. 1937년 소련 헌병에게 끌려가 1938년 하바로프스크 감옥에서 총살된 것으로 전한다. 시집 《봄잔디 위에서》, 소설집 《땅 속으로》가 있다.
이기영
호 민촌(民村). 충청남도 아산 출생.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중퇴하였다. 《오빠의 비밀편지》가 《개벽(開闢)》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한 이후, 줄곧 경향문학의 대표적 작가로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1931년과 1934년의 카프검거사건 당시 구속되는 등 조직과 창작 양면에 걸쳐 맹활약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자신의 가난 체험을 당대 현실의 총체성과 관련시키는 방향으로 열려져 있으며, 특히 집단성의 묘사에서 전형적이고도 탁월한 성과를 산출해 냄으로써 당대 프로문단의 최고수준으로 평가받았다.
《농부 정도룡》 《민촌(民村)》 《홍수》 《서화》 등에서는 농촌현실의 발견과 새로운 인물유형의 창조를 통해, 농민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출해 냄으로써 농촌현실의 총체성을 구현하는 사실주의소설의 가능성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작가적 역량이 내적인 성숙과정을 거쳐 종합적이고도 완결하게 표출된 것이 바로 '경향소설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대작 《고향(故鄕)》이다. 이 작품은 식민지시대 농민의 형상을 전형적으로 창조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농촌현실의 구체적 형상화를 통한 삶의 총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8·15광복 이후에는 카프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일찍이 월북하여 북조선 문학예술총동맹을 이끌면서 북한문예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에는 소설집에 《민촌》(1927), 《고향》(1936), 《서화》(1937), 《신개지(新開地)》(1938), 《생활의 윤리》(1942), 《봄》(1942), 《동천홍(東天紅)》(1943), 《광산촌》(1944), 《처녀지(處女地)》(1944), 《어머니》(1948) 등 다수가 있다.
함남 함흥 출생. 본명 한병도(韓秉道).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도쿄[東京]에 있는 니혼[日本]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후 북창(北倉)사립중학교원을 거쳐, 1925년 《조선문단》에 소설 《그 날 밤》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해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 창설에 참가한 맹원이었고, 1927년 이후 《프롤레타리아 예술선언》 《프롤레타리아 작가의 입장에서》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 등의 평론을 발표한 강경파 좌익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9∼1946년에 《청춘기》 《귀향(歸鄕)》 《황혼》 《한설야단편선》 《초향(草鄕)》 《탑(塔)》 《이녕(泥濘)》 등 10여 권의 소설집을 냈다. 초기 작품에는 주로 만주·간도 등지에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고통의 현실을 그렸기 때문에, 그 주된 무대가 농촌이었고 계급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적 색채가 중심을 이룬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감하여, 무력해진 프로문학의 전통을 살려보려는 의욕이 담긴 장편 《황혼》(1936)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유행하는 지식인의 불안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장하는 노동계급의 삶의 현장을 취급한 그의 대표작이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전향자의 좌절과 현실타협의 논리가 작품상에 대두함으로써 그의 현실변혁 의식이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음을 엿볼 수 있다.
1940년부터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연재한 장편 《탑》이 한말 전환기의 전체상을 다룬 중량감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의 형상화에 미홉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 조선문학건설본부의 노선에 반발하여 이기영(李箕永)·송영(宋影) 등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결성하였고, 이후 조선공산당의 지령에 의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되자, 월북하여 초기 북한문단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북조선문학총동맹 중앙위원장이 된 후 인민위원회 교육국장, 북로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문화부장을 거쳐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위원직도 맡았다.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을 지냈으나, 방탕과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1962년 말에 숙청된 뒤 생사불명이다.
강경애
황해도 장연(長淵)에서 태어났다. 1931년 잡지 《혜성(彗星)》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 문단에 등장하였다. 1932년 간도(間島)로 이주, 단편소설 《부자(父子)》 《채전(菜田)》 《소금》 등을 발표하였다. 1934년 《동아일보》에 장편 《인간문제》를 연재하여, 당시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관계를 대담하게 다루었다. 이 작품은 인간으로서 기본생존권조차 얻을 수 없었던 노동자의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소설로, 근대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1935년 이후, 《해고(解雇)》 《지하촌(地下村)》 《어둠》 등, 사회의식을 강조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간도에서 귀국한 후 1년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박화성
목포 출생. 1926년 숙명여고 졸업, 1929년 일본여자대학 문학부를 수료하고 작가생활에 들어갔다. 1961년부터 1973년까지 문인협회이사, 1965년에는 여류문인협회 회장에 선임되었고, 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한편 1964년부터1973년까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을 겸하고, 1968년에는 여류문인회장, 1972년에는 동고문이 되었다. 1974년 펜클럽 고문, 같은 해 한국소설가협회 상임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예술원상·한국문학상·목포시 문화상·이대(梨大) 문화공로상·은관(銀冠) 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에는 《백화(白花)》, 《사랑》, 《고개를 넘으면》 등 18편의 장편소설과 《햇볕 내리는 뜰악》, 《홍수전후(洪水前後)》, 《잔영(殘影)》, 《휴화산(休火山)》 등의 중단편소설 및 수필집 《추억의 파문》, 《순간과 영원 사이》과 자서전 《눈보라의 운하》가 있다.
채만식
본관 평강(平康). 호 백릉(白菱). 전라북도 옥구(沃溝)에서 출생하였다. 중앙고보(中央高普)를 거쳐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를 중퇴, 귀국 후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를 역임, 1925년 단편 《세 길로》가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 후 희곡 《사라지는 그림자》, 단편 《화물자동차》·《부촌(富村)》 등 동반작가적 경향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4년에 《레디 메이드 인생》·《인텔리와 빈대떡》 등 풍자적인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적인 기반을 굳혔다. 그 뒤 단편 《치숙(痴叔)》·《소망(少妄)》·《예수나 믿었더면》·《지배자의 무덤》 등 풍자성이 짙은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장편 《탁류(濁流)》는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사건을 놓고 사회의 비리를 풍자한 작품이다. 1973년에는 유고로 중편 《과도기(過渡期)》와 희곡 《가죽버선》이 발견되어 《문학사상(文學思想)》지에 발표되었다. 저서로 《채만식단편집》·《탁류》·《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집》(단편집) 등이 있고, 8·15광복 후에는 《여자의 일생》·《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잘난 사람들》 등을 남겼다.
이상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 〈파편의 경치〉를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지에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배천온천(白川溫泉)에 들어가 요양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모르고 '리상(李씨)'이라고 부르니까 그대로 '이상'이라고 했다지만 학교 때의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요양지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과 함께 귀경한 그는 1934년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 《동해(童骸)》《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東京行]을 결행하였으나, 불온사상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병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전기 외에 소설 《지주회시(鼅鼄會豕)》 《환시기(幻視記)》 《실화(失花)》 등이 있고, 시에는 《이런 시(詩)》 《거울》 《지비(紙碑)》 《정식(正式)》 《명경(明鏡)》, 수필에는 《산촌여정(山村餘情)》 《조춘점묘(早春點描)》 《권태(倦怠)》 등이 있다. 1957년 80여 편의 전 작품을 수록한 《이상전집(李箱全業)》 3권이 간행되었다.
이효석
호 가산(可山). 강원도 평창(平昌)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작가(同伴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行進曲)》 《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희(九人會)에 참여, 《돈(豚)》《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 교수가 된 후 《산》《들》 등 자연과의 교감(交感)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고, 1936년에는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秀作)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화분》 외에도 《벽공무한(碧空無限)》 등의 장편이 있으나 그의 재질은 단편에서 특히 두드러져 당시 이태준(李泰俊)·박태원(朴泰遠)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이태준
호 상허(尙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조치[上智]대학에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내관적(內觀的) 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작중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되었지만, 때로는 그 속에서 현실과 밀착된 시대정신에의 추구를 지향하기도 했다.
《문장(文章)》지를 주관하다가 8·15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하다가 월북하였다. 그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1946)에서 이러한 문학적 변모를 확인할 수 있다. 작품에는 앞에 든 것 외에 소설집 《구원(久遠)의 여상(女像)》 《딸 삼형제》 《사상(思想)》 《해방전후》 등이 있으며, 문장론 《문장강화(文章講話)》가 있다.
김유정
1908년 1월 18일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徽文高普)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를 중퇴, 한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中外日報)》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데뷔작인 《소낙비》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은 대부분 농촌을 무대로 한 것인데 《금 따는 콩밭》은 노다지를 찾으려고 콩밭을 파헤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그린 것이고, 《봄봄》은 머슴인 데릴사위와 장인 사이의 희극적인 갈등을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린 그의 대표적인 농촌소설이다. 그 밖에 《동백꽃》 《따라지》 등의 단편이 있다.
박태원
필명 몽보(夢甫)·구보(丘甫)·구보(仇甫)·구보(九甫)·박태원(泊太苑)이다. 서울 출생이며 경성제일고보, 도쿄[東京] 호세이[法政]대학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시 《누님》이 당선되었으나, 소설로서의 등단은 1930년 《신생(新生)》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면서 이루어졌다.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한 이후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 서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仇甫)씨의 1일》 《천변풍경(川邊風景)》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그의 소설에 있어 특기할 사항은, 문체와 표현기교에 있어서의 과감한 실험적 측면과, 또 시정 신변의 속물과 풍속세태를 파노라마식으로 묘사하는 소위 풍속소설의 측면이다. 이러한 특징은 그가 예술파 작가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요건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발표한 《우맹(愚氓)》 《골목 안》 《성탄제》 등에도 비슷한 경향을 잘 드러내었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작가의식의 전환을 꾀한 바 있고, 6·25전쟁 중 서울에 온 이태준(李泰俊)·안회남(安懷南) 등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서술된 작품 외에 단편소설 《사흘 굶은 보름달》 《애욕》 《5월의 훈풍》, 장편소설 《태평성대》 《군상(群像)》 등이 있다.
박영준
호 만산(晩山).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 연희전문 졸업, 그 해 《조선일보(朝鮮日報)》 신춘문예(新春文藝)에 단편소설 《모범경작생(模範耕作生)》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했다. 1946년 《경향신문》 문화부장에 취임하고, 1947년 고려문화사 편집장을 거쳐 1951년 육군본부 정훈감실 문관을 역임하면서 종군작가단(從軍作家團)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 연세대학교 강사에 취임하고 1958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9년 한양대학교 부교수가 되었다. 1965년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고 한국문인협회 이사로 활약하였으며, 잡지윤리위원회위원을 역임하고, 1970년 중앙대 예술대학 강사로 출강하기도 했다. 1974년 연세대학교 문리과대학장에 취임하였다.
예술원상·자유문학상을 수상하고, 단편집으로 《목화씨 뿌릴 때》(1945) 《풍설(風雪)》(1951) 《그늘진 꽃밭》 《방관자(傍觀者)》(1960) 등이 있고, 장편으로 《태풍지대》 《애정 계곡》(1954) 《열풍(熱風)》(1959) 《고속도로》(1969) 《지향(地香)》 등이 있다.
김정한
호 요산(樂山), 경남 동래 출생이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1928년 동래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원보통학교에 재직하던 중 조선인교원동맹을 조직하려다 검거되었다. 1929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부속 제일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해 수학했으며, 1931년 조선유학생 학우회에서 펴낸 《학지광》의 편집을 맡았다. 1936년 일제강점기 궁핍한 농촌의 현실과 친일파 승려들의 잔혹함을 그린 《사하촌》이 《조선일보》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그 후 《항진기》 《기로》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민중을 선동하는 요주의 작가’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고문과 1987년 그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한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는 《낙일홍》 《인간단지》 《수라도·인간단지》 《삼별초》 등이 있다
첫댓글 장숙씨 유익한 자료 고마워 ...
수고많으셨네요
유익한 자료 고맙습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많은 정보 감사합니다.
자료 감사합니다.
좋은 정보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자료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