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 폐기 豪言壯談으로 양극화·민생 문제 풀지 못해
박근혜, 나라 판 다시 짜는 믿을만한 약속으로 승부해야
민주통합당이 신났다. 어깨를 들먹들먹한다. 발걸음도 잽싸졌다. 전당대회가
끝나자마자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유족을 찾고 민주당이란 옛 둥지를 빼앗긴 듯한
허탈감을 앓는 광주 분위기를 다독이며 4월 총선, 12월 대선을 향한 전의(戰意)를 다졌다.
한명숙 대표, 문성근 최고위원 발언은 거침이 없다. 이명박 정권의 실정·비리·부패를
낱낱이 파헤쳐 응징하고, 한·미 FTA를 반드시 폐기하고, '국민과 더불어' 검찰을
개혁하겠다고 했다. 국민이 노무현 정권의 실정·비리·무능 책임을 물어
노씨 일족(一族)을 유배(流配) 보낸 게 불과 4년 전이다.
4년 만에 '국민'이 다시 그런 그들 차지가 된 것이다. '국민 특사(特赦)'로 귀양지에서
풀려나자마자 한달음에 구(舊)민주당을 허물어 새 집을 앉히더니 이참에
민노당·진보신당 연립주택인 통합진보당의 울타리를
걷어내 뜰도 넓힐 거라고 한다. 기세가 놀랍다.
한나라당이 무너지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노무현 세력의 부활이 실제보다
더 크고 화려해 보이는지 모른다. 비상대책위가 썩은 기둥을 갈아끼우겠다며
들어서더니 서까래 하나 손보지 못하고 외려 내몰릴 판이다.
이름난 대목(大木)이 나서도 까딱 잘못하면 풀썩 주저앉고 마는 것이 헌 집이다.
목수 면허 없는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이라 '썩어도 준치'라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는지 톱 하나 달랑 들고 묵은 기둥에 대든 게 애초 무리였다.
새 집주인 박근혜 위원장도 이 들보는 떼내 갈아끼우고 저 문짝은 손봐
다시 쓰라는 세세한 지침을 주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니 서툰 목수들
입에선 '아무개는 떠나라' '누구는 새 인물을 위해 자리를 비우라'
'대통령은 탈당하라'는 두서 없는 말이 쏟아지고 그때마다 박 위원장은
그걸 주워 담느라 바쁘다. 파장(罷場) 무렵 장터 풍경이다.
민주통합당 눈앞엔 지금 총선ㆍ대선 승리가 어른거릴 거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허벅지를 꼬집는지 모른다. 민주통합당은 이제 안철수 교수가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기생(寄生)정당이 아니다.
요 며칠 전 대선 여론조사에선 박근혜 42.2%, 야권 단일후보 41.8%로 나왔다.
박근혜와 안철수 가상 대결은 43.6% 대 48.1%였다. 안 교수를 업으면
땅 짚고 헤엄치기이고, 그게 안 돼도 자력(自力)으로 한판 너끈히
겨룰 판세로 어울린 것이다.
작년 내내 한 자리 숫자에 붙박혀 있던 당내(黨內) 도토리들 키도 훌쩍 컸다.
문재인 14.5%, 한명숙 11.4%, 손학규 10.2%로 지지율이 올랐다.
총선은 어깨가 더 가뿐하다. 한 여론조사는 야권 단일후보 50.1%,
한나라당 후보 31.3%였고, 다른 여론조사는 31.1% 대 27.9%로 나왔다.
묘한 나라의 묘한 정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명박 현 대통령이
차례로 경쟁이나 벌이듯 서로 반대당 집권을 기를 쓰고 도왔으니 말이다.
2012년은 운명(運命)의 해다. 2013년 고개를 넘으면 나라도 국민도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느 정당이 다수 정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번영과 통일을 향한 문이 더 활짝 열릴지, 아니면 2000년
역사에서 처음 잠시 열리는가 했던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다시 굳게 닫힐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싫든 좋든 여기서 우리는 익숙한 과거와 작별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크게 금이 갔다. 부(富)는 갈수록
한 곳으로 쏠리고, 가난은 가난대로 대물림되는 비탈길을 굴러왔다.
양극화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김대중 정부의 외환위기 극복 처방이다.
국가 부도 앞에선 그 방법밖에 달리 길이 없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가 정치 헛발질 재미에 빠져 경제 사회 개혁의 때를 놓치면서
그게 골짜기로 파여갔다. 이명박 정부의 눈치없는 '기업 프렌들리(Friendly)' 정책은
최후의 결정타를 날렸다. 겉으론 세대 갈등ㆍ지역갈등처럼 보이는
현상 뒤에도 어김없이 양극화 문제와 민생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 그릇이 양극화 문제를 제대로 담지 못하자 거친 흙탕물은
정치를 넘어 거리로 흘러넘쳤다. 그 결과 나라 운명·국민 미래가 나꼼수 수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됐다. 이대로 가다간 13억 인구의
세계 제2 경제대국과 1억3천만 인구의 제3 경제대국 사이에 낀
이 나라의 내일은 없다.
여기가 대한민국의 승부처다. 한·미 FTA 폐기라는 호언장담으론 양극화도
민생의 문제도 풀리지 않는다. 민주통합당이 다수당이 되고 집권하는 순간
그게 약(藥)이 아니라 독(毒)이란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한국 정치는 나라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총선, 특히 대선은 누가 속 빈
큰 약속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 약속이 믿을 만한가하는
국민 판단에 따라 결판 날 것이다.
'쫓기던 처지'에서 '쫓는 처지'로 바뀐 한나라당과 박근혜 위원장에게도
기회의 문이 아주 닫힌 게 아니라는 말이다.
姜天錫 주필