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말씀 묵상> (새번역)
마태복음서 5장 3-10절. [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 * *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하게 행동하는 사람’ 을 말한다는 해석이고, 또 하나는 ‘영적 교만심, 즉 율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자신하지 않는 사람’ 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평행복음인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마음이’ 라는 구절이 빠지고, 경제적 가난을 명시하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고 말하고 있어서, 제3의 견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라는 메시지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라는 메시지가 동시에 성립하는 메시지를 설교자가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이 두 가지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경험을 했다면, 얼마든지 이 두 가지 명제를 가지고 설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의 양식을 신뢰합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행복’ 의 통념을 송두리채 뒤집어 버리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이 경제적인 가난도 내포하는 것이라면, ‘부자가 행복할 것’ 이라는 통속적인 가치관을 일격에 분쇄해 버리셨습니다. “가난이 행복하다.” 얼마나 혁명적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가난을 행복이라 하셨습니다.
진실되게 살기 위해 가난해진 사람, 의롭게 살기 위해 가난해진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가난해진 사람, 평화를 위하여 가난해진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신 것입니다. 진정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되어야 함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맨 처음 선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가난’ 그 자체를 행복이라고 보는 철학이 있습니다. 힌두교에 그런 신앙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이 복’ 이라거나, ‘부는 저주’ 라는 그런 철학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가난의 길을 가는 사람을 복되다고 하셨으며, 하나님을 거슬러,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며 부하게 된 사람을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20절 이하를 참조)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다가 슬픔을 당하게 된 사람이 행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다가 외로워진 사람이 행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다가 박해를 받게 된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기도> 주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최우선으로 삼고, 모든 가치를 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저희의 행복이요, 이것이 저희가 전심으로 추구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