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에 매진 종범 스님 일체유심조 강의 들으며 마음의 원리 관심갖고 출가 결심 통도사 포교원 불지사 주지 시절 다라니 기도로 대중들의 불심 일깨워 3년만에 1400여 회원 동참 눈길 공양미 모아 무료 급식으로 회향 부산 외곽지역 홍법사 불사 시작 문화와 신행 아우르는 적극적 포교로 유아부터 노인까지 신행활동 이끌어 |  | | ▲ 심산 스님은 … 동국대 선학과와 불교문화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대성사 주지를 역임하고 공군법사, 공창종합사회복지관장, (사)동련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1994년 ~2002년 통도사 부산포교원 불지사 주지를 거쳐 조계종 홍법사 주지를 맡고 있다. 현재 (사)한나래문화재단 이사장, (재)불심홍법원 이사, 국제불광회 한국 부산협회 회장으로 활발한 포교 활동을 펼치고 있다. 몽골 NOC 훈장, 조계종 포교원 제10회 포교대상 원력상, 2014년 조계종 포교원 제26회 포교대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또한, 몽골의료봉사 지원 및 몽골 헌옷 보내기 지원사업, 다문화 페스티벌, 청소년 몽골 봉사 활동, 인도영화제 개최, 인도 KITT 대학 상호교류협력 체결 등을 통해 해외 포교에도 앞장서고 있다. |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포교를 위해 좋은 조건이 갖춰야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신도가 한두 명 뿐이었던 불지사를 맡았을 때도, 비닐법당으로 홍법사 법회를 시작할 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찾아 열심히 했을 뿐이죠. 절박한 사명감을 가지고 현재의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10년만 노력한다면 포교의 성과는 드러나게 마련이죠.” 불자와 비불자를 아우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포교의 새 방향을 제시해온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은 포교의 핵심은 현재의 조건을 잘 살피고 그에 맞는 방법을 찾아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불자와 비불자를 아우르는 도심 포교로 개사 10여년 만에 대형 사찰의 면모를 갖추며 힐링의 명소로 자리잡은 부산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의 포교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 | ▲ 아미타대불 앞에서 신도들과 함께. 45m의 규모의 홍법사 아미타대불은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
비닐 법당 법회에서 대규모 불사까지 홍법사 입구에 조성된 아미타대불은 홍법사를 상징하는 웅장한 불상이다. 대광명전을 좌대로 삼아 모셔진 아미타대불은 높이가 21m인데, 건축물인 대웅보전까지 합치면 45m 크기의 좌불로 국내 최대 불상이라고 한다. 달라이라마존자가 보내준 부처님 진신 사리까지 봉안되어 있어 홍법사를 찾는 이들에게 환희심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홍법사에는 주말이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부터 쉼을 찾아온 어르신들까지 문전성시를 이룬다. 불자 비불자 상관없이 이곳을 들리는 이라면 웅장하고도 정갈하게 불사를 이룬 사찰을 보고 환희심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통도사 부산 포교당 불지사에서 도심 포교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스님이 홍법사 불사를 시작한 시기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지사에서 도심 포교와 복지 활동에 큰 두각을 보이던 스님에게 새로운 제안이 들어오게 된다. 홍법사 창건주 故 하도명화 보살이 평생 서원이었던 절을 짓고자 하는데 심산 스님을 주지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보살님께서는 절을 짓고자 원력을 세우시고 20여년 동안 인연을 찾아다니셨다고 했습니다. 재단법인 불심홍법원에서 이사로 활동하며 보살님을 뵙곤 했는데 자신의 신창 농원에 절을 짓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홍법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린벨트로 묶여 있는 그곳은 2층으로 마련된 낡고 초라한 요사채와 농장을 가득 채운 나무만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부산 시골 변두리에 위치해 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스님은 이곳에서 새로운 행보의 첫발을 내디뎠다.
6개월간 은거 생활을 하며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던 스님은 자신이 처한 조건에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30평 남짓의 농장관리 사옥을 개조해 첫 법회를 연 것이다. 열 명 가량으로 시작했던 법회에는 천천히 신도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린이법회에서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 또 취미활동에서 신행까지 다양한 콘텐츠를 마련해 신도 한 명 한 명의 눈높이에 맞춘 포교에 힘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렇게 일 년 사이 수많은 불자들이 몰려들고 더 이상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하지만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자유롭게 불사를 할 수 없었다. 농장관리사옥을 조금씩 허물어 공간을 만들고 비닐을 엮어 벽을 만들어 임시방편으로 바람을 막으니 비닐하우스나 다름없는 법당이었다.
“물론 상황이 열악했죠. 하지만 어렵다 포기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포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2002년 종단에서 처음으로 템플스테이 사찰을 지정할 때도 전국에 5개 사찰 중에 저희 사찰이 선정됐습니다. 단청도 기와도 없는 곳에서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냐며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희는 성공적으로 템플스테이를 해냈습니다” 홍법사 템플스테이는 영어 프로그램 및 외국인들과의 만남 등으로 교육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등 신도들의 눈높이에 맞춘 콘텐츠로 주목을 받았다. 그렇게 5년의 시간이 흐르고 2007년 그린벨트 지정이 풀리자 곧장 불사를 진행했다. 2008년 6월에 기공식을 시작해 1년 만에 대웅보전을 완공했다. 일사천리로 불사가 진행됐다. 스님은 이 과정을 통해 불사는 부처님의 가피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했다.
“비가 내리면 안 되는 상황에서는 신기하게도 비가 안 왔어요. 홍법사 옆에 다리 건너에는 비가 와도 경내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겁니다. 또 어떤 날 하루는 건설 담당자가 콘크리트를 붓고 나서 그 위를 한번 물로 씻어 주면 좋은데 하는 겁니다. 하지만 500평이나 되는 곳을 무슨 수로 씻겠습니까? 그 다음날 새벽에 안 내리던 비가 내렸는데 억수 같이 퍼부었습니다. 새벽 예불을 위해 준비하던 그때부터 시작해 새벽 6시까지 내리니 공사 현장이 깨끗이 씻겨지더군요. 그러니 부처님 가피로 홍법사가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렇게 불사를 이룬 홍법사는 현재 등록 신도 숫자만 해도 7천 명이 넘을 정도이며, 부처님 오신 날에는 2만 명의 불자들이 다녀간다. 또한 초하루 법회와 어린이법회 등 각 법회에는 불자들이 몰려들면서 법당을 가득 채우는 활기 넘치는 사찰이 된 것이다.
출가의 원을 세우다 심산 스님은 고등학교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 “울산고에 입학했을 때 불교학생회 선배들이 학생회 설명차 교실을 찾아왔는데 자석에 이끌리듯 선배들을 따라 학생회를 찾았어요. 정기법회로 해남사를 처음 찾았을 때 문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향나무, 단청 그 모든 것이 감동이었습니다. 그렇게 매주 토요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정기법회를 다녔죠.” 그리고 그해 5월 통도사에 법문하러 온 종범 스님을 만나게 되면서 불교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스님은 ‘일체유심조’를 주제로 자유자재한 마음에 대해 법문을 하셨어요. 자유에 대한 개념을 단박에 정리해주는 법문에 큰 충격을 받았죠. 어린 시절 겪었던 긴장감과 두려움이 떠올랐어요. 어둠 속에서 귀신을 만난 상상을 하며 느꼈던 두려움도 떠올랐죠. 내 마음에서 만드는 두려움과 긴장감, 그 근원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게 됐죠. 그 후로는 일체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불교만 생각하게 되었죠. 그러니 학교 공부도 의미가 없어져 소홀하게 되었습니다.” 1학년 내내 불교 학생회 활동에 매진하던 스님은 2학년 때는 영남불교연합회 학생회장을 맡게 된다. 그때부터 스님은 포교에 남다른 역량을 보여주었다. 당시 200여명이었던 연합회 회원이 340여명까지 늘게 된 것이다. “당시 임원단들은 신행 프로그램으로 수련회, 철야정진과 법회, 야외 법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어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운영을 하니 회원수가 1.5배 늘었어요. 해인사에 야외법회를 갈 때는 참가자 수가 200명 가까이 모일 정도 반응이 좋았어요. 당시는 회장직을 한 학기만 할 수 있었으니 이 모두가 6개월만에 이루어낸 성과였죠.” 또한 이 시기에 스님은 출가를 결심한다. “2학년 때 여름 학생연합수련회가 경주 중생사에서 열렸어요. 500명 정도가 모인 자리였죠. 마지막 날 수계식에서 당시 중생사 주지였던 불심 도문 스님이 출가 할 사람이 있냐며 갑작스럽게 질문을 하시더군요. 번쩍 손을 들었는데 참가자 중에 손을 든 사람은 저 혼자였어요. 그러자 도문 스님께서는 동국대에 입학하고 찾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1학년 내내 손을 놓았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죠. 그리고 동국대 선학과에 합격하고 스님을 찾아뵙고 출가하게 됐습니다.”
|  | | ▲ 대웅보전 건립 기공식에서 심산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
문화로 경계없는 불법 홍포 발원 이렇게 출가한 스님은 1994년 통도사 부산 포교당 불지사 주지를 맡게 된다. 당시 스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포교 실력(?)을 발휘했다. “당시 불지사는 숟가락, 젓가락조차도 사러 다녀야 할 만큼 살림이 가난했고, 신도는 1~2명 정도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신도가 찾아와 부적을 써달라고 하더군요. 난감했죠. 이 사람에게 어떻게 불교를 가르쳐주어야 하나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스님은 불교를 기복으로 믿는 신도들을 부처님께 안내할 길을 모색했다. 불안에 떨며 부적을 찾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며 은사 스님이 일러준 다라니기도를 생각해냈다. “신도들과 함께 다라니 기도를 시작했어요. 매월 1일~3일은 어김없이 다라니기도를 이어 갔는데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시작된 정기 다리니 기도였어요.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마음을 모아 기도를 했고 기도비는 공양미 이외에 받지 않았어요.” 이렇게 기도에 동참하는 신도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3년여 만에 신도가 14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쯤 되자 매월 다라니 기도가 있는 날 불지사 앞에는 새벽 기도를 마친 불자들을 위해 택시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기도하는 회원이 늘어나자 공양미만 매달 50가마니가 넘어섰다. “당시 복지관을 위탁 운영하고 있어 신도들이 보시 올린 쌀은 복지관에 보내고 북한에 쌀을 보내기 위해 100가마니 정도 모았죠. 그때 IMF가 터졌어요.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위해 공양미를 회향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스님은 무료급식을 위한 밥차를 마련, 매주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급식을 진행했다. 이는 스님이 주지를 놓고 떠난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불지사는 현재 부산 초읍 부산자유회관에서 500여명에 이르는 소외 이웃들을 위해 급식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이 다라니 기도는 새로운 불사를 위해 홍법사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이어졌다. 현재 홍법사는 정기적으로 매월 1일~3일 다라니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포교의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었던 특별한 노하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스님은 “특별한 것은 없다. 단지 절박한 마음으로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다. 그리고 작은 것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답한다.
또한 스님은 작은 인연도 허투루 보는 법이 없다. “홍법사 경내에는 부모들이 아기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럼 다가가서 아기 손도 잡아 보고 이름도 묻고 하면서 언제 동자승 할거냐고 물어 봐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들은 부모들이 나중에 자녀를 동자승을 시키는 경우도 있죠. 그러니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음의 인연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알고 신도 한 분 한 분의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또한 스님의 철저한 문제 해결 방식 또한 포교활동의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회의를 통한 문제점 확인과 대책 마련 그리고 철두철미한 실행을 통해 스님은 사안을 해결해낸다.
“영남불교학생회 회장을 맡았던 고교시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새기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성과 성찰입니다. 어떤 행사든 끝나고 나면 회의를 통해 문제점을 철저하게 분석해 대책을 마련하고 발전 방향을 잡아 나갑니다. 이렇게 도출된 결과는 다음 행사를 진행할 때는 반드시 적용해 나가죠.”
홍법사는 현재, 영아부터 어린이 청소년 노인 외국인 불자와 비불자 등 모든 계층과 세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각광받고 있다. 불자뿐 아니라 비불자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까지 마련하니 스님은 불교가 아닌 것으로 불교를 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포교에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힐링, 복지, 문화 등에 관심을 가지고 갈 곳을 찾아다닙니다. 불교 안에 그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제가 생각하는 사찰이란 취미에서 신행까지,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종합문화 복지타운입니다. 비불자들은 처음부터 불교색을 강하게 드러내면 대부분은 반감을 가지죠. 가랑비에 옷 젖듯이 서서히 불교로 물들게 할 수 있는 그런 포교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포교의 방향에 대해 스님은 두 가지를 언급했다. “우선 템플스테이, 동자승, 영유아 수기 등 불교를 통한 전통 포교를 우선으로 하는 포교를 꾸준히 이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를 뛰어 넘는 사회 환원 활동을 통해 세상의 화합을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세상만물을 모두를 포용하는 부처님의 마음을 닮은 홍법사, 그 중심에는 심산 스님이 있었다. 모두가 화합하는 불국정토의 아름다움이 홍법사를 통해 이뤄지길 발원한다.
|  | | ▲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동자승 삭발식을 진행하는 심산 스님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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