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5월 25일 서울 출생
**1921년 서울 교동공립보통학교 입학
**1923년 친구들과 함께 '꽃밭사'를 만듬
**1924년 <신소년>에 동요 '봄' 입선
[봄]
니나니 나니나 니나니나
버들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니나니 나니나 니나니나
버들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니나니 나니나 니나니나
시내에 얼음이 다 풀렸다
니나니 나니나 니나니나
잔디가 파랗게 돋아난다
니나니 나니나 니나니나
산나물 캐러들 올라간다
니나니 나니나 니나니나
제비가 물 차고 날아든다
**1925년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 입선
[오 뚜 기]
책상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 야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 야
술이 취해 얼굴이 빨개가지고
비틀비틀 하는 꼴 우습구나 야
책상위에 오뚜기 우습구나 야
주정하다 아래로 떨어져서도
안아픈체 하는 꼴 우습구나 야
**1930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 전에 나옴
**1932년 <윤석중 동요집> 냄
**1933년 우리나라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냄 '개벽사'에 입사, 소파 방정환 선생의 뒤를 이어 <어린이>를 주관함
**1935년 박용실과 결혼
**1939년 일본 상지대학으로 유학 <윤석중 동요선>을 냄
**1940년 동경에서 동요집 <어깨동무> 냄
**1945년 해방이 되자 아동문화협회 창설, 아동도서 출판을 주재함
**1947년 '노래동무회'창립,
**1951년 '윤석중 아동연구소'설립
**1954년 <윤석중 동요 100곡집> 냄
**1956년 '새싹회'창립
**1957년 '소파상' 제정
**1961년 '장한 어머니상'제정 3·1 문학상 예술부문 문학 본상을 받음
**1962년 <윤석중 아동문학독본> 냄
**1963년 <윤석중 동요집> 냄
**1966년 문화훈장 받음
**1968년 한국공로표창 받음
**1971년 회갑 동요집 <윤석중 동산>냄
**1973년 '새싹문학상'제정 '윤석중 동요 반세기'노래 잔치 엶
**1977년 계간지 <새싹문학> 창간. 첫 창작 동화집 <열 손가락 이야기> 냄
**1978년 필리핀의 막사이사이상 받음(언론 문학 창작 부문)
**1980년 창작동화집 <어깨동무 쌍둥이>냄 <윤석중 동요 525곡집> 냄
**1983년 동요전집 <날아라 새들아> 냄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새나라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1986년 예술원 원로 회원 됨
**1987년 모교인 양정고등학교에서 57년만에 '명예졸업장' 받음
**1988년 세종대학교의 명예문학박사 학위 받음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30권. 카세트 8개) 나옴 1990년 팔순 기념 동요집 <여든살 먹은 아이> 냄 KBS동요 대상 받음
**1992년 인촌상 받음
**1997년 '어린이가 뽑은 올해의 작가상' 받음
**1999년 '77년 동요인생, 아흔살 아이 윤석중의 밤' 개최 (한국 대학생 대중문화 감시단 주최)
**2000년 후배문인들이 엮은 아흔 기념 창작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 출판기념회 엶. 현재 새싹회 회장
**2003년 3월1 윤석중씨, 동시 · 동요 발전 기여도 1위
원로 아동문학가 윤석중 (尹石重·92)씨가 한국 동시와 동요문학 발전에 가장 높은 기여도를 보인 인물로 조사됐다. 계간 ‘한국동시문학’(발행인 박두순)은 올 봄 창간호 특집으로 다룬 ‘한국 동시문학 발전에 공헌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에서 윤씨가 동시와 동요 분야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어 동시문학 발전에 기여한 인물은 신현득, 이원수, 강소천, 김종상, 어효선씨 순이었으며, 동요문학 분야에서는 강소천, 권오순, 권태응, 김영일, 김종상, 박경종, 박화목, 신현득, 어효선, 윤극영, 이원수, 한정동씨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해 결성된 한국동시문학회의 회원 중 설문에 응한 6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2003.03.11)
**★2003.12.9. 향년 92세로 별세
-정부 금관문화훈장 추서
아동문학의 거봉 석동(石童) 윤석중(尹石重) 옹이 9일 0시5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옹은 1924년 ‘신소년’지에 동요 ‘봄’으로 등단했다. 윤옹은 소파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지를 이끌었으며 새싹회를 창립해 아동문학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평생을 노랫말 짓기에 바쳐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 노래’ ‘낮에 나온 반달’ ‘기찻길 옆 오막살이’ ‘새나라의 어린이’ 등을 남겼다.
저서로는 ‘초승달’ ‘엄마손’ 등 동요집과 ‘열 손가락 이야기’등 동화집,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전 30권) 등이 있다. 외솔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인촌상 등을 받았으며 86년 예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됐다.
유족은 부인 박용실(朴鏞實촵89)씨와 아들 태원(台元촵65촵재미 사업), 원(源촵59촵재미 사업), 혁(赫촵56촵재미 사업)씨, 딸 주화(珠華촵66) 영선(音변英 善촵62)씨 등 3남 2녀. 빈소는 서울 삼성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9시 서울 방배동 방배성당. (출처: 한국일보2003/12/10)
● 경력사항
**1924년 <신소년>에 '봄'으로 등단 <어린이>에 '오뚜기'로 등단
**1933년 개벽사 <어린이 >주간
**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 겸 '소년중앙' 주간
**1936년 조선일보 '소년', '유년' 주간
**1955년 조선일보 편집주간
**1956년 새싹회 회장
**1957년 소파상 제정
**1961년 장한어머니상 제정
**1967년 문인협회 아동문학분과위원장
**1968년 서울가정법원 가사 조정위원
**1973년 새싹문학상 제정
**1973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
**1974년 방송용어 심의위원
**1986년 예술원 원로회원 상훈
**1961년 3.1문학상
**1966년 문화훈장 국민상
**1973년 외솔상
**1978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대한민국문학상
**1989년 제 34회 예술원상
**1990년 제5회 KBS동요대상
**1995년 제 8회 대한민국동요대상 공로상'
**2000년 제 34회 잡지언론상
● 저서
**1932년 윤석중 동요집(신구서림)
**1858년 멍청이 명철이(카톨릭 출판사)
**1980년 윤석중 동요 525곡집(세종음악출판사)
**1981년 노래가 하나 가득(일지사)
**1982년 사람나라 짐승나라(일지사)
**1983년 날아라 새들아(창작과 비평사)
**1985년 어린이와 한평생(범양사)
**1985년 별마을 꿈마을(한국명작문고)
**1990년 팔순 기념 동요집 <여든살 먹은 아이>(웅진출판)
**1990년 어깨동무 쌍둥이(예림당)
**1991년 저학년동시집(지경사)
**1994년 동요집 <그 얼마나 고마우냐>(웅진출판)
**1999년 예쁜 동시 이야기쟁이(웅진출판)
**2000년 아흔 기념 창작문집 <내일도 부르는 노래>(문공사)
● 윤석중 문학비 :
서울시 중구 덕수궁 내
● 윤석중 선생님의 대표작
[먼 길]
아기가 잠드는 걸
보고 가려고
아빠는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
보고 자려고
아기는 말똥말똥
잠을 안 자고.
(1946년)
[새 신]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새 신을 신고
달려보자 휙휙.
단숨에 높은 산도 넘겠네.
(1957년)
[넉점 반]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점 반이다."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고.
"넉점 반
넉점 반"
아기는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
해가 꼴딱 져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점 반이래."
(1940년)
[고추먹고 맴맴]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할머니가 돌떡 받아 머리에 이고
꼬불꼬불 산골길로 오실 때까지.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아버지가 옷감 떠서 나귀에 싣고
딸랑딸랑 고개 넘어 오실 때까지.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1932년)
[오뚝이]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야.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술이 취해 얼굴이 빨개 가지고
비틀비틀하는 꼴
우습구나야.
책상 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주정하다 아래로
떨어져서도
안 아픈 체하는 꼴
우습구나야.
(1932년)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찻길 옆 옥수수밭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차 소리 요란해도
옥수수는 잘도 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1946년)
[퐁당퐁당]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널리 멀리
퍼져라.
건너편에 앉아서 나물을 씻는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 주어라.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냇물아 퍼져라, 퍼질 대로
퍼져라.
고운 노래 한마디 돌려달라고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질여주어라.
(1932년)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우리가 자라면 새나라 일꾼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1948년)
[졸업식 노래]
빛나는 졸업식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며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 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
(1948년)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1980년)
[옹달샘]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띠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달밤에 노루가 숨바꼭질하다가
목마르면 달려와 얼른 먹고 가지요.
(1962년)
[봄 나들이]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종종종
봄 나들이 갑니다.
(1939년)
[산바람 강바람]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강가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도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노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배를 저어 간대요.
(1932년)
[우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랑 우산
깜장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1932년)
[낮에 나온 반달]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 끈에 달랑달랑 채워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쪽발에 딸깍딸깍 신겨 줬으면.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버린 면빗인가요.
우리 누나 방아 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 곱게 빗겨줬으면.
(1932년)
[오 뚜 기]
1.
책상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검은 눈은 성내어 뒤룩거리고
배는 불룩 내민 꼴 우습구나 야
2.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 야
술이 취해 얼굴이 빨개가지고
비틀비틀 하는 꼴 우습구나 야
3.
책상위에 오뚜기 우습구나 야
주정하다 아래로 떨어져서도
안아픈체 하는 꼴 우습구나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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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중 아동문학가의 문학세계 / 김민정
▶ 하루로 시작한 동요인생
윤석중 님이 동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1살 때부터. 소학교의 창가 시간에 우리말이 아닌 일본말로 노래하는데 의문을 품은 것이 스스로 동시를 만들게 된 계기였다.
"나 어려서는 일정 땐데, 일본사람 교장이 가르쳤거든요. 그땐 동시란 말도 없고 동요란 말도 없었죠. 창가라고 해서 노래를 하는데 '하루'라는 걸 배웠어요. 난 하루 이틀을 하루라 한 줄 알았더니. 봄이 일본말로 하루예요. 어린 생각에도 우리나라에도 버젓한 봄이 있는데 '하루'가 뭐냐 난 봄을 지키겠다 해서 '봄'이란 걸 지어서 <신소년>이란 잡지에 보냈는데 입선이 됐어요. 그때부터 시작한 거죠."
윤석중 님은 곧 뜻이 맞는 친구들을 모아 글모임인 '꽃밭사'를 만들었다. 함께 활동한 동료 중에는 <고향의 봄>으로 유명한 이원수 선생도 있었다. 우리말과 글로 된 책을 읽고 글을 지시를 계속하여 <굴렁쇠>란 잡지도 만들었다. <어린이>에 동요 '오뚜기'가 입선했다. <어린이>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아 후에 발행인인 방정환 선생 사후에는 그가 주간으로 일하기도 했다.
▶ 어린이운동은 나라사랑운동
그가 한창 활동하던 청년 시절은 일제 치하였다. 잃어버릴 위기의 우리말과 글, 정신을 지키기 위해 벌이던 구국운동 중 하나였던 어린이운동. 윤석중 님은 힘겨웠던 어린이운동을 지켜보고 함께 해온 산 증인이기도 하다.
"한쪽에선 좌익운동, 다른 쪽에선 우익. 이래서 어린이날도 양쪽에서 했어요. 그러니 어린이운동조차도 좌익우익이 갈렸죠. 어려서부터 어른 눈치에, 좌익우익 이런 걸 따졌으니 그 시절 어린이들이 불행하게 됐죠. 동요에도 그렇게 없는 사람, 억울한 사람 이런 걸 다루곤 했죠."
함께 활동하던 분들을 떠올리는 윤석중 님.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헤치던 선후배 동료들은 교과서에서 익숙하게 듣던 이름들이다. 방정환, 최남선, 윤극영, 박목월, 어효선, 마해송, 나운규, 이광수, 심훈..... 어린이운동과 큰 관련이 없을 거라고 여기던 분들도 일제 치하의 어린이를 염려하는 마음은 같았다.
윤석중 님도 동요만 지은 것이 아니라 영화 주제가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나운규의 영화 <풍운아>가 그것.
"나운규 그 분이 동대문 밖에 살았어요. 한번 찾아갔는데, 웬 삐쩍 마른 학생 녀석이 오니까 심부름 온 아인줄 알구 어디서 왔니 그래요. 난 노래 짓는 사람인데 이번에 내는 <풍운아> 노래를 하나 지어드리려구 그런다니까 그러래요. 지어드리니 맘에 들어하세요. 나중에 단성사에서 <풍운아>를 상영하길래 갔더니 자막으로 주제가 윤석중, 하고 내 이름이 나오잖아요? "
▶ 밝음 속의 슬픔, 슬픔 속의 희망
윤석중 님이 청년이었을 때는 나라를 잃어 앞날을 알 수 없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보다 동요가 더 활발하게 쏟아지던 때였다.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 희망도 미래도 없이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쓴 해맑은 동심의 동요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노랫말만 보고서야 암울했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
"동요들이 슬프고 어렵고 그랬어요. '낮에 나온 반달'도 어려운 노래고 '새 나라의 어린이'도 어려운 거예요. '엄마 앞에서 짝짜꿍'이 좀 쉽죠. 그것도 아주 음울한 노랜데, 엄마아빠가 얼굴에 주름살 투성이고 한숨만 쉬고 그러니까 애들이 부모를 위로하려고 부르는 노래예요. 그런 노래가 그렇게 많았죠. "
그러다 맞은 해방. 해방되자마자 지은 노래가 '새 나라의 어린이'다. '새 나라의 어린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는 물론 유치원에 들어가자마자 배우는 노래니까.
'어린이날 노래', '졸업식날 노래' 등도 해방 이후 이 즈음에 나왔다. 중요한 기념식 때 부르는 노래가 모두 일본말이었으니 얼른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다급하게 찾아와 빨리 해달라는 무리한 요구에 급히 만들었지만 윤석중 이름 석자에 어울리게 좋은 노래였다. 초중고 졸업식 치고 '졸업식날 노래' 듣지 않고 진행되는 졸업식이 어디 있겠나.
▶ 동요가 갈 길은 아직도 먼 데
그렇게 애써 일궈온 동요가 풍요로운 21세기에 와서 오히려 한쪽으로 밀려난 처지가 됐다. 동요보다 대중가요를 더 빨리 접하고 즐겨 부르는 아이들. 윤석중 님은 이런 상황을 개탄하신다.
"요새 아이들이 동요를 모르고 싫어하는 세상이 됐어요. 학교에서 입학 준비만 하지 말구 애들 노래 살리는 것도 해야 되는데. 애들이 동요를 안 부르는 건 그 맛을 몰라요, 처음 먹어보는 거니까. 애들이 재미 붙일 수 있도록 자꾸 불러주고 길을 만들어 줘야죠."
요즘에 나온 동요가 옛날에 나온 것들보다 더 어렵고 따라 부르기도 힘들다는 얘기에, 윤석중 님도 고개를 끄덕이신다. 동요가 애들 거라고 쉽게 보지만 막상 하려면 어렵다는 것. 어려운 데다가 동요 만드는 것만으로는 수입이 없으니 동요를 쓰겠다는 사람도 점점 더 줄어든다. 그러니 좋은 노래가 나오기도 힘들고, 좋은 동요가 적으니 동요가 아이들과 멀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 윤석중 님 자신도 발표한 천여 편의 동요로 인해 큰 부자가 된 건 아니었다. 소년잡지와 신문사 생활도 처음엔 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됐다.
"방정환 선생이 돌아가시곤 잡지 <어린이>를 제가 일년 정도 맡아봤죠. 그때 월급이 35원인데, 첫달밖에 못 받았지. 허허허... "
예전엔 방송국 어린이 시간이 있어서 동요 사용료가 있었다. 지금은 그나마도 거의 사라지고, 노래방에서 쓰는 사용료가 고작. 많을 땐 한달에 3백만원까지도 사용료를 받아봤다고 하지만 널리 알려진 천 여 편의 동요를 지으신 것에 비하면 턱없는 액수다. 하물며 덜 알려진 몇 편 안되는 동요의 작곡가와 작사가야. 우리나라 동요의 역사는 현대에 와서도 수난이 그침없다.
▶ 고마운 아내 자랑스러운 아이들
윤석중 님의 다섯 자녀들은 모두 미국에 있다. 우리말을 잘 살린 동요로 한평생 공로를 인정받은 분의 손자들이 미국에서 자라 우리말도 잘 모른다고 하면 아이러니칼한 일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부모를 두고 미국에서 사는 것도 모르는 이들은 흉잡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편하게 여기고 받아들이신다. 당신의 체면보다 자식들의 뜻을 더 존중하신 것.
"큰 아이가 미국 가서 공부하고 아우들을 데려갔죠. 그래서 5남매가 모두 시카고, 엘에이에 살구요. 손자가 다섯, 손녀가 넷인데 미국서 나고 자라서 우리말은 잘 못해요. 그래도 내가 지은 동요들은 곧잘 부르죠. 일년에 한번씩은 걔들이 오기도 하고 우리가 가기도 하는데 요샌 그렇게 못하죠. 내가 힘들어서."
멀리 떨어져있는 자식과 말도 잘 안 통하는 손자들. 그래도 자식 얘기하실 때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으로 가득 차 계시다. 서운함 같은 그늘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65년을 함께 해온 부인 박용실 (87세) 여사가 계신 것도 얼마나 큰 힘인가. 아흔 나이에도 건강하신 비결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 창작은 계속된다
윤석중님은 새벽 5시에 일어나고 매일 대우재단 에서 내준 새싹회 사무실에 출근하여 작품을 돌보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해오셨다. 일과에 변화가 생긴 건 최근. 대우그룹에 문제가 생기면서 27년동안 정든 새싹회 사무실을 내줘야 했다. 다행히 후배 작가인 황 베드로 수녀의 주선으로 부평의 자애병원에 새 보금자릴 틀게 됐다. 새봄이 오면 그쪽으로 나가게 된다.
윤석중 님은 지금도 날마다 창작에 몰두하신다. 최근작은 김동진 선생과 함께 '나라 사랑 노래'를 만들고 계시다.
"애국가는 애들이 부르는 국가냐 하는 우스개소리도 있었죠. 지금의 애국가는 어렵고 요즘 현실이랑 맞지도 않아요.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했는데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 남산에 철갑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니까 여러 개 있어도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지금 만들고 있지요."
노랫말은 나왔는데 곡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좋은 곡조만 나오면 널리 퍼질 거라고 자신하신다.
어린 나이에 걸핏하면 은퇴와 컴백을 반복하는 경솔한 젊은 대중문화인들에게 윤석중 님의 왕성한 창작활동은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진정한' 예술인, '진짜' 문인에게 은퇴란 말은 영영 없다. 늘 기꺼운 마음으로 창작을 하는 장인에겐 나이가 따로 없고 때가 달리 없다. 나이가 많아서 일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윤석중 님에겐 없다. 그의 몸은 아흔이지만 마음은 열 살 소년이니까.
글: 김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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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적(0202)
▶국내 최초의 교동초등학교
교동초등학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초등학교이다. 1894년 9월 18일 설립되어 우리나라 초등학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개교 당시의 명칭은 황실학교이었으며 그후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 1947년 10월의 교동국민학교 등을 거쳐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주요 졸업생으로는 윤보선대통령(2회), 윤치영 초대 내무부장관(3회), 소설가 심훈(5회), 동요작곡가 윤극영(7회), 아동문학가 윤석중(17회), 연극인 이해랑(19회), 김상협국무총리(23회), 아동문학가 어효선(28회), 연예인 구봉서(28회) 등이 있다.
최근 교내에는 <교동의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이 노래비에는 심훈의 <그날이 오면>,윤극영의 <반달>, 윤석중의 <새나라의 어린이>, 어효선의 <파란마음 하얀마음>이 새겨져 있다.
교동초등학교 근처 종로구 경운동 18번지는, 유학자 정암 조광조의 집이 있던 자리이다.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 ~ 1519)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기성세력인 훈구파의 저항으로 실패에 그쳤으나 후일 그의 사상은 율곡 이이 등에게 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위치: 인사동 수운회관 맞은편 덕성여대 옆
以上은 (인물-문학-함동진의 문학수첩에서)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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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의 삶과 문학
9일 별세한 아동문학가 석동(石童) 윤석중(尹石重·92) 선생은 평생을 아동문학 발전을 위해 몸 바친 한국 아동문학의 큰별이었다.
선생은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아름다운 우리말에 담은 동시로 한국 아동문학에 초석을 놓았다. 특히 동심(童心)을 바탕으로 한 그의 작품 세계는 일제시대 민족의 수난기나 격동의 근대기에 어둠과 절망 대신 밝고 건강한 희망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열세 살 때 글 친구들과 ‘꽃밭사’라는 모임을 조직해 이듬해 작품 ‘봄’을 ‘소년지’에 처음 발표한 선생은 1926년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전국적으로 모집한 조선물산장려가에서 1등으로 뽑힌 뒤 본격적으로 동요를 짓기 시작했다. 1933년 우리나라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출간한 선생은 소파 방정환(方定煥) 선생의 뒤를 이어 잡지 ‘어린이’를 주관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마을 아저씨 댁에’(‘집 보는 아이’)나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퐁당퐁당’) 등 선생의 작품은 생활 주변의 친숙한 대상을 소재로 가족이나 친구, 자연에 대한 사랑을 리듬과 운율을 살린 시어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아동문학가 유경환씨는 “윤석중 동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아기’와 ‘어머니’”라며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선생은 포근하고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통해 고향의 정(情)과 나라 잃고 징집을 피해 다니던 젊은 시절의 설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는 언니께…’로 시작되는 ‘졸업식 노래’는 해방 직후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오는데 우리말로 된 졸업식 노래가 없어 하루 만에 노랫말을 지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등에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윤석중 시어는 전통 시조의 3·4조와 민요의 7·5조 율격을 바탕으로 그 전통적인 생동감을 뽑아냈다. 여기에 ‘조심조심’ ‘아장아장’ ‘송이송이’ ‘파릇파릇’ ‘깡충깡충’ ‘퐁당퐁당’ ‘자장자장’ 등 생생한 의성어와 의태어를 적절히 사용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재철 한국아동문학학회장(단국대 교수)는 “윤석중 선생의 동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에 이르는 3대(代)에 걸쳐 암송할 정도로 소파 선생을 뒤를 이은 한국 아동문학의 대부(代父)”라며, “그의 생애는 빼거나 보탤 것 없이 그대로 우리나라 동요 80년사”라고 말했다.
윤석중 선생은 1936년 당시 조선일보 출판부장이었던 노산 이은상 선생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수습 2기로 입사해 경제부장 및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7년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신문 ‘소년조선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며, 1939년에는 당시 조선일보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 사장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도쿄 상지(上智)대학에서 3년 동안 신문학(新聞學)을 공부했다. 1955년에는 조선일보에 재입사해 15년 동안 편집 고문으로 ‘소년조선일보’ 제작에 도움을 주었다.
선생은 1956년 아동문화운동단체인 ‘새싹회’를 창립해 평생 동안 어린이를 위한 운동을 벌여왔다. 어린이를 위한 ‘소파상’을 제정하고 문학지 ‘새싹문학’지를 발행한 선생은 아흔이 넘어서까지 새싹회 사무실에 출근할 정도로 열성을 보여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1973년에는 새싹문학상을 제정, 황베드로 김구연 노원호 권오순 정원석 이동운 이해인 서정술 황영애 이석현 정두리 정채봉 등을 배출했다. 1978년에 막사이사이상(언론 문학 창작부문)을 수상해 한국 아동문학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
지난 2000년에는 애국가를 나라사랑 노래로 변형한 ‘나라사랑 노래-동해물과 백두산’이란 시를 짓는 등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유경환씨는 “윤석중 선생은 일제시대 나라 세우기에 꼭 있어야 할 정신적 영양분을 동시를 통해 공급했으며, 어려웠던 시절에는 어린이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는 빛이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3.12.10 최홍렬기자 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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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 선생이 말한 '어린이'는
-"동심은 인간의 본심이요, 양심… 어린이달 오월에 가는게 소원"
“…익지 않은 옥수수는 아무리 볏겨도 껍질뿐이요 알맹이는 나오지 아니한다. 아무리 추려도 신통치 않은 내 노래들을 덜 익은 옥수수에나 비길까….”(1939년 윤석중 동요선의 ‘추리고 나서’에 실린 대목)
“오래오래 살 수 있는 길은 나이를 많이 먹는 것이 아니고, 언제까지든지 어린 맘을 잃지 않는 것이다.”(1940년 일본에서 낸 네 번재 동요집 ‘어깨동무’의 머리글)
“ ‘해방의 기쁨을 어린이에게도!’ 이것이 해방과 함께 내건 나의 표어였다.…나는 해방 뒤의 그 혼란을 ‘3당과 3로’로 나타낸 적이 있다. ‘3당’이란 ‘정당·식당·불한당(不汗黨)’이요, ‘3로’란 ‘에로·테로·할로’였다. 느느니 ‘3당’과 ‘3로’뿐이었던 것이다.”(1988년 전집)
“아기네들이 어머니의 자장가를 잃어버렸다면 그처럼 쓸쓸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까짓 자장가쯤 없으면 어떠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머니가 있다면 이 또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두 살 적에) 외가에서 외할머니의 말라붙은 젖꼭지를 만지며 커서 그랬는지 몰라도 엄마 품에 안기거나 등에 업혀서 엄마가 불러 주는 자장가를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버리는 동네 아기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1972년)
“정말로 국경이 없는 것은 동심(童心)인 줄 압니다. 동심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심입니다. 인간의 양심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동물이나 목석하고도 자유 자재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곧 동심입니다.”(1978년, 막사이사이 상 시상식에서 답사)
“금강산에 있는 아들딸에게―. 산토끼처럼 맨발로 눈 위를 뛰어나닐 향빈아, 태원아, 정아, 그리고 원아. 너희들과 소식이 끊긴 지가 일흔다섯 날이 되었다.…사랑하는 아들딸아, 산토끼처럼 눈 위를 맨발로 뛰어다닐 향빈아, 태원아, 정아, 그리고 원아. 아빠는 양말을 껴 신었어도 발이 시리단다. 너희들은 장사로구나.”(1946년)
“처음엔 지다가 나중 판에 이기는 ‘역전승’이란 운동 경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겠으니, 일흔 살 고개를 넘어선 내가 나보다 더 오래 남을 수 있는 작품을 써 놓고 눈을 감는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삶의 끝맺음이 될 것인가.”(1983년)
“경아 어머님. 아시다시피, 오늘날 우리 나라 어린이들은, 나날이 심해 가는 시험 지옥, 교통 지옥에서 몸과 마음이 다 함께 지쳐 있습니다. 가뜩이나 들볶이는 그들을, 독이 든 물감칠을 한 과자나 장난감이, 그리고 잠 안 오게 하는 약들이 노리고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나쁜 만화가, 나쁜 영화가, 나쁜 유행가가, 나쁜 방송극이 그들 머리맡까지 먹어 들어오고 있습니다.”(1968년 동아방송에서 읽은 편지)
“어느 신문사에서 노후의 소망을 물어왔을 때, 꽃과 달과 빗자루를 벗삼을 ‘덕수궁지기’라고 대답한 일이 있지마는, ‘새싹의 집’ 한 채를 마련한 다음에는 ‘노래 나그네’가 되어 교가 없는 학교에 교가를 지어 주며 우리 나라를 한 바퀴 삥 돌아오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인력으로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내 생일이 5월 25일이니 죽은 다음 내 묘비(墓碑)에, ‘어린이의 달인 오월에 와서/ 어린이의 달인 오월에 가다.’ 이렇게 적어 넣게 되기가 소원이다.”[1967년 ‘사상계'] (출처: 조선일보 2003.12.10. 김광일기자 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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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어린이 사랑’ 전파
-별세한 ‘아동문학 거봉’ 석동 윤석중옹
아동문학가 석동(石童) 윤석중(92) 옹은 한국 아동문학의 역사에서 우뚝 솟은 거봉으로 자리잡은 인물이다.
그는 1932년 ‘윤석중 동요집’부터 87년의 ‘아기꿈’까지, 그리고 88년의 ‘윤석중 전집’에 이르기까지 1000편도 넘는 동요와 동시, 동화를 선사하여 어린이들에게 새로운 문학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1911년 서울 수표동에서 태어난 윤 옹은 일본 도쿄 조지(東京 上智)대학 신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24년 ‘새소년’에 동요 ‘봄’, 1925년 ‘어린이’에 ‘오뚜기’가 입선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이날 노래’,‘졸업식 노래’,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기찻길옆 오막살이’, ‘새나라의 어린이’ ‘고추먹고 맴맴’ 등 윤 옹의 손을 거쳐 나온 나온 작품중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동요들만도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이다.
윤 옹은 향토적이고 정서적인 우리말을 동시어로 가다듬어서 일제 말기에 우리말을 지켜왔으며, 새로운 형태의 동요·동시를 개발하여 한국 아동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특히 1953년 ‘새싹회’를 창립, 어린이를 위한 각종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여나갔으며 ‘어린이신문’ ‘새싹문학’ 등을 창간하고 ‘소파상’ ‘장한 어머니상’ ‘새싹문학상’을 제정했다. 또 어린이를 위한 창작 및 각종 활동으로 막사이사이상(78년), 대한민국문학상(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89년), 인촌상(92년) 등을 수상했다.
어린이를 위한 그의 노래는 한국어의 가장 기본적인 음악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또 자연과 사물과 사람에 대한 태도는 섬세하고 다정하면서도 감상적이거나 나약하지 않고 건강하며, 사람과 사람의 일에 대하여 도덕적이고 교훈적이기 보다는 사실적이고 너그러운 작품 세계를 보이고 있다.
윤 옹의 활동이 아동문학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는 아동을 위한 문학, 음악, 놀이 연구그룹을 조직하고 아동과 어머니의 사회적 인정을 확대시키는 상을 제정하는 등 아동들이 건강하게 자라남을 존중하는 사회풍토 조성에 적극 노력하였다.
계간 ‘한국동시문학’(발행인 박두순)이 올 봄 창간호 특집으로 다룬 ‘한국 동시문학 발전에 공헌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설문조사에서 윤 옹이 동시와 동요 분야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조사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우리 나라 첫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를 비롯, ‘윤석중 동요집’ ‘날아라 새들아’ ‘어깨동무’ ‘초승달’ ‘굴렁쇠’ ‘아침 까치’ ‘엄마손’ 등 동요집과 ‘열 손가락 이야기’ ‘멍청이 명철이’ ‘열두 대문’ 등의 동화집이 있다. 그밖에 ‘새싹의 벗 윤석중 전집’, 팔순 기념 동요집 ‘여든 살 먹은 아이’가 출간됐다.
(동요) [낮에 나온 반달] /윤석중
1.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쓰다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달랑달랑 채워 줬으면
2.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 짝 발에
딸각딸각 신겨 줬으면
3.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해님이 빗다 버린 면빗인가요
방아 찧고 아픈 팔 쉴 때 흩은 머리
곱게곱게 빗겨 줬으면
(문화일보2003/12/09 김영번기자 munhw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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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선생 영전에]유경환/맑은노래 울릴때마다 굽어보소서
이 땅의 아동문학가들이 선생님을 ‘한국 동요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데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노래에 전통적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율동감은 시조에서 3·4조, 민요에서 7·5조, 가사에서 4·4조의 율격(律格)으로 나타나는데, 선생님은 이 3가지 율격을 종합해 생동감 있는 기본리듬을 자신의 동요에 뽑아 쓰셨습니다. 그래서 곡이 붙은 동요를 부르면, 누구나 숨결에 와 닿는 기본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시조와 민요는 밝은 정서만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생동감 있는 기본 리듬을 밝은 정서에 연결시켰습니다. 어려서 살아온 나라 안의 분위기와 침울한 정서, 이를 작품으로 이기고 딛고 올라선 공로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이것이 윤석중 문학의 특징이며, 아울러 선생님에 의해 이룩된 운문의 문학사적 전환이기도 합니다.
밝은 희망, 동요 속에 들어있는 나라 사랑의 씨앗은, 1945년 광복에 즈음해 새싹으로 자라고 퍼집니다. 동요를 부르는 누구나의 가슴에 옮겨진 희망과 기대와 이상(理想)이었습니다. 만일 선생님의 동요가 아니었으면 광복 직후 그 허허로운 진공 상태에서 무엇을 가슴에 채울 수 있었겠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됩니다.
소년기에 우리 말글이 모든 매체에서 사라지는 현실을 체험하셨기에 우리 말글에 남다른 사상을 쏟아오셨으니 ‘주차’ ‘정차’라는 말 대신 ‘둠’ ‘섬’을 쓰자고 하셨고, 또 아흔 잔치(2000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선 새로 ‘나라 사랑 노래’를 짓고 있다고 밝히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1960년대 중반에 월간 사상계에 3회에 걸쳐 ‘내가 걸어온 동요의 길’을 연재해 이 글이 번역되자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타셨습니다. 선생님이 여든을 넘기고 낸 동시집 두 권 ‘그 얼마나 고마우냐’(1994)와 ‘반갑구나 반가워’(1995)는 자신의 문학과 인생을 스스로 정리한 것으로, 동요짓기만으로 한평생을 보낸 생애를 대견하고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따뜻한 인본주의 사상이 입력된 정형률의 완성. 선생님은 정형률의 보석을 만인의 가슴에 걸어주고 가셨습니다. 맑고 고운 노래가 울릴 때마다 굽어보소서.
(2003/12/10 유경환 시인·한국아동문학교육원 원장)
첫댓글 아동문학의 선구자이신 윤석중 선생님께 머리숙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승에서 아이들과 함께 했으니 분명 천국가서 환한 미소로 이 땅의 아이들을 지켜 주시겠죠^^ 편안히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