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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2
전통적으로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신성이 마리아의 인성을 '취하여' 이루어진것이라 하지만, 실제로 성경에는 '취했다'라는 용어는 찾아볼수 없고 단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만 되어있다.인성을 취했다라는 표현은 결국 사람의 기원과 생육과 출생에 대한 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러할것이다라고 왜곡하여 전제한것에 불과하다.피조물에 대해서는 유한은 무한을 받아들일수 없지만,그리스도의 인성은 피조물이 아니시므로 이를 적용할수없다.그리스도의 인성은 유한체가 아니라 무한체이시다.그리스도의 인성의 시작을 성육신에 두게되면 그분의 인성에 대한 폄하가 발생한다.그분의 인성의 기원을 영원전 성부의 독생자에 두게되면 합당한 영광을 돌릴수있게 된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신 말씀은 신성만 지칭하는것이 아니라,신성이 연합하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성육신 시점에서야 신성이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 아나라,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이 이땅의 인간의 수준으로 한없이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중 하나는,육신으로서 동시에 여러곳에 계실수 없으시다는 국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3차원적인 피조세계의 시각으로 형언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그분의 영광의 인성을 제한하려는데서 야기되는 오류이다.유한은 무한을 담을수 없다는것은,낮은차원의 존재는 높은차원의 존재를 수용할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나 높은차원의 존재는 낮은차원 세계를 품을수있다.1차원인 선이 0차원인 점을 포함하고,2차원인 면이 1차원인 선을포함하며,3차원인 입체가 0-2차원인 점선면을 모두 포함하듯이,셋째하늘 차원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은 그보다 낮은 차원의 피조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실 수 있으시다.마지막날 주님께서 육체로 다시오실때 둥근 지구의 모든곳에 퍼져사는 모든인간들이 그분의 육체의 강림을 목격할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여호수아 #Joshua 20:1-9
제 20 장
도피성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스라엘 일곱 지파들에게는 아직 차지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있었으나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전부 자기 기업을 차지할 때까지 기다리시지 않으시고 40년 전에 모세를 통해서 명령하셨던 과실치사자를 위한 도피성을 먼저 세울 것을 여호수아를 통해서 다시 명령하신다. 도피성은 말 그대로 고의가 아닌 과실치사자가 보복을 당하지 않고 목숨을 건질 수 있도록 몸을 피할 성읍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우선순위로 치자면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뭔가 딱히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을 내비칠만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조속히 할 사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서 하도록 두신다면 그들이 도피성 세우는 일을 차일피일 이리저리 미루다가 결국에는 흐지부지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들이 더이상 미루지 못하도록 여호수아 시대에 명령하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도피성은 이미 이스라엘 몇몇 지파들이 차지한 성읍 중에서 할당해야 했으므로 요단 동편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가 하나씩 세웠고 요단 서편에서는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유다 지파가 하나씩 담당하였는데 이는 먼저 권리를 얻은 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요단 서편의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유다 지파는 각각 산지를 도피성으로 지정하였는데, 이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과실치사자가 험준한 산지에 위치한 도피성으로 피함으로써 보복자의 추격을 조금이나마 손쉽게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납달리와 에브라임 지파는 차지한 기업 중에서 가장 가치가 떨어지는 척박한 산지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에브라임 지파가 여호수아에게서 추가로 지정받은 땅이 산지라서 불평했던 것을 근거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같은 산지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하였더라도 그런 불명예와 오명을 쓸 수 없는 것은, 헤브론 산지는 다름아닌 갈렙이 노년에 얻은 귀한 딸 악사를 내걸면서까지 힘겹게 차지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 지파는 자기들의 기업 중에서 헤브론 산지를 가장 좋은 것으로 보고 도피성으로 여호와 그리스도께 바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단 동편 갓 지파가 지정한 길르앗 라못은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이 거짓 영에 미혹된 4백명의 선지자들의 메시지만을 듣고서 유다 왕국 여호사밧 왕과 함께 아람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한 장소이다.
도피성으로 피한 과실치사자는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으나 어쨌건 사람을 죽인데 대한 죄책으로서 멋대로 도피성을 나가서는 안되었고 희년이 오거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오로지 도피성에만 머물러 있어야함으로써 자기가 원래 누리던 모든 소유와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한다는 제약을 받아야 했다. 희년이 얼마나 남는지, 대제사장이 언제 죽을지는 사람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 기간이 많건 적건간에 과실치사자는 그 모든 것이 여호와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심판의 섭리로 여기고 겸허히 주어진 기간을 채워야만 했다. 또한 과실치사자는 자기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얼마간 가지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실치사가 혹시 자기의 은밀한 죄악들을 드러내어 깨닫게 하려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징벌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 신자들 중에서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에게 상해나 손해를 끼치게 되었다면 그저 고의가 아니었다며 주님의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되고 자기가 할 수 있는대로 최선을 다해 상대방의 피해를 배상해야 하며 만약에 그럴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오랜기간동안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20201222
#민수기 #Numbers 18:1-32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
1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조상의 가문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의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
2 너는 네 형제 레위 지파 곧 네 조상의 지파를 데려다가 너와 함께 있게 하여 너와 네 아들들이 증거의 장막 앞에 있을 때 그들이 너를 돕게 하라
3 레위인은 네 직무와 장막의 모든 직무를 지키려니와 성소의 기구와 제단에는 가까이 하지 못하리니 두렵건대 그들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4 레위인은 너와 합동하여 장막의 모든 일과 회막의 직무를 다할 것이요 다른 사람은 너희에게 가까이 하지 못할 것이니라
5 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제단의 직무를 다하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너희의 형제 레위인을 택하여 내게 돌리고 너희에게 선물로 주어 회막의 일을 하게 하였나니
7 너와 네 아들들은 제단과 휘장 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 하는 외인은 죽임을 당할지니라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모세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모세에게처럼 아론에게도 직접 말씀하신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내 생각에는 아마도 후자이지 않았을까 싶다.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아론의 지팡이에 생명을 부여하셔서 새순을 돋게 하시고 꽃이 피게 하시며 살구 열매가 열리게 하심으로써 오직 아론이 백성들 중에서 백성의 대속을 위해 여호와께 선택된 대제사장임을 인증하셨다. 때문에 아마도 아론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더욱 확실히 하시려고 그에게 직접 말씀하셔서 레위인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 같다. 내 생각에 여호와께서 이처럼 아론과 레위인들에 대한 규례를 다시 선포하신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이유와 목적이 있어보인다. 하나는 모세가 구스 여인과 재혼한 것을 두고 미리암의 꾐에 빠져 미리암과 함께 모세를 비방했던 아론에 대한 주의와 경고를 위한 것이다. 그 때에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냐면서 비방했는데 이는 고라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했던 말이자 그들이 멸망 당한 후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아론은 모세를 비방하면서 자기 주제를 많이 벗어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대제사장의 직무를 다시 한 번 그에게 상기시키셔서 아론이 오직 자기 직무에만 만족하고 충성하도록 하신 것이다. 둘째는 백성들, 특히 고라를 중심으로 반역을 도모했던 레위인들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가 있다. 고라는 아론이 모세를 비방할 때랑 똑같은 논리로 회중들도 여호와의 백성이란 말을 꺼냈고, 백성들은 멸망 당한 고라 무리들이 여호와의 백성이라면서 모세와 아론을 대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반역을 주도했던 레위인들에게 다시 그들의 회막에서의 직무를 상기시키셔서 자기들의 범위와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시는 것 같다.
여호와께서는 패역하고 완악하여 줄기차게 대적하고 반항하는 광야 백성에게 이적과 기사로 표징을 보이시고 아울러 다시 한 번 율법과 규례를 선포하심으로써 참으로 인자하게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깨우치신다.
여호와께서는 아론에게나 레위인들에게나 각자에게 주어진 직무가 여호와의 선물이라 말씀하신다. 아론은 아무런 자격이 없었음에도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을 선물로 받은 것이고, 레위인들은 아무런 자격이 없었음에도 회막을 섬기는 직무를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자격없이 선물을 받았으므로 아론이나 레위인들이나 각자가 맡은 직무에 불평하거나 다른 이의 직무를 탐내서도 안되었다. 그런데도 아론이나 레위인들이나 자기가 받은 직무가 여호와의 선물임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론은 모세의 것을 탐내었던 것이고 레위인들은 아론의 것을 탐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그들 각자의 직무가 당신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임을 그들에게 상기시키셔서 그들이 자기의 직무에 만족할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 사울 왕은 사무엘의 직무를 탐내다가 망했고 어떤 왕은 제사장의 직무를 탐내다가 나병에 걸렸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왕의 직무를 넘보다가 7년 만에 처형 당했다. 압살롬도 왕의 자리를 넘보다가 처참하게 죽었다.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왕위를 탐내다가 브나야에게 처형 당했다. 에브라임은 입다의 전공을 가로채려다가 입다에 의해 4만 여 명이나 쉽볼렛 학살을 당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군인들에게 받는 급료로 만족하라 하였다. 사도 바울은 부유하건 가난하건 가진 것에 불평하지 말고 자족하라 하였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장사하여 이익을 남겨 주인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만족하지 않고 그저 땅에 묻어 놓아 주인의 노여움을 샀다. 고린도 교인들은 각자가 받은 은사에 만족하지 않고 겉보기에 좀 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탐내다가 교회가 사분오열 되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어떤 곳은 적은 복음만으로도 신앙을 굳게 지켜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다.
어떤 교인이 아무리 성경 해석에 탁월하다 하더라도 목사나 교사가 아닌 이상 복음을 설교하게 하거나 가르치게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장로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하더라도 집사나 봉사자들이 해야 할 교회 실무 운영 또는 주차 안내 등의 일들을 도맡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더라도 교회에서는 많은 교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가르친다거나 목사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무리 자기가 복음을 잘 알고 있어도 창조 질서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에 대한 우선권을 남자보다 앞서서 쟁취하려 해서는 안된다.
제사장의 몫
8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거제물 곧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하게 한 모든 헌물을 네가 주관하게 하고 네가 기름 부음을 받았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너와 네 아들들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노라
9 지성물 중에 불사르지 아니한 것은 네 것이라 그들이 내게 드리는 모든 헌물의 모든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물은 다 지극히 거룩한즉 너와 네 아들들에게 돌리리니
10 지극히 거룩하게 여김으로 먹으라 이는 네게 성물인즉 남자들이 다 먹을지니라
11 네게 돌릴 것은 이것이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거제물과 모든 요제물이라 내가 그것을 너와 네 자녀에게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주었은즉 네 집의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니라
12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첫 소산 곧 제일 좋은 기름과 제일 좋은 포도주와 곡식을 네게 주었은즉
13 그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그 땅의 처음 익은 모든 열매는 네 것이니 네 집에서 정결한 자마다 먹을 것이라
14 이스라엘 중에서 특별히 드린 모든 것은 네 것이 되리라
15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생물의 처음 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네 것이로되 처음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대속할 것이요 처음 태어난 부정한 짐승도 대속할 것이며
16 그 사람을 대속할 때에는 난 지 한 달 이후에 네가 정한 대로 성소의 세겔을 따라 은 다섯 세겔로 대속하라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니라
17 오직 처음 태어난 소나 처음 태어난 양이나 처음 태어난 염소는 대속하지 말지니 그것들은 거룩한즉 그 피는 제단에 뿌리고 그 기름은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며
18 그 고기는 네게 돌릴지니 흔든 가슴과 오른쪽 넓적다리 같이 네게 돌릴 것이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레위인의 몫
21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22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죄값으로 죽을까 하노라
23 그러나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
레위인의 십일조
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6 너는 레위인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받아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받을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27 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 마당에서 드리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드리는 즙 같이 여기리니
28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29 너희가 받은 모든 헌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30 이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그 중에서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가 드리고 남은 것은 너희 레위인에게는 타작 마당의 소출과 포도즙 틀의 소출 같이 되리니
31 너희와 너희의 권속이 어디서든지 이것을 먹을 수 있음은 이는 회막에서 일한 너희의 보수임이니라
32 너희가 그 중 아름다운 것을 받들어 드린즉 이로 말미암아 죄를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성물을 더럽히지 말라 그리하여야 죽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는 레위인들에게 성막 봉사를 맡기시면서 가나안 땅의 기업은 없을 것이라 하신다. 그러나 대신에 백성들에게서 거둔 십일조를 래위인들의 소유로 삼으셔서 그들을 먹이신다. 또한 대제사장 아론에게는 레위인들에게서 백성이 드린 십일조의 십일조를 소유로 지정하시되 여호와 당신께서 직접 그의 기업이 되시겠다고 하신다. 즉,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의 백성이어도 특별히 신령한 직무를 맡을수록 영적인 기업은 커지는 반면에 이 땅의 기업은 반비례 하여 줄어드는 원리가 나타난다. 레위인은 성막 봉사라는 신령한 직무를 선물로 받았으나 정작 백성들의 십일조에만 전적으로 생계를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아론은 대제사장이라는 가장 높은 직무를 선물로 받았으나 생계는 전적으로 레위인들이 가져오는 십일조의 십일조에 의존해야 했다. 레위인들이나 아론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이나 생계를 위해 받는 일용할 것들이 많든지 적든지간에 그것으로 만족하고 각자가 맡은 성막 봉사나 대제사장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므로 그리스도라는 더할 나위없이 신령한 기업을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레위인이나 아론처럼 이 땅의 기업에 연연해 하지 말고 그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세상을 통해 주시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고 평생 꾸준히 하늘의 신령한 복을 땅에 내려주는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20191222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12장.
#아브라함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선택하신 것은 그가 무언가 하나님 보시기에 구원 받기에 합당한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다. 도리어 그는 70여세 까지 자기 선조를 따라 대대로 우상을 만들던 자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신성으로는 독생자이시며 인성으로는 인류의 맏아들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공로로 절대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진리는 죄로 물든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지성으로 인해 대표적으로 두 가지 잘못된 가르침으로 왜곡되어 왔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부분적인 은혜와 인간의 부분적인 공로가 연합해야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신자로서의 선행조차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다. 전자는 구약 시대와 초대 교회 시대에는 바리새인, 교부 시대에는 펠라기우스, 종교개혁 시대에는 아르미니우스 등을 거쳐 이어져 왔으며 교황주의 또한 이 공로 사상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바울 사도 등에게, 펠라기우스는 아우구흐티누스 선생 등에게, 아르미니우스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 등에게 반박 되었고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후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의 신비를 알지 못하고 인간의 저열한 수준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을 피상적으로 강조하고 신자의 행위를 지나치게 배제함에 따른 거짓된 가르침이다.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이라고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후자는 성령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신자를 부르시고 깨우치시며 인도하실 때 신자의 의지와 연합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신자가 성령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거부할 수 없다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가르침을 마치 신자가 받기 싫은데 억지로 받는 것처럼 오해한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최종적으로는 신자의 굳은 심령을 부드럽게 하셔서 신자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그런 은혜인 것이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은 전자의 공로 사상과 더불어 후자의 선민 사상에 젖어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절대 취소되지 않으므로 어느 정도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는 구원파의 거짓 가르침이 대표적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사실 적지 않은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이런 구원파 사상에 적지 않게 물들어 있는데 심각한 죄를 지었어도 자기만 하나님께 회개하면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이 죄사함 받았다고 떠드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한 교회의 담임목사씩이나 되어서도 선악을 구별하지도 못하고 죄의식도 없으며 교회를 버리고도 그렇게 떳떳해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그렇게 후자 마인드로 선 줄로 생각했던 자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 되어 있으면서도 선행으로 자기 구원을 증명하지 못하는 자들은 성령께서 주신 믿음을 소멸한 자로 심판 받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명령은 바로 떠나야 하는 것이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은 자기 생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머나 먼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먼 훗날에나 이루어질 하나님의 언약을 마치 자기 시대에 누릴 것처럼 믿음으로 바라고 소망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대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당신의 때를 볼 것을 바라고 즐거워 하였다고 하셨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가 넘어가 거주하는 곳에서 안정을 누릴 노년에 접어들었고 그러나 여전히 대를 이을 자녀가 없는 상황에서 별다른 소망 없이 하루 하루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대에는 부족을 떠나면 어느 누구로부터도 보호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노년에 자녀도 없이 부족을 떠난다는 것은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미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과감히 떠남으로써 자기가 성령으로부터 받은 그 믿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이었음을 드러내어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비단 이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위로 드러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증거를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단지 나와는 상관없는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단과 순종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자기의 삶에서는 마치 아브라함보다 더한 믿음의 시련이 왔다고 엄살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몇십년 후에 맞이하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하고 몇십년이면 사라져버릴 이 땅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다른 믿음(?)을 내세우는 것이 우리 수준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복의 근원을 삼으셔서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신다 하셨으므로 이는 마지막 날까지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리고의 창녀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선대함으로써 그 집안이 구원을 받았고 라합 자신은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모압 여인 룻은 시모 나오미를 선대함으로써 유대인 부호인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게 되었다. 구스 인 내시 에벳멜렉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물 없는 진창 구덩이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해냄으로써 바벨론의 침략에서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지게 된다. 사렙다의 과부는 자기와 아들이 먹을 마지막 식량을 엘리야에게 내어줌으로써 가뭄이 끝날 3년 6개월 동안 식량을 공급 받게 된다. 선지자 엘리사에게 묵을 곳을 제공한 어떤 여인은 노년에 아들을 얻는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형제라 하여 물 한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급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고, 약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대로 살다가 당하게 되는 모든 조롱과 비난과 불이익 등은 신자들에 대한 저주와 같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더 크게 저주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간 것에 대해서는 그가 비록 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의 계시를 받기는 했어도 연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 의지할만한 롯을 데리고 떠났다는 견해가 있다. 즉, 처음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주 연약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완전히 순종하지 못하였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진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대로 부족에 대한 아무런 미련없이 홀로 떠나려 했으나 조카 롯이 자발적으로 그를 따라 나온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롯은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따랐을 것이므로 그의 성품을 본받아 왔을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하면서 느닷없이 떠난다고 하니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그 위험을 감수하고 따라 나선 것일 수 있다. 때문에 비록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다가 패가망신했어도 베드로 사도는 그가 의인으로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어쨌건 그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던 것이다.
가나안은 노아의 저주를 받은 함의 후예들이다. 따라서 함의 후예인 가나안을 셈의 후예인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노아의 저주가 단지 개인차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따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따른 것이니 대체 함이 무슨 잘못이냐,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냐고 따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네가 누구이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힐난하는지, 지음 받은 물건이 지은 이를 향해서 대체 자기를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수 있는지, 옹기장이가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과 다른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지적한다. 교인들 중에서도 자기 눈에 좋아보이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구원하시지 않는지 불평하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함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가지고서는 함의 후예들이 둘러싸고 있는 지역을 나그네처럼 전전하며 살았다. 함의 후예들에 비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복의 근원의 세력은 너무나 보잘 것 없었고 언제 침략을 받아 사라져도 모를 상황이었다. 아브라함이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나그네 여정에서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와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 덕분이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이라 굳게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처한 상황도 아브라함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의 이 땅에서의 세력과 영향력은 세속인들에 비해서 열세를 띨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라 하면서 이 땅의 것들을 두고 세상과 경쟁해서 이기려 하는 것은 성경적인 복과 형통과 성공이 아닐 가능성이 99.99999999999999999999….% 이다. 도리어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들을 아브라함처럼 굳게 믿고 순종하며 언제든지 이 땅을 떠날 나그네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