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먀오족[苗族, Miao, 묘족] 마을
중국 먀오족[苗族, Miao, 묘족]은 중국·베트남·라오스·타이의 산간지방에 사는 종족입니다. 중국의 먀오족은 자신들을 몽·뭉(Hmung) 혹은 무(Hmu)라고 부른다. 먀오족은 구이저우[貴州]·후난[湖南]·쓰촨[四川]·윈난[雲南] 등 중국 남부의 여러 성(省)과 광시좡족 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언어, 의복, 기타 풍습의 차이로 구별되는 70~80개가량의 각기 다른 집단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말에 중국 정부는 먀오족이 39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했다. 먀오족은 야오족[瑤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도차이나의 먀오족 역시 자신들을 메오 혹은 몽이라 부르며 베트남과 라오스의 북부지방에 모여 살고 있다. 베트남의 먀오족은 여자들의 의복색깔로 구별 짓는 여러 집단으로 나뉜다(예를 들면 백먀오, 청먀오, 흑먀오, 적먀오, 화[花]먀오). 1980년대 초에 이들의 수는 대략 38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타이의 먀오족은 주로 타이 북부지역에 살고 있으며, 자신들을 뭉(H'moong)이라 부른다. 이들 역시 의복 색깔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구별되며, 대다수가 청먀오나 백먀오이다.
대부분의 먀오족은 땅 위에 직접 지은 단층집에서 산다. 농업이 모든 먀오족 집단의 주요 생활수단이며, 옥수수와 벼를 구릉지대 위의 화전(火田)에서 재배한다. 중요한 환금작물인 아편을 재배하여 저지대의 시장에 내다 판다. 자치마을 수준 이상의 행정단위는 거의 없다. 최고의 지위는 마을 추장의 지위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지방관청의 지배를 받고 있다. 먀오족이 비교적 밀집해 살고 있는 라오스와 베트남 북부에서는 때로는 자치마을 수준 이상의 정치적 지위를 얻기도 한다. 대부분의 먀오족은 정령·귀신·조상신 등을 숭배한다. 먀오족에게는 악령을 쫓아내는 무당들이 있으며, 제례를 집전하는 성직자들도 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널리 행해진다.
중국에 사는 많은 먀오족은 중국의 중매결혼 풍습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들의 배우자를 직접 고를 수도 있고 성적(性的)인 면에서 많이 개방되어 있다. 구애(求愛)의 제도화된 형태로는 다른 마을의 남녀로 구성된 여러 집단들 사이에 서로 응답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앞뒤로 공을 던지는 놀이가 있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나 사실상 부유층에 국한되어 있다. 가족은 결혼한 아들들과 그 가족들을 포함하여 여러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부모가 죽으면 그 가족은 소단위로 분가한다.
묘족은 인구가 약 894만으로서 주요하게 귀주(貴州), 운남(雲南), 사천(四川), 광서, 호남(湖南), 호북(湖北), 광동(廣東) 등 곳에 집거하고 있다. 묘족은 묘족어를 사용한다. 이는 한장어계에 속한다. 지난날 묘족은 통일된 문자가 없었다. 1956년, 묘족은 4가지 방언의 라틴병음문자를 창제하거나 개혁하여 통일된 묘족문자를 형성했다.
묘족은 중국에서 역사가 오랜 민족의 하나이며 4천여 년 전의 역사서적에 벌써 기재가 있다. 옛 역사서적에 전한데 의하면 황제, 염제와 합하거나 싸운 치우가 바로 묘족사람들이 신봉하는 선조이다. 전쟁과 기근, 질병 그리고 인구의 번성, 농경지의 황폐화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묘족은 부단히 이주하였다. 이로 인하여 묘족은 분포가 광범하고 방언, 옷장식, 머리장식, 습관에서 아주 큰 차이를 이루었다. 각 지방에 분포된 묘족은 많은 자칭 이름이 있는데 일례로 옷장식에서 긴 치마, 짧은 치마, 장각묘(長角苗), 홍묘(紅苗), 흑묘(黑苗) 등 이름이 서로 다르다. 묘족은 거의 모두 만물이 영험하다고 하는 원시종교를 믿는다. 묘족은 벼와 옥수수 재배를 위주로 하며 겸하여 기름오동, 유채 등 경제작물과 삼칠, 천마 등 귀중한 약재를 재배한다.
중국의 묘족은 고대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중국의 묘족은 고대 고구려의 유민이라고? 처음 교수님의 마씀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극단적인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지식을 잘 받고 있는 현대인이라서, 만약에 그 책의 내용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면,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내가 교수님의 추천 때문에 그 책을 읽어보고 약간 실망스럽다. 저자는 책에서 열아홉 중의 증거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증거들을 다 반박하는 필요가 없고 그 중의 몇 가지에 대해 질문을 하겠다.
중국 남방에서 마주친 북방민족의 바지
저자는 먀오족 마을을 방문했다 남성들이 고구려의 궁고(말을 타기 편하도록 엉덩이 부분이 튀어나온 바지)와 비슷한 ‘쪼우’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다. 말을 타지도 않는 중국 남방의 소수민족이 고구려인의 궁고를 입고 있었던 것. 일반사람들이 묘족사람들이 말을 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묘족사람들이 설날 때 여러 가지 퐁속습관 중의 하나는 경마다. 말을 항상 타지 않는 묘족은 고구려 조상에게 이 풍습과 비슷한 바지를 계승할까? 답이 모른다. 나는 인터넷에서 고구려의 궁고와 묘족의 ‘쪼우’의 이미지를 검색해보고 아주 독특한 스타일이 없다. 모든 말을 타는 민족의 바지가 비슷하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묘족의 조상이 말을 탄 민족이지만 그 민족이 고구려인지 아닌지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먀오족의 역사와 고구려의 역사
한 바지는 묘족이 고구려의 후손인 것을 사실로 증명할 수 없어서 저자는 다른 증거를 제시하였다. 알다시피 고구려의 역사는 기원전 37년 시작한 것이다. 부여왕자 주몽이 지금 조선반도의 북방에서 건국하였다.
하지만 묘족의 역사는 고구려의 역사보다 활씬 더 오래다. [山海经·大荒南经] 载:“东南海之外,甘水之间,有羲和之国。[山海经·海内经]载:“南方……有人曰苗民……名为延维。” 산해경에 의하여 묘족이나 묘민이란 말이 중국의 문헌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묘족의 전설과 한문문헌에 의하여 묘족선민들은 중국신화 중의 蚩尤(치우)와九黎(구려)랑 연관성이 있다. [苗经(묘경)]과 [姓氏歌(성시가)]에서 치우는 자기민족의 수령이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묘족은 치우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기며, 단풍나무 숭배 등 치우와 관련된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
한 4000년 역사를 가자고 있는 묘족이 2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논리에 맞지 않는 것 같아.
황하와 창강을 건너다
‘668년 9월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 보장왕 등 20만 명을 끌고 갔다. 이후 유민들은 영주(현 라오닝 성 차오양 시)와 내주(산둥 성 옌타이 시 라이저우) 등에 머물게 했다가 중국 각지로 보내졌다.’ 저자가 그렇게 주장하였다. 나는 자료를 찾아보고 그런 기록이 있지만 도대체 고구려의 유민이 얼마 있는지 확실한 기록을 못 찾았다. 나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산동반도에 들어간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황하와 창강을 건너고 중국의 서남지방에 옮겨 가는 것을 인정을 못한다.
내가 인정을 못 하는 이유는 바로 고구려유민들이 그쪽에 옮겨 가는 동기다. 다른 말로 하면 고구려유민들이 왜 그쪽에 가냐고. 저자는 당나라가 20만 명을 고구려유민들을 끌고 갔다고 주장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유민들을 중국에 서남지방에 보냈다고? 내가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고대사회중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력이다. 20만이 얼마 큰 숫자인데 당나라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려운 지방에 보내는 이유가 없다.
그러면 고구려유민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황하와 창강을 건너고 그쪽에 가는 것 인가? 나는 그런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나라의 국경 내 그시기에 전쟁이 없다. 그래서 고구려유민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그쪽에 가는 것은 증거가 없다.
설마 고구려 유민들이 다시 고구려가 재건하기위하여 ‘와신상담’ 그 어려운 지방에 가는 것인가? 고구려유민들이 고구려가 재건하려고 하기 때문에 대조영이 발해국을 세웠다. 유민들이 옛날국가의 땅위에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게 말이 되지만 4000km를 가다가 황하와 창강을 건너고 나라를 세우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묘족의 선조들이 ‘清水’와‘浊水’를 건너는 것이 고구려유민이랑 연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유민들이 황하와 창강을 건너는 증거가 없다.
“中 남부 먀오족은 고구려 후예다”
김인희 전북대 연구원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출간
중국이 동이족 수장으로 꼽히는 치우(蚩尤)를 중화 3대 시조로 모시는 것은 만주 등 동북지방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여기에는 남부 산악지역에 살고 있는 먀오(苗)족 문제도 있다. 인구가 1000만명에 이르러 중국 56개 소수민족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크다는 먀오족은 자신들의 조상으로 치우를 내세운다. 그런데 먀오족이 치우의 후손이 아니라 패망한 고구려 유민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김인희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전임연구원이 지난 10여년간 중국 남부지역을 현지답사한 결과를 총정리한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푸른역사 펴냄)에 담긴 주장이다.
▲ 중국 윈난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서부 먀오족. 옷 뒤에 붙이고 다니는 도성 문양은 량차오,
다이가러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어떤 단어든 ‘오래된 옛 성’을 뜻한다. 네모 형태의 고구려 옛 성을 본뜬 문양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김 연구원은 “역사상 최초의 ‘코리안 디아스포라(Diaspora)가 먀오족”이라고 주장한다.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 흔히 국가 소멸 뒤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을 뜻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재일교포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카레이스키 등을 지칭한다.김 연구원의 주장은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중국 측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당나라 장수 이적은 평양성을 함락한 뒤 668년 보장왕과 함께 20만명의 유민들을 끌고 귀국했고, 이듬해인 669년 이들을 남쪽 공한지(空閑地)에 배치했다. 고구려 핵심 지배층을 고구려 본토와 머나먼 곳에 살게 해서 재기 의욕을 끊고, 포로들을 투입해 변경지역을 개발하려는 의도였다. 중국 문헌에 먀오족에 대한 기록이 일절 없다가 10세기 이후 송나라 시대 때부터 갑자기 “고구려와 풍속이 닮았다.”면서 언급되는 까닭은 이때서야 중국 남부에 자리잡은 먀오족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먀오족이 고구려 유민이라는 증거로 우선 전통 바지 ‘궁고’를 든다. 고대 복식을 보면 중국 남방지역은 무덥고 습하기 때문에 대개 엉덩이와 허벅다리 뒤쪽을 그대로 노출하는 개방형 바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먀오족만 유일하게 바지 위에다 또 한번 큰 천을 덧대는 방식의 바지, 궁고를 입고 있다. 이는 고대 흉노족 복식이나 고구려 벽화에서 발견되는 복식과 비슷하다. 종아리 부근은 바짝 조이고,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은 통을 크게 넓힌 뒤 그 위에다 바지 천 하나를 덧씌워 두르다 보니 엉덩이 부분은 뾰족하게 솟아나도록 한 모양새다. 이는 추운 곳에서 말을 타야 하는 북방 유목민의 전형적인 복장이라는 것이다.이외에도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형사취수(兄死娶嫂) 문화, 장례 전에 집안에 시신을 모셔 두는 풍습, 동명왕 신화처럼 아시아 동북부의 대표적 설화인 난생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 다양한 근거를 든다.
결정적으로 먀오족은 옷에다 조상에 대한 옛 기억을 그려 뒀다. 이는 인디언 이러쿼이족 출신 미국 학자 폴라 언더우드(1932~2000)가 ‘몽골리안 일만년의 역사’라는 책을 남긴 것과 비슷하다. 문자가 없던 인디언들은 옛 조상들의 대이주 행렬을 장대한 구전 서사시로 남겨 뒀고, 언더우드는 집안 어른들로부터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적 얘기’라고 들어왔던 이 서사시를 기록으로 남겼다. 먀오족 옷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여자들의 주름치마에 두 개의 강을, 웃옷 뒤편에는 큰 성을 그려 뒀다. 구전설화에 따르면 이들은 추운 곳에서 적에게 패배해 노란 물과 맑은 물을 건너 남쪽으로 왔다. 이게 바로 황하와 장강을 뜻한다는 것이다. 또 조상들이 머물렀던 곳을 잊지 않기 위해 고향에 두고 온 옛 성을 그려뒀다. 이 성의 문양은 장방형인데, 고대 성곽에서 장방형으로 지었던 성은 고구려 성이 가장 대표적이다.재미있는 점은 서부 먀오족과 달리 동부 먀오족에게서는 ‘큰 강’에 대한 얘기 대신 ‘동쪽의 해 뜨는 바닷가’ 얘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를 고구려 패망 뒤 만주 일대에서 남쪽으로 끌려온 이들은 서부 먀오족, 고구려 평양성에서 바다 건너 끌려왔던 이들은 동부 먀오족이라고 해석한다. 동부 먀오족이 서부 먀오족보다 더 반항적이고 남방문화와 비교적 덜 섞여 든 이유와도 연결된다. 한마디로 평양성에 거주했던 고구려의 핵심 지배층이었던 까닭에 서부 먀오족에 비해 문화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고구려가 아니라 치우를 조상으로 내세웠을까. 이는 만주족 청나라를 붕괴시키고 한족 중심의 근대국가를 성립시키려 했던 반청 운동가들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먀오족을 이민족으로 정벌했던 고구려로 보기보다, 한때 다투었던 형제인 치우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 편했다는 것이다.문자가 없어 옛 조상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갖고 있는 먀오족 역시 중국과는 조상이 다르다는 민족 자주성 차원에서 이를 받아들였다는 해석이다. 실제 저자는 먀오족의 조상이 치우라는 주장을 주로 한족 학자들이 내놓는 반면, 먀오족 스스로는 치우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이는 동북공정이 최근 들어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1950년대부터 이미 시작됐다는 학계 일부 주장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마오쩌둥이 꿈꾼 것은 공산주의 정권이 아니라 한족 패권 정부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