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잃은 사회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기침체가 아니다. 정치가 혼탁한 것도 아니다. 청년실업이 심각한 것도 아니다. 저출산도 문제가 아니다. 심한 빈부격차도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꿈을 잃은 것이다. 개개인이 꿈을 잃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민중들이 꿈을 잃었다. 아무리 성실히 일해도 빚이 늘어나니 어쩌란 말인가? 기껏 꿈이라고는 복권당첨의 허황된 꿈밖에 없다. 청년이 꿈을 잃었다. 게다가 나라도 꿈을 잃었다. 민주주의가 저만치 멀어졌다. 민족도 꿈을 잃었다. 통일이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리고 과거 지긋지긋했던 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가장 크고 가장 잔인한 국가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군대 마귀 보다 더 조직적이고 치밀하고 거대한 국가 마귀다.
폭력사회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는 학교폭력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의 내용은 학생들의 폭력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배경이 되는 시대에 학교폭력의 주범은 교사들이었다. 교사들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폭력에 학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다. 교사들의 폭력이 너무 커서 학생들 간의 폭력은 그냥 청소년들의 성장과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아무도 교사들의 폭력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하면 그것은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폐륜으로 여겨졌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직폭력배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마치 협객이나 되는 냥 미화되었다. 일제의 폭력이 너무 거세어서 조폭들의 주먹싸움은 오히려 낭만처럼 여겨진 것이다.
해방 후 이 땅의 최고의 폭력집단도 국가였다. 자유당 때의 국가폭력은 무차별적 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마치 사냥감 대하듯 하였다. 집단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재판도 없이 그냥 죽였다.
자유당 때의 국가폭력이 즉흥적이고 무차별적이었다면 군부독재시대의 폭력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 중앙정보부가, 군 보안사가, 경찰이 목표를 세우고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대표적인 조직폭력배 김두한, 그는 이승만의 충실한 개가 되어 닥치는 대로 물어뜯었다. 그러던 그가 군부독재시대에도 그렇게 행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폐인이 되었다. 몸은 야위고 눈빛은 흐려졌으며 말은 어눌해졌다. 군부독재의 폭력은 조직폭력배를 이용할 필요조차 없는 강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폭력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국가폭력이 사라지고 나자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던 폭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의 폭력이 사라졌다. 그리고 비로소 학생들 간의 폭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대 내에서의 의문사가 대폭 줄어든 이후에 비로소 군대 내 폭력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냥 묻혔던 폭력의 희생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에서의 조직적이고 폭압적인 폭력이 줄어들면서 비로소 가정폭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은 여자가 남편에게 맞아 죽고 얼마나 많은 어린이가 부모에게 죽임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러한 죽음들은 그냥 묻혔다. 특히 어린이들의 죽음은 거적에 말아서 산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힘 앞에서는 너무나도 나약하고 비굴한 존재가 된다. 너무 비굴해서 불쌍해 보일정도다. 처자식을 두들겨 패는 찌질한 남자들이 그러하고 조직폭력배들의 모습이 그러하며 자유당정권과 군부독재권력이 미국에 보인 태도가 바로 그러했다.
일전에 취객이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렸다면서 공권력이 너무 약하다고 한탄하는 보도를 본적이 있는데 나는 그 보도를 보면서 “아~ 우리나라가 참 좋아졌구나. 이제 취객이 파출소에서 난동을 부릴 수도 있다니...” 했다. 국민에게 군림하는 공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뒤치다꺼리 하는 공권력의 모습에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아! 그런데 그것도 잠깐 스멀스멀 국가폭력이 되살아나고 있다. 살겠다는 민중에게 폭력을, 억울해 가슴을 치는 이들에게도 폭력을, 거짓과 불의에 항거하는 이들에게도 폭력을.... 저들은 국가안보와 사회질서가 폭력으로 유지되는 줄 아는가보다. 그런데 그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라는 것조차도 실은 저들의 권력안보요 권력질서다.
목숨을 빼앗는 폭력 앞에는 인권, 노동쟁의,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은 없다. 공정한 재판도 없다. 의로운 자들의 죽음만 있을 뿐이다.
국가폭력이 되살아나면 폭력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폭력이 일상화 된 사회는 지옥이다.
함석헌은 말했다.
“씨ᄋᆞᆯ은 어느 역사에서나 참혹한 존재지만, 이 씨ᄋᆞᆯ 같은 것이 어디 또 있느냐? 이것은 먹이를 아니 주고 짜 먹는 염소다. 짜 먹다 못해 피가 나왔다. 그래도 짜먹었다. 마지막에 죽는 날 가서야 잘못인 줄 알지만 그때는 짜 먹던 놈, 저도 죽었다.”
- 김홍한목사의 <이야기 신학 154호> 2016. 4. 1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