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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1788~1856)은 오랫동안 규장각에서 일하면서 청나라 실학(實學)의 학풍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사물(古今事物)에 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정밀한 고증으로 천문·역수(曆數)·종족·역사·지리·문학·음운(音韻)·종교·서화·풍속·야금(冶金)·병사(兵事)·초목·어조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考訂辨證)하여 1,400여 항목을 담아『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60권을 집대성하였다.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인사편 1 / 인사류 2 / 씨성(氏姓)에서 씨성(氏姓)과 보첩(譜牒)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33)을 보면
무릇 성(姓)은 오제[五帝,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사기(史記)》에는 소호 대신 황제(黃帝)로 되어 있음]에서 생기고 《춘추(春秋)》에 22성(姓)이 보이는데, 전국 시대 이후로는 성(姓)을 그냥 씨(氏)로 삼고 오제 이래로 생겼던 성(姓)은 없어졌다. 무릇 주소가(注疏家)들이 인용한 성ㆍ씨는 거의《세본(世本)》에서 나왔는데, 지금에는《세본》이 없어졌으므로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씨(氏)는 제후(諸侯)에게서 생겼다. 《예기(禮記)》대전 정의(大傳正義)에 “제후가 경대부(卿大夫)에게 씨(氏)를 준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제후의 출생한 지명을 따라서 성(姓)을 주고 수봉(受封)된 지명을 따라서 씨(氏)를 명하였으니, 성(姓)은 그 조상의 근본을 통할하고 씨(氏)는 그 자손의 유래를 분별한다. 천자는 덕(德) 있는 이를 제후로 삼은 뒤에 그 제후의 연고지 지명을 따라 성(姓)을 주고 수봉된 지명을 따라 씨(氏)를 명하며, 제후는 신하의 왕부(王父)의 자(字)를 따라 씨(氏)를 명하고 시(諡)를 따라 족(族)을 삼도록 한다.
천자는 성(姓)과 씨(氏)를 줄 수 있고 제후는 씨(氏)는 줄 수 있으나 성(姓)은 줄 수 없으므로, 성(姓)은 천자가 아니면 주지 못하고 씨(氏)는 제후가 아니면 명하지 못한다. 또한 성(姓)을 씨(氏)로 호칭할 수 없고 씨(氏)를 성(姓)으로 호칭할 수 없으며, 성(姓)은 혼인(婚姻)의 관계를 분별하고 씨(氏)는 귀천(貴賤)의 등위(等位)를 분별한다.
그러므로 성ㆍ씨에 대해 잘못된 관례를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그래도 씨(氏)ㆍ족(族)을 호칭하였는데, 한(漢) 나라 때 사람들은 통틀어서 성(姓)으로 호칭하였다. 예를 들면, 백우(伯禹)의 성을 사(姒), 씨를 유하(有夏)라 하고 백이(伯夷)의 성을 강(姜), 씨를 유려(有呂)라 하였다.
순(舜)이 규예(嬀汭) 가에 거주하였으므로 규(嬀)로 사성(賜姓)되었고, 순의 후손이 진(陳)에 수봉(受封)되었으므로 이내 성을 규(嬀), 씨를 진(陳)이라 하였다. 고염무(顧炎武)가 씨ㆍ족의 잘못된 관례에 대해 ‘주자(朱子)가《논어》ㆍ《맹자》를 주석하면서, 태공(太公)의 성은 강(姜), 씨는 여(呂), 이름은 상(尙)이라 한 데는 성과 씨가 매우 분명히 구별된 것이요, 자하(子夏)의 성은 복(卜), 이름은 상(商), 자금(子禽)의 성은 진(陳), 이름은 항(亢), 자공(子貢)의 성은 단목(端木), 이름은 사(賜), 자문(子文)의 성은 투(鬪), 이름은 누오도(穀於菟)라 한 유는 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요, 제선왕(齊宣王)의 성은 전씨(田氏), 이름은 벽강(辟彊)이라 한 데는 성과 씨를 하나로 삼은 것이니, 이는 혹 옛사람들의 착오를 그대로 인습하여 미처 시정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였는데, 지금 성과 씨를 합쳐서 하나로 삼고 있으니, 그 잘못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다.
족(族)에서 구별, 성이 되고 성에서 구별, 망(望) 망은 곧 씨의 명칭이다. 이를테면, 중국에서는 이성(李姓)의 망이 농서(隴西)이면 농서를 망으로 삼고, 우리나라에서는 망을 본(本)이라 하는데, 이성(李姓)의 본이 전주(全州)이면 전주를 본으로 삼는다. 본은 혹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곧 향관(鄕貫)이란 것으로, 세속에서는 성향(姓鄕), 또는 적(籍)이라 한다. 이 되고 망에서 구별, 방(房) 방은 곧 파(派)의 명칭인데, 장적(長嫡)을 장방(長房), 차적(次謫)을 차방(次房), 삼적(三嫡)을 삼방(三房)이라 하여 그 서차를 따라 일컫는다. 이 된다. 그러므로 성이 번다(煩多)하면 그 족이 그릇되기 쉽고, 망이 번다하면 그 성이 그릇되기 쉽고, 방이 번다하면 그 망이 그릇되기 쉬우니, 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대저 성은 황제(黃帝)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모두가 다 그 후예인 셈이다. 그 근본을 상고하자면 모든 성ㆍ씨를 말하는 이들이 다《세본(世本)》유향(劉向)의 찬(撰)으로 2권이라 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고, 송충(宋衷)이 찬(撰)한《세본》은 4권이다.ㆍ《공자보(公子譜)》 저자는 전하지 않는다. 두 책을 근거로 삼았고, 두 책은 모두《좌씨전(左氏傳)》을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거슬러올라가 보면 팔원(八元 고양씨(高陽氏)의 8재자(才子)인 창서(蒼舒)ㆍ퇴애(隤敱)ㆍ도연(檮戭)ㆍ대림(大臨)ㆍ방강(尨降)ㆍ정견(庭堅)ㆍ중용(仲容)ㆍ숙달(叔達))ㆍ팔개(八愷 고신씨(高辛氏)의 8재자인 백분(伯奮)ㆍ중감(仲堪)ㆍ숙헌(叔獻)ㆍ계중(季仲)ㆍ백호(伯虎)ㆍ중웅(仲熊)ㆍ숙표(叔豹)ㆍ계리(季貍))가 고양씨(高陽氏)와 고신씨(高辛氏)를 근본으로 하여 16족(族)이라 일컫고, 요전(堯典《서경(書經)》편명(篇名))에는 ‘구족(九族 고조(高祖)에서 현손(玄孫)까지)을 친(親)했다.’ 하였으니, 분합(分合)의 조짐이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주(周)의 성세(盛世)에 이르러서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을 정하여 종법(宗法)이 매우 밝았고 또 소사(小史 주대(周代)에 춘관(春官)에 속한 벼슬이름)를 두어서 세계(世系)를 분별, 소목(昭穆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시조를 중앙에, 2ㆍ4ㆍ6세(世)를 좌편 소[左昭]에, 3ㆍ7ㆍ9세를 우목(右穆)에 모시는 것)을 정하게 하였고, 소종백(小宗伯 주대에 춘관에 속한 벼슬 이름)을 두어서 삼족(三族 여기서는 부(父)ㆍ자(子)ㆍ손(孫)을 말함)에 관한 구분을 맡아 그 친소(親疏)를 분별하게 하였고, 대전(大傳《예기(禮記)》편명(篇名))에는,
“위로는 조녜(祖禰)를, 옆으로는 형제를, 아래로는 자손을 바르게 한다 …… 친(親)한 이를 친하기 때문에 조상을 놓이게 되고, 조상을 높이기 때문에 종(宗)을 공경하게 되고, 종을 공경하기 때문에 족(族)을 통합하게 되고, 족을 통합하기 때문에 종묘(宗廟)가 엄격하게 된다.”
하였는데, 무도한 진대(秦代)에 와서는 종법이 크게 무너져 버렸다.
수(隋)ㆍ당(唐) 이전에는, 관서(官署)에는 부장(簿狀)이, 사가(私家)에는 보계(譜系)가 있었다 …… 역대에 모두 도보국(圖譜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관장하게 하고 박식(博識)한 선비를 시켜 보(譜)를 편찬하되, 백관(百官)들 가운데 족성(族姓)에 관한 가장(家狀)이 있는 자는 관서(官署)에 제출하도록 하여 사실을 고정(考定)한 뒤에 비각(祕閣)에 간직하고 그 부본(副本)은 좌호(左戶 나라의 계장(計帳)ㆍ호적 등의 사무를 맡은 벼슬 이름)가 비치해 두게 하였다 …… 한(漢) 나라 등씨(鄧氏)에게《관보(官譜)》가, 응소(應劭)에게《씨족편(氏族篇)》이, 영천 태수(潁川太守) 요씨(聊氏)에게《만성보(萬姓譜)》가 있고, 진(晉) 나라 가필(賈弼)ㆍ왕홍(王弘)과 남제(南齊) 왕검(王儉)과 양(梁) 나라 왕승유(王僧孺) 등에게 각기《백가보(百家譜)》가, 서면(徐勉)에게《백관보(百官譜)》가 있고, 남조(南朝) 송(宋) 나라 하승천(何承天)은《성원(姓苑)》을, 당 태종(唐太宗)은 여러 선비에게 명하여《씨족지(氏族志)》1백 권을, 유충(柳冲)은《대당성계록(大唐姓系錄)》2백 권을 찬(撰)하였고, 노경순(路敬淳)에게《의관보(衣冠譜)》가, 위술(韋述)에게《개원보(開元譜)》가, 유방(柳芳)에게《운략(韻略)》이, 장구령(張九齡)에게《운보(韻譜)》가, 임보(林寶)에게《성찬(姓纂)》이, 소사(邵思)에게《성해(姓解)》가, 정초(鄭樵)에게《씨족지(氏族志)》57권이 있고, 또《씨족원(氏族源)》ㆍ《족운(族韻)》등 70권이 있다. 당(唐) 나라 때에는 사람의 성(姓)을 소중히 여겨 8대성(大姓) 이하 1백 50성이 소개되었고, 송 나라 가우(嘉祐 인종(仁宗)의 연호) 연간에《천성편(千姓編)》이 나왔고, 안문(雁門) 사람 소사(邵思)의《성해(姓解)》에는 1백 70문(門)으로 분류, 2천 5백 68씨(氏)나 소개되었고, 또《만성통보(萬姓統譜)》ㆍ《만성통보(萬姓通譜)》등과《기성통(奇姓通)》이 있다. 기타 성씨에 관한 보서(譜書)가 매우 많으나 다 기록할 수 없고 후일을 기다린다.
성씨를 다룬 글에 소개되지 않은 기성(奇姓)도 많으므로 대충 언급하려 한다.《난매유필(暖妹由筆)》에,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연간에 진사(進士) 茂에게 陝이란 성을 하사하였는데, 섬()은 섬(陝)자와 같이 발음한다.”
하였고《지북우담(池北偶談)》에,
“내가 의조(儀曹 관명(官名))로 있을 때 완평(宛平) 사람 아무개가 있었는데, 관리가 잘못 벽(碧)으로 발음하자, 그 사람이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은 번(樊)자와 같이 발음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밀(高密)에 있는 자 성은 축(閦)으로, 禚자 성은 탁(卓)으로, 제성(諸城)에 있는 자 성은 지(支)로 발음하고, 수광(壽光)에는 鱉자 성이, 하남(河南)에는 驢자 성이, 제남(濟南)에는 俳자 성이 있고, 임자년 전시(典試)에는 부방(副榜)에 든 사천(四川) 사람 度 아무개가 있었는데, 탁(拓)으로 발음한다.”
하였고, 우리나라에 있는 㫆자 성은 며로, 자 성은 왁으로, 遇자 성은 황으로 발음하고 㔛자 성은 발음이 자세하지 못하고 乁자 성은 비로, 鴌자 성은 궉으로, 㸴자 성은 소로, ●자 성은 퉁으로, 乜자 성은 로 발음하고, 복성(複性)으로 된 牆籬은 담울로 발음한다.
족보(族譜)에 대하여는 진(晉) 나라 지우(摯虞)가 맨 처음으로《족성소목기(族姓昭穆記)》를 지었고,《수서(隋書)》경적지 보계편(經籍志譜系篇)에, 익주(益州)와 기주(冀州) 등 여덟 고을의 성보(姓譜)가 소개되었으며, 송 나라 구양씨(歐陽氏 구양수(歐陽脩))와 소씨(蘇氏 소순(蘇洵))가 비로소 옛날의 소종법(小宗法)을 근거로 하여 족보를 만들었는데, 후세에 보학(譜學)을 다루는 이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주례(周禮)》의 소사법(小史法 소사가 맡은 소목(昭穆)을 정하는 법)이 군공(君公)에게만 적용되다가 진(晉) 나라 이후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점차 보첩(譜牒)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성씨의 분합(分合)에 대하여 한(漢)ㆍ위(魏) 이전에는 그 세차(世次)가 모호하고 서책(書策)이 미비하여 낱낱이 상고하려 하나, 먼 데를 보려 하는 자는 기어이 그 모습을 보았으면 하고 먼 데를 들으려 하는 자는 기어이 그 소리를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문충은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시호)이,
“성씨가 생겨난 유래는 매우 오래다. 그러므로 상고(上古)의 것은 거의 없어져 알 수 없으니, 보도(譜圖)를 다루는 법은 알 수 있는 세대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변동할 수 없는 의론이다.
춘추 시대에는 족성(族姓)을 가장 중하게 여기고 당 나라 사람들은 보첩을 매우 귀하게 여겼는바, 담자(郯子)는 그 조상을 설명하였으므로 칭찬을 받았고 적담(籍談)은 그 선대(先代)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비웃음을 받았으니, 사람으로서 계보(系譜)에 익숙한 이야말로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화목시키는 마음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통보(通譜)하는 폐습을 들어 말하자면, 옛날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윤상(倫常)을 패란(敗亂)시키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바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런 폐습은 진정 종법(宗法)이 엄격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두정륜(杜正倫)이 성(城) 남쪽의 두씨(杜氏)들에게 끼이기를 청하자 군자가 부끄러이 여기고, 곽숭도(郭崇鞱)가 곽자의(郭子儀)의 묘(墓)를 찾아 곡배(哭拜)하자 식자(識者)가 부끄러이 여겼으며, 고산(孤山)이란 이름을 내세우자 아들로 되어 온 자가 끊임이 없었고, 조군(趙郡) 출신이라 자칭하자 족의(族誼)를 맺은 자가 한량 없었으니 《구당서(舊唐書)》이의부전(李義府傳)에 “의부가 귀(貴)하게 된 뒤에 조군(趙郡)의 이성(李姓)이라고까지 자칭하고 드디어 다른 이성들과 소목(昭穆)의 항렬을 가림으로써 무뢰배들이 그에게 구합(苟合)하여 그의 권세를 빙자하는 한편, 그를 형(兄)이나 숙(叔)으로 받드는 자가 매우 많았다.” 하였으니, 이는 명문(名門)으로서 의부와 같은 소인에게 아부한 예이다. 소위 보첩이란 것을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희문(希文 송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자)은 어려서 주씨(朱氏)에게 개가(改嫁)한 어머니를 따라 주씨로 행세, 주학구(朱學究)라고까지 칭하였다가 이미 장성한 뒤에는 자신이 세가(世家)의 출신임을 알고 흐느끼면서 범씨(范氏)로 되돌아왔으니, 외가(外家)의 손성(孫姓)을 따라 손씨가 되어버린 등공(滕公)의 자손에 비하면 그 소견이 동떨어지고, 무양공(武襄公 송 나라 적청(狄靑)의 시호)의 조상이 바로 적양공(狄梁公 양공은 당 나라 적인걸(狄仁傑)의 봉호)이라는 데 대해 고증할 만한 고신(告身 직첩(職牒))까지 있었으나, 무양공은 한때 영귀(榮貴)한 것을 빙자하여 감히 양공(梁公)을 모독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자의(子儀)의 묘(墓)를 찾아 곡배(哭拜)를 드렸던 곽숭도에 비하면 그 소득이 많다.
장주(長洲) 사람 여종옥(呂種玉)의《언청(言鯖)》에,
“명 태조(明太祖)가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옥첩(玉牒 임금의 보첩)의 편수를 의논하면서 주문공(朱文公 문공은 송 나라 주희(朱熹)의 시호)을 시조로 삼으려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날 휘주(徽州) 출신 주(朱) 아무개가 전사(典史)로 있는 것을 보고, 문공의 후손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태조가 ‘한낱 전사로도 경솔히 주자(朱子)를 시조로 삼지 않는데, 우리 국가가 어찌 주자를 시조로 삼겠는가.’고 깨닫고는 이전의 의논들을 모두 퇴각시켰다.”
하였으니, 통보(通譜)하는 폐습으로 자신의 부조(父祖)를 바꾸는 자가 이를 본다면 어찌 부끄러움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리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의 성씨에 대하여 본국의 토성(土姓)으로는 삼한(三韓)과 삼국시대 왕공(王公)들의 후예가 많고 그 나머지는 혹 하사된 성(姓)이거나 혹 중국에서 나온 성들인데, 제 각기 보계(譜系)가 있어서, 중국의 성씨처럼 혼란스러워 상고하기 어려운 예와는 다르다. 고증할 만한 보첩을 아래에 대충 열거하려 한다.
《동국제성보(東國諸姓譜)》2권은 정시술(丁時述)이,《성원총록(姓苑叢錄)》은 임경창(任慶昌)이, 《술선록(述先錄)》에 “임경창ㆍ정시술ㆍ정서천(鄭西川)은 보학(譜學)의 대가이다.”하였다. 《씨족보(氏族譜)》53권은 박사정(朴思正)이, …… 원문 1자 빠짐 …… , 산현(□山縣) 사람 《백가보(百家譜)》10권은 허함(許涵)이,《씨족원류(氏族源流)》는 이경렬(李景說)이,《씨족원류》7권은 조종운(趙從耘)이 지었고,《벌열통고(閥閱通攷)》4권은 우리 왕고(王考)의 윤문 수보(潤文修補)를 위시하여 불초손(不肖孫)인 나도 수보하였고,《팔팔첩(八八帖)》은 벽진(碧珍) 이모(李某)가,《만성총보(萬姓叢譜)》는 유언선(兪彦䥧)이 지었고,《동교록(東喬錄)》28권은 저자(著者)가 전해지지 않는다. 진신(搢紳)들의 세보(世譜)로는 8대(代), 혹은 10대의 것을 모아 만든 것으로《문보(文譜)》ㆍ《무보(武譜)》ㆍ《음보(蔭譜)》ㆍ《사마보(司馬譜)》등이 있고,《명위보(明衛譜)》는 고려 시대 사람의 편저(編著)로 송경(松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며,《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양성지(梁誠之)가 지었고,《백가보략(百家譜略)》은 저자가 전하지 않는다. 성씨에 관한 책은 이외에도 몇 종류가 더 있는지 알 수 없다.
성(姓)의 유래는 오제(五帝)에서 시작되고 오제의 성을 얻은 것은 오행(五行 금ㆍ목ㆍ수ㆍ화ㆍ토)에서 시작되었다.
오행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상배(相配)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있다.《좌전(左傳)》에 “유규(有嬀)의 후예는 장차 강(姜)에서 발족될 것이다.” 하였고, 또《좌전》선공(宣公) 3년 조에 “길성(姞姓)이 희성(姬姓)의 배우가 되면 그 자손이 반드시 번창할 것이라고 했다.” 하였는데, 후세에 사람의 성을 오음(五音)에 배속시켜서 〈금성(金姓)이니, 목성(木姓)이니 하는〉설이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기(禮記)》곡례(曲禮)에 ‘동성(同姓)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성(姓)자에는 생(生)자의 뜻이 들어 있다.
여(女) 자와 생(生) 자가 합하여 성(姓) 자가 되므로 성(姓)에는 여(女) 자가 붙은 글자가 많다. 이를테면, 규(嬀)ㆍ희(姬)ㆍ사(姒)ㆍ길(姞)ㆍ운(妘)ㆍ주(婤)ㆍ흡(姶)ㆍ비(㚰)ㆍ구(嫪)ㆍ강(姜)ㆍ영(嬴)과 같은 유이다. 은(殷)나라는 양덕(陽德)을 받았으므로 남자를 표시할 때 자(子)자로 사용하고 주(周)나라는 음덕(陰德)을 받았으므로 여자를 표시할 때 희(姬)자로 사용하였다. 성(姓)자는 여(女)자에 의해 생겼으므로 부인(婦人)의 칭호로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백희(伯姬)ㆍ계희(季姬)ㆍ맹강(孟姜)ㆍ숙강(叔姜)과 같은 유이다.
《시경(詩經)》인지지(麟之趾)에,
“인후(仁厚)한 공손(公孫)들이다.”
하였는데,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은 혼자로는 생생(生生)하지 못하고 둘이 있어야만 생생하게 되므로 〈《좌전》희공(僖公) 23년〉에 숙첨(叔詹 정(鄭)의 어진 대부(大夫))이,
“남녀가 동성(同姓)끼리 혼인하면 그 생육(生育)이 번식하지 못한다.”
하였고, 〈《국어(國語)》정어(鄭語)에〉 사백(史伯 주(周)의 태사(太史))이 정 환공(鄭桓公)에게,
“선왕(先王)이 후비(后妃)를 이성(異姓)에게 맞이하는 것은 그 화동(和同)을 힘쓰기 위함입니다. 즉 단조(單調)로 된 음악은 들을 것이 없고 단일(單一)로 된 물건은 문채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으니,《예기》의 동성끼리 혼인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혐의를 피하려는 것뿐 아니라 임석(衽席 부부의 동침을 말함) 사이를 경계하는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혜강(嵇康)의 논(論)에 “오행(五行)에 상생(相生)하는 이치가 있으므로 동성끼리는 혼인하지 않는다.” 하였다.
씨가 같고 성이 같지 않은 자는 혼인할 수 있고, 성이 같고 씨가 같지 않은 자는 혼인할 수 없다.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에는 성ㆍ씨를 주는 데 있어, 그 거주한 지명(地名), 수봉(受封)된 지명, 시(諡)ㆍ관(官)ㆍ읍(邑)을 따른 5종류였는데, 후세에는 성ㆍ씨를 받은 데 32종류나 된다. 즉 정초(鄭樵)의 씨족서(氏族序)에,
“1. 국(國)으로 씨(氏)를, 2. 읍(邑)으로 씨를, 3. 향(鄕)으로 씨를, 4. 정(亭)으로 씨를, 5. 지(地)로 씨를, 6. 성(姓)으로 씨를, 7. 자(字)로 씨를, 8. 명(名)으로 씨를, 9. 차(次)로 씨를, 10. 족(族)으로 씨를, 11. 관(官)으로 씨를, 12. 작(爵)으로 씨를, 13. 흉덕(凶德)으로 씨를, 14. 길덕(吉德)으로 씨를, 15. 기(技)로 씨를, 16. 사건으로 씨를, 17. 시(諡)로 씨를 18. 작계(爵系)로 씨를, 19. 국계(國系)로 씨를, 20. 족계(族系)로 씨를, 21. 명씨(名氏)로 씨를, 22. 국작(國爵)으로 씨를, 23. 읍계(邑系)로 씨를, 24. 관명(官名)으로 씨를, 25. 읍시(邑諡)로 씨를, 26. 시씨(諡氏)로 씨를, 27. 작시(爵諡)로 씨를 삼았고, 28. 대북(代北)의 복성(複姓), 29. 관서(關西)의 복성, 30. 모든 지방의 복성, 31. 대북(代北)의 삼자성(三字姓), 32. 대북의 사자성(四字姓)이다.”
하였다.
백제 때에는 8족(族)의 대성(大姓)이 있었다.《북사(北史)》에는 백제의 대성인 8족이 사(沙)ㆍ연(燕)ㆍ예(刕)ㆍ진(眞)ㆍ해(解)ㆍ국(國)ㆍ목(木)ㆍ묘(苗)로 되어 있다. 백제의 8성(姓) 중에 그 하나를 든다면, 진한(眞漢)ㆍ진우(眞祐)는 태위(太尉)ㆍ장사(長史)였고, 진흠(眞欽)은 태의령(太醫令)이었고, 진현도(眞玄菟)는 산법(算法)에 능하였다.
신라 때에는 육부(六部)에 사성(賜姓)하였다. 신라유사(新羅遺事)에 보면, “유리왕(儒理王) 9년(32)에 육부의 이름을 고치고 이어 사성하였다. 즉,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로 하여 이성(李姓)을,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하여 최성(崔姓)을, 대수촌(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하여 손성(孫姓)을, 우진촌(于珍村)을 본피부(本彼部)로 하여 정성(鄭姓)을, 가리촌(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하여 배성(裵姓)을, 명활촌(明活村)을 습비부(習比部)로 하여 설성(薛姓)을 주었다.” 하였으니, 이 6성(姓)은 신라 시대의 망족(望族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고려 때에 와서는 성ㆍ씨가 매우 많아졌다. 그러나 한 성으로서 1백여 가지의 씨망(氏望)이나 되므로 쉽게 상고할 수 없다. 우리나라 정조(正祖) 13년(1789)에 경조장적(京兆帳籍)에 기입된 성(姓)이 4백 7가지이고,《여지승람(輿地勝覽)》에 기재된 79성과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 기재된 13성은 정조 13년 경조 장적에 누락된 것으로 도합 92성이 된다. 기타 기벽성(奇僻姓)도 이루 다 기재되지 못하였으니, 성이란 다 상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인(古人)들이 성(姓)을 기록해 놓은 것 중에는 너무도 황당(荒唐)하고 맹랑한 것이 있다. 하늘이나 해와 달에도 성이 있고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에게도 성이 있다 하였으니, 그 허황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즉《수서(隋書)》에,
“천존(天尊)의 성은 악(樂), 이름은 정신(靜信)이다.”
하였고,《노자역중경(老子歷中經)》에,
“해의 성은 장(張), 이름은 표(表), 자는 장사(長史)로 하늘의 사도(司徒)이고, 달의 성은 문(文), 이름은 신(申), 자는 자광(子光)으로 하늘의 사공(司空)이다.”
하였고,《통서정종(通書正宗)》에,
“해의 성은 손(孫), 이름은 개(開), 자는 자진(子眞)이고, 달의 성은 당(唐), 이름은 말(末), 자는 천현(天賢)이다.”
하였고,《광박물지(廣博物志)》에,
“천황씨의 성은 망(望), 이름은 획(獲), 자는 자윤(子潤)이고 지황씨의 성은 악(岳), 이름은 갱(鏗), 자는 자원(子元)이고, 인황씨의 성은 개(愷), 이름은 호조(胡絩), 자는 문생(文生)이다.”
하였다.
무릇 성씨에 관한 책을 편저(編著)하는 데 있어, 글자로 논한 이는 글자의 편방(偏旁 글자의 왼편 획과 오른편 획)을 주장하고, 성(聲)으로 논한 이는 글자의 사성(四聲 글자가 갖는 고저 장단(高低長短) 네 종류의 음(音))을 범례로, 지망(地望)으로 논한 이는 출신의 귀천(貴賤)을 격식으로 삼았다. 이것이 마치 다른 책들의 분문 유휘(分門類彙)한 체제와 같은데, 보학가(譜學家)는 반드시 이 점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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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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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 읽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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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에 의한 기록이니 작금의 추정보다는 더 정확할 것으로 사료되어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 서문의 뿌리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올렸습니다.
늘 바라시는 행복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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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이라도 참고가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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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보았습니다. 근데 많이 어렵네요.
찬찬히 읽어 보시면 특별한 것이 아니랍니다.
고증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우리나라의 성씨 역사에 관한 기록을 요약한 것입니다.
아마 상식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