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예배 찬송 가운데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라는 가사가 있어 머리가 하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위의 가사가 후렴구로 반복되어
찬송을 부르는 가운데 말씀의 일주천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서지대에 하나님의 꿈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성서지대에 나의 비전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성서지대에 예수님의 성품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성서지대에 나의 인격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성서지대에 성령의 권능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성서지대에 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있는가?
주마등처럼 뇌리성경일람표를 강타하며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라는 찬양에 대한 말씀의 복음적 성찰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서지대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영광...등의 말씀은 가득하지만
하나님의 꿈이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꿈 뿐만 아니라 나의 비전이라는 말씀도
성서저자들의 영감적 성찰의 언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이것을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는 것은 신일합일의 주술적 신앙이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교훈의 전형적인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특히 "되고"라는 말씀은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요,
되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뜻이며, 그 경륜입니다.
되게 하는 주체가 "자아"인 인본주의 신앙은
은혜를 은혜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배신이요,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라는 기도문은
신인협력의 구원관, 그 인본주의 신앙의 발로요, 신화(神化) 사상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의 이상은 신화(神化)요,
개혁주의 신앙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배도적인 도전입니다.
또한 성서지대는 예수님의 성품을 복음적 언어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나의 인격이라는 복음적 성찰의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벧후1장 4절 말씀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개역한글에 신의 성품이라고 하였지만 개역개정은 신성한 성품이라고 하였고
공동번역은 하나님의 본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에서 주 예수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또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하신 주체는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자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믿음은 주께서 되게 하신 것을 은혜의 선물로 얻는 것이요,
나의 비전, 나의 인격, 나의 능력을 주술적 인본주의 신앙으로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신념이 아니며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의 도량이 아니며
믿음의 주체는 자아가 아니라 대상이기 때문에 은혜의 방편입니다.
은혜는 무엇을 기원하고 발원하는 무속적 영성의 산물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임하는 은혜요, 그 끝없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국 교회는
바알을 여호와로 섬겼던 혼합주의를 무속적으로 인본주의 영성에 매몰되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영성으로 추구하는 주술적 무속 신앙은
오늘날 인본주의 숲을 이룬 한국 교회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가져 참여하게 된 성도가
주 안의 믿음을 버리고 여전히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인본주의 신앙의 전형입니다.
부처를 섬기듯 하나님을 향한 발원 신앙은
주 안의 믿음 이라는 은혜의 선물을 버린 전형적인 우상화요, 주술적 인본주의 무속 신앙입니다.
믿음의 구원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보장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도다는"는 호세아의 탄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 신앙의 주체는 나의 비전, 나의 인격, 나의 능력의 개발이요,
이것을 신의 힘을 빌려 기원하는 신앙은 주술적 신앙이며,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주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그러므로 예수님의 품성이 나의 인격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진 예수님에 대한 바로 그 신앙의 주체가 대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품에 대한 자기이해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움의 목적은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운 사도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였습니다.(엡4:2-3)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제자의 길이요,
예수님의 품성이 나의 인격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염원하고 발원하고 축원하는 신인합일의 신화사상입니다.
또한 성서지대에 성령의 권능이라는 말씀은 단 한번 사용되었는데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난 후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성서지대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였는데
성령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기도하는 신앙은 선지자와 사도적 신앙이 아닙니다.
시편의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요, 구원이시다는 찬양은
여호와의 능력이 나의 힘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신앙고백입니다.
기원과 발원의 주체가 자아가 될 때
믿음의 주체가 자아인 바로 그 인본주의 신앙이요, 주술적 무속신앙입니다.
말씀과 은혜와 권능은 위로부터 임하는 것이요,
기원과 발원과 축원으로 얻는 영성의 산물이 아닙니다.
성령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은
은혜대신 영성이요, 믿음대신 신념이며, 신본주의를 버린 인본주의의 선택입니다.
성서지대에 믿음으로 강조되지 않은 것이
나의 비전과 나의 인격과 나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성령의 권능과 능력에 대한 문제는
그 오해로 인해서 성령의 무속신앙, 그 올무와 함정과 덫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고라는 말씀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베드로를 농락하는 말씀이요,
또한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섬길려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과 그 무리와 같습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으로 인해서 솔로몬 행각에 모인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행3:12)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을 인해서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할 때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행14:14-15)
참으로 베드로를 비롯하여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의 권능에 대한 올바른 복음적인 이해를 하였으며
은혜의 기적으로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고라는 말씀은
돈을 드려 누구에게든지 안수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하는 것을 구하였던
마술사 시몬의 저주받을 신앙입니다.
☞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된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8:18-23)
사도 바울은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
총독으로 예수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을 보고 저주의 말씀으로 책망하였습니다.
☞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행13:9-10)
참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고린도 교회가 만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다른 교훈의 쓰나미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는 찬양에 대해서
복음적인 성찰로 잘못된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 베드로와 바울의 신앙을 따르는 것이요,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면 베드로의 저주를 받은 마술사 시몬과 바울의 저주를 받는 바예수의 후예들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따르지 않고 혼합주의를 따르는 한국 교회는
본질적으로 말씀과 성령에 대한 주술적인 신앙과 인본주의 신앙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아무런 거부반응없이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라는 찬양에 할렐루야 아멘하다가.....
마술사 시몬을 물리친 베드로를 만나고 유대인의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물리친 바울을 만나면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여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는 책망과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는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불신자를 예수 믿게 하는 것도 힘들지만 이단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더욱 힘들고
이렇게 주술적 인본주의 신앙에 빠진 것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더 더욱 힘든 일입니다.
지금 내가 앉은 자리가 사탄의 굿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죽기보다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로 깨어나고 말씀 묵상에 깨어있는 주의 백성은
종말론적인 참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찾아들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본주의 신앙과 인본주의신앙의 구별이 없고
은헤와 영성의 구별이 없는 혼합한 종교의 확증편향에 함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