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고향을 떠나 이사를 했다.
태어나 26년 살다 취직해 떠났고, 두 번은 직장이 청주이거나 근처여서 들어갔다 떠났다. 이번은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농사와 선산의 묘소도 관리할 겸 들었더니, 7년이면 운이 바뀐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작은 밭뙈기도 팔리고 선산도 앞뒤 산이 모두 시에서 공원으로 매수를 한다고 묘지에 이장공고가 붙었다. 송절 파 일가 종산, 잘 관리된 묘지 앞에 꽂힌 묘지 이장공고를 처량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던 나의 모습이 곧바로 내게도 현실이 되었다. 아쉬운 것은 선산에 잘 관리된 선영들이 도시화로 대량 멸실되거나 이장되거나 공동묘지로 가야 하는 현실이다. 서구와 문명에 마구 무너지던 우리 전통 문명이 아직도 계속되는 느낌이다.
7년 전에 싸둔 상자를 풀지도 않고 평택창고에 넣었다 고향 본가에 옮긴 것까지, 다시 서울 용산 우리 집으로 들어와 짐 풀어 정리하고 버릴 것 버리고, 새로 살 가구 준비하고 아직도 더 사야 할 상품이 몇 더 있다고 마고가 말씀을 하신다.
환경이 바뀌면 일상의 생활 방식이 따라가지 못한다. 책 읽기가 1주일 밀린다. 그러니 이 週는 신상의 변경이니 이사 記를 쓰고 있다.
서적, 지난 일상의 사진, 공사 현장의 나의 분신과 같은 각종 관련 서류, 각종 상패, 기념패 등을 그냥 싸서 들고 있으니 짐은 많아진다. 이제는 털어 버려야 하는 데 아직도 미련이 남아서 그냥 다시 조금 덜고 보관 중이다. 선대의 고서적들은 찬란한 유물이니 귀한 대접을 해 소중하게 모신다, 선대의 유묵과 서책, 할아버지 몫의 목판본 족보들도 이제는 남의 집에는 거의 없고 나만의 보물로 종중의 모든 역사를 내가 설명하고 기록해 줘야 한다. 그것은 그나마 족보 기록 정도는 읽고, 쓰고, 해석이 되니 그런가 보다? 아버지의 서원문적은 여러 질이고, 사진과 유품은 책꽂이 여러 칸 차지한다. 그러나 이 서첩은 완전한 한문이라서 나로서는 감당이 안 되는 문서들이다. 국가문서기록보관소 학예사나 되어야 읽을 내용이지만 그냥 두고 있다. 한문도 공부를 더 한다면 어렴풋이 해석이 못 될 이유야 없지만, 지금은 한자 문화는 영어문화권에 완전히 뒤진 2등이니 영어가 우선이기 때문에 그냥 유보한다. 더 늙어 눈이 큰 글자밖에 못 볼 때까지다. 지금은 영어로 신문이라도 떠듬떠듬 읽고, 방송이라도 대충 감을 잡을 때까지는 영어를 해야 한다. 지금의 방송이 나의 오기를 깨웠다. 도대체 보고 들은 것이 없다. 뉴스는 편파성이 짙어 순기능을 잃은 지 오래라 판단, 블롬버그를 읽기 시작했다. 듣지는 못하여도, 둬 서너 페이지 대학노트에 쓰고 해석하고 읽기 시작했다. 이제 153일 차이니 모르는 단어가 행간에서 점점 줄어든다.
이사 1주일 만에 이제 있던 책상에 나의 필기구, 컴퓨터, 계산기, 책, 파일들이 놓였고, 옆 서상에 벼루와 붓 종이를 정리한다. 와이파이가 안되니, 전화기로 모든 소식을 보다. 먼저 컴퓨터를 개통하고 전화기도 와이파이로 바꾸고 내방에 쌓인 짐을 풀어서 상자를 쌓았는데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보통이 아니다. 모든 테이프를 떼어내야 한다. 7년이나 묵은 상자에 늘어 붙은 테이프 제거가 진땀이 난다. 자정이 넘어까지 무리하게 일을 하고 보니 몸살이 났다. 요즘 열이 나면 아무 곳도, 못가니 항상 조심한다. 지난겨울은 예방 주사도 놓쳐서 그냥 넘기고 봄이 왔는데, 봄 감기에 걸리면 큰일, 비타민C의 냥을 두 배 높여 복용하고 하루 포기하고 폭 잠을 자니 정상으로 돌아온 듯하다.
선대의 묘소는 보상에서 배제해 존속시키기 위한 청원 하려는 자료를 만들기로 하고 윗대의 행적을 정리하다 보니, 13대(東字燁, 1604~1680) 77세, 12대(寅字建, 1637~1712 ) 76세, 11대(漢字羽;1674~1740) 67세, 10대(聖字一, 1695~1756) 62세로 당시로는 대단한 장수를 하셨다. 그런데 10대조께서 패착을 두셨다. 당시 1728년 무신난, 즉 이인좌의 난이 나고, 신천영이 충청 병사 이병상 장군 포함 3 충신 목을 베고 점령한 반란이다. 우두머리 신천영이 연수창 선생 등의 창의군에 청주 읍성을 되빼앗기고 상당산성에서 버티다 패전, 잡혀서 죽는다. 이 반란군의 토벌 창의군에 말을 타고 칼 차고 참여하신듯하나 기록은 없다. 정치적 성향이 있지 않았나 보고, 위로 딸 둘은 출가시키고 늦게 남들 손자를 볼 나이인 39살에 겨우 아들은 본다. 그리고 손자를 빨리 볼 욕심으로 며느리를 아들과 띠동갑인 12살 연상녀를 들인다. 결국 13세 신랑과 25세 신부가 손자를 낳으니 여기 까지는 순풍이었다. 조상님께 불경스러운 말씀이나 그러나 이 아들이 24세로 요절하니 결국 아버지는 모든 희망을 잃고 시름시름 앓다 같은 9월, 세 이레 후에 절망하시어 돌아가시는 겹 초상이 나고 말았다. 청상과부로 남편 제청을 윗방에 설치하고 시아버지 제청은 건넛방에 설치해 朝夕으로 메를 올려야 하고, 초하루 보름에 上食을 삼색 과일, 메, 탕, 적, 김, 자반은 최소 궤 연에 올리고 호곡을 해야 한다. 식솔로 노비나 머슴이 있어도 삼 년은 어린 손자와 제삿밥으로 식사를 했을 것이다.
당시 집안 사정을 족보로 추측해 살펴보면 큰할아버지 쪽은 육촌 형이 아들을 뒀고, 작은할아버지 쪽은 육촌형이 아들이 없어 대가 끊어질 지경인데 작은 집인 당신도 겨우 나이 52세에 며느리를 보려니 당장 아이를 낳을 나이의 사람이 필요했으리라 짐작은 가나 이가 패착이었다. 아들이 육체적 미성숙한데, 손자 욕심에 청춘인 24세 며느리에서 손자는 봤다. 이때부터 우리 집은 장수, 섭생이 잘되던 전통이 무너지고 조혼으로 인한 건강상의 병약한 아기가 태어나 역시 손자 대도 29세로 단명한다. 12살 연상녀 할머니는 70세로 장수한 기록으로 봐 영양상의 문제는 없는 경제력인듯하다.
이 광주이씨 할머니는 당시 큰 증조할아버지댁에 병약한 8촌 서방님이 있었고, 작은 증조할아버지 쪽은 첨 지중추부사 벼슬을 했으나 재당숙 대에 입양을 받을 아이가 없어 절손이 된다. 광주이씨 할머니는 욕심이 컸다. 7촌 당내의 집안 초상이 발생하고 장지가 명당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 묏자리를 챙기려는 음모를 꾸민다. 장례 전날 광중을 다 지어 놓고 내일 하관을 기다리려는 야밤에 물동이를 이어 산으로 올라가 바가지로 물이 솟은 것처럼 부어 놓고 내려온다. 다음날 상주가 장례를 치르려고 올라가 보니 물이 난 흉지가 아닌가? 그대로 덮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정하자. 아들과 손자에 당신의 묘지로 삼을 것을 청원한다. 결국 아들도 29세로 죽고 34년 뒤 입양을 한 손자에 의해 명당을 최종으로 차지한 것이다.
광주이씨 시어머니와 며느리 전주이씨는 일심 협동하여 물심양면으로 봄에 상을 치르고 가을까지, 입양자들이기에 눈물겨운 노력으로 목적을 달성한다. 그리하여 우리 대까지 이 세상을 보게 된다. 그 당시 행정서비스는 우리가 생각하던 옛날의 어리숙한 것이 아니었다. 사극에서 보던 정치적 모략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백성들의 입양에 의정부 예조에서 우승지가 次知하여 판서, 참판, 참의, 정랑 3인, 좌랑 3인이 직접 자필로 서명 자필로 서명하여 예조의 직인이 꽝꽝 무수히 위변조를 방지하도록 찍은 예조입안서를 발부해 청주 목사에게 파발마로 서울서 보내왔다. 청주 목사가 요청한 공식문서가 조정에서 확인하여 보증하고 민원인 집으로 온 것이다. 이 서류를 예조 입안서라 부른다.
1773년 영조 49년 우승지 신익빈이 차지한 예조 입안서
아직도 여러 집안에서 보존되고 있다. 윤선도 선생 집안 보물 전시실에서 봤고, 정몽주 선생 예조입안서를 신문에서 봤고, 나의 친구인 연무식. 연중식 집안도 우리보다 20년 앞선 시절에 받은 서류를 내가 본 적이 있다. 연 씨 문중의 고문서는 당시 이인좌의 난으로 역적이 난 고을이라 6계급 강등되어, 청주 목이 서원 현으로 강등되고 행정수장이 목사 정삼품 당하관에서, 서원 현감 정육품이 근무하지만, 호구 장부를 정확히 만들어 주어 친구 집에 보관된 서류를 보았다. 예산연감 연수창(1687~1753) 선생의 입양자 연덕징 선생과 58명의 노비 이름과 출생년, 노비의 자식 숫자가 나오는 문서다. 연수창 선생은 무신의 난에 상당적록원종1등공훈(上黨賊錄原從1等功勳)이고 청주에 가장 먼저 반란 목격 후, 7일을 통곡하며 결심, 창의하여 군사를 동원하시고 반란군과 접전을 치르신 본받을 표상이시다. 연수창 선생은 연최적(1662~1693) 선생의 아들로 (연최적 선생의 충효정려 즉, 충과 효 두 가지를 정려하는, 충효 양 정려문이 모충동에 있다) 약관 21세에 대과에 급제한 소년 생원 또는 진사로 약관에 대과급제 한 수재다. 증이조판서 행 사헌부감찰이다.
1783년 서원 현령이 발급한 유학 연덕징 선생 호구장 문서
다음 전주이씨 할머니는 눈물겨운 노력으로 입양을 할 아이들 찾는데 우리 집이 종손인 관계로 항렬이 낮아서 근동 일가 아이들은 모두 삼촌 할아버지 증조 이상이니, 십여 리 떨어진 24촌 형네 집에서 마땅한 아이를 발견한다. 그리고 매일 찾아가 입양아를 달라고 빌고 빌었다. 지금이야 어림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생떼를 쓴 격이지만, 당시는 그런 예도 있었는가 보다. 24촌 형은 자기도 8촌 형의 입양아로 양자로 온 경험이 있던 분인지라, 처지를 잘 이해하시어 결국은 봄에서 여름 가을까지 버티고 가을 궂은비 오는 날, 삼일 밤을 가마니 위에 거적을 덮고, 지새우며 혼절한 여인을 그냥 두면 죽는다고 판단, 아들을 시켜서, 어머니 방에 들어갑시다. 시킨다. 어머니라고, 아니 그냥 됐다! 빨리 가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9살 난 아이를 업고 한걸음에 십 리를 달려와 집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조부한테서 들었기에 기록으로 남긴다. 입양된 집은 대체로 생가보다 경제력과 환경이 좋은 것이다. 더 좋은 영양이나 환경에서 성장하여 장성하여 아들을 삼 형제를 낳고 우리 집을 번창시킨다.
이 전주이씨 할머니 친정은 옥산면 수락리인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으로 윗대 산소를 아는 종친이 모두 죽어서 백여 년 실전했는데 이 할머니는 친정에서 그 큰산소가 류 씨 고총임을 듣고 알고 있었고 족보에서 이름도 확인하였다. 특이하게 판서 공 아들, 황해감사 공의 배 위는 성씨가 매우 드문 하동 설 씨인데, 동네 이 씨들이 산소의 모든 비석을 천비 답 늪에 처넣어 없애고, 호패 석의 柳字 글자는 징으로 쪼아 판독이 어렵게 하였으나, 할머니들은 그냥 두어, 설 씨로 인해 증명되어 되찾는 빌미가 된다. 대충 처리한 것은 언제나 비밀의 문이 있는 법이다. 그 윗동네 이름이 류터골로 지금도 불리고 있다.
2021. 04. 12
移徙記와 윗대 들은 내력, 내가 본 친구네 내력도 기록으로 남긴다.
첫댓글 조상님들의 내력과
본가의 내력을 기록함이
쉽지 않은 작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사기(移徙記)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