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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여의치 않을때
출 5: 20-23
서론
사람들은 누구든지 인생을 살면서 자기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모든 일이 자신
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은 자기 뜻
을 이루어 준다고 하는 구슬을 사모합니다. 그 구슬의 이름은 ‘여의주(如意珠)’입니
다. 이무기가 999년의 도를 닦아도 이 여의주를 얻지 아니하면 용이 되지 않는다 하
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 몸속에 여의주가 있다고 합니
다. 그들은 여의주는 ‘단전’이라는 곳에 있는데 사람은 단전호흡을 잘 해야 여의주
가 활동을 해서 뜻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의주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
은 우주의 중심에 자기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가 다 자기의 뜻에 순종하
고 다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사상을 가리켜서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이 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만약에 다 내 뜻대로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이 세상에 모든 일은 하나
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
관자시며, 역사의 주권자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성경의 사상은 인본주의가 아니고 신본주의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여 내가 내 뜻을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렇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신본주의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합
할 때에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내 뜻과
충돌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5장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내 뜻대로 다
되지 아니하고 여의치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모세와 아론
모세와 아론은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
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모세를 만나시고 애굽에 가서 백성을 건져
내라는 분명한 사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네 번씩이나 변명
을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결국엔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면서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 주십니다. 출애굽기 3장 27절에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십니다. “너
는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그래서 아론은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맞아서 함
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모세와 아론은 먼저 이스라엘에 장로들을 모으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았습니다. 그리
고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나신 것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장
로들과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리고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하다 하
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가지 이적을 행했습니다. 지팡이를 던져서 뱀이 되게 하
고 손을 품에 넣어서 문둥병이 되었다가 치료함을 받게 하고 또 하수를 취하여 뿌릴
때에 그것이 피가 되는 그런 이적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머
리 숙여서 여호와를 경배하고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의 종으로 추앙을 했습니다. 여기
까지 모세와 아론은 얼마나 승승장구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다 모세와 아론의 뜻과
완전히 일치되었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승리감과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는
바로왕 앞에 나아갑니다. 가서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하고 가
감없이 전했습니다. 3장 18절에 하나님은 이미 모세가 바로왕 앞에 해야 될 말씀을 가
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
기를 허락하소서.” 그래서 그 말씀 그대로 출애굽기 5장 3절에 모세가 전하지 않습니
까?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
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이 명하신 그 말씀을 똑같이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모세의 목적은 단순히 3일 휴가를 얻
어서 광야에 가서 희생제사 한번 절기 드리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완전히 건져내서 출애굽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단지 3일간의 휴가를 요구했습니까? 단지 3일 휴가를 얻어서 광야에 가서 희생
을 드리겠다고 하는 요구를 했습니까? 모세의 요구가 사기성이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
다. 모세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
금 첫 번째 모세의 요구는 바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첫 번째 요구를 하게 하
신 것입니다.
당시 애굽에는 소수민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소수민족들도 각각 나름대로 종교가 있었
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바로왕이라 할지라도 소수민족이 와서 “우리가 당신을 위해
서 일을 하지만 우리도 종교가 있으니 우리에게 휴가를 주어서 우리의 종교의식을 행
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것은 소수민족
으로 마땅히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요구입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
까? 불합리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왕의 마음이 강퍅한 것을 보여주
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아 강퍅하다는 것은 합리성이 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
니다. 불합리한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도 있지만 이성
도 있습니다. 사람은 짐승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 감정 따라 움직일 수는 없는 것입니
다. 사람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판단도 하고 이성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기도 하고 이
성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수납하기도 하고 계시를 정리해서 믿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렇기 때문에 사람은 합리성을 따라야 합니다. 불합리한 것은 마음에 강퍅함을 드러냅
니다. 즉, 모세의 첫 번째 요구에 의해서 바로왕의 마음속에 있는 불합리성과 강퍅함
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결과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하게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뜻이 이루어지지 아
니하고 도리어 여의치 않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바로왕은 어
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바로왕은 모세의 말을 들었을 때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는 무슨 말을 합니까? 도전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5장 2절에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
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바로왕은 하나님을 향해서 도전적인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왕이 참 어리석은 존재다. 하나님이 계신데 그가 어찌 그런 어리석은 말
을 했을까?’ 하고 비웃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가끔은 바로처럼 말한다는 것을 기억해
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하느냐? 하나님이 누
구관대 내가 주일이 되면 나들이 갈 수 없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느
냐?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하나님께 그 아까운 물질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 하
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하나님께 내 죄를 회개하고 죄를 토해놔야 되겠느냐?” 여러분
이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님이 누구관대 내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는 말은
‘바로형 언어’인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형 언어를 사용하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바로의 말은 어리석습니다. 바로는 지금 모세가 합리적인 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합리한 분노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큰 고통
을 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비돔과 라암셋이라고 하는 두 국고성을 짓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로 삼아서 벽돌 만드는 일을 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데 바로왕은 모세의 요구를 듣고 이 백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나가서 종교행사를 하겠
다고 하는 것이라고 하며 간역자들과 패장들을 시켜서 더 큰 어려운 사명을 내립니
다. 간역자는 누구입니까? 그들은 애굽족속으로서 공사감독입니다. 패장은 이스라엘
족속으로 인부의 두목입니다. 간역자들은 패장을 치고 때리고, 패장이 가서 자기 동족
들을 시켜서 벽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지금까지는 벽돌을 만들
때 원료가 되는 짚을 주었지만 그것도 주지 않으면서 이전과 같은 양을 만들라고 명령
합니다.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말씀을 증
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감소되기는커녕 크게 증가되는
어려운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패장들은 왕에게 가서 “전에는 짚이라도 주더니 원료도 주지 않고
만들어 놓으라고 하니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요구를 하십니까?”라고 호소합
니다. 그런데 바로왕은 호소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더욱더 괴롭힙니다. 벽돌 생산량
을 조금도 줄여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패장들은 ‘화가 내 몸에 미쳤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왕을 떠나 나오면서 모세와 아론을 만나게 되자 불평
을 늘어놓습니다. 바로 얼마 전 까지 머리 숙여 경배하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높이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을 합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팔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구나 여호와는 너희
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와 아론이 상황을 보니 바로왕은 더 성질을 내고, 또 이스라엘 백성은 더 괴롭힘
을 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는 자기들을 향해서 원망을 합니다. 결국 모세는
혼란에 빠집니다. 22절 23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받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
치 아니하시나이다.”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혼란과 좌절에 빠진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
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고통과 좌절을 주셔야만 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런 고통이 없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대한 정을 끊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도 이들은 광야에 가서 조금만 배고프면 불
평합니다. 애굽에서는 고기도 먹고 마늘도 먹고 부추도 먹고 힘도 좋았는데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만약에 큰 고통
을 통해서 애굽에 대한 정을 떼지 않았더라면 출애굽 후에 조금만 원망스러운 상황이
닥치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다수결로 결의했을 것입니다. 고통을 당해야 애굽
과 정을 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죄를 짓고 있으면 고통으로 말미암아 정을 뗄 수 있습니다. 죄는 고통
을 받아야 끊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만약에 이런 좌절이 없었다고 한다면 모세
와 아론은 지금 교만심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
나님께 쓰임 받게 되면 인간은 쉽사리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하
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게 되면 겸손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모세와 아
론에게 이런 좌절감이 없었다면 하나님께 기도할 리가 없습니다. 고통으로 인해 “하
나님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하나님 내가 내 지팡이 하나만 가지면 다
역사가 일어날 줄 알았더니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십시오.”하
고 하나님을 절대 의지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런 고통과 좌절은 이스라엘 백성으
로 하여금 애굽에 대한 정을 끊게 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뜻대로 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지금 인생
이 뜻대로 다 되십니까? 여러분의 뜻대로 다 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것
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뜻대로 다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뜻대로 되어
야 이 세상이 바르게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
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대처방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3. 여의치 않은 상황을 대처하는 세 방편
첫째로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여의치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려고 합니다. 교회
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를 중지해 버리려고 합니다. 하나
님 믿어도 아무 소용없고, 말씀 읽어도 아무 소용없고, 예배 드려도 아무 소용없고,
십일조를 드려도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교회를 떠납니다. 그러나 이
런 반응은 방향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성숙치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반
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들을 보세요. “아빠 이거 해주세요 저
거 해주세요.” 하다가 안 해준다고 하면 집을 나갑니다. 그러니까 집 나갈까봐 할
수 없이 조금씩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집을 나간다고 하는 것은 애들이 자기 뜻이
안 이루어질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좌절이 되고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 모세처
럼 하나님께 더 나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워져서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자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
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람은 밖에 나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십시오. 그것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것을 과학자가 만들었습니까? 정치가가 만들었습니까? 그것을
석가모니나 공자가 만들었습니까? 석가모니도 그 땅에 태어났고 그 하늘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산과 나무, 바다와 물고기를 보십시오. 누가 그것을
만들었습니까? 이 천지가 한 치도 빈틈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신이 안 계시
다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못 만나서 모르는 것이지 만나면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
면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리라” 하는 말씀대로 여러분의 삶이 어려워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두 번째로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아니할 때에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
다. 내 뜻대로 안 될 때에는 잠깐 기다려야 합니다. 성급한 결론은 금물입니다. 내 뜻
대로는 안 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너무 성급한 결
론을 내리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지금 실패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주권자시
요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바로왕의 강퍅함이 먼저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좀더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
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모세가 제 뜻대로 안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
다.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요, 이 세상이 내 뜻대로 안되더라도 하나님께
서 지금 그 뜻을 행하고 계시다 하는 믿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역사는 도도한 물
결 같아서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내 뜻이 안 되고, 내
가 어렵고 고통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믿음을 가
지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래도 옳은 편에 서야
합니다. 정의 편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왕은 사단의 상징, 마귀의 상징입니다.
압제의 상징이요, 포악의 상징이요, 불신의 상징이요, 탐욕의 상징입니다. 그는 비돔
과 라암셋에 국고성을 짓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악을 행합니다. 바로왕은 하나
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왕 쪽에 서는 것은 죄의 편에 서는 것이
요 마귀 편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어려워도 언제든지 옳은 편, 정의 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한민국은 소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예수 믿는 성도가 천만을 헤아리는
나라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은 불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정의 편
에 서야 합니다. 사람들은 좌로도 아니고 우로도 아니고 중용지도가 좋다고 합니다.
중용지도가 좋다고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지 정의 편에 서지 말라는 것
이 아닙니다. 정의냐 불의냐의 문제가 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단연코 정의의 편
에 서야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고 어렵다고 해도
불의를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의를 따라야 합니다. 바로왕을 따를 수는 없는 것
입니다.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옳은 편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그렇기 때
문에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어도 판단력을 바르게 행사하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곳에 참 자유가 있고 구원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정의의 편에 서
서 모세는 계속해서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인생이 내 뜻대로 안 되어도 성도 여러분들
은 정의의 편에 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인생이 안 되고 내가 망해도 정의! 내가 망해도 믿음 편에! 내가 어려워도 믿음 편
에! 내가 어려워도 하나님 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것이 바로 인생의 정도를 가
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왜 어려운지 그 이유를 다 일일이 설명하지
는 않으십니다. 이유는 모를지라도 우리가 정의 편에, 하나님 편에, 믿음 편에 서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사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40절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믿음의 삶, 정의로운
삶, 하나님 편에서 사는 삶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출 5: 22-23
마침내 모세는 애굽 땅에 당도합니다. 모세는 먼저 아론과 만나 기쁨이 재회를 나눕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을 만나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말씀들을 전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당하는 바 모든 고난을 돌아 보셨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머리 숙여 하나님 앞에 경배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제 백성들의 신뢰 속에 바로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바로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지니고 있었던 모세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는 담대히 바로 앞에 나갔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킬 수 있도록 내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읍니다".
바로는 일언지하에 이런 모세와 아론의 말을 거절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모세와 아론의 재차 간청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바로 앞에서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혹자들은 바로가 이들을 죽이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바로의 또 다른 계산이 있었습니다. 바로의 입장에서는 당장이라도 모세와 아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자기 궁에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만일 모세와 아론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반발을 사게 될 것임이 너무나도 자명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바로는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도록 만들게 되면 자기는 힘들이지 않고 적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바로는 즉시로 애굽 공사감독자들을 불러서 새로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공사현장 상황을 더욱 더 열악하고 힘들게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벽돌을 만들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지던 짚들을 더 이상 공급하여 주지 말고 자신들이 그것을 직접 주워 벽돌을 굽게 하되 이전과 동일한 양을 생산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탁월한 정치수완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의 예상대로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에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큰 기대를 가지고 이 땅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으로 인하여 백성의 고역은 더욱 심해 졌고, 더 이상 백성들은 자기들을 신뢰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으니 그 심령의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안타까운 상황에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왜 상황은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일까요?주님이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는 해결될 조짐은 없고 더욱 더 꼬이기만 하는 것입니까?
왜 상황이 꼬여만 갔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신 특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은 불신의 세계 속에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상황을 더욱 더 절망적으로 만드셨습니다.
출3:19"내가 아노니 강한 손으로 치기 전에는 애굽왕이 너희의 가기를 허락지 아니하다가"
출6:1"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의 강한 손을 바로와 온 애굽에 나타내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상황을 더욱 더 악화되도록 섭리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하나님은 더욱 더 큰 일을 하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역경은 도리어 하나님의 기회가 될 뿐인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함에도 어찌하여 이 역경이, 이 아품이 계속되느냐?"는 안타까움이 있으십니까? 이 때 모세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불신이 세계 속에 자신의 능력을 크게 나타내시기 위한 기회라는 것을......
2.인간의 연약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태는 도무지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와 긍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자신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자들만이 진정한 감사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6장 말씀에서 우리는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을 반복해서 듣게 됩니다. 즉 이 모든 구원은 바로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임을 분명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삶이 더 고단해 지고 더 무거운 짐이 실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면 다시 한 번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시면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여 진정 저는 아무 힘도 없는 자입니다. 저의 힘으로는 이 상황을 극복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능히 해결하신 전능자가 되심을 제가 믿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신 줄 믿습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직 담대함을 가지고 이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신 주님의 약속을 의지합니다."
주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예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리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마음 속에서 애굽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탈출한 후에도 어려운 일만 있으면 다시 애굽을 찾았습니다. 그 노예의 땅에서 거지처럼 누렸던 것들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애굽에 살기 좋고 평화로운 상태만 계속되었다면 이들은 결코 애굽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곳만한 곳은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오늘날도 소득 수준이 올라갈수록 신앙이 떨어지는 통계적인 현실을 우리는 전 세계의 기독교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로 하나님은 고통의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서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끊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황이 더 나빠질 때 우리의 자세
그렇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 때 우리의 자세는 과연 어떠해야 할까요?
1.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심치 말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상황이 나빠지자 오직 바로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모세도 아론도 하나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직 바로만 보였고 , 자신들이 당할 고통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모세는 하나님을 볼 줄 알았습니다. 비록 상황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물론 모세는 이 때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세로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세의 모습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의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에드가 게스트의 시
"하나의 깨어진 꿈은 모든 꿈의 마지막이 아니다.
하나의 무너진 희망은 모든 희망의 마지막이 아니다.
푹풍우와 비바람 저 너머로 별들은 빛나고 있으니
그대의 성곽이 무너져 버릴지라도 다시 성곽짓기를 계획하라"
2.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의 완전하심을 믿자는 것입니다.
바로의 강팍하여짐과 그의 모든 행동은 사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들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팔로 바로와 그 백성을 치시기까지는 바로가 그들을 보내주지 않을 것임을 하나님은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 있었던 일들이었던 것입니다. 다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다 알지 못합니다. 왜 상황이 자꾸 나빠지는 것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모세를 생각하며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지역 전도시에 귀신들려 점치는 소녀를 고쳐주었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기절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녁 때 일어난 이들이 찬양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착고가 풀어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간수가 죄수들이 달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자진하려고 할 때 바울과 신라가 그를 제제시키자 그 간수는 그 사도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하여 바울은 간수의 온 가정을 구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여 내게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다 주고야 말 것이다"라는 것을....
3.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큰 차이는 바로 이 점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여러분은 어떤 자세를 취하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 앞에 마음을 토해 놓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인내함으로 그분의 때를 기다리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곧 다가올 것입니다. 지난 주 교회 마당에 목련에 몽오리가 맺힌 것을 보았습니다. 겨울이 길다해도 결국 지나가고 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이 악화되고 계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좀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곧 임할 것입니다. 그 은혜의 때가 눈 앞에 있음을 믿으시면서 오늘을 이겨 나가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네가 보리라"
출 5: 22 - 6: 1
영국의 과학자들이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일이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가장 우울한 때가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1월 셋째 주간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번 주간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때 영국 날씨가 가장 춥고 어둡기 때문이랍니다. 둘째는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가 가라앉고 이때 진 빚을 갚아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셋째는 새해의 새로운 결심들이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는 때이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희망차게 새 해를 시작했지만 그 희망은 사라지고 다시금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우울해 진다는 것입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인데 기왕이면 신나고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우리 인생에는 신나고 행복한 때보다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한 때가 더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때로는 우울하거나 더 나아가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우울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을 짓누르는 견디기 힘든 심적 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특히 주의 일을 하면서 우울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심적으로 큰 고통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주의 일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아예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우울한 기분을 느끼거나 심적 고통을 겪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 기대했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둘째, 포기하고 돌아서야 할 때
셋째, 희망의 끈을 놓아야 할 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우울한 감정과 심적 고통은 마치 정신적인 암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암이 생기면 이것이 자라고 전이가 돼서 우리 몸을 망가뜨리고 나아가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울한 감정과 심적 고통이 생기면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우리 삶 전체를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우리 몸에 암이 생기면 일단 이 암을 제거하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울한 감정과 심적 고통을 처리해야 합니다. 일단 진정시키고 나아가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우울한 감정과 심적 고통을 해결할 수 있을 까요? 오늘 본문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사건 초기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저를 준비시키시고 힘을 북돋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바로 왕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바로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학대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초지종을 알아보고는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왜 쓸 데 없는 짓을 해서 우리를 더 힘들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더 붙인 셈이 됐습니다.
모세가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답하셨습니다. 모세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인간의 항변
오늘 본문을 보면 우울하고 마음이 답답한 사람들의 항변들이 나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항변입니다.
출 4:29-31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등장으로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셔서 본격적으로 역사하시면 무엇인가 자기들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로의 학대가 더욱 심해진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자기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고, 채찍질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나쁜 일들만 더 많이 생겼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원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찾아와 항변을 합니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출 5:21)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저들이 깨닫지 못해서 항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 3:1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 백성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출 5:16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종들이 매를 맞사오니 이는 당신의 백성의 죄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바로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항변하게 된 원인은 바로 깨닫지 못한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의 백성이었던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는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깨닫지 못해서 항변할 때가 많습니다. 오해해서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깨닫지 못해서 우울하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버트란트 러셀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부정적인 파괴와 비참한 일들은 모두가 다 감정의 충동에서 생긴 것이다. 반대로 창조적인 사건들은 모두가 다 지성의 충동에서 생긴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에 매몰되어 감정의 충동을 따라 행동하게 되면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신 지성을 활용해서 생각하고 깨닫고 행동하면 창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우울하게 만들고 마음의 고통을 안겨다 줄 때 감정의 충동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더욱 깊은 우울과 심적 고통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이럴 때 차분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감정보다는 지성을 앞 세워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이 일들의 의미는 무엇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심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모세의 항변입니다.
본문 22-23에서 모세가 이렇게 항변하고 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고, 또 자기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자기가 바로 앞에 서면 단번에 모든 일이 잘 해결 될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바로의 저항에 제대로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 것입니다. 오히려 바로를 잘못 건드려서 더욱 거칠게 이스라엘 백성을 다루게 만든 것입니다.
모세의 마음이 답답합니다. 원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항변합니다. 이럴 거라면 왜 자기를 바로에게 보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뭐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난 430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한 민족입니다. 정말 긴 세월 종으로서 살아왔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들의 신분이 갑자기 바뀔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인구가 무려 장정만 60만입니다. 애굽에서 저들이 노역을 주로 다 담당했습니다. 지금부터 3500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에 이 엄청난 노동력을 하루아침에 잃는다는 것은 나라가 그대로 망한다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바로는 필사적으로 저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지금 한번 바로를 만나고 와서는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면 바로가 당장 손을 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보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항변하게 된 원인은 바로 조급함 때문입니다.
많은 엄마들이 아이 때문에 속상해 합니다. 옆 집 아이는 벌써 뛰는데 우리 아이는 아직 걸음마를 한다는 것입니다. 옆 집 아이는 벌써 학습지를 세 개나 하는데 우리 아이는 아직 한 개도 벅차한다는 것입니다. 옆 집 아이는 벌써 어학연수를 다녀왔는데 우리 아이는 갈 생각도 안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울쌍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많은 경우 우리가 조급합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면 모든 일이 다 잘 될텐데 조급함 때문에 우울하게 되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울하고 마음이 답답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의 항변에 대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우선 귀 기울여 들어주십니다.
출 3: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시고자 작정하신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저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이에 응답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 놓고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에 응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 6:1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모세의 항변을 들으시고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소개해 주는 우리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제가 애창하는 CCM 곡 가운데 하나가 “주만 바라볼지라”입니다. 특히 그 가사가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후렴 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작은 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여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신음 들릴듯 말듯 토해 놓는 작은 신음까지도 다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의 신음에 민감하게 반응하십니다. 힘들어 토해 놓는 부르짖음, 고통 속에 쏟아 놓는 울부짖음, 괴로움 속에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는 신음소리, 하나님께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점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울을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6:1에 놀라운 말씀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모세가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나면 겉으로 볼 때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대지를 뚫고 싹아 움터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음 소리,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보리라”
최근에 교회 긍휼 사역팀으로부터 간증 편지를 받아보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노숙인이었던 53세의 김정수라는 분이 보낸 편지입니다.
이분은 대학 졸업 후에 가정을 이루고 직장생활을 하던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 15년 전에 교통사고로 부인과 딸 그리고 장인 장모를 다 잃게 되었습니다. 죄책감에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아들 홀로 남겨두고 집을 나와서 노숙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기를 10여년.
알콜 중독으로 온 몸이 엉망이 되었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노숙자들 틈에서 이곳저곳을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노숙인 사역에까지 오게 됐습니다. 다른 교회와 다를 바 없이 단돈 500원과 차와 빵을 제공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교회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긍휼사역팀의 따뜻한 사랑이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인격적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없는 예배와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분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고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사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말씀따라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현장소장이 이분을 보고 감동을 받아 더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1년 만에 2000만원을 모았고 월세방도 얻었습니다. 조그맣게 자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의류를 외국에 수출하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수출액이 10억이 넘기 시작했고, 종업원이 90명이 넘는 탄탄한 중소기업이 되었습니다.
이분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도 놀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도중앙교회를 통해 받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편지를 보낸다고 썼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네가 보리라” 말씀하신대로 그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오늘을 성실하게 참고 이겨낸다면 우울과 마음의 답답함을 털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보리라”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