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31.水. 맑음
영등포 구청 역의 직녀織女에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는 지하철 노선이 생각보다는 참 많이 있다. 1호선부터 9호 노선만 가지고는 부족해서 분당선, 중앙선, 경의선, 경춘선, 공항철도 등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서울 시내를 뱅뱅 도는 순환선은 2호선이 유일하다. 지금도 그 이야기가 유효한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가는 대학이 좋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야 서울을 관통해버리는 노선보다는 서울 시내 요소요소를 뱅뱅 돌아가는 2호선은 아무래도 수많은 대학을 지나칠 터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다른 대중교통에 비해 지하철은 교통체증이란 것이 없으니 지하철로 학교를 통학하는 경우에는 최소한 시간을 잘 맞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2호선은 순환선이니 타고 앉아 몇 바퀴를 뱅뱅 돌아도 교통비가 추가로 오를 염려가 없어서 왠지 한바탕 바람을 쐬고 싶은 더운 여름날이면 찬바람 잘 나오는 2호선 객차에 앉아 지하철 안 풍경을 보며 몇 바퀴 돌고나면 한바탕 바람에 대한 갈증이 그런대로 풀리기도 한다. 그러다 그 짓도 싫증이 나게 되면 또 아무 역에서나 내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책상 앞에서 상상만으로는 느껴보지 못할 광경을 만나면 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쳐다본다. 물론 집에 돌아오면 결국 그 모든 것들은 글감이 되어 내 일의 밑천이 되어주지만 8월 어느 날의 이런 일탈이 자유로운 것인지 한심한 것인지 가끔 혼동스러울 때도 있다. 누구는 대승적 차원에서 투표율을 걱정하고, 또 누구는 입에 거품을 물고 국가와 역사 앞에 떳떳함을 외치며 온몸을 내던지듯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최소한의 내 몫만큼이나마 하고 사는 건지 원, 우리 동네와 훌륭한 사람이 되라며 나를 가르치신 선생님들께 솔직히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2호선을 타고 가다 내린 곳이 영등포 구청 역이다. 내로라 한 2호선 역들 중에서도 별 특징도 없고, 별 내놓을 것도 없는 영등포 구청 역이지만 바로 그런 점이 내 눈길을 잡아끄는 요인이 된다. 허구한 날 유명짜하게 인터넷에 올라오는 김태희나 이효리보다 잔주름 늘어가는 아내의 얼굴이 더 사랑스러운 이치나 한 가지라고 보면 된다. 영등포 구청 역은 지하철역에서 밖으로 나가보면 역 이름이 왜 영등포 구청 역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정말 영등포 구청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구청 부근답게 국민은행도 있고 신한은행, 우리은행도 보인다. 길 맞은편에는 먹자골목도 형성이 되어 있고, 대로변에는 이런저런 공단 건물도 보이는데 구청 뒤쪽으로 눈에 딱 띄는 건물이 있다. 그 건물은 영등포 세무서인데 저런 건물 양식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이름이 딱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내가 입때까지 본 세무서 건물 중에서 가장 우아한 건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저렇게 멋진 건물 안에서 세금을 매기고, 세무조사를 나오고, 체납액 추징을 한다고 생각을 하니 입안이 떨떠름해져온다. 영등포 구청 주변을 돌아다니다보면 마치 한성대 부근인 동소문동 주위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1960년대와 2000년대가 섞여있는 듯한 부조화의 조화라고 할까 혹은 그 시기에서 이 시기로 흘러오는 시간의 통풍성通風性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곳에서는 사대문 안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독특한 분위를 자아낸다. 그렇게 일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본 뒤 다시 영등포 구청 역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지하계단을 내려딛고 있는데 안쪽에서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조그만 역 광장 한쪽에 길거리 가수가 마이크 앞에 서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들어보는 익숙한 곡이다.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져 온다.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에
노둣돌을 놓아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은하수 건너
오작교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 딛고 다시 만날 우리들
연인아 연인아
이별은 끝나야 한다
슬픔은 끝나야 한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문병란 시인이 가사를 만들고 김원중이 노래한 ‘직녀織女에게’ 이다. 본래 ‘직녀에게’는 1976년 심상이라는 시전문지에 발표했던 통일염원을 읊은 서정시인데, 1981년 창비사에서 간행한 ‘땅의 연가’ 라는 시선집에 실린 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1980년, 5.18 민주항쟁이후로 신군부의 독재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시로 알려지다가 시를 노래 부르기 쉬운 가사로 짧게 개작하고 곡을 붙여 노래한 것이 바로 김원중이 부른 ‘직녀에게’ 이다. 직녀에게를 듣고 있자니 ‘80년의 오월이 생각이 난다. 이 노래를 들으려고 영등포 구청 역에서 내리고 싶었을까?
(- 영등포 구청 역의 직녀織女에게. -)
첫댓글 어떤 인연으로 그 시간에 거기에 계셨을까요?
긴울림님~ 오랫동안 뵙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건강하시지요? 건필하세요. *^^*
제가 영등포 구청역으로 몇년을 뭔가 배우러 다녔거든요...
그역에 내리면 필요한건 다 있어요...ㅎㅎ
오늘도 기쁨이 함께 하세요 잘 보고 갑니다 ~~~~~~~~~~~~~~~
부산에 사는 내가 서울 영등포역사가 어디 쯤 있는지....
영등포 세무서가 어떻게 생겼는지 도통 알 수 없으나
글 따라 흘러 내려가면
작가의 눈에 비친 풍경이 내 눈에도 설핏 비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