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질
송영숙
제주도 세화우체국에서
너에게 편지를 써
사랑이라고 두 글자만 써서
발신인 주소 없이 빠른우편으로 보냈어
너는 뛸 듯이 기뻐하겠지
첫사랑이 찾아왔다며
미안하지만 나야
화풀이는 바다에게
거리마다 수국이 불두화가 지천이야
갑자기 부처님께 너의 안부를 물었지 뭐야
부처님 느닷없어 하시겠지만
화풀이는 바다에게
----송영숙 시집 {남자들이여 출산하라}(근간)
근질筋質이란 무엇인가? 근질이란 근섬유 내의 근원섬유根源纖維 사이를 메우고 있는 세포질을 말하지만, 그러나 송영숙 시인의 [근질]은 ‘근질거리다’의 동사에 가까운 명사라고 생각된다. ‘근질거리다’는 어떤 벌레에 물리거나 이물질이 닿을 때마다 ‘가렵다’는 것을 말하고, 따라서 그 불유쾌한 자극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송영숙 시인의 [근질]은 사랑이 그 주제이긴 하지만,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아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즉, ‘배반 당한 애정’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배반을 당하고, 이 ‘배반 당한 애정’은 그의 의식과 무의식을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처럼 자극한다. 가려움증은 불유쾌함이고, 불유쾌함은 반드시 그 대상을 찾아서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제주도 세화우체국에서” “사랑”이란 “두 글자만 써서” “발신인 주소도 없이 빠른우편으로”너에게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주고, “너는 뛸 듯이 기뻐하겠지/ 첫사랑이 찾아왔다며”라는 시구가 그것을 말해준다. 시적 화자에게 사랑은 가려움증이며 불유쾌함이지만, 그 대상인 너에게는 언제, 어느 때나 첫사랑이고 삶의 황홀함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인 ‘나’는 자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익명으로 가짜 연서를 쓰는 것이고, 이것이 ‘배반 당한 애정’, 즉, 무서운 복수심의 표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그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 원망을 하지 말고, 바다에게 화풀이를 하라는 것이다.
첫사랑이 아닌 선남선녀가 만나 사랑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헤어졌고, 그 상처는 남아 이처럼 [근질]이란 가짜 연서를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종의 투사投射이자 반동형성反動形成이지만,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이 더럽고 비천한 사랑으로 변모하는 것은 단 한 순간이고, 이처럼 악연으로 이어진 원인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너’에게 있다는 것이 시적 화자의 원망이기도 한 것이다. 거리마다 수국과 불두화가 지천인 것을 보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다 용서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부처가 아니니 “화풀이는 바다에게” 하라는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가려움증이고 불유쾌함이며, 일종의 투사이자 반동형성으로 무서운 복수심을 낳게 만든다. 모든 것은 ‘네 탓이고, 내 탓은 없다’는 자기 방어적인 선민의식은 [너는 나 못 잊는다], [잘 가라 치사한 새끼], [단발머리], [연락처 좀 주세요] 등을 통해서 그야말로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노골적으로 분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