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9일 [6]
"와,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놀라워요, 믿을 수가 없어요." 갈색 눈을 크게 뜨며 사니가 말했다.
어떤 부분이 놀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상실에 대해 얘기하기를 피하지 않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이만큼 솔직할 수 있었다는 데 놀라기도 했고, 사니는 매주 나를 베이리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차 안에서 자신이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녀는 스물한 살의 아기 엄마였고,아이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대학을 계속 다니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족은 최근 유대인 정착촌 때문에 집을 잃었는데, 이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려고 한 학기 내내 씨름했단다. 이제는 내가 마음을 털어놓을 차례인 것같았다.
거대한 타워와 긴 강철 케이블이 매력적인 베라자노 다리를 건너며 나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엄마를 뉴저지주에서 퀸스의 오래된 오래된 우리 집으로 모셔오던 날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한테 이 다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다리라고 얘기했지만, 엄마는 조금도 감동하는 기색이 없었다. "흠, 이 다리는 당장 페인트칠 좀 새로 해야겠는걸." 엄마는 말했다. 한밤중에 이 다리가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빛나는 모습을 보셨다면, 엄마는 흠결 대신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을까?
사니는 96번가에 나를 내려 주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덜덜 떨면서 지하철역 계단을 내가 R선 전철을 타고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뉴저지로 돌아갔던 날, 늦겨울 추위 때문에 오빠네 차고는 마치 대형 냉동실 같았다. 오빠는 엄마의 물건을 벌써 위층 방에서 차고로 옮겨놓았다.
"이러면 너한테 쉬울 것같아서." 오빠가 말했다.
나는 스무 개가 넘는 대봉투을 특별한 순서 없이 풀어보기 시작했고, 거기선 수십 년 동안 못 보던 것들이 나왔다. 엄마 침실 웃장에 몰래 들어갈 때마다 입어보던 레이스 잠옷과 새틴슬리펴, 엄마가 다락방 작업실에서 직접 지은 화려한 옷, 엄마가 특별한 날을 위해 아껴두었지만 결국 써보지 못한 향수 비누, 엄마가 어느 벌목 사업가 결혼식에 딱 한 번 입고 갔던 은색 인조 모피 재킷이 거기 있었다.
엄마는 그 사람 집에서 청소일을 해주다 이층 유리창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그 재킷을 보자 사고 당일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서너 살 때쯤,엄마는 일하러 가는 데 나를 데려갔다.
"엄마가 잘 보이게 여기 창문 옆에 있어, 그레이스야?" 엄마는 유리창 반대편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고 이르면서 말했다. "엄마 여기 내내 있을 거야, 알았지? 엄마 잘 보이는 데 있어. 어디 멀리 안 간다고 엄마랑 약속."
나는 엄마가 반깥쪽 유리를 닦는 동안 엄마 말대로 창문 옆에서 조용히 놀고 있었다. 우리는 유리 사이로 서로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놀고 있었는데, 그 순간 사다리가 뒤로 기울며 엄마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 둘 다 일시적으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엄마는 부상을 입었고 나는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그 다음 봉투를 풀자 오래된 회갈색 손가방이 나왔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쩌다 가끔 우리와 외출을 할 때면 들고 다니던 것이라 다른 물건만큼 감정적 동요가 일지는 않았다. 나는 문득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수건과 지갑이 들어있었는데, 처음에는 둘 다 별다를 것 없어 보였다. 손수건은 엄마를 터프한 여자로 보이게 했던 마스카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지갑은 1993년 크리스마스에 내가 엄마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거기엔 오래전 기한이 만료된 운전 면허증과, 엄마가 죽기 14년 전인 1994년 5월 발행된 정신건강센터 주차 티켓이 들어 있었다. 엄마가 차를 운전한 것도 이날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눈물로 얼룩진 손수건과 엄마가 어느 정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세상에 나갔던 마지막 기록 사이의 연관성을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산산이 부서진 엄마의 징표인 이 물건들의 무게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찾아낸 물건에서 슬픔만큼이나 따스함도 느꼈다. 엄마 손가방 안에는 천으로 겹겹이 싸인 작고 무거운 뭉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