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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풍경 송은석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선비 & 문중
2.【서흥김씨】
아무도 선생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한훤당 김굉필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
1. 프롤로그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에는 우리나라의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 하나 있다. 바로 ‘도동서원’이다. 도동서원은 서원건축 그 자체로도 대단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원에 모셔진 한 인물 덕분에 도동서원은 세상으로부터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달성군에 이러한 서원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서원에 모셔진 인물이 조선을 대표하는 ‘N0.1 선비’라는 사실을 우리들 스스로가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도동서원에 모셔진 인물은 조선을 대표하는 대유학자, 한훤당 김굉필(金宏弼·1454-1504) 선생이다.
[사진1 다람재에서 내려다본 도동리 전경](출처:송은석)
2. 조선조 ‘NO.1 선비’ 한훤당 김굉필
필자는 일주일에 2-3일 정도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과 하빈면의 묘골 ‘육신사’에서 해설사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중 도동서원에서 해설을 할 때면 해설초반에 꼭 언급하는 멘트가 있다.
“여러분! 서원 답사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할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 서원이 어떤 인물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서원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서원은 역사·건축·유교 등등 여러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누가 뭐래도 서원의 핵심은 ‘제향인물’에 있습니다. 참고로 ‘제향(祭享)’이라는 말은 사당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곳 도동서원에 제향된 인물은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한강 정구 선생 두 분입니다. 이분들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여기까지만 설명을 하고,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린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일반인 방문객들은 ‘김굉필·정구’라는 인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해설 초반부터 알지도 못하는 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늘 자신한다. 1시간 정도만 필자와 함께 도동서원을 즐겨(?) 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1시간 후면 놀라움과 함께 김굉필 선생과 도동서원의 열렬한 펜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2 도동서원 중정당 상지] 기둥의 상단에 둘러져 있는 흰색 한지로 동방5현 중 수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서원이라는 표식(출처:송은석)
각설하고, 먼저 김굉필 선생의 이력을 한 번 살펴보자. 선생의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 본관은 ‘서흥’이다. 서흥은 지금의 북한 땅인 황해도 지역에 있는 한 고을의 이름이다. 선생은 1454년(단종2) 서울의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절충장군 김뉴, 어머니는 청주한씨였다. 선생의 어릴 적 이름은 ‘효동’이었으며 매우 활달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는 공부에 관심이 없는듯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학문을 가까이 했다.
21세 때인 1474년(성종5) 봄, 선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을 한다. 바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27세 때인 1480년(성종11)에 생원시에서 3등으로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를 했으나, 결국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선생은 일명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도 불렸다. 이는 스승인 김종직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21세 때부터 30세까지 10년 동안 오로지 소학만을 공부했으며, 그 이후에도 평생토록 소학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붙여진 선생의 별칭이었다. 가끔씩 사람들이 찾아와 시국에 대해 물어도 선생은 한결같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를 알겠소.’라고만 답을 했다고 한다.
41세 때인 1494년(성종25),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나아갔으니 첫 벼슬길이었다. ‘유일’이라는 말은 시골에서 이름 없이 살고 있지만 숨은 재주가 있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이후 사헌부감찰·형조좌랑을 지냈다. 45세 때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먼 북녘 땅인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2년 뒤 47세 때인 1500년(연산군6)에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으로 다시 유배지가 변경되었다. 51세 때인 1504년(연산군10), 이번에는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선생은 이미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중이었지만, 갑자사화에 또다시 연루되어 결국 유배지 순천에서 죽임을 당했다.
선생 사후 13년이 지난 1517년(중종12)년에 선생은 우의정에 증직되고, 1575년(선조8)에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1610년(광해2) 비로소 문묘에 종향되었다. 이후 현풍의 ‘도동서원’, 순천의 ‘옥천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화순의 ‘해망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가조의 ‘도산서원’, 성주의 ‘천곡서원’, 합천의 ‘이연서원’, 아산의 ‘인산서원’, 황해도 황주의 ‘백록동서원’ 등에도 제향 되었다. 여기까지가 선생의 일생에 대한 약력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훤당 김굉필 선생하면 따라 붙는 수식어가 몇 개 있다. ‘동방5현 중 수현’·‘소학동자’·‘도학자’·‘동방도학지종’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좀 다른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조선조 NO.1 선비 한훤당 김굉필’
[사진3 한훤당 김굉필 선생 흉상] 달성 역사 인물동산(출처:송은석)
아마 이 표현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거나 혹은 뭔가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염려놓으시라.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편하다면 독자께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독자께서는 무엇을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
솔직하게 말해 김굉필 선생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심지어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들 조차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답사객들은 김굉필 선생보다는 도동서원의 건축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도동서원 해설을 마무리하는 시간이 되면 답사객들과 함께 반드시 강당 마루에 올라가 앉는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해설을 이어간다.
“이제 오늘 해설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한훤당 김굉필 선생에 대해 한 번 알아볼까요?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 선생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극히 드물 거예요. 그런데 참 이상하죠? 역사적으로 대단한 위상을 지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한마디로 평가절하가 되도 너무 평가절하가 된 인물이죠.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여러 측면에서의 접근이 가능합니다만, 오늘은 좀 독특한 예를 하나 들어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바로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모셔진 위패의 자리순서에 관한 것입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나라 안의 수많은 선비들 중에서 최고의 선비를 뽑아 국가에서 공인(?)하는 제도가 있었다. ‘문묘종향(文廟從享)’이 바로 그것이다. ‘문묘’는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사당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향’이라는 말은 공자의 사당에 위패가 함께 모셔져 대대로 제사를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문묘종향’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선비들이 누릴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사진4 현풍향교 대성전](출처:송은석)
조선시대만 해도 문묘에는 최대 133위, 최소 27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간에 이들 위패 중에서 18위만이 우리나라 인물이며, 나머지는 모두 중국 인물이다. ‘동방(동국)18현’이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동방은 중국의 동쪽 즉 조선을 말하며, 18현은 ‘18분의 어진선비’를 말한다. 그런데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둘 이상이 모이면 위차(位次·자리의 순서)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과연 동방18현 중 김굉필 선생의 자리가 어디쯤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문묘의 ‘위패설위’ 방식은 조선시대와 현재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뒤에 나올 ‘현풍향교’편에서 다시 다뤄질 것이다. 여하튼 거두절미하고 표현한다면 동방18현의 위패는 대성전 안 동·서 양 벽면 쪽에서 벽면을 등지고, 중앙을 향해 남북으로 길게 설치되어 있다. 마치 부대장[공자]이 연병장 단상에 올라있고 그 앞쪽 좌우로 부대원[동방18현]들이 이열종대로 길게 정렬해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사진5 대구향교 대성전 동종위](출처:송은석)
동방18현 중 제일 상석에 해당하는 북쪽[안쪽]의 동·서위에는 각각 신라시대 때 인물인 ‘설총’과 ‘최치원’ 선생의 위패가 놓여 있다. 그 다음 동·서위에는 고려시대 인물인 ‘안향’과 ‘정몽주’ 선생의 위패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 동방18현 중 남은 인물은 14현이다. 참고로 이 14현은 전원이 조선시대의 인물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이 있다. 조선조 14현 중 제일 상석에 위패가 설치된 인물이 바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라는 사실이다. 참고로 조선조 14현의 문묘설위를 위차에 따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현석 박세채’
“자! 이제 아시겠죠? 김굉필 선생은 조선조 14현을 대표하는 수현(首賢)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김굉필 선생을 제향하는 대표서원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인 것이죠. 다들 모르셨지요?”
[사진6 대구향교 대성전 위패봉안 위차도](출처:송은석)
3. 한훤당, 소싯적에 깡패(?)였다
도동서원에서 해설사로 근무하던 어느 날의 일이다. 모 지역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강좌 수강생들이 지도교수의 인솔 하에 도동서원을 찾았다. 지도교수와 필자의 서원해설이 모두 끝나고 자유롭게 서원을 둘러보는 시간이었다. 필자는 지도교수와 함께 동재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굉필 선생은 젊었을 때 깡패였대요. 시장 통에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만나면 모조리 회초리를 치고 패고 그랬대요. 그러다가 소학을 읽으면서부터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해서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다네요···”
‘아! 또 저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참으로 큰일이다. 큰일이야.’
필자는 지도교수에게 이 부분에 대해 해명을 좀 하고 싶다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얻어 이 오류에 대한 진실을 자초지종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때서야 많은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해가 풀린 것이다. 인솔자인 지도교수도 필자의 설명에 충분히 공감을 표해주었다. 그렇다면 선생의 이 소싯적 일화의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일단 이 일화의 가장 대표적인 텍스트를 하나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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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국어국문학자료사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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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는 고봉 기대승 선생이 쓴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행장에 바탕을 둔 서술이다. 실제로 행장의 원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이중에서 문제가 되는 구절이 바로 ‘편태인물(鞭笞人物)’ 이라는 구절이다.
‘少豪逸不覊 游走市街 鞭笞人物 人見先生至 輒避匿 旣長 發憤學文’
[사진7 한훤당 김굉필 선생 행장(고봉집)] (출처: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
[사진8 경현록]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편태인물’ 다시 말해 ‘채찍으로 사람을 쳤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해석할 때 ‘人物’을 ‘사람’이 아닌 ‘사람과 물건’ 또는 ‘사람의 물건’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텍스트를 하나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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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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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선생의 시문집인 경현록에 들어 있는 ‘한훤당 연보’에서 발췌한 것이다. 앞서 행장에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던 부분이 명쾌하게 해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역시 해당 원문을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輒用捶楚(문득 회초리를 쳤다) 鞭扑其所售魚泡之類(그들이 파는 고기나 두부 등을 쳤다)’
‘한훤당, 소싯적에 깡패(?)였다’는 이야기의 전말은 이러했던 것이다. 사실 필자도 처음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일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의문이 들었고, 나름 위와 같은 방식으로 그 해결책을 찾아낸 것이다.
사실 이 일화는 일반인들 보다는 김굉필 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가 ‘소학공부의 중요성’에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그 수단과 방법이 정도를 벗어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넘어가자. 한훤당 선생은 소싯적에 시장 통에서 행실이 바르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그가 판매하는 물건을 매로 쳤던 것이지, 그 사람을 쳤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4. 호를 사옹에서 한훤당으로
‘호(號)’는 자(字)와 더불어 옛 사람들이 이름을 대신하여 즐겨 사용했던 호칭이다. 그런데 이중에서 호는 정말 엄청난 매력덩어리이다. 왜냐하면 두서너 글자에 불과한 호에 담겨있는 그 엄청난 상징성 때문이다.
‘유교’가 여타 종교에 비해 어렵다고 느껴지는 것은 ‘공부’로 시작해서 공부로 끝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유교’는 죽는 그날까지 성인의 말씀인 경전을 펴놓고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해야 도가 터지는 종교이다. 그러하니 당연 어려울 수밖에.
그런데 ‘유교·유학’을 공부하다보면 어느 순간 선현들의 ‘호’나, 건물에 붙은 ‘당호(堂號·건물의 이름)’ 등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있다. 드디어 도가 터지는 순간이다. 이제부터는 호가 눈뿐만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으로도 읽혀지는 것이다. 이쯤 되면 ‘호’나 ‘당호’는 ‘주인’과 ‘객’이 무언 속에서도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고차원적 ‘상징·심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피터지게 유교경전을 공부하지 않은 이에게는 이 호는 그냥 무의미한 한자의 나열에 불과한 것이다.
김굉필 선생은 처음에 호를 ‘사옹(簑翁)’으로 했다. ‘사(簑)’는 옛날에 비가 올 때 겉옷 바깥에 걸치던 일종의 비옷으로 흔히 ‘도롱이’라고 하는 것이다. ‘옹(翁)’은 ‘늙은이’ 혹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사옹’은 곧 ‘도롱이를 걸친 늙은이[사람]’라는 의미이다. 앞서 호는 주인과 객이 서로 주고받는 고차원적 ‘상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옹’,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사진9-1 도롱이. 국립민속박물관](출처:송은석)
이에 대해서는 선생의 시문집인 경현록과 ‘한훤당 선생 신도비’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약간 윤색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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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선생이 사옹이라는 호를 지었다가 다시 포기를 한 것은 그 뜻이 너무 ‘특출’나 평범한 ‘일상의 도’를 벗어났다고 본 것이다. 이후 선생의 호는 ‘사옹’에서 ‘한훤당’으로 바뀐다. 이는 선생께서 합천 야로의 순천박씨 부인에게 장가든 1472년(성종3), 선생 나이 19세 때의 일이었다.
조선 초·중기만 해도 우리나라의 혼례풍속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사위가 (일정기간)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솔서혼(率壻婚)’이라고도 한다. 여하튼 이러한 혼례풍속에 따라 선생께서도 한동안 합천 야로의 처가에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선생은 당시 처가가 있었던 합천군 야로현 말곡 남교동 개천가의 ‘지동암’이라는 큰 바위 아래에 초가를 짓고 생활을 했다. 당시 선생은 인근의 가야산을 왕래하며 글을 읽고, 내원사에서도 오래 머물렀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선생의 제자인 김안국은 가야산을 일러 ‘무이산’이라고도 칭했다. 무이산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가 거처했던 중국의 산 이름이다. 이처럼 선생이 머물렀던 가야산을 무이산이라 칭한 것은 그만큼 선생을 높인다는 의미였다.
그건 그렇고, 선생은 당시 지동암 아래의 초가에 이름을 붙이기를 ‘한훤당(寒暄堂)’이라 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선생의 호 ‘한훤당’이 바로 이 초가의 이름에 연유한 것이었다. ‘한훤당’이라. 무슨 뜻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한(寒)’은 ‘차다·춥다’는 뜻이며, ‘훤(暄)’은 ‘따뜻하다’는 뜻이다. 또한 옛글에서 이르기를 ‘춥고[寒] 따뜻한 것[暄]을 고르게 맞추는 것은 사람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이는 ‘한훤지례(寒喧之禮)’ 또는 ‘한훤문(寒喧問)’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인사를 나눌 때나 편지를 주고받을 때,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이 날씨와 관련한 것이다. 예를 들면 ‘더운데 요즘 어찌 지내십니까?’ 또는 ‘혹한에 별고 없으신지요?’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예법을 ‘한훤지례’라고 하고, 이러한 문투를 ‘한훤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시 ‘한훤당’이라는 선생의 호로 돌아오자. ‘한훤당’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도(道)’에 충실하겠다는 의미이다. 평생 소학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그러한 까닭에 ‘소학동자’라고까지 칭해졌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 과연 선생의 호 역시 ‘소학동자’다운 호가 아닐 수 없다.
선생이 스승인 김종직 선생에게 올린 시 중에는 아래와 같은 시가 있다. 이 시를 두고 제자가 스승에게 바른 소리(?)를 한 것이라는 평이 있다. 심지어 추강 남효온 선생은 이 시 때문에 스승과 제자가 갈라섰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는 잘 모르겠다. 필자의 눈에는 그냥 ‘일상의 도’를 강조한 시로만 보일 뿐이다. 과연 선생의 깊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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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개면 나다니고 장마가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잘 할 수야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을 태운다는 것을 누가 믿어 주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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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털끝 하나도 태산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다, ‘추호가병어태산부’
조선의 4대 사화는 젊고 똑똑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있어서는 안 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사화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부분이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 사림파 그룹이었다. 익히 잘 알다시피 김굉필 선생은 무오·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당시 함께 화를 당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들의 ‘도학자’적인 면모는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다. 하지만 ‘성리학자’로서 그들의 학문세계를 살펴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과 관련된 각종 자료 등이 가족이나 지인들에 의해 남김없이 철저하게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이는 더 큰 화를 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 하늘의 그물망은 넓고 넓어 엉성한 것 같지만 결코 놓치는 일이 없는 법이다. 보라. 그 옛날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다지만 그렇다고 세상에서 유학자와 유교경전이 없어졌던가!
우리나라에 주자성리학이 처음 들어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600-700년 전인 고려 말 조선 초였다. 김굉필 선생 생존 당시인 조선 초기만 해도 우리나라 유학자들은 대부분 ‘절의(節義·충효)’·‘사장(詞章·글짓기)’·‘장구(章句·경전해석)’의 공부에 머물렀다. 하지만 김굉필 선생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기수양의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이후 조선중기로 넘어오면서 정암 조광조·회재 이언적·퇴계 이황과 같은 후배 학자들이 배출되면서, 비로소 우리나라 성리학은 르네상스기를 맞게 된 것이었다.
흔히 사림파의 종장이라 칭송되는 김종직 선생의 제자하면 ‘김굉필·정여창·김일손·남효온’ 등을 든다. 이들은 하나 같이 스승인 김종직과 함께 무오·갑자 두 사화에 연루된 ‘도학자’들이다. 이들은 형이상학적인 고담준론보다는 일상의 도를 지향하며 위기지학을 행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소학을 중시했다. 그래서 당시 소인배들은 이들을 얕잡아보는 의미에서 ‘소학당(小學黨)’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이는 ‘코흘리개 아이들의 학문인 소학을 행하는 부류’라는 뜻이었다.
[사진9-2 강학모습. 대구국립박물관] 강학은 요즘의 수업·강의에 해당한다(출처:송은석)
[사진10 옛 선비들의 모임. 대구국립박물관」 옛날 선비들의 모임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출처:송은석)
익히 알려진바 대로 김굉필 선생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소학동자’로 불렸다. 평생을 소학의 가르침대로 따르고 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은 무오·갑자 두 사화에 연루된 탓에 남아 있는 저술 등이 많지 않다.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몇 편의 시와 간찰[편지], 산문이 전부이다. 그런데 현전하는 이 약간의 저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를 하나로 꿰고 있는 핵심주제가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일상의 도’에 대해 서술하거나 시를 읊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필자의 관심을 끄는 글이 하나 있었으니, ‘추호가병어태산부’라는 글이다. 참고로 ‘부(賦)’는 한문 문체의 하나인데 얼핏 산문처럼 보이지만 운문에 해당하는 형식이다.
이 글에 유독 관심이 가는 이유는 선생의 새로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의 도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추호가병어태산(秋毫可並於泰山)’을 우리말로 풀이 해보면 ‘가을날의 가는 털끝 하나도 가히 태산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작디작은 동물의 터럭하나를 태산에다 비유하다니. 대체 이 무슨 소리일까?
‘아! 우뚝한 태산은 만 길이나 높이 솟았는데, 가느다란 추호는 겨우 형상이 있는 둥 마는 둥 이름뿐이로다. 그 크고 엄청난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멀리 동떨어졌도다.’로 시작되는 ‘추호가병어태산부’. 그 글의 요지는 대략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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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을 좀 달자면, ‘추호’나 ‘태산’은 크고 작음이라는 분수의 다름은 있을망정 원리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하나의 원리, 여러 개의 실재(實在)’, 곧 이기론(理氣論)의 ‘리일분수(理一分殊)’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자성리학의 핵심개념 중 하나이다.
우리는 김굉필 선생하면 소학에 충실한 삶을 산 도학자로 알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이론’보다는 형이하학적인 ‘실천’에 충실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론’과 ‘실천’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서로 통하는 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론’과 ‘실천’이 따로 노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론은 박사급인데 실천이 안 된다든가, 반대로 실천은 성인군자인데 이론에는 허망한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유교·유학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성인·현인·군자’로 본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는가? 바로 이론과 실천이 서로 합치되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위기지학을 실천한 ‘도학자’이자, ‘현인’으로 존숭하는 까닭은 실천과 더불어 앎에 있어서도 조금도 부족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학동자’라는 실재 뒤에는 ‘추호가병어태산부’ 같은 원리도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6. 참! 까칠한 상소문이로다, ‘경자상소’
‘상소(上疏)’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에게 올리는 각종의 글을 통상 ‘상주문(上奏文)’이라 한다. 그 중에서도 간언(諫言·아래 사람이 위 사람에게 하는 충고)·의견·진정 등을 전달하는 글을 ‘상소’라고 한다. 상소 중에서도 내용이 짧고 간단한 것은 특별히 ‘차자(箚子)’라고도 한다. 또한 ‘봉사(封事)·봉장(封章)’이라고 하여 왕 외에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도록 밀봉한 형태의 상소도 있다. 저 유명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의 「무진봉사(戊辰封事)」가 이에 해당한다. 참고로 ‘상서(上書)’도 있는데 이는 조정의 신하가 임금이 아닌 세자에게 올리는 글이다. 이외에도 여러 유형의 상주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상소문하면 퍼뜩 떠오르는 유명한 상소문이 하나 있다.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의 「단성소(丹城疎·일명 을묘사직소)」가 그것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명종 조 문정왕후 집권시절, 명종을 가리켜 ‘고아’요, 문정왕후를 일러 구중궁궐의 일개 ‘과부’라 지칭하며 목숨을 내놓고 쓴 상소문이다. 당시 명종은 대노하여 조식을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선비의 언로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조정의 건의가 채택되면서 선생은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 「단성소」는 1555년(명종10)에 선생이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곧장 사직을 하면서 올린 상소이다. 그 해가 을묘년이었기에 「을묘사직소」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진11 남명 조식의 단성소] 왼쪽 둘째 줄 아래 부분에 ‘자전색연불과심궁지일과부’라는 문구가 보인다 (출처: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그런데 필자의 생각에 조선시대 상소문 중에서 「단성소」 만큼이나 까칠하고 논리적인 상소가 하나 더 있는 것 같다. 바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성화)경자상소(成化庚子上疎)」가 그것이다. 어떤 상소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여기에도 역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듯,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하나 숨어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선생의 저술은 극히 일부만 현재 남아 있다. ‘무오·갑자’ 두 번의 사화 탓에 대부분의 저술·유묵 등이 불태워졌기 때문이다. 현재 선생의 시문집 경현록은 선생 사후 뜻있는 몇 몇 학자들에 의해 여러 번 수정·보완을 거친 결과물이다. 통칭 경현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경현록·경현속록·경현록보유·경현부록 이렇게 4권의 책이 수 백 년 세월에 걸쳐 수정·보완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경현록 안에 매우 흥미로운 상소문이 하나 들어 있다. 본문도 본문이지만 본문의 앞뒤에 붙어있는 보충설명의 내용이 아주 드라마틱하다. 아래 인용문 중 앞의 것은 정구 선생이 쓴 경현속록의 서문 중에서 일부를 인용한 것이고, 뒤의 것은 「경자상소」의 첫 머리에 달려 있는 보충설명을 인용한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문으로 약간 윤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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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16일에 성균생원으로서 상소를 올렸다. 생각건대 이 상소는 당초에 이 선생(이황)이 기록한 데는 들어 있지 않았으니, 어떤 뜻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그 후에 곽규가 순천부사로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이 상소를 추가하여 넣을 것을 권했다. 이에 곽규는 “이것이 꼭 선생(김굉필)이 지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하여 넣지 않았다.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순천부사가 되어 마침내 이 선생(이황)이 손수 쓴 것을 오려 내어서 그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는 좀 온당치 못한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상소문이 꼭 선생(김굉필)이 지었다는 것을 보증할 수 없는 것처럼 감히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러한 연유를 여기에 기록해 두니 나중에라도 아는 이가 나타나 결정해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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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경현록은 구암 이정이라는 인물이 처음 편집을 하고 퇴계 이황 선생이 교정을 본 책이다. 이것이 한훤당 선생 시문집의 초본이 되는 경현록이다. 이후 정구 선생이 몇 가지 내용을 보충하여 경현속록을 편찬했다. 이때 제일 앞쪽에 등재된 글이 바로 이 「경자상소」이다. 특이한 점은 「행장」·「연보」보다도 더 앞쪽에다 이 상소문을 등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구 선생은 서문에서 밝히기를 ‘이 상소문이 꼭 김굉필 선생의 글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황 선생이 수록한 이 상소문이 경현록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 진위를 가리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근세에 와서 아주 속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바로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 누구도 열람이 불가능했던 조선왕조실록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순식간에 해결이 난 것이었다. 실제로 필자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직접 확인해본바 ‘성종실록 118권, 성종 11년 6월 16일 을축 3번째 기사, 1480년 명 성화 16년, 성균관 생원 김굉필이 원각사 중의 심문·처형에 관해 상소하다’라는 기사에 장문의 상소문이 등재되어 있었다. ‘경현록본’과 ‘조선왕조실록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내용은 물론 문장 역시 거의 동일하다. 다만 ‘경현록본’에 비해 ‘조선왕조실록본’이 약간 요약되어 있을 뿐이다.
[사진12 가운데 둥근 원 표시 아래 ‘성균생원 김굉필 상소왈’이라는 문장이 보인다]
(출처: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그렇다면 「경자상소」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이쯤에서 독자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할 일이 있다. 「경자상소」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불교배척’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익히 잘 알고 있듯이 조선시대는 ‘숭유억불’의 시대였다. 특히 김굉필 선생이 활동하던 조선전기는 유교·유학사상으로 무장된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불교’가 철저히 배척되던 시기였다. ‘불교의 나라 고려’가 ‘유교의 나라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으니만큼, 숭유억불과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때였던 것이다.
「경자상소」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상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 현대의 시각으로 이 글을 바라보면 매우 불편한 글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들은 현재의 시각이 아닌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한 법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경자상소」는 ‘숭유억불’이 한창이던 조선 전기의 글임을 해량해주기 바란다.
참고로 ‘경현록본’ 경자상소 번역문은 A4용지로 5장 분량, ‘조선왕조실록본’도 3장 정도의 분량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그 내용을 다 소개하기는 불가능하다. 대신 상소문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한 번 요약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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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이 즉위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이 없음을 지적
■ 원각사의 기적은 스님 자신들이 불상을 돌려놓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났다며 거짓으로 세상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임
■ 조정의 신하들과 전국의 선비들이 원각사 스님의 처벌을 원하는 간언을 올렸지만, 성종이 윤허하지 않음에 대한 원망과 그 부작용에 대한 걱정
■ 원각사의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전국 각지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을 염려
■ 만약 이 모든 것이 대왕대비(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면, 이제는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야함을 역설
■ 이번 일과 관련하여 언로를 막거나 탄압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맹자와 가의(賈誼)의 상소를 예로 들어 역설
■ 불교의 폐단이 너무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른 까닭에 이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리니 너그럽게 살펴줄 것을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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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해 위 상소문의 배경이 되는 원각사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서울 탑골공원은 옛 원각사(圓覺寺) 터이다. 본래 원각사는 조선 태조 때 ‘흥복사’로 창건된 것을 세조가 ‘원각사’로 업그레이드 시킨 사찰이다. 그런데 서울 도성 내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던 이 원각사는 좀 특이한 면이 있었다. 세조가 ‘원각사’로 업그레이드시킨 이후, 이 절에서는 신비한 이적(異蹟)이 자주 일어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래가 나타나고, 하늘에서 감로수가 내리고, 신승(神僧)이 나타나고, 채색 안개가 하늘을 매우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불어나고, 불상이 저절로 돌아서고 등등···’
세조는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수 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 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 세조는 ‘숭유억불’에도 불구하고 내심 불교를 지원했다. 특히 도성 안 원각사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려 민심을 다독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에 대한 친화적 분위기는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비를 맞게 된다. 성종에 의해 조정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 신진사대부 사림파들이 불교의 횡행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 나라 안을 시끄럽게 만든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원각사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번에는 불상이 스스로의 힘으로 180도 돌아섰단다. 이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졌다. ‘부처님이 보인 기적설’과 ‘스님에 의한 조작설’이 그것이었다. 추측컨대 당시 사림파 신진사대부들을 제외한 조선사람 대부분은 ‘부처의 기적설’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을까싶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에 이 원각사 불상의 이적을 두고 여러 번의 상소가 올라왔음을 알 수 있다. 「경자상소」 역시 이 상소들 중 하나이다. 이 상소를 두고 「(성화)경자상소」라 일컫는 것은 편의상 붙인 명칭이다. ‘성화(成化)’는 중국 명나라 헌종의 연호이며, ‘경자(庚子)’는 1480년(성종11)의 간지식 표현이다. 따라서 「(성화)경자상소」는 ‘중국 명나라 성종 시절인 1480년(성종11) 경자년의 상소’라는 뜻이다.
한편 이 장문의 상소문 본문 중에서 유독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대목이 한두 군데 정도 있다. 그 부분을 ‘조선왕조실록본’에서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진13 왼쪽에서 4번째 줄 가운데쯤 ‘원각사승도취군도성’이라는 문장이 보인다]
(출처: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사진14 오른쪽 3번째 줄 아래 부분에 ‘대왕대비지명’이라는 문장이 보인다]
(출처: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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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 만일 핑계하시기를 대왕대비의 명령을 어기기가 두려워서라고 하신다면, 신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신은 들으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부인은 남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제(專制)의 의(義)는 없고 삼종(三從)의 도(道)가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정히 대왕대비께서 거조(擧措)와 시위(施爲)를 한 결 같이 전하를 따르시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능히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간하고 울면서 따르는 데에 이른다면 대비께서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대비는 여중요순(女中堯舜)의 성스러우심으로써 단지 부처가 돌아섰다는 것의 참과 거짓을 알지 못하신 것입니다. 만일 혹시 참으로 허망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덮어줄 리가 있겠습니까?···(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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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의 경우 그 요지는 ‘불상이 돌아서는 정도가 아니라 설령 사람처럼 걸어 다닌다 한들 그게 국가와 백성들에게 무슨 직접적인 이익이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과연 ‘도학자’다운 고정관념을 깨는 탁견이라 하겠다. 두 번째는 임금으로서 더 이상 대왕대비의 눈치를 보지 말고 떳떳하게 일처리 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성종의 할머니이자, 할아버지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는 불심이 깊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선생은 유교에서 여성이 따라야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잣대를 대왕대비에게도 공평하게 들이댄 것이었다. 게다가 문장의 행간을 잘 살펴보면 ‘대왕대비는 아녀자인 탓에 불상의 이적을 믿고 있다. 만약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만 할 수 있다면, 어찌 저들에게 벌을 주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대왕대비를 일개 아녀자의 수준으로 낮춰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이 「경자상소」는 글의 논리성과 과단성을 보면 조식 선생의 「단성소」에 못지않다는 생각이다.
살펴본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이 「경자상소」는 퇴계 선생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어느 때인가 경현록 속으로 들어왔다. 당시 경현록을 편집했던 옛 선비들은 정말이지 너무나 정확했다. 「경자상소」가 김굉필 선생의 글이 아닐 가능성도 무시하지 않았고, 동시에 선생의 글일 가능성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솔직하게 기술하며, 400여 년 세월 동안 이 「경자상소」를 지켜온 것이었다. 그 결과 근세에 와서 조선왕조실록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비로소 「경자상소」의 저자가 한훤당 김굉필 선생임이 확인된 것이다.
[사진15 국역 경현록] 2000년 ‘한훤당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발행(출처:송은석)
그나저나 말이 나와서 말인데, 힘이 센 신하들과 말발이 좋은 간관(諫官·간언을 하는 관직)들 그리고 글발이 좋은 전국의 선비들 탓에, 조선의 왕은 왕 노릇하기 참 힘들었을 것 같다.
7. 한훤당 선생이 반우형에게 건넨 「한빙계」
‘성현(聖賢)’이라는 말은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이 합쳐진 말이다. 유교용어이기도 한 이 말은 유교에서 지향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성인’은 이상적 개념이며, ‘현인’은 실제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성인’은 솔직히 되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현인’은 부단히 노력하면 누구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인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현인을 판단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임을 전제로 한다면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에 제향된 인물들과 전국의 모든 서원·사우 등에 제향된 인물들을 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선정기준이 좀 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이 기준을 선호한다.
[사진16 도동서원 중정당 야경] 중정은 중용과 같은 의미로 성인군자의 덕을 뜻한다(출처:송은석)
현인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 다음 가는 사람’ 정도로 풀이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설명이다. 현인은 신분이나 학문의 높고 낮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문관·무관 역시 상관없다. 오로지 ‘어질고 총명한 사람’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어질고 총명하다’고 하는 것일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어질고 총명한 사람’, 곧 현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큰물에 큰 물고기 놀듯, 큰 스승 밑에 큰 제자가 있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김굉필 선생의 제자하면 ‘조광조·김안국·김정국·정붕·이장곤·정응상·성세창·유우·이적·최산두·반우형···’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중에서 ‘반우형’이라는 인물은 거의 근세에 와서야 밝혀진 인물이다.
1970년 국역 경현록이 간행될 때, 새롭게 추가로 등재된 글 중에 「한빙계(寒氷戒)」라는 글이 있었다. 이글은 선생이 ‘반우형’에게 손수 써준 ‘18조목’의 글로서, 일종의 ‘잠언·좌우명’이다. 바로 이 「한빙계」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반우형이라는 인물이 선생의 제자임이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반우형이라는 인물이 김굉필 선생을 찾아가 배움을 청할 당시, 그의 관직은 성균관 대사성(정3품), 선생은 사헌부감찰(정6품)이었다. 다시 말해 성균관의 최고 책임자가 자신보다 훨씬 아래의 직책에 있는 사헌부 관원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췄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서울대 총장이 검찰 수사관을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기를 청한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이론이 있긴 하다. 하지만 아직은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니 경현록의 기록을 의지할 뿐이다.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첫 만남에 대해 두 사람 모두 각각 기록을 남겼다. 먼저 김굉필 선생의 기록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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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경현록 388쪽, 「한빙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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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형이 선생을 찾아왔다. 하지만 선생은 최근 들어 방문을 걸어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은 지 오래다. 반우형은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선생이 섭섭한 마음이 들어 「한빙계」라는 글을 하나 지어 그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반우형의 글을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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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경현록 410-411쪽, 사화(士禍)를 곡(哭)하는 시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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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위 두 인용문은 그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다만 반우형의 글에서는 이 외에도 선생이 무오·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형을 받자, 직접 유배지로 스승을 찾아뵙는 등의 일화가 더 나타난다. 그런데 이 글을 잘 보면 당시에 선생이 반우형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반우형이 선생을 찾아간 것은 1496년이다. 무오사화(1498)가 일어나기 불과 2년 전이었다. 선생은 혹여나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나중에라도 그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까 미리 조처를 한 것이었다. 옛말에 ‘견기이작(見機而作·조짐을 보고 미리 대처함)’이라는 말이 있다. 현인들은 아주 작은 기미도 놓치지 않고 읽어내어 미리 대비하고 또 처신한다는 말이다. 당시 김굉필 선생을 포함한 우리나라 현인들 대부분은 ‘사화’를 직감하고, ‘견기이작’했음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성인’과 ‘현인’을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위 두 인물과 함께 「한빙계」라는 글을 언급한 것은 다 그 까닭이 있다. 바로 「한빙계」가 현인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인(김굉필)’이 자신을 찾아온 ‘이(반우형)’에게 현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18조목으로 정리해 알려준 것이 바로 「한빙계」인 것이다.
옛 성현들은 후학들을 위해 좋은 말과 글을 많이 남겼다. 유교·유학에서는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성인의 저술은 ‘경’이라 하고, 현인의 저술은 ‘전’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경전 외에도 ‘잠언’이나 ‘좌우명’과 같이 그 내용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실생활에 매우 요긴하게 쓰이는 글들도 있다. ‘구사’·‘구용’·‘경재잠’·‘숙흥야매잠’·‘서명’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물론 퇴계의 ‘수신10훈’, 율곡의 ‘자경문’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자칭 ‘대구지역 유교문화 가이드’ 혹은 ‘대구지역 유교문화 해설사’이다. 그렇다보니 싫든 좋은 유교·유학관련 공부를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전공자들처럼 그렇게까지는 공부를 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옛 선현들의 문집을 보다보면 선현들마다 학문의 요체나 혹은 자기수양의 요체를 나름대로 정리해 놓은 글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선현들이 자신의 경험을 살려 공부의 요체를 뽑아놓은 것이니만큼 얼마나 중요한 글이겠는가. 그런데 그러한 글들 중에서 유독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한빙계(寒氷戒)」이다.
「한빙계」는 ‘차가운 얼음의 경계’라는 말인데 살얼음을 밟듯 매사에 두려워하고 조심하라는 뜻이다. 「한빙계」는 모두 18개의 조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평범한 일상의 도를 중심으로 간단명료하게 구성되어 있다.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느껴지는 참 좋은 글이다. 따라서 자기수양을 위한 공부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 번 쯤은 꼭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필자의 생각에 「한빙계」는 명문(名文)이 아닌 선문(善文)이다. 지면관계상 18조목의 제목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17 도동서원 환주문] ‘환주(喚主)’ 나의 주인인 마음을 불러 일깨운다는 의미이다(출처:송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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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심솔성(正心率性) 마음을 바르게 하고 성(性·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순수한 본성)을 따르라.
3. 정관위좌(正冠危坐) 갓을 바로 쓰고 꿇고 앉으라.
4. 심척선불(深斥仙佛) 선과 불을 깊이 배척하라.
5. 통절구습(痛絶舊習) 옛 버릇을 철저히 끊어버려라.
6. 질욕징분(窒慾懲忿) 욕심을 막고 분한 마음을 참으라.
7. 지명돈인(知命敦仁) 명을 알고 인을 도탑게 하라.
8. 안빈수분(安貧守分) 가난에 만족하며 분수를 지켜라.
9. 거사종검(去奢從儉) 사치를 버리고 검소하게 하라.
10. 일신공부(日新工夫)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
11. 독서궁리(讀書窮理)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12. 불망언(不妄言)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13. 주일불이(主一不二) 마음을 한 결 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말라.
14. 극념극근(克念克勤) 잘 생각하고 부지런히 하라.
15. 지언(知言) 말을 알라.
16. 지기(知幾) 일의 징조를 알라
17. 신종여시(愼終如始)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
18. 지경존성(持敬存誠) 공경함을 가지고 성실함을 지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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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2016년 9월 4일, 공교롭게도 라디오에서 이런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성녀, 테레사 수녀 성인이 되다. 금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가톨릭 성인추대 시성식 열려···”
8. 소학동자 그 최후의 모습
[사진18 도동서원의 여름](출처:송은석)
[사진19 도동서원의 가을](출처:송은석)
사람은 궁한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본 모습이 드러난다고 한다.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나,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몰리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따라서 그 가타부타를 논하기가 쉽지 않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본능의 한계를 뛰어넘은 인물들을 만날 수가 있다. 유교에서는 이러한 인물에 대해 ‘성인’·‘현인’·‘군자’라는 칭호를 붙여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 역시 ‘군자’이자 ‘현인’으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최후는 과연 어떠했을까?
익히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선생은 유배지 순천에서 죽음을 맞았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512년 전인 1504년 무오년 음력 10월 초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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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김굉필 행장·고봉 기대승)
◾1504년(연산군10) 선생 51세, ···(생략) 10월 초하루에 화(禍)가 선생이 귀양살이하는 곳에 미쳤다. 이날에 선생이 죽으라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듣고, 즉시 목욕을 하고 관대를 바로 하고 나가면서 신색(身色)이 변하지 않았다. 우연히 신이 벗겨졌으므로 다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갔으니, 나이가 51세였다.
(한훤당 김굉필 연보)
◾···(생략) 연이어 일어난 갑자사화로 그해 10월 1일 화급함에 이르렀다. 선생은 처음에 왕명을 듣고 곧 목욕재계한 후 관대(冠帶)하고 나오니 조금도 신색에 변함이 없었고, 우연히 신발이 벗겨지자 바로 신고 손으로 수염을 골라 입에 물고 조용히 말하기를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가병차수상(不可幷此受傷)”이라하고 나아갔다.
(대구향맥·서흥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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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각종 문헌자료에 나타나는 선생 최후의 모습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1504년 10월 1일, 선생의 유배지인 전남 순천 땅에 연산군의 명이 내려왔다. ‘죽음’이었다. 이에 선생은 목욕재계한 후 의관을 갖추고 왕명을 받들기 위해 자리에 나아갔다. 자리로 나아가는 도중 잠시 짚신이 벗겨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선생도 사람인데 두렵지 않았을까? 여하튼 선생은 벗겨진 짚신을 다시 고쳐 신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고봉 기대승 선생이 지은 「한훤당 선생 행장」에 의하면 선생은 의관을 정제한 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체 형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좀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신체와 머리털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이 모든 것을 함께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자신의 수염을 입에 물고 형을 받았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효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이는 가정에서의 효가 확장되어 나라의 충(忠)이 되듯, 인륜에 있어 효는 그 시작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생은 최후의 순간 효경의 한 구절을 외며 자신의 수염을 입에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참고로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효의 대명사인 증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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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여족(啓予足) 계여수(啓予手)”
이 말은 제자들로 하여금 이불을 들치고 증자 자신의 손과 발을 살펴보란 뜻이다. 이에 제자들이 이불을 들치고 증자의 손과 발을 살펴보니 상처하나 없이 깨끗했다. 이에 증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지면부(吾知免夫)로라 소자(小子)아”
증자가 말하기를 내 몸을 상하게 할까 평생을 두고 전전긍긍 근심을 했는데, 이제야 그 근심에서 벗어난 것을 알겠다는 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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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태어날 때와 같이 깨끗이 보존하여 죽음에 이르는 것이 최고의 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1504년 무오년 10월 초하루의 일로 돌아가 보자. 선생은 유배지에서 연산군으로부터 죽음을 명받았다. 당시 선생은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가병차수상”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는 칼을 받았다고 전한다. 선생의 마지막 말은 몸과 피부와 터럭은 모두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이 모두를 함께 상하게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목이 잘리는 형벌도 불가한 것인데, 하물며 수염까지 함께 잘리는 일은 더더욱 불가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생은 길게 기른 턱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었던 것이었다. 선생의 이 마지막 말은 본래 효경에 나오는 것인데, 소학에도 그대로 발췌되어 실려 있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소학의 가르침을 몸소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사진20 정수암] 한훤당 김굉필 선생 이하 3대가 여묘살이를 하던 곳이다.
도동서원 인근 대니산 중턱에 있다(출처:송은석)
한편 죽음의 명을 내린 연산군도 선생의 최후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 10월 8일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올라 있다.
왕이 의금부 가낭청 김희수·정유강을 불러 묻기를 “강백진과 김굉필이 죽음에 다다라 무슨 말을 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모두 한마디 말도 없이 죽음에 나아갔습니다.” 하였다.
사실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 앞에서 한마디 말도 않았다는 것은 ‘현인’이나 ‘군자’가 아니라면 진정 행하기 어려운 처신인 것이다.
9. 에필로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달성의 인물을 넘어 우리나라의 인물이다.
‘조선조 NO.1 선비,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그 진한 선비의 향취를 한 번 느껴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과 ‘이로정’, 현풍 못골의 ‘한훤고택’과 솔례마을 앞 ‘대양정’, 도동서원 인근의 선생의 산소와 ‘정수암’, 현풍 치마거랑 마을의 ‘쌍계서원(도동서원의 전신)터’ 등을 한 번 찾아가보라. ‘사사여생(事死如生)’이라는 말이 있다. 죽은 자 섬기기를 산자 섬기듯 하라는 뜻이다. 진실로 그렇게 하면 ‘여재(如在)’, 다시 말해 신이 마치 내 눈앞에 있는 듯 할 것이라는 말이다. 옛 현인들은 결코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 법이다. ‘공경하는 마음’, ‘경건한 자세’로 이들 유적지를 한 번 둘러보라. 그리하면 분명 ‘조선조 NO.1 선비,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끝...
2017년 1월 9일...
砧山下 풍경산방에서
訥齋 송은석拜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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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1 도동서원 은행나무] 나무를 심는 것은 덕을 심는 것이라 했다.
한강 정구 선생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수령 400년의 도동서원 은행나무(출처:송은석)
[사진22 한훤당 선생 묘소] 도동서원 뒤로 나있는 산길을 따라 약 15분 거리에 있다(출처:송은석)
[사진23 망료례] 향사에서 축과 폐백을 감(坎)에서 불사르는 의식.
도동서원의 감은 특이하게도 땅바닥이 아닌 담장에 설치되어 있다(출처:송은석)
[사진24 도동서원 향사] 사진 좌측이 주향인 한훤당 선생의 신위,
뒤에 보이는 것이 종향인 한강 선생의 신위(출처:송은석)
[사진25 분정례] 향사에서 ‘집사분정기’ 작성을 마친 후 다시 게시하고 있다(출처:송은석)
[사진26 한훤당 선생 신도비 쌍귀부] 보기 드물게 쌍귀부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거북의 얼굴 모양이 매우 독특하다(출처:송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