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철학과 학생의 고민
1.나는 현재 2년째 철학과에 재학중이다. 학년상으로는 4학년이지만 4학년에 걸맞는 지식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불안해진다. 나는 왜 불안해지는가?
2.실존주의자들은 불안을 인간의 기본요소로 설정한다. 불안은 공기나 땅처럼 존재하고, 우리는 물 속에 들어가거나 뛰어내림으로써 그것들로부터 겨우 잠시간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3. 4학년에 걸맞는 지식이란 사실 내 스스로가 기대하였던 만큼의 지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4. 나는 무엇을 기대하였나? 3에서 명제를 명확히 하는 쪽으로 바꾼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충분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내가 기대하였던 만큼의 지식의 조건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의 범주를 명확히 해야한다. 만약 내가 나에게 기대하였던 만큼의 지식을 갖추게 된다면 나는 불안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5. 불안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야 한다. 일반적인 불안과 특수한 불안으로 나누도록 한다. 일반적인 불안은 2에서 말한 인간 특성으로서의 것이고 특수한 불안은 마주한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비롯되는 불안이다.
6. 다시 돌아와 ‘내가 기대하였던 만큼의 지식’을 명확히 하도록 한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였는가?
7. 과거의 일들을 떠올려보다 시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을 느끼게 되었던 시점과 기대를 가졌던 시점을 떠올려보기로 한다. 불안을 느낀 것은 겨울방학 즈음이었다. 기대를 가졌던 시점은 편입학을 하기 전이었다. 학교에 다니기 전에는 졸업 후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겨울방학 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다.
8. 남의 생각이 아닌 내가 가진 생각도 어딘가에 잘 적어두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사라져버린다. 허무한 기분이 든다.
9. 잘 떠올려지지 않거나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거나 말하기 어렵거나 한 이유를 제외한다면 편입학을 선택한 이유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이다.
10. 영감(inspiration)은 국어사전에 ‘창조적인 일의 계기가 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자극’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적힌다. 창조적인 일이란 예술적인 것을 일반적으로 일컫지만, 잘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것 역시 창조적인 일이다.
11. 예술적인 창조의 영감과 삶에 있어서의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철학과를 선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처럼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계획과 달랐다.
12. 작년 첫 학기는 무난하게 보냈다.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생각을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공부하는 것이 더뎌졌다. 원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펼쳐보면 절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플라톤의 책은 대화 형식으로 쓰여져 빨리 읽기가 어려웠고 명료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푸코의 [말과 사물]은 서문 두 쪽을 읽는 것도 몇 번이나 되돌아가느라 오래걸렸다. 정치철학이나 사회철학의 책들은 적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고 가슴이 답답해지게 만들었다.
13. 나의 글을 쓰거나 작업을 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머리를 쓰는 일을 하는것이 매우 피로하게 느껴졌다. 겨울 방학 기간에는 작업물을 완성시켜야 할 경우가 많았는데 어쩐지 그것 역시 매끄럽게 되지 않았다.
14. 막 공부를 시작했을 때에는 영감이 넘쳐 흘러 기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이끌려 더 들어가고자 하니 모든 것들은 혼란스러웠고 굳게 닫힌 성벽처럼 높고 견고하여 나를 전혀 환영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신기루같이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내가 그 프랑스의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15.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창조적인 일이며 그 재료는 학교에서 얻은 것이므로 얻어진 지식은 영감이 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감은 기쁘고 즐거워 무언가 행동에 옮기도록 부채질하는 종류의 것과, 고뇌에 빠지게 하고 삶을 무겁게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스스로 확인하고 검토하는 것 외에는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16. 이것은 막연하고 모호한 제안이므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7. 여기까지의 정리는 나를 위한 것이자 우연히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다른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만약 이 글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16의 제안을 드린다. 과제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은 이를 길이 없다.
첫댓글 8.남의 생각이 아닌 내가 가진 생각도 어딘가에 잘 적어두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사라져버린다. 허무한 기분이 든다./그럼에도 불구하고/ 9. 잘 떠올려지지 않거나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거나 말하기 어렵거나 한 이유를 제외한다면 편입학을 선택한 이유는 ‘영감을 얻기 위해서’이다./그러므로/11. 예술적인 창조의 영감과 삶에 있어서의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철학과를 선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처럼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계획과 달랐다./그렇다고 하더라도/14. 막 공부를 시작했을 때에는 영감이 넘쳐 흘러 기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이끌려 더 들어가고자 하니 모든 것들은 혼란스러웠고 굳게 닫힌 성벽처럼 높고 견고하여 나를 전혀 환영하지 않는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신기루같이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내가 그 프랑스의 철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17. 여기까지의 정리는 나를 위한 것이자 우연히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다른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적절한 질문과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생각의 과정 잘 들여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